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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홍모 목사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대림절이란 절기는 성탄절을 앞에 두고,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기간이며, 우리의 삶이 종말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제 다시 영광 중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기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뜨락의 기도"라는 대림절에 드리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문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세주를 약속하신 여호와여, //
오늘 또 다시 부르짖는 우리를 굽어보아 주소서. /
애타게 빛을 기다리는 암흑 속의 인류에게 희망을 주소서//
나를 구해주실 분은 오직 한 분뿐/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빛을 받았으나 번번이 외면하고, 거절하고, /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다 생생이 보게 해 주십시오. //
무디어진 양심에 날을 세우게 하시고/
굳게 닫은 마음의 문을 열게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말씀을 들으십니까? /
나 자신이 갇히어 아무 것도 못보고 아무 것도 못 듣습니다. /
나 위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
기쁨은 어디에나 있고, 희망도 언제나 있지만 /
그것은 타인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
내가 나를 열지 않기에 아무도 나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에게 오는 무수한 아픔도 혼자서 겪습니다. //
여호와여! 내가 갇힌 이 감옥 문을 부숴 주십시오/
기쁨과 빛이 가득한 길을 열어 주십시오.
한해를 마무리하며 결산하는 12월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을 사모하면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여 기쁨과 빛이 가득한 길을 열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도 메시아의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으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본문 1절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새의 '줄기'라는 말이나 '뿌리'라는 말은 근원이나 혈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새의 집안에서 그 혈통을 따라 한 싹이 나온다, 즉 위대하고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다윗을 거론하지 않고 부친인 이새를 거론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새라는 분은 다윗의 아버지로 미천한 농부요, 보잘것없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유명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다윗 왕'을 말하지 않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 미천한 사람, 보잘것없는 사람 이새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사위가 되라고 할 때에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삼상18:18)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겸손하게 한 말이지만, 이새의 집안이란 내 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미천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삼상18:23)고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화려한 가문도 아니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보면 영광스러운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이, 낮고 천한 마구간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어떤 유명한 귀족 출신이 아니라, 다 미천한 사람이요, 추켜 세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조용한 가운데, 이름 없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또한 신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이새의 줄기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신 분이지만,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은 지혜와 모략 곧 총명의 영이시며,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 나온 한 싹과 같이 미천한 사람이지만,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는 오직 성령으로 역사하실 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역사하는데, 여호와의 영이 언제나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류의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죄 없는 참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인 양성을 지니셨습니다. 이것을 라틴어로 VERE DEUS, VERE HOMO(베레 데우스, 베레호모)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지 않는데, 서양의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인성만 강조하려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메시아의 신성을 나타내는 성경 말씀이 많은데 대표적인 2구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9:6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메시아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미가서5:2에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메시아의 근본은 상고에 있고, 영원에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는 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또한 인성을 가지고 태어나신 사람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인간이라고 하셨으며, 그는 태어나시고 인간의 성장과정을 따라 자라셨으며, 육체와 영혼을 소유하시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지셨고, 인성을 가지신 분이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아 죽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하며, 우리의 죄를 대신하고 구속하시려면 죄 없는 인간이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희생을 치르시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면 그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에 서서 중보자가 되시려고 하면 우리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르게, 진실하게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으며,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역사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주가 되십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은 가벼운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물어보아야 하는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려 오신 주님, 당신 때문에 어떤 이들은 구원받으며, 당신을 배척하고 영접하지 않아 구원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과연 누구십니까?"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자신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은 곧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주님을 만나야 하고, 주님을 영접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도 없고, 그 분이 없이는 나를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3절 상반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3-5절의 말씀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고 그 분을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개인적인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10:28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삼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시기 위하여 주님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가서 참된 만족을 얻으시겠습니까? 전구의 불이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곳에 가서 몸을 흔들고 춤추면서 만족을 얻겠다고 생각해보셨습니까? 그것은 만족이 아니라, 죄악의 소굴이요, 지옥에 가서 사는 것은 연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지만, 육신만의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고, 우리는 영혼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혼이 만족을 얻지 못하면 육신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하루에 30분씩 성경을 붙들고 앉아 있으니 일년에 3독하게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사하고 유익한지 모릅니다. 새로운 복음성가를 익히면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새로운 복음성가를 부르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찬송과 기도생활, 전도 사역, 성경공부, 봉사, 성도의 교제 모두 다 즐거운 일이요, 유익한 일이요, 감사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즐거움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세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우리는 감사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인생의 바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3절로 5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지, 선과 악, 공의와 불의와 성실과 부실을 판단하여 주셨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판단하고 귀로 들리지 않는 것까지 판단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공의가 무엇인지, 정직함이 무엇인지, 겸손은 또 무엇인지,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인지, 성실과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보여주셨습니다.
법(法)에는 자연법(自然法)과 사람이 정하는 인정법(人定法)이 있습니다. 자연법이란 하나님이 천부적으로 주신 능력으로, 사람은 지음 받을 때부터 선과 악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자연법은 영원법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요, 계획이요, 절대 완전합니다. 그래서 자연법이란 "자연선(自然善)에 대한 자연이성의 명령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법도 이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은 부패한 법이라고 합니다.
칼빈 선생님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지하다고 핑계할 수 없는 양심과 죄책감을 주었고 인간에게는 자연법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마르틴 루터도 동의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연법은 자연 질서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실정법규 즉 계명 그 자체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원죄로 인하여 병들고 타락하고 나약해지고 무능해졌습니다. 자연 내지 인간의 본성이 악하여졌기 때문에 인간본성을 거역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범죄 하였고, 타락하였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하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성실이며, 성실이 아닌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살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치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예수님의 판단기준을 나의 판단기준으로 삼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우리도 공의롭고, 정직하고 겸손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공의롭게 사십시오. 조금 넉넉하게 살자고 죄악을 끌어들이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살고, 겸손하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승진에 있어 뒤쳐지고 늦은 것 같고 요령도 없는 같아도 나중에 가서보면 여러분의 회사에서 가장 앞서 있을 것입니다. 후일에 가서 웃어야 진정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는 만물을 회복시키러 오셨습니다.
6-10절의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참으로 이상향의 세계가 펼쳐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평화와 일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인하여 모든 관계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며,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나 자신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까? 모든 일에 중보자 되시는 우리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이웃을 진정 사랑하며, 나 자신도 긍정적으로 보아주고, 자연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 중에는 급하고 사나운 성질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런 성질을 다 버렸습니다. 이 세상이 약육강식의 세계인데, 구원해주신 주님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이해해주고, 덮어주는 세상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주변에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하여 내 것을 내어놓고 베풀고 싶어집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사랑스럽게 보여집니다.
초대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4-45)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과 같은 세계가 펼쳐질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사자와 살진 짐승, 그리고 어린 아이, 암소와 곰, 그리고 그 새끼들,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유대의 선지자들은 초림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질 것을 내어다보았지만, 성경의 말씀은 재림으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언의 말씀은 초림에서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구원을 그려보고 있습니다. 초림 안에 재림의 약속까지 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으로 역사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간 속에 구원의 완성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5-6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면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바른 삶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는 만물을 회복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으며, 인생의 바른 삶을 살게 되었고, 사랑하며, 용서하며, 평화를 창조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의 말씀을 붙잡고 여러분의 신앙을 추스르고 바로 세워서 우리 주님의 회복의 역사에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