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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행처럼 번졌던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과 ‘빚투(빚내서 투자)’의 어두운 그림자가 2030세대에 드리워지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초저금리 시대 부동산과 가상화폐 등으로 소위 대박을 터뜨린 주변 사람들을 통해 보면서 자신도 거지생활을 면해보려고 투기성 투자에 적극 나섰지만 결과는 불운해졌다는 내용입니다. 금리는 올랐고 자산가치는 떨어졌고 이자부담까지 늘어나면서 역대 가장 빚이 많은 청년층이 지금 이 시대의 2030세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빚이 많은 청년층이 빚 부담에서 해방되려면 소득이 늘거나 자산가치가 상승해야 하지만 오히려 더 큰 이익을 기대하며 위험도가 높은 가상화폐와 주식투자에 올인하고 그것이 결국 더 큰 빚부담으로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동산가치도 떨어지면서 집을 사기 위한 무리한 대출과 부동산 갭투자도 빚부담을 가중시켰다고 하네요. 그런데 가뜩이나 고물가시대 주거비와 생활비부담이 높아지면서 각종 빚을 청산하기가 쉽지 않아졌다고 합니다. 청년들은 채무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대출을 시도했고 결국 3개 이상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아 여러 금융기관에 다중채무의 굴레에 빠진 사람이 크게 늘었는데 이것은 한 은행에서 빚을 낸 것을 이자라도 갚기 위해 신규대출을 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합니다. 담보나 신용이 충분하지 않은 채무자들은 1금융 대출은 쉽지 않아 상대적으로 대출 금리가 높은 저축은행 등 2금융권이나 불법 사채 시장의 문을 두드렸고 결국 돌려막기를 하다가 빚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개인회생이나 개인워크아웃에 내몰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 최근 부동산 경기가 반등되면서 또 다시 빚의 유혹에 청년들이 넘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빚을 내어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가격이 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영끌시도가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제의 악순환, 재물에 노예가 되어 빚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청년들을 보며 돈에 눈이 뒤집혀 돈의 속박속에 영혼이 피폐해져가는 영혼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며 치유하시는 은혜, 구원을 베푸시는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펴본 두 맹인이 치유받은 사건이후 바로 다음 치료대상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귀신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 스스로 올 수 없었고 이웃들이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말 못하는 자를 고치신 기사는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 나오는 열 개의 이적 기사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못하는 사람을 치유하셨고 이 기적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오늘 성경에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귀신에 매여 억눌린 인생을 살며 그 억눌림으로 인해 말을 한 마디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귀신의 매임에서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도 혹 어떤 영적 매임으로 인해 정상적 생활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또한 예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자유를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 첫째로 온전히 예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32절입니다.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오늘 본문의 앞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맹인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치유받은 사람들이 나갈 때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 벙어리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가 왜 말을 못할까요? 오늘 본문 성경에서는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려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사람은 귀신들렸기에 즉, 영적인 문제가 생겨 육체적으로 증상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긴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이 데리고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치료대상자 “귀신들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이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왔다”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로 프로세넹칸(προσήνεγκαν)이라고 쓰여진 단어가 바로 대격, 즉 이끌림을 받아서 나온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 쓰여진 단어상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데려오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 드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어를 보면 ‘말 못하는 사람’은 ‘코포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경 다른 부분에서는 ‘귀먹은 사람’으로 번역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듣지 못해서 말을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벙어리를 뜻하는 ‘코포스’(κωφός)라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속에는 ‘듣지 못하는’ 즉 귀머거리라는 뜻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말 못하는 것”을 고치신 일은 곧 “듣지 못함”을 고치신 일입니다. 이렇게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이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처지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듣지 못하니 깨달을 수도 없었습니다. 말할 수도 없으니 자기 소원과 갈망을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가 자기 병을 고침받겠다는 의지를 어떻게 알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신 날 주변의 사람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 그의 가족, 그의 친구의 믿음으로 그는 예수님앞에 나왔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 불쌍한 사람을 깊이 동정하며 예수님께 데리고만 나가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주위에 영적으로 귀가 막힌 사람이 있습니까? 영적으로 입이 봉해진 사람이 있습니까? 영이 막혀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사탄마귀의 농간을 부리고 있어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영혼이 있습니까? 사탄마귀는 우리가 예수님앞에 나오지 못하도록 영혼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들을 수도 없게 깨달을 수도 없게 담대하게 나아갈 수도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에서 공중권세를 잡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탄마귀는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복음의 빛이 비취지 못하도록 영적으로 어둡게 만듭니다. 귀가 닫히고 마음이 완악하게 하게 만듭니다. 그런 그들이 입이 당연히 하나님께 대하여 다물어지게 되고 기도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들의 입에서 신앙적인 일에 대한 불신앙의 말, 비웃는 말, 대적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악한 귀신의 영향력을 받아 귀가 닫히고 입이 둔해지고 비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은 귀신들려 귀가 어둡고 말을 못하는 상태에 빠진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대신하여 믿음과 기도로써 주님 앞에 달려와 기도하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들의 귀가 되어주고 그들의 입이 대신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회복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치료받은 귀가 멀었던 사람은 예수님앞에 나오며 예수님께 그 육신이 드려졌기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 자신이받기 위해서나 우리 주변에 치료의 대상자가 있다면 그 육신을 예수님께 드리고 그 치료의 대상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이끌고 나와 변화될 수 있도록 드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와야 구원받고 예수님께 나와야 치료받습니다. 온전히 우리의 삶, 혹은 우리 주변에 치료받을 영혼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자유를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 둘째로 예수님의 행하심을 봅니다.
마태복음 9장 33절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오늘 본문의 기적을 직접 봤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놀랍게 여겼다”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놀랍게 여겼다”라는 뜻으로 성경에서는 헬라어 ἐθαύμασαν(에싸우마산)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싸우마조’(θαυμάζω)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된 것인데 ‘기이히 여기다’라는 뜻이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반응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는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말 못하던 사람이 말하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에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성경에서는 귀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하고 있고 이 귀신들을 명하여 치유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말씀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도 분명히 귀신이 들려서 귀가 먹었고 입이 둔해져서 말을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시고 그 사람이 입이 열려서 말하게 되는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고쳐주었는가에 대하여 이 본문 말씀은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고 고치신 것은 분명합니다. 사탄마귀는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게 만듭니다. 또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탄마귀의 꾐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1절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 말씀도 보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탄마귀는 사람들을 잘 속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자기 존재를 감추며 의로운 척 만들고 거룩한 척 만듭니다. 여러분 신천지 이단을 보십시오. 그들은 교회에 들어와 마치 해외에서 선교를 열심히 하다가 들어온 선교사인 양 신분을 속이며 교회에 접근하고 성도들에게 접근합니다. 어떤 경우는 다른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인정받은 그리스도인인척 가장하며 멀리서 이사왔기 때문에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존 성도들을 속입니다. 어떤 경우는 오랫동안 신천지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핵심 신천지사람인데 이제 신앙을 처음 받아들인 것처럼 가장해서 정통 교회에 등록해 새신자로 도움이 많이 필요한 척 사람들에게 접근합니다. 기존 성도를 신천지로 끌고 나가기 위해 교회에 들어와 어떻게든 교인들을 속이려 합니다. 여러 모임에서 얻은 교인들의 개인정보를 신천지의 다른 사람에게 알려줘서 그 사람이 기도하다보니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마치 신통력이 있는 사람인 양 가장합니다. 어떻게든 신분을 속이고 정체를 숨기며 사람들에게 접근하며 그들을 미혹시켜 그들을 끌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탄마귀도 이 세상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사탄마귀는 사람들을 농락하며 의의 백성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 어떤 이단들은 좋은 일을 위해 신분을 속일 수도 있고 선한 결실을 얻기 위해 사기와 거짓말을 이용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건 정말 하나님을 망령되게 만드는 짓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과정을 통해 선한 결과를 만드십니다. 공의와 정직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전도를 위해서도 정직과 선한 과정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어떤 거짓도 어떤 사기도 어떤 허위증거도 내세워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영혼구원이 우선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불법과 편법, 세상의 악한 방법대로 하면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이단들은 그들이 이단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욥기를 보십시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한 욥을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탄을 보지 않습니까? 거짓과 편법을 사용하는 존재입니다. 거짓증거를 내세우고 악한 행위를 서슴치 않고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도 사탄마귀는 자신이 마치 세상의 임금이 된 듯 세상에서 사람들을 미혹하며 사람들속에 권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주님 재림하시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아직도 사탄은 자기가 힘이 살아있는 양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짓과 불신과 악함과 방탕과 분열과 다툼을 조장하고 불안, 초조, 걱정을 심으며 마음도 병들게 하고 몸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도 혼란스러워지게 만들어 세속주의, 물질주의의 늪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적 윤리도 타락시켜 성도덕이 땅에 떨어진 지 오래입니다. 올해도 전국 각지에서 지금 퀴어축제라는 것을 벌이며 동성애자의 축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성윤리를 무너뜨리고 성적 행위의 자유, 성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그럴 듯한 포장을 하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세상은 자신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다 사탄마귀의 작전입니다. 다 귀신들의 농간입니다. 사탄과 그들의 종병인 귀신들은 영적인 눈과 귀, 영적인 입을 막습니다. 영적인 타락에 빠지게 만들고 영적인 나태함을 가져오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사탄마귀의 공격이 있음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에베소서 6장 12,13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귀신에 사로잡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내쫓으시며 그가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어떤 이단은 이런 예수님을 보며 우리도 귀신을 내쫓는 역사를 해야 예수님의 백성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이단은 심지어 세상의 모든 질병은 귀신 때문에 생긴 것이고 그러기에 모든 질병은 축사기도, 즉 귀신을 내어쫓는 기도를 통해야 고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귀신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귀신을 움직일 수 있어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일명 귀신론에 관련된 이단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님이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비록 사탄마귀가 세상의 공중권세잡은 듯 하고 사탄마귀가 더 힘이 센 척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지만 하나님앞에서 사탄은 타락한 피조물일 뿐이며 귀신들도 분위기만 조성할 뿐 어떤 결과를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빌립보서 4장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지키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 은혜받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승리해 놓으신 분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하신 분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승리의 역사를 주신 분이시고 가장 선하신 일로 지금 이 시간에도 좋은 결과로 인도하시고 계신 분이십니다.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시고 주님이 행하시는 것을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자유를 우리가 경험하기 위해 셋째로 온전한 기대를 하며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33절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의 구원자이셨습니다. 귀신은 창조주 예수님을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귀신이 쫓겨나가고 그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사람이 완전히 고침받아 입을 열어서 주님을 찬양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집에 모인 둘러싼 무리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러면서 이르기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과 백성에게 수 많은 기적과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까마득히 그런 역사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며 살아왔습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여주시는데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역사를 상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메시야를 보내 이런 일을 하실 것을 수없이 예언하였는데도 그들은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우리 주 예수님께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진심으로 달려나온 자들마다 지금도 여전히 이전에는 전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우리 주 예수님을 향해 날마다 소망을 품으며 기도하며 살아갈 때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깜짝 놀라운 일들을 지금도 일으키십니다. 우리 입술에서 새로운 간증들이 사람들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충만하게 솟아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이러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라고 소리 높여서 주님을 찬양하며 간증하는 놀라운 일이 여러분 생애 속에 늘 새롭게 주어질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미 그런 역사를 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성경에 나온 그 순간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귀로 소문과 소식을 듣고, 눈으로 직접 기적을 보고, 늘 보던 말 못하던 사람이 정상으로 회복된 모습을 목격하고도 그 권능의 주인공,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4절을 보시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오늘 본문을 보면 깜짝 놀라며 놀라운 능력에 감격하는 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바리새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했습니다. 귀신이 내어쫓기고 정상인이 된 사람앞에서 그 사람의 완벽한 회복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폄훼하며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일한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하고도 이렇게 예수님 사역을 비방하는 말을 합니다. 여기 나오는 ‘귀신의 왕’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서 경험했던 수 없는 그 땅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가나안의 신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도 나오는 ‘바알세불, 바알세붑’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 명칭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명칭이 사탄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그런 호칭을 붙여 비난했다는 것은 대단히 망령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쳤던 말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귀신이 쫓겨난다는 말은 어두움의 지배가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귀신”을 뜻하는 헬라어 δαιμόνιον(다이모니온)이 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시면서 이제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제는 하나님의 역사가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의 고백속에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지만 “귀신을 쫓아낸다”라는 말은 분명하기에 이것은 서로 맞지 않는 모순이 되지만 결국 귀신은 내쫓기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사람과 이 세상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우리는 죄와 죽음, 형벌에 놓였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죄인이었고 지옥불에서 영원히 지낼 영혼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런 죄와 죽음, 형벌과 지옥이라는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으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를 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의 감격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복음은 죽은 자들, 자기 힘으로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자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용서와 용납, 이미 완전히 해결하신 하나님의 업적을 아는 데에서 나타납니다.
로마서 7장 5,6절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로마서 8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악을 능히 덮으시고 영접해 주시는 구원의 복음에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며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제 죄와 사망, 어두움과 지옥의 세상에서 풀려나 완전한 자유와 온전한 생명,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참 생명, 영원한 삶, 완전한 구원을 신뢰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인 참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죄와 사망, 어두움과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완전한 구원, 영원한 생명, 천국에 대한 기대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도 어떤 불안, 초조, 걱정, 염려를 떨쳐버리며 참 구원이신 예수님만 의지하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이 이제는 항상 주님만 의지하며 참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어떤 기쁨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기쁨을 누리며 어떤 형편에서든지 주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며 주님이 함께 하셔서 누리게 되는 평안속에서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