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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31일 새벽. 충남 아산군 현충사 유물전시관에 보관돼 있던 <난중일기>가 사라졌다. 1592년 5월부터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진중생활과 작전계획 등이 세세하게 기록돼 있는 <난중일기>는 이 장군의 후손들에 의해 고향인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의 본가에 보관돼 왔었다. 1959년 국보76호로 지정됐고 196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현충사 부근 대지 9만여 평이 성역화되고 유물전시장이 마련됐을 때 정부가 이순신 장군의 나머지 유품들과 함께 이를 인수, 관리해오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국보를 도난당했으니 그야말로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대형사건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국보가 도난당한 이후 급박했던 열흘간의 수사기록이다. 당시 <난중일기>는 일본으로 밀수출되기 몇 시간 전에 극적으로 되찾았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부터 들어보자.
당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즉시 현충사 내에 수사본부가 차려졌고 치안국에서는 전국 경찰에 공조수사 명령이 떨어졌다. 도난당한 품목들은 장물품표로 작성돼 수천매가 배포됐고 밀수출에 대비해 공항 및 항만 등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국보를 훔친 용의자는 좀처럼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수사에 진전이 없자 1월 8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유감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까지 나서자 가장 다급한 것은 경찰이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회고.
대통령 담화가 있던 날 서울시경에는 30명의 형사들로 이뤄진 ‘국보도난사건 특별수사전담반’까지 꾸려졌다. 치안국 수사지도과 계장 등 실무진이 현장에 급파돼 수사지휘가 이뤄졌을 정도였으니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특별소집회의를 가진 수사팀은 서울시내 골동품판매상 1000여 명을 상대로 조사에 들어가는 동시에 동일수법전과자 50여 명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초기에 현장 검증 결과 수사팀은 전문꾼에 의한 원정범죄가 아닌 현장부근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 벌인 단순절도사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철문을 20cm가량 뜯어놓은 수법이 졸렬했던 데다 범인의 침입로로 보이는 전시관 근처의 철망이 잘려나간 모습도 몹시 어설펐고, 전시관 옆 담장의 기와장도 많이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박 전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있은 뒤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됐다. 전국 경찰이 공조수사에 나서 수사를 벌였지만 사건발생 9일이 지나도록 수사는 안개속을 헤어나지 못했다.
사건의 실마리가 잡힌 것은 이듬해 1월 9일이었다. 오전 11시경 당시 부산에 사는 A 씨(30)가 “<난중일기>를 훔쳐간 사람들에 대해 제보하겠다”며 부산시경을 찾아온 것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A 씨는 당시 부산시경을 찾아와 국장 면담을 요청했다. A 씨는 자신의 아버지한테서 ‘OO표구사’에 수상한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A 씨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들이 <난중일기> 도난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에 A 씨는 사실을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 평소 안면이 있는 OO표구사 종업원 K 군(17)을 불러내 넌지시 떠봤다고 한다.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보상금이 나오면 나눠줄 테니 알고 있는 대로 얘기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K 군이 우물쭈물하면서 말을 하지 않자 A 씨는 ‘보상금을 타면 나눠주겠다’는 확약서를 써줬고 그제서야 K 군이 입을 열었다고 한다. K 군은 OO표구사를 운영하는 자신의 이모부 장상익 씨(가명·47)와 골동품 중개상인 최만필 씨(가명·37) 등이 근래 여러 번 만나 ‘국보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으며 1월 5일에는 문제의 <난중일기>를 표구사로 가져왔다가 다음날 어디론가 옮겨갔는데 곧 일본으로 가져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털어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날 오후 청와대 민정비서실로 또 한 건의 중요한 제보가 들어온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전화를 건 사람은 부산 출신의 박동수(가명)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난중일기>를 훔치기 위해 범행 일주일 전 현장을 답사한 일당 중 한 명이라고 자수했다. 국보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어 제보하게 됐다고 자수한 배경을 털어놓은 그는 최만필이 사건의 주범이라고 밝히고 현장답사를 한 사람과 <난중일기>를 직접 훔친 사람 등 공범들에 대해서도 모두 자백했다. 또 그는 이들이 <난중일기>를 조만간 일본으로 밀수할 계획이라는 얘기도 했다.
이 무렵 부산시경에서는 A 씨로부터 받은 제보를 근거로 수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수사팀이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은 최만필 씨였다. 놀랍게도 최 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후 중학교에서 교감까지 지냈던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63년과 66년에도 고려청동수은향로(보물 321호)와 경남 밀양의 통도사 금불상을 절취한 혐의로 수개월간 징역을 살다 67년 가을에 출소한 인물로 이미 동일수법의 전과가 있었다.
긴급회의를 마친 수사팀은 이날 최 씨의 집을 급습했다. 하지만 최 씨는 집에 없었다. 이에 수사팀은 공범인 OO표구사 주인인 장상익을 검거,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 한편 ‘<난중일기>는 마산에 사는 이태식(가명)이 보관하고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마산으로 급파된 수사팀은 이날 오후 최만필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난중일기>의 행방을 알아내는 데는 적잖이 애를 먹어야 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최만필은 곽정일(가명)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다고 했으나 곽 씨는 이를 부인했다. 수사팀은 최만필과 장상익, 곽정일을 상대로 <난중일기>의 소재에 대해 추궁했지만 그들은 모두 <난중일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잡아뗐다. 몇 시간 후 추가로 검거된 이태식 역시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태식이 마음을 바꾼 듯 입을 열었다. 그는 형사에게 ‘실은 <난중일기>가 부산에 사는 민병태(가명)에게 넘어갔다’고 슬그머니 귀띔해줬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직접 <난중일기>를 훔친 범인에 대한 인적사항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난중일기>를 손에 쥐는 것이었다. 수사팀으로서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자정 무렵 민 씨의 주거지를 급습한 수사팀은 마당의 연탄창고 가마니 안에 들어있는 <난중일기>를 발견, 무사히 회수했다.
수사팀은 체포한 이들을 상대로 공범관계 및 범행동기, 경위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난중일기>를 훔친 사람은 임명국(가명·30)과 양재석(가명·28)이며 이번 사건에 무려 8명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임명국을 검거한 수사팀은 마지막 남은 양재석을 검거하기 위해 그의 연고선을 토대로 추적에 들어갔다. 하지만 1월 13일 오전 7시경 양 씨는 부산의 한 산기슭 공원에서 변사체로 발견된다. 사체 옆에는 먹다남은 청산가리 조각과 사이다 병이 흐트러져 있었다. 부검결과 양 씨는 청산염에 의한 중독사망으로 확인됐다. 양 씨는 하루 전날 자신의 형을 찾아와 자신의 혐의를 고백하며 쫓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국보를 훔칠 생각을 한 것일까.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최만필 등은 범행 약 일주일 전 부산 시내의 한 다방에서 모임을 갖고 범행을 공모했다. 범행동기는 돈 때문이었다. <난중일기>를 훔쳐 일본으로 밀수출하면 적어도 1000만 원은 받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후 장상익이 운영하는 OO표구사에서 수차례 모임을 가지며 체계적으로 범행을 모의했다. 이들은 하나씩 끌어들인 공범들로부터 범행도구 등을 조달받는 한편 각자 역할까지 분담해 가면서 범행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이들은 기차를 타고 현장답사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 전날 저녁 7시 30분부터 현충사 부근에서 숨어있다가 이날 새벽 현충사에 침입, <난중일기>를 훔쳤다. 이들이 국보를 훔치는 데 불과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범행 후 온양의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들은 다음날 열차편으로 부산에 도착, 최만필 씨에게 <난중일기>를 건넸다. 조사결과 이들 일당은 훔친 <난중일기>가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장소를 옮겨 보관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최 씨는 <난중일기>를 보관하기가 여의치 않자 집 근처에서 OO표구사를 운영하는 장상익에게 건넸다. 하지만 경찰수사가 골동품상으로 확대되는 것을 알게 된 최 씨는 <난중일기>를 다시 가져와 밀수전문가인 이태식 씨에게 넘겼다. 하지만 이태식도 보관에 부담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쇄업자인 민병태에게 <난중일기>를 맡겼던 것이다.
특히 이들은 1월 10일 새벽 일본 ‘이즈하라’를 거점으로 한 밀수루트를 따라 <난중일기>를 반출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드러나 수사팀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검거될 무렵 이들은 외항선원을 매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난중일기>는 일본으로 밀수출되기 몇 시간 전 극적으로 회수될 수 있었던 셈이다. 도난당한 국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한 청년과 양심에 가책을 받은 공범 박동수의 제보, 사활을 걸고 공조에 나선 수사팀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국가의 보물인 <난중일기>를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했을 거라는 게 김 연구관의 얘기다.
주범격인 최 씨는 수사본부로 압송되기 직전 “선조들이 만든 고귀한 문화재를 만져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을 남겨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이 사건은 이례적으로 전국 경찰이 공조해서 수사에 착수했을 뿐 아니라 열흘간의 급박했던 수사진행과정이 연일 청와대에 보고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난중일기>는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헬기로 공수되고 당시 문교부 장관이 대통령으로부터 건네받아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현충사로 다시 옮겨지는 역경을 겪었다. 한편 이 사건의 주범인 최 씨는 68년 3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징역 5년 등을 선고받았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