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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따라 삽시다
시편 119:1~16
오늘 저녁 우리가 읽은 시편 119편은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시편 150편중에서 가장 긴 시편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그처럼 긴 시편이지만 어떤 내용의 연결이 없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아마 다윗이 일생을 거의 다 살고 그의 평생을 돌이켜보면서 그의 일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향을 끼친 사실을 순서 없이 추려 모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 이 성도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심오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시편은 길면서도 매우 단순합니다. 그리고 아주 정확합니다. 이 시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효인 22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졌고, 각 부분이 8절씩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가 176절입니다. 그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쉽게 암송할 수 있도록 시를 썼습니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전파하고 영화롭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받은 바 은혜를 말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를 열 가지 다른 말로 표현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다 같은 뜻의 말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계율,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진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같은 뜻의 말이면서도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처럼 긴 시편이면서도 이 열 가지 낱말이 하나라도 들어 있지 않은 구절은 176절 중에 오직 한 절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이 시편을 보세요. 매 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에 대한 것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아까 말씀 드린 대로 9절부터는 히브리어 알파벳 다음 글자인 베드로 시작하는 부분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이 시편 전체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꼭 한 절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122절입니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75, 84, 121절에서는 다윗의 실행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커다란 존중과 애정을 가졌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비하면 너무 부족한 것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배자이시며, 보호자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며, 우리 자신이 그 말씀을 배워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살 때 참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서로가 위로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삶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환경과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도 아니 우리 평생 이 말씀을 깊이 상고할 때 모두에게 큰 축복이 되실 줄 믿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1-12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이 있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다는 말은 더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의 진리에 부합된 말씀인가 아닌가를 성경을 통해서 상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귀한 신앙생활입니다.
열심이 얼마나 귀합니까? 간절한 말씀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진리를 떠난 열심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성경의 지식, 진리를 떠난 열심은 무서운 과오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성경 말씀을 떠난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람을 놀랍게 하는 이적이 일어났다고 해도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것은 거짓 선지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상고하지 아니하면 바른 신앙생활하기가 어려운 때를 만났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을 만났더니 자기는 음악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수십 년 봉사해 왔는데, 지난 가을 집에서 누전이 되어서 그만 화재가 나 집이 거의 불타 버리고 많은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나님께 나가서 힘을 얻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교회엘 나갔더니 언제 교인들이 그 소식을 들었는지 자기가 볼 때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어떤 입빠른 사람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벌을 받았지?” 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아연실색하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치우치게 배우고 가르치다 보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 믿으면 그저 복 받는다는 말만 하다 보니까 복에 대한 개념이 잘못 되어서 기복 관념에 빠지게 되고, 육신적인 면과 보이는 면에 치우치게 되어 성경과는 아주 거리가 먼 곳까지, 아니 반대가 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단이나 사이비 운동가들도 다 성경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 전체의 사상에서 떠나 한 면만을 치중하게 되면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민망히 여기셨고 불쌍히 보시고 저희를 도우셨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본인의 죄값입니까? 부모의 죄값입니까?” 하고 물은 제자들에게 “본인의 죄값도 아니요 부모의 죄값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다 죽게 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을 나무라시고, 불쌍하게 된 사람에게 자기의 시간과 정성과 물질을 들여서 도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시면서 이 사람이 착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Do yourself!)”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사욕에 따라서 배우면 안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말만 받아들이고 내 마음에 좀 거슬리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 못됩니다. 어린애 때는 그러므로 편식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입에는 그리 좋지 않아도 몸에 균형잡힌 영양공급을 위해서 골고루 섭취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에서는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권장합니까?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침묵을 지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면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우주 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시편 19편에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낮은 낮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이 대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여 100년만 지나면 이 땅 위에 교회는 필요 없어질 것이다.” 이 사람의 생각은 과학이 발전하지 못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백년 후인 오늘에 와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 위에 더욱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학이 발전하여 하나님의 만드신 우주 만물의 신비를 알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창조의 오묘를 발견하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인간의 한계를 더욱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그 방면에서 공헌한 사람들에게 수여되는 상이 노벨상인데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탄 사람들을 보세요. 거의가 진실한 신자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과학을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지적해 줍니다. 양심이란 말을 영어로는 ‘conscience’라고 하는데 본래는 라틴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라틴말 con-scientia라는 말은 ‘같이 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사람의 지식이 같아질 때 그것이 양심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칭찬하고 영광을 돌려도 부끄럽고 고통스럽습니다.
맥베드 장군이 뱅코우 장군을 암살시키고 스코틀랜드의 왕의 자리에 앉게 되었으나 마음이 괴로워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양심이 그를 책망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마음이 담대합니다.
요셉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양심이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죄짓고 부귀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아니하고 고생하는 것이 오히려 장하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늠름하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처럼 복잡 다단하고 변화무쌍한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십니다.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인간의 역사를 주재하시고 계신다면 어떻게 이처럼 불의가 성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좌시하시고 계실까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면 이 모든 것까지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해 주는 결론입니다. 개인의 생활이나 한 나라,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롱펠로우의 말은 너무 유명합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천천히 돌아갑니다. 그러나 매우 부드럽게 갑니다.” 옳습니다. 인간 역사를 통해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너무 정확합니다.
이런 것을 신학 상으로는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자연계시로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신학에서 말하는 특별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다시 말하면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 세상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조상이 어떻게 타락했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에게 말씀하시고, 야곱에게 나타나신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지구상의 여러 종족 가운데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자손을 택해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성품과 그의 뜻을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모세를 보내시고 여러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떤 개인의 전기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단순히 그들의 생활을 알리기 위해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의 생활을 통해서 이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히브리서 기자가 맨 첫 절에 기록한 대로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눈으로 분명히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게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기록한 책이 곧 우리가 항상 읽는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 말씀을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데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간단하게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간추려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간단히 네 가지로 말씀했습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말씀하신 책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신령하시고, 우주를 어떻게 창조하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둘째, 성경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는 책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실, 인간이 어떻게 범죄하고 타락했는가 하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셋째, 이런 사람을 구원키 위해 구주를 보내신 사실을 말씀하신 책입니다. 그가 어떻게 나시고, 어떻게 자라시고, 어떻게 일하시고, 어떻게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넷째, 성경은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하늘나라의 축복을 주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를 알고, 구주를 만나고, 영생을 얻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는 성경을 네 마디로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를 지었노라.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구속했노라.
내가 너를 위해 영원한 집을 준비했노라.”
아마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오직 한 분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얼굴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죄인된 사람들에게 구주되시는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와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복의 근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삶의 갈 길을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의 지혜가 된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달다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주의 말씀은 우리 심령의 양식이 됩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가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의 모든 욕구를 만족시켜 줍니다.
철학자의 깊은 욕구는 지혜입니까?
정치가의 욕망은 평화입니까?
교육가의 간절한 소원은 위대한 인격의 도야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소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독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두움을 헤매이는 사람이 주의 말씀을 통해서 참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길 잃어버린 사람이 주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바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굶주렸을 때 생명과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겐 해갈을, 슬픈 자에게 위로를, 병든 자에게 건강을, 실패한 사람에겐 새 용기를, 낙심된 사람에겐 새로운 소망을, 나약한 자에겐 새로운 감격을, 죄악에서 헤매는 사람에겐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모든 성도들이 이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이 말씀을 꿀과 같이 달게 여겼습니다. 정금보다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공부했습니다.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과연 앞으로 사람이 살 만한 사회가 되고, 우리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 국가로서 건전한 발전을 이루려고 할 것이면 우리 민족의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화해야 되겠고, 우리 민족의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날이 오려면 먼저 믿는 우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산다는 말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금년 일 년,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안에 살아서 열매맺고, 싱싱하고, 하시는 모든 일이 형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1장 7절 이하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15장 7, 8절을 읽어보도록 합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 살아서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주님 말씀 안에 거해서 우리 삶을 통해 열매맺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을 증거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말씀 사모하여 헐떡이는 사람- 찰스 브리지스
1. 복 있는 자의 행로
시편 119:1
시편 전체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 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합니다. "복 있는 자는..." 너무나 흥미롭고 교훈적인 이 시편 119편도 역시 그렇게 문을 엽니다. " ...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그리하여 시편 119편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행복에 이르는 길을 즉각 제시하십니다. 사람들은 방식은 다르나 다 행복을 얻으려고 기를 쓰고 있습니다. 또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임할 수 있는 비참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비참이 죄의 열매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죄에서 구원받고 다시 죄에 빠지지 않게 자신을 보전해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이 구절이 묘사하는 '행위 온전한 정결한 성품'을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을 보시며 지적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사도 바울도 자기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24:16)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는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롬7:15)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마음 자세로 '자기들의 행로'를 결정합니다. 곧"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은 주님 안에서 힘을 얻습니다.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슥10:12) 그런 이들은 항상 자기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30:21)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의로운 백성들에게 인쳐 주신 특권들이 무엇입니까?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하시어 의롭다 선언하셨고(시32:1,2:롬 4:6-8), 하나님의 양자됨과 성도들과 교제하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시며(요일1:7), 섭리와 은혜로 보호하여 주시다가(대하16:9,욥1;8,10), 결국 영원한 복락에 대한 영광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의구심도 가질 수 없습니다.
현세에서 번영하게 하시고(수1:7,8;딤전 5:8;대하17:4,5), 영적으로 충만하며 새롭게 하시고(시1:2,3), 신령한 지각을 크게 하시고(요7:17), 구주와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하시고(요14:23;15:14,15),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시119:165;갈6:16;사32:17). 그러다가 영원토록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을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계22:14). 성도에게 주신 이러한 특권들의 가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유쾌함과 평안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도다."(시73:1)
우리 자신에게 각자 물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길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길인가? 그 길이 항상 온전하게 정결한 길인가? 불의가 내 마음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가? 아니 내 마음의 길이 죄다 하나님께서 항상 미워하시고 슬퍼하시며 버려두신 길은 아닌가?'"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진정 나의 '행위'가 어떠한가? 나의 행위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의 원리로부터 나온 것인가? 그 생명의 원리만이 영적 생명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처음 살리심을 받을 때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습니다. 그 후 우리는 그 안에서, 또 그를 따라 행해야 합니다. 오, 내 행위가 견고하고 일관성 있고 진보를 보일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오, 내 아버지의 음성,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라는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이게 하소서.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그 행위가 온전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온전하지 못한 더러움'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법을 따라 그 '행위'가 온전한 일관성을 보인다 하여도 그 속에 일관되지 못한 '만연한 연약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위하여 복음이 얼마나 은혜로운 선언을 하는지요!"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
출처: 자기부인 글쓴이: 그분을 뵙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