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2024년 9월 25일 (수)
오백칠십아홉 번째 이야기
명당과 발복
어떤 이가 “땅을 고르는 방법에 길지를 추구하고 흉지를 피한다는데 무슨 말입니까? 화복을 인력으로 이룰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내가 응답하기를, “길지를 추구하고 흉지를 피하는건 자식된 마음이고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이에게 화를 내림은 천도의 고정된 법이니 사람의 일을 하면 천리가 응한다. 만물의 이치는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느끼니 그러므로 하늘이 길지를 감춰뒀다가 선한 사람에게 주는 것 또한 천도에 합치됨이요 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바가 끝내 아니다.”라고 하였다.
或問曰: “擇地之法, 有趍吉避凶, 何謂也? 禍福可以力致歟?” 余應曰: “趍吉避凶, 人子之情也; 福善禍淫, 天道之常也, 人事修而天理應矣. 凡物之理, 同聲相應, 同氣相感, 故天藏吉地, 以與 善人, 卽亦天道之脗然, 終非人力之所致.”
혹자가 “그대의 말과 같다면 선인의 장례와 악인의 장례, 길지와 흉지는 각기 바뀌지 않는 이치가 있습니다. 장평에서 병졸을 파묻어 죽인 일1)과 신안성에 참혹하게 생매장한 일2)이 있는데 만인이나 같은 구덩이에 묻힌 경우, 묻힌 사람들이 선한지 악한지 반드시 다를 테고, 묻힌 땅도 길한지 흉한지 반드시 다를 것입니다. 또한 자손의 화복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만약 ‘화복이 땅에 달렸지 사람은 관련 없고 사람에게 달렸지 땅은 관련 없다.’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또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或曰: “如君之言, 善惡之葬、吉凶之地, 各有不易之理也. 如有長平之卒、新安之慘, 而萬人同穴, 則人之善惡, 未必同焉, 地之吉凶, 未必異焉. 抑其子孫之禍福, 同歟異歟? 若曰: ‘係乎地則人無與焉, 係乎人則地無與焉.’ 此亦有說乎?
*1) 장평(長平)은 지명으로서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백기(白起)가 조(趙)나라 조괄(趙括)의 군사를 대파하고 항복한 군졸 40여만 인을 땅에 파묻어 죽였다고 한다. 《史記 卷43 趙世家》
*2) 진나라 장수 장감(章邯)이 간신 조고(趙高)의 전횡에 실망하여 항우에게 투항하였는데 항우 휘하의 병사들이 예전에 진나라에 수자리 살러 갔을 때 품게 된 원한을 갚기 위해 진나라 군졸들을 함부로 대하였다. 이에 진나라 군사들이 불만을 갖자 신안성 남쪽에 20만 명을 모두 생매장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내가 말하길, “비유하자면 온갖 곡식 종자가 그 토질은 같지만 싹터 자라는 건 반드시 다르니 이것이 사람에게 달렸다는 설이고 토질은 알맞지만 유독 지력 받은 곡식이 있으니 이것이 땅에 달렸다는 설이니, 사람과 땅이 어찌 서로 연관이 없겠습니까. 근세의 감여설은 참으로 허탄합니다. 그리고 용맥의 길흉에 대해 서로 감응한다고 한다면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양 혼자서는 낳을 수 없고 음 혼자서는 이루지 못하니 그러므로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됨이 천지의 도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길지에 흉격이 없을 수 없고 흉지에 길격이 없을 수 없습니다.
余曰: “譬如百穀之種也, 其地雖同, 其生必異, 此係乎人之說也; 土之所宜, 穀有偏受, 此係乎地之說也. 人與地豈不相須乎? 近世堪輿之說, 固多誕妄. 而山龍吉凶, 若曰有相感, 則亦有說焉. 獨陽不生, 獨陰不成, 故一陰一陽, 天地之道也. 無物不然, 吉地不能無凶格, 凶地不能無吉格.
사람도 선인이 있고 악인이 있어서 반드시 부류로 응하니, 그러므로 묫자리는 같더라도 선인이 묻히면 길한 기운이 반드시 응하고 흉인이 묻히면 흉한 기운이 반드시 응합니다. 비유하자면, 군자는 군자의 벗을 따르고 소인을 멀리하며 소인은 소인의 벗을 따르고 군자를 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선인과 흉지가 감응하겠으며 악인과 길지가 서로 감응하겠습니까. 옛사람이 산을 보면서 ‘이 산에서 발복하지 않으면 어찌 지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누가 그에게 까닭을 물어보자 ‘이 사람에게 발복한다면 어찌 천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3) 여기서 천리가 끝내 지리를 반드시 이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응은 스스로 초래하지 않
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길지를 추구하고 흉지를 피하는 것은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요 선인에게 복을 내리고 음란한 이에게 화 내림은 천도가 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함에 간사하지 않도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길지를 고르는 방법입니다.”
人之有善有惡, 必以類應, 故穴雖同, 善人之葬, 吉氣必應, 凶人之葬, 凶氣必應. 譬如君子, 以君子之朋相從而小人遠矣; 小人, 以小人之朋相從而君子遯矣. 豈有善與凶相感, 惡與吉相應乎? 古之人有看其山則曰: ‘此山不發, 豈有地理哉?’ 問其人則曰: ‘此人若發, 豈有天理哉?’ 此可見天之理終必勝於地之理也. 然則感應無非自招, 故曰: ‘趍吉避凶, 人事之修也; 福善禍淫, 天道之應也.’ 《詩》云: ‘愷悌君子, 求福不回.’ 此其擇地之法乎.”
*3) 주희(朱熹)가 복건성 숭안(崇安) 현령이었을 때 지역의 권세가와 일반 백성 사이의 산송(山訟)이 있었다. 특히 길지를 파보니 그 서민의 조상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나왔다. 주희는 권세가가 서민의 길지를 탐내서 뺏는 것이라고 판결했는데, 도리어 서민이 비석을 묻고 권세가를 무고하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에 주희가 후회하며 벽에다 “이 땅에서 발복하지 않으면 이는 지리가 없는 것이고 이 땅에서 발복한다면 이는 천리가 없는 것이다.[此地不發, 是無地理, 此地若發, 是無天理.]”라고 하였다. 그날 밤 퍼붓듯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치더니 뇌성 소리에 집들이 모두 울릴 정도였다. 다음날 보니 그 무덤이 이미 훼손되어 못으로 되었고 석곽은 보이지 않았다. 《人譜類記 卷下》
- 박영석(朴永錫), 『만취정유고(晩翠亭遺稿)』 「논산용이기설[論山龍理氣說]」
한국의 대 명절 추석이다. 요즘은 다들 연휴 기간이라 해외여행을 다니지만 아직까지 많은 국민들은 차례와 성묘를 지내며 조상을 기리고 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조상 덕 받은 이들은 이미 해외여행 다니고 못 받은 이들만 복받으려고 열심히 제사지낸다는 말이 나오니 한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조상을 숭배하는 의식은 동서를 통틀어 고대부터 내려왔던 미덕이었고, 동아시아에서는 효(孝)의 기본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 사대부에게 풍수는 필수 교양이었다. 영조는 《인자수지(人子須知)》, 《탁옥부(琢玉斧)》, 《나경정문침경해(羅經頂門針經解)》를 수입하여 인출(印出)하고 과시(科試)에도 활용하려고 하였다.4) 하지만 풍수는 효(孝)의 일환이었던 동시에 기복신앙의 측면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영우원(永祐園)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천장할 때 예전 기해예송 때 송시열에게 밀려 폐기되었던 남인 윤선도의 풍수설을 받아들였였는데,5) 천장한 이후 순조를 낳았다. 이를 통해 현륭원은 명실상부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인식되었으며, 동시에 정조는 노론의 기세를 누르는 방법으로 풍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4) 《승정원일기》 영조 18년 12월 18일
*5) 《승정원일기》 정조 13년 7월 13일
올 초 돌풍을 일으켰던 영화 ‘파묘’도 시작 부분은 조상 묘가 잘못되어 미국에서 부귀를 누리던 후손이 사고를 당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던가. 또한 코로나 이전에 개봉했던 ‘명당’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임금마저 아래로 보는 장동 김씨 김좌근이 영원한 권력을 누리고 싶어 왕의 관 위에 자기 조상들의 관을 엎어 이장했다는 설정에서도 명당과 부귀영화의 상관관계를 잘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정말 ‘묘만’ 잘 쓰면 후손들이 그 복을 받을 수 있을까? 당연하겠지만 결론은 'NO'다. 박영석(朴永錫)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수경(千壽慶), 김낙서(金洛瑞), 장혼(張混) 등 옥계사(玉溪社)의 시인들과 교유하며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여항시인의 한 사람이다. 또 손자 박응모(朴膺模)도 최경흠(崔景欽), 유재건(劉在建) 등의 인물과 직하사(稷下社)에서 활동한 여항시인이다. 그는 문학적 재능과 고고한 인품 외에 특기가 있었으니 바로 풍수였다. 이경민(李慶民)이 지은 《희조일사(熙朝逸事)》 등에는 그가 어느 날 돈을 빌려 선조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그해 큰 장마가 져 예전 묘가 있었던 자리가 깊은 골짝으로 변했다는 언급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관보를 베껴서 팔아 제사에 이바지하고, 아내는 남이 쓰던 묵은 솜을 타서 입에 풀칠하였다. 구들 땔 장작을 살 돈이 없어 그의 부친은 집 안에서 얼어 죽는다. 그래서 그는 평생의 한으로 삼아 평생 구들을 때지 않고, 가끔 세밑 선물로 들어오는 꿩이나 닭의 털을 뽑아 방안에 깔아 지냈다고 한다.
그가 만약 조금이라도 가난이 지긋지긋하였다면 선조의 묘를 옮길 때 명당에 이장하여 부귀영화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다. 지리(地理)가 천리(天理)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복을 받는 사람은 그가 천리대로 평소 착하게 살고 마음을 곱게 써서이지 결코 길지(吉地)의 발복(發福)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그의 부친이 얼어죽었더라도 그는 가난한 생활에 만족하고 지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집안의 영달을 위해 남을 속이고 몰래 땅을 차지했다가는 그가 인용한 주희의 고사처럼 무덤이 훼손되고 복은 저만치 멀리 달아났을 것이다.
요즘은 일확천금을 누릴 기회가 너무 많다. 인터넷에는 누구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한다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복권과 코인으로 벼락부자가 된 이들도 주변에서 종종 들린다. 하지만 이들 중 누가 그 복을 오랫동안 누렸는가 생각해보면, 결국 갑작스러운 복을 겸손하게 맞이하고 현명하게 재단한 이들이었고, 대체로 흥청망청 쓰거나 얻은 복을 부족하게 여겨 더 크게 키우려다가 도리어 패가망신 당하였다. 사람마다 타고난 복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당사자의 선행과 노력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시운(時運)과 약간의 음덕(陰德)이 더해진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잘나가게 된 사람과 지나치게 비교하지 말고 1년 전, 5년 전의 나와 비교하면서 나도 열심히 살아왔었노라고 자기를 위로하고 격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쓴이 이도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