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가 뭔데? 정의를 어떻게 내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진짜란 두뇌가 해석하는 전자 신호에 불과해."
-모피어스
매트릭스를 보며 기억에 남았던 대사다. 네오가 빨간 약을 고르고 가상세계로 들어온 후 자신이 보고있는게 진짜냐고 묻자 모피어스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무엇이 존재한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인간의 오감인데, 그 오감이 가짜라면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영화 [매트릭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거짓일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여러 방면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 내 생각 등 여러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의 말이다. 나의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전능한 악마가 내 감각을 통제해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깨달을 방법이 없다고 데카르트는 생각했다. 쉽게 말해 멀리서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를 인간은 다른 악기로 착각할 수도 있어서, 인간의 오감을 완전히 믿지 못한다는 말이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것은, 의심하고 생각하는 자신뿐이라 주장한다. 내가 느끼는 것이 가짜여도, 무엇을 느끼는 나는 존재한다.
인간을 통제하는 주체가 악마에서 로봇으로 변하긴 했지만, [매트릭스]의 배경이 되는 설정이다. 작중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이 가짜인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시각과 미각, 촉각, 후각, 청각 등 인간이 느끼는 모든 것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내 오감이 가짜라는 사실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즘에는 우주 시뮬레이션 가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론 머스크가 99.99%의 확률로 우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라고 하는 말을 들어봤을진 모르겠다.
대충 요약하자면, "인류가 가지고 있는 시뮬레이터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는데, 먼 미래에는 우주를 컴퓨터로 구현할 수 있다. 지구를 만들고, 인간을 만들어서 그들이 느끼는 현실이 진짜라고 생각하도록 모든것을 정교하게 시뮬레이터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한 인류가 시뮬레이터를 만들고, 만들어진 인류의 기술이 발전해서 시뮬레이터를 또 만들어낸다. 이게 무한히 반복되고, 내가 살고있는 현실이 저들 중 하나의 시뮬레이터일 확률이 높다."
라는 주장인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요약해놓아서 모든 이야기를 담진 못하지만, 나름 설득력있게 들렸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앞에서 말한 이야기들로는, 존재를 확신할 방법이 없다고 설명되지만, 난 다르게 생각한다. 존재한다는 것의 개념은 무엇인가? 거짓된 오감으론 존재를 설명할 수 없고, 진실된 오감으로 느끼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인가? 거짓되어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앞에서 모피어스는 인간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는건 오감에서 뇌로 전달되는 전자신호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그게 존재의 증거이지 않을까? 설령 오감이 거짓이라도, 그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도출되어야 하는가? 존재는 진실인가, 거짓인가?
존재의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겠다. 만약 이 세상이 컴퓨터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다면, 현실이 거짓이라면,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사이퍼라는 흥미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는 세계의 진실을 안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빨간 알약을 먹은 것을 후회하고, 가짜 현실에서 쾌락을 누리는 선택을 한다. 그 때문에 동료였던 이를 배신하고 기계의 편에 선다.
영화에서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먹으며 하는 말이 있는데,
"이게 진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주죠. 내가 9년만에 뭘 깨달았는지 알아요? 모르는 게 약이다."
사이퍼는 현실이 가짜라는 사실을 잊는게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이와 정반대되는 인물로는 네오가 있다. 네오는 현실이 거짓이란 사실을 안 순간부터 고통을 겪었다. 요원들에게 쫓기고, 동료의 죽음을 보았고, 정신이 피폐해지는 순간들을 겪었지만 꿋꿋이 저항해, 가짜 현실을 극복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네오는 현실의 모든 비밀을 알고, 가짜 현실에서 신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해피엔딩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안간힘을 써도 시스템을 초월할 수 없다면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매트릭스]에서 나오는 총알 피하기 같은 초월적인 행동들은 영화라 그런것이지, 현실에서는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이다"라는 정보만 갖고 있으면, 나는 사실을 잊는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다. 가령 내가 세상의 비밀은 안다 치자. 하지만 그게 절망적인 내용이라면 잊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느낀다.
사이퍼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동료에게 피해를 준 행동은 도덕적 논란이 있겠지만, 나는 그가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불에 비유할 수 있겠다. 불에 손을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답답함을 느껴도, 불에 손을 넣어 고통을 느끼는 것보단 낫다.
옛날 영화라 그런지 액션이 뭔가 투박하고 보는 내가 부끄러웠던 [매트릭스]였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들은 숙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훝어보면 별 생각없이 지나갔겠지만, 깊이 생각하고 뜯어보다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명작을 나이가 먹을수록 몇번 더 보라는 이유가 느껴진듯 하다. 나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