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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 : 농악
정의 및 이칭
농악은 꽹과리·징·장구·북·소고·태평소 등의 악기연주에 제의적·놀이적·군사적·노동적·음악적·무용적·연극적 공연요소가 더해져 악가무희(樂歌舞戱)의 형태를 이루는 민속연희이다. '풍장', '풍물', '매구', '걸궁', '걸립', '두레'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농악을 가리키는 이칭 가운데, '풍장'은 풍악(風樂)에서 나온 말이며, '풍물(風物)'은 풍악(風樂)에 쓰이는 기물 즉 농악기를 지칭하던 것이 풍악 전반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매구'는 땅에 묻혀 있는 잡귀를 밟고 위로하여 진정시킨다는 뜻의 '매귀(埋鬼)'로 풀이되며, '굿', '매굿', '지신밟기', '마당밟기'라고 부르기도 했다. '걸궁(乞窮)'이나 '걸립(乞粒)'은 공공의 기금 마련을 위해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형태의 농악을 가리킨다. 궁궐이나 민가에서 벽사축원(辟邪祝願)을 위해 요란한 타악기를 울리며 귀신 쫓는 소리를 지르는 나례와 같은 초기 축원농악(祝願農樂)을 일컬어 문헌에서는 '매귀희(埋鬼戲, 魅鬼戲)', '매귀놀이(埋鬼遊)', '방매귀(放埋鬼)', '화반(花盤)'이라 했다.
'두레'는 농민들이 들에서 일할 때 노동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연주하는 농악을 뜻하는데, 주로 '사고(社鼓)' 또는 '사고악(社鼓樂)'이라는 명칭으로 문헌에 표기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러 '두뢰(頭耒)'로 실음표기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한편 농악을 연주하는 행위를 일러 특별히 '굿친다', '금고(金鼓)친다', '매구친다', '쇠친다'라고 했으며, 농악기를 '굿물', '풍물', 농악대를 '걸립패', '굿패', '두레패', 농악가락을 '쇠가락', 농악의 구성원을 '치배'라고 불렀다. 승려들의 시주에 사용되는 농악을 가리킬 때에는 '법고(鼓法)' 또는 '걸공희(乞供戱)'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농악을 연행하며 민가를 돌아다니는 승려들을 '법고승(法鼓僧)'이나 '굿중패'라고 했다.
'농악'이라는 용어는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부락제(部落祭)』에서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농촌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일본인 학자 고세이(吳請)가 1931년에 간행한 『조선(朝鮮)의 연중행사(年中行事)』에서 '농악'이라는 말을 사용한 바 있다.
굿중패 연희 장면
김준근. 『기산풍속도첩』. 조선말. 국립모스크바동양박물관. 러시아
그리고 이미 19세기 말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문헌에서도 '농악'의 용례가 발견된다.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속음청사(續陰晴史)』에서 1891년 7월, 자신이 관찰한 당진 두레굿의 기세배에 대해 기록하며, '농악(農樂)'과 '두뢰(頭耒)'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했다. 황현(黃玹, 1855-1910)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남긴 1894년 이전의 기록에도 두레농악을 지칭하기 위해 '농악'을 사용한 용례가 보인다. 최덕기(崔德基, 1874-1929)는 『갑오기사(甲午記事)』에 남긴 1894년의 일기에서 화적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터로 출정할 때 연주하는 군악(軍樂)을 가리켜 '농악'이라고 명명했다. '농악'은 193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해 처음 사용된 용어가 아니라, 이미 19세기 말 조선 문인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농악'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에서 황민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농촌진흥운동'과 '농촌향토오락진흥'의 영향 아래, 농악이라는 용어가 두루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농악경연대회'로 명명되는 각종 대회가 전국 규모의 행사로 진행되었던바, '농악'이라는 용어도 점차 전국 단위의 표준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농악' 이외의 다른 용어들은 공식석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농악경연대회'라는 대회명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중요무형문화재와 시·도무형문화재의 종목명으로도 '농악'이 사용되었다. 1980년대에 주로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집단에서는 '농악' 대신 '풍물', '풍물굿', '풍물놀이' 등의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 바 있다.
유래 및 역사
농악에 관한 주요 유래설로, 안택축원설(安宅祝願說), 군악설(軍樂說), 불교관계설(佛敎關係說) 등을 들 수 있다. 각 유래설은 현존하는 농악의 여러 특징적 면모에 근거하여 제기된 것이다. 안택축원설은 재앙을 면하고 복과 풍년을 맞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안택축원의 의식에서 농악의 유래를 찾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현재 일부지역에 남아있는 당굿, 샘굿, 집돌이로서의 지신밟기에 주목하여 제기된 것이다. 농악대가 당(堂)으로 가서 농신(農神) 또는 마을의 수호신을 맞이하고, 집집마다 순회하는 집돌이를 통해 가신(家神)을 위하며, 잡신(雜神)과 잡귀(雜鬼)를 위로해 마을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마을을 정화하는 절차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군악설은 농악에 군대와 관련된 진법(陳法), 도구, 악기 등이 많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제기된 관점이다. 농악의 원진(圓陣)·방진(方陣)·방울진·종대·횡대·구궁팔괘진(九宮八卦陣)은 군의 원진·방진·사반진(蛇蟠陣)·학익진(鶴翼陣)·장사진(長蛇陣)·구군팔진(九軍八陣)과 형태면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농악의 용기(龍旗)는 군의 교룡기(交龍旗)·황룡기(黃龍旗)·청룡기(靑龍旗)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농악의 영기(令旗)는 군의 영기와 관련성이 있다. 농악에 사용되는 징과 북은 군대에서 각각 전진과 후퇴를 알리는 악기이며, 나발은 군대의 신호용 악기이고, 태평소도 군영에서 연주하던 악기이다. 병과 농을 함께 담당했던 양인농민의 군종(軍種) 가운데 태평수(太平手)·나발수(喇叭手)·기수(旗手)·취수(吹手)·취고수(吹鼓手)·취타수(吹打手)·세악수(細樂手)·내취(內吹)와 같은 기(旗) 및 취타(吹打) 관련 군종이 농악과 관련된다.
불교 관계설은 사물(四物)이나 고깔, 삼색띠, 무동(舞童)들의 나비춤 등 농악에서 확인되는 불교적 요소에 근거하여 제기된 관점이다. 불가에는 사찰의 건립·중수 등에 소요되는 경비의 마련을 위해 사승(寺僧) 수십 인이 머리에 불두화(佛頭花)를 매단 고깔을 쓰고, 대금·소금·새납 북·저 등 악기를 연주하면서 걸립(乞粒)하는 풍속이 존재했다. 이를 굿중패라 했는데, 민간에서도 이와 유사한 집단을 조직해 농악을 성립시켰다고 보는 것이 불교관계설이다.
농악의 기원 혹은 형성의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문헌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다음의 여러 기록을 근거로 농악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배경적인 요소에 대해 고찰할 수 있다. 농악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요소로, 고대국가의 제천의식(祭天儀式) 및 구나의식(驅儺儀式)을 들 수 있다. 농악의 시원적인 형태는 고대국가의 제천의식에서 행해졌던 가무(歌舞)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부여의 영고(迎鼓), 예(穢)의 무천(舞天), 마한의 5월제와 10월제, 고구려의 '동맹(東盟)'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은력(殷曆) 정월에 지냈던 제천행사로서의 '영고'는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북(鼓)을 치면서 신(神)을 맞이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천'도 '하늘과 더불어 춤을 추는 의식', 혹은 '하늘을 향해 춤을 추는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모두 주야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행했던 제천의식이다. 마한의 기록은 조금 더 자세하다.
마한에서는 항상 5월에 파종이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마을사람들은 무리지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셨다. 그 춤은 수십 명이 한 줄을 이루어 몸을 구부리기도 하고, 허리를 펴기도 하며, 손과 발을 서로 맞추는 것이었다. 절주(節奏)는 마치 중국의 탁무(鐸舞)와 비슷했다. 10월에 농사일이 다 끝나도 그와 같이 했다.
馬韓 常以五月 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 俱起相隨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以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上.
농경신(農耕神)에 대한 축원의식을 거행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던 가무연희(歌舞演戱)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특히 춤의 동작은 오늘날의 농악무나 대동놀이를 연상케 한다.
고구려에서 10월에 거행했던 제천의식인 '동맹'은 제천과 함께 국조신인 동명(東明)을 위한 제사로, 나라 동쪽에서 신을 맞이해온다고 했다는 점에서 지신(地神)에 대한 제사도 포괄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백제(百濟)」에는 백제에서 지냈던 천신, 오제신, 구태묘에 대한 제사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북과 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북사(北史)』 「열전(列傳)」 「신라(新羅)」에는 시조묘, 신궁, 오묘, 사직 등의 왕실제사와 농경제의인 팔사(八蜡)가 언급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구나의식이 성행했다. 중국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 민가와 궁중에서 묵은 해의 마귀나 사신(邪神)을 쫓아내기 위해 베풀었던 의식인 나례(儺禮)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려에 전래되었다. 이색(李穡)의 〈구나행(驅儺行)〉 중 "시골에 북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례가 성행하여(鼓聲不絶鄕儺盛) 악귀를 몰아내니 행복과 경사가 도래하네(驅逐精邪福慶臻)"라는 표현을 통해서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무렵, 나례는 귀신을 쫓는 의식과 난장놀이인 잡희로 분리되었으며, 특히 후자는 이후 공연오락행사로 독립했다. 이는 농악이 구나의식에 해당하는 지신밟기와 오락 위주의 판굿으로 구별되는 것과 유사하다.
산악(散樂), 백희(百戲)와 같은 전통연희도 농악의 성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산악 백희는 우리나라로 전해져 백희(百戱),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대희(山臺戱), 나례(儺禮) 등으로 불렸다.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 묘사된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狻猊)의 다섯 가지 놀이는 신라악의 가무백희 내용을 잘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우란분재, 나례, 과거급제자 축하연 등 여러 행사 등에서 연희를 행했는데, 곡예적인 연희와 환술, 교방의 가무희인 궁중정재, 가면희, 골계적 우희 등이 주요 레퍼토리였다. 전문적인 연희 계층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고려시대부터이다. 조선시대 광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수척(楊水尺)은 유랑광대 집단의 효시에 해당하며, 유랑광대 집단은 농악의 주요 연희자 가운데 하나였다. 불교행사인 연등회, 팔관회, 우란분재 등에서도 가무백희가 활발히 연행되었으며, 이 역시 축원농악의 성립에 부분적으로 일조했다.
공동노동의 습속 및 두레와 같은 조직도 농악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주요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신라본기(新羅本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년 조에 서술된 길쌈두레에 대한 내용을 통해, 당시 공동노동에 음악과 놀이가 결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공동노동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했음은 고려시대의 임춘(林椿)이 음력 6월 15일 유두절(流頭節)의 풍경을 읊은 한시 중 "백성들이 밭두둑에서 날뛰며 부르는 노래 흥겹게 들리는데(喜聞民隴皆騰歌)"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인인 이행(李行, 1352-1432)의 한시에서는 "밭머리의 두레북(社鼓)은 두둥둥 울리고(田頭社鼓聞坎坎)"라 하여 두레농악을 더 직접적으로 묘사했다. '사고(社鼓)'란 글자 그대로 '두레북'이라 할 수 있다. 농민들은 논밭에서 공동노동을 하면서 북을 두드리는 형태의 두레농악을 행했던 것이다. 다만 이것이 현전하는 두레농악과 같은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 연행된 농악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농민들이 공동노동 조직에서 작업으로 인한 피로를 덜고,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행했던 악기연주, 노동요 중심의 두레농악이다. 두레농악은 두레조직이 연관된 각종 행사와 민속놀이까지 일컫는 다소 넓은 의미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두레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들을 구성원으로 하여,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다. 주로 모내기, 김매기, 추수 등을 함께 했으며, 두레본부인 농청(農廳)에서 연회를 벌이거나 휴식을 취했다. 공용의 농기구와 함께 농악에 소요되는 농기(農旗)와 농악기(農樂器)도 여기에 보관했다. 농악은 두레가 발달한 곳에서 성행했으며, 농경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만경평야, 나주평야, 김해평야, 평택평야 등 평야지대에서는 농악도 매우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만경강 등 하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도 여러 유형의 농악이 성립되었다.
충청도 관찰사였던 이승소(李承召, 1422-1484)가 1465년 충청도 가을 들녘의 풍경을 노래한 한시의 "해마다 가을 낟가리 높이 쌓이면(歲歲秋禾登大有) 마을마다 두레농악(社鼓樂) 소리 드높이 퍼져 가네(村村社鼓樂昇平)"에는 '사고악(社鼓樂)'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며, 이는 두레농악을 가리킨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한시 〈여주팔영(驪州八詠)〉에서 두레농악에서 사용되는 선율악기를 '농적(農笛)'이라 했으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입춘(立春)〉에서 퉁소와 북이라는 의미의 '소고(簫鼓)'라는 말로 두레농악의 악기를 지칭했다. 이들 기록을 통해 두레농악에서 북을 중심으로 한 타악기연주에 피리류가 동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10 〈인사문(人事門)〉 '양로(養老)'에는 '세서연(洗鋤宴)' 즉 호미씻이의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나중에 풍악이 울리면 피리를 불고 장고(杖鼓)를 치면서 한껏 즐긴 후에 그 놀이를 파한다(至樂作 村篴杖鼓 盡歡而罷)"라는 기록으로부터, 두레농악에 피리와 장고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의 기록 가운데 호남 지역에 두레농악이 크게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737년 9월에 호남어사 원경하(元景夏)가 전라도 일대를 암행하다가 부안에서 우연히 두레농악을 보게 되었다. 그는 농기와 농악기가 민란의 도구로 쓰일 것을 염려해 모조리 몰수했는데, 이것을 부안현감 안복준(安復駿)이 착복해 사사로이 사용했다. 이듬해인 1738년, 호남어사 남태량(南泰良)은 이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하면서 '쟁고기치(錚皷旗幟)' 즉 징, 북, 농기를 백성들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조가 징의 쓰임을 묻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밭이나 논에서 일을 하다가 피로해져 더러 게을리 하며 힘써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금고(金鼓)를 두드려 기운을 북돋게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듬해인 1739년 2월, 다시 호남지방을 살피고 돌아온 어사 남태량은 두레에서 사용하는 깃발은 금지하고, 악기는 백성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요지를 담은 최종 보고를 올렸다.
19세기에도 두레농악에 관해 구체적으로 기록한 문헌이 다수 발견되는데, 김윤식이 『속음청사』에 남긴 당진의 두레농악에 관한 일기도 그 중 하나이다.
7월 4일 : 병인일 바람이 개다. 입추절이다. 아침에 창밖에서 징과 북소리가 어지럽게 울렸다. 창 쪽으로 다가가 보니 마을 사람들이 농사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용 한 마리가 그려진 깃발을 세웠는데 장대가 삼장이나 되었다. 청령기 한 쌍과 징과 장고 등속이 섞여 시끄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또 신촌(新村)패가 있어 깃발과 북과 복색을 곱고 아름답게 고쳤다. 본촌(本村)이 먼저 북을 두드리며 기를 세우는데 이것을 선생기라고 한다. 신촌(新村) 기가 두 번 넘어지면 본촌(本村)의 기는 한 번 넘어짐으로써 이에 답한다. 두 마을이 요란하게 하나가 되어 마당을 둘러싸고 북을 두드리다 파했다. 이렇게 마을마다 있는 풍속의 이름을 두레(頭耒)라 하는데 예로부터 오랜 마을의 풍속이다.
聞鉦鼓亂鳴於窓外 推窓視之 乃村民農鼓也 建畵龍旗一面 桿長三丈, 靑令旗一雙 鉦鼓·杖鼓等屬雜進聒耳 又有新村一牌 旗鼓服色更鮮好 以此村先建旗鼓 謂之先生旗 新村旗二偃 本村旗一偃以答之 兩村合鬧 繞場鼓擊而罷 此俗村村有之名頭耒 古之眉州之俗.
7월 27일 : 농가에서는 7월에 김매는 일을 끝내면 술과 음식을 차려 서로 노고를 위로하며 북을 두드리고 징을 울려 서로 오락을 즐기는데 이를 두레연(頭來宴)이라고 한다. 잔치가 끝나면 농기와 북을 갈무리하여 다음 해를 기다린다. 오늘 본촌은 두레연을 벌이고 술과 떡과 고기로 잘 먹었다.
農家七月 耘事旣畢 設酒食相勞苦 擊鼓鳴鉦 以相娛樂 謂之頭耒宴 宴罷藏旗與鼓 以待嗣歲 今日本村設頭耒宴 以酒餠及肉來饋.
여기서 그는 두레농악을 지칭하면서, '사고' 혹은 '사고악'이라는 종전의 명칭 대신 '두뢰(頭耒)'와 '두래(頭來)'라는 실음표기를 하고 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농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대개 시골에서는 여름철에 농민들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논을 맸다. 이것을 농악이라고 한다(盖野鄕夏月 農人擊錚鐃 以相鋤耘 謂之農樂)"라고 기록한 바 있다.
둘째, 벽사진경(辟邪進慶)을 목적으로 하는 나례 등의 구나의식(驅儺儀式)이 민간으로 확산되면서 지신밟기와 같은 민간 고유의 구나의식으로 발전한 축원농악이다. 종교적 주술행위에 해당하는 굿은 무녀나 광대들에 의해 행해지기도 하나, 이와 같이 농악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부락제』에서는, 무악(巫樂)으로 지내는 동제로 경기도의 도당굿, 강원도·함경도의 단오굿, 경상도의 수신(禱神)굿·별신굿, 평안도의 당굿·별신굿, 농악으로 지내는 동제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당산(堂山)굿을 언급했다. 당굿을 농악으로 하는 경우, 농악대는 성황대 혹은 농기(農旗)나 영기(令旗)를 들고 농악을 연주하며, 제관과 축관(祝官), 마을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당에 도달하면 당 주변을 돌거나, 일렬횡대로 서서 당굿을 친 뒤, 절을 하거나 축관이 축문을 왼다. 이때 제관은 소지를 올려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친 뒤에는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농악을 울리며 춤을 춘다. 지방에 따라서는 당에서 농악대가 판굿을 하고, 샘굿이나 집돌이(지신밟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축원농악의 기원적인 형태는 나례에서 찾을 수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용재총화(慵齋叢話)』 권1에 기록한 나례의 양상은, 가면을 쓰고 북과 징 등의 타악기를 시끄럽게 울리며 입으로 축귀의 내용이 담긴 사설을 읊는다는 점에서, 농악의 지신밟기와 매우 흡사하다. 그는 『용재총화』 권2에 섣달그믐에 행하는 '방매귀(放枚鬼)'에 대해서도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데, 역시 축원농악의 형태와 비슷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농악을 일러 '매구' 또는 '매귀'라고 부르는데, 여기에 언급된 '방매귀'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마을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직접 사제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마당밟이 계통의 농악도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농악은 '매귀희(魅鬼戲)', '걸공(乞供)', '화반(花盤)', '매귀놀이(埋鬼遊)' 등의 명칭으로 지칭되었는데, 이옥(李鈺)의 『봉성문여(鳳城文餘)』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섣달 열아흐레 날 저녁, 읍인들이 봉성문 밖에 늘어서 매귀희(魅鬼戲)를 가설했다. 동자가 보고 돌아와서 말했다. "미친 사람 셋이 가면을 썼는데, 하나는 서생이고, 하나는 노파이고, 하나는 귀신의 얼굴이어요." 꽹과리를 차례로 치고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
十二月十九日夕 邑人設魅鬼戲于鳳城門外例也 童子觀而歸言 狂夫三人着假面 一措大二老婆 三鬼臉 金鼓迭作 謳謠竝唱以樂之.
정월 초이틀에 떠들썩하며 창 밖 길을 지나는 자가 있어 엿보았다. 종이 깃발을 잡은 사람이 앞서고 꽹과리(銅鈸) 세 사람, 징을 잡은 사람 둘, 북을 잡은 사람 일곱이 모두 붉은색 쾌자를 입고 전립을 썼는데 전립에는 종이꽃을 꽂고 있다. 인가에 들어와서 떠들썩하게 놀면 그 집에서 소반에다 쌀을 들고 문밖으로 나와 바치는데 이것을 화반(花盤)이라 한다. 아마 나례의 유풍인 듯하다.
正月二日 喧而過窓外路者 窺之 執紙毦白拂先者一人 執銅小鈸者三人 執銅鉦者二人 執鼙鼓者七人 皆衣紅掛子 戴氈笠 笠上搜紙花 到人家噪戲 其家盤供米出門 名曰花盤 其亦儺之餘風歟.
가면을 쓰는 놀이에 관한 음력 12월 19일 기록 가운데, 농악의 잡색놀이와 매귀희를 하면서 불렀다는 노래는 고사소리일 것으로 추정된다. 음력 1월 2일의 기록에 묘사된 농악대의 행렬은 오늘날 걸립농악대의 형태와 거의 유사하다. 행렬의 순서가 기수-꽹과리-징-북 등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전립에 꽃을 달았다. 인가로 나와 떠들썩하게 노는 것은 마당밟이의 마당굿을 연상시키며, 주인이 소반에다 쌀을 받쳐 들고 나와 바치는 모습도 오늘날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옥은 걸공(乞供)에 대해서도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매귀희를 제의 행위 자체로, 걸공을 그 제의 행위의 대가로 쌀과 돈을 얻는 행위로 구분했다.
이전까지 주로 유랑광대나 승려, 무당들의 전유물이었던 걸립은 18세기 이후 일반 백성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마을농악의 마당밟이가 보편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오횡묵(吳宖默, 1834-?)이 1887년부터 1894년까지 정선, 함안, 고성 지방에 근무하며 기록한 『경상도자인현총쇄록(慶尙道慈仁縣叢鎻錄)』 〈서재걸공(書齋乞功)〉에 마을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행한 마당밟이가 묘사되어 있다. 황현은 〈상원잡영(上元雜詠)〉에서 당시 구례 지역에서 행했던 마당밟이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농악'이나 '두뢰' 대신 '역귀 쫓기(罷儺)'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농악(세시풍속도)〉
이한철. 조선 후기. 동아대박물관 소장
셋째, 조선 초기에 사원 혁파로 절에서 쫓겨난 승려들이 재승(才僧)이 되어 민간을 떠돌면서 행했던 걸립농악이다. 조선조 이후 유랑예인으로 전락한 재승들의 연행물(演行物)은 민간의 두레농악, 축원농악 등과 교섭하면서 걸립농악으로 정립되었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 즉 사원에서 의식을 담당했던 하품잡승(下品雜僧)들은 고려시대까지 사원 소속이었으나, 조선시대 이후 가장 먼저 쫓겨나 인근을 돌며 걸식하게 되었다. 범패, 염불, 법고, 바라 등 가무희의 명수였던 이들은 자신들의 연희에 농악을 결합해 연행물화 했다. 재승들의 걸립농악은 정초에 승려들이 마을로 내려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법고(法鼓)에 맞춰 염불(念佛)을 독경(讀經)하고 망령(亡靈)을 위로하는 중걸립 혹은 절걸립과 연관된다.
유만공(柳晩恭, 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 중 〈오월오일(五月五日)〉의 "스님들 당돌하게 성곽 길가에 자리 잡고(唐突群僧郭路邊) 요란한 북소리로 사람들을 맞이하네(迎人鐃鼓直喧天) 너도나도 염불하는 어리석은 행자들(聲聲念佛痴行) 늙은 할미들에게만 돈을 시주하라 하네(偏向婆娘覓舍錢)"라는 기록을 통해 그 실상을 살펴볼 수 있다. 걸립농악을 행하는 재승을 일러 '법고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권용정(權用正, 1801-?)은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 〈정월 십오일(正月 十五日)〉에서 "법고승은 마을의 거리에 모여 초립을 쓴 채 북과 징을 치고 푸른 깃과 종이로 만든 꽃을 비녀 삼아 꽂고 노란 장삼을 걸치고 부절을 들고 배우나 광대처럼 둥글게 모여 춤을 추면서 돈이나 곡식을 얻어 부처님께 공양한다. 혹은 야간에 징을 치고 다니면서 재미(齋米)를 구하는 것도 같은 종류이다(法鼓僧者 緇徒聚街坊 擊鼓鐃戴草笠 簪翠羽紙花 着黃衫赴節 環舞狀若優倡 乞得金穀 以供佛 或敲鉦夜行呌化齊米 亦其類也)"라 하여 법고승의 정의 및 걸립농악의 방식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재승들은 조선 초기부터 여러 유랑 광대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동놀이, 줄타기와 같은 종목도 자신들의 연행물에 포함시켰다. 범패나 법고춤 같은 불교연희 외에 농악, 무동놀이, 줄타기와 같은 연희 종목까지 다양하게 공연했는데, 무속의례인 고사(告祀)까지 지냈던 무리를 '굿중패'라고 불렀다. 최영년이 『해동죽지(海東竹枝)』 〈속악유희(俗樂遊戱)〉 「고사반(告祀盤)」 조에 "옛 풍속에 가을추수가 끝난 후에 여러 명의 중들이 변장하여 긴 장대를 앞세워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마을 집 앞에서 고사반을 빈다. 흰쌀과 흰 실을 소반 위에 가득 올려놓으면 중들이 범패를 외면서 복을 빈다. 그것을 굿중패라고 한다(舊俗秋成後 群僧 變裝建長竿於前擊鉦打鼓 乞告祀盤於村家門前 以白米白絲 豊厚盛盤 群僧誦梵祈福 名之曰굿중패)"라고 한 데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 〈굿중패노름놀고〉 등을 살펴보면, 굿중패가 머리 위에 고깔을 쓰고 있다. 이를 근거로, 오늘날 농악의 복색인 고깔이 조선시대 재승들의 복색에서 도입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점도 있다.
넷째, 조선시대 재인청 소속의 세습무계 광대나 북방 유목민 계통의 양수척, 반인, 사당, 남사당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유랑광대들이 여타의 전통연희 작품과 함께 공연했던 연예농악이다. 무당 및 무부들은 벽사축원(辟邪祝願)을 목적으로 하는 축원농악을 행했다. 이는 『총쇄록(叢鎖錄)』의 "정초에 무부(巫夫) 최한주 등이 걸공(乞功)을 했다. 예부터 연초에 화랭이(花郞)들이 풍년을 기원하고 장인의 기예를 보존케 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다(初巫夫崔漢柱等乞功歲首花郞故託穰爭持工藝也 相當最中童子尤奇 簛弄身才盖一場)"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문 광대들 가운데 농악을 가장 활발히 공연한 집단은 사당패라 할 수 있다. 사당패는 사당버꾸춤(社黨法鼓舞), 줄타기, 소리 등을 연행했다. 이후 생겨난 남사당패는 농악, 줄타기, 땅재주, 탈놀이, 인형극, 버나돌리기 등 사당패보다 많은 연희 종목을 공연했다. 그리고 이들은 농악을 연행하면서 무동놀이를 즐겨 선보이곤 했다.
개화기로 접어들면서, 기존의 농악은 근대적 연예농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남사당패의 연희 종목이었던 무동놀이는 개화기 이후 단일 장르로 독립되어, 야외공연장에서 일정한 대가를 받고 공연하는 상품으로 변모했다. 1902년에 협률사가 설립되면서, 농악은 프로시니엄식 극장 무대에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 야외에서 실내로 들어온 협률사의 농악 공연에서 가장 자주 연행되었던 것은 무동놀이였다. 남사당패는 협률사에서 무동을 삼층으로 쌓는 무동놀이를 선보여 큰 인기를 끌었다.
190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김창환 협률사, 송만갑 협률사, 김창룡 협률사, 남원 협률사, 광주 협률사, 화순 협률사 등 유랑극단 형태의 민간협률사가 크게 성행했으며, 호남 지역의 농악인들도 이들 단체에 단원으로 참가했다. 이들의 연희 종목은 길놀이와 민요 반주, 창극 공연 막간에 행해지는 설장구놀이 등이었다. 전북 김제출신의 최장원은 임방울 단체와 김연수 단체에서 설장구놀이를 선보였으며, 전남 영광의 장구잽이 김오채는 우리국악단의 김연수와 함께, 이어 임방울과 함께 전국으로 다니면서 장구 개인놀이를 연주했다. 전남 고흥의 상쇠 김광열은 조선성악연구회의 〈농부가〉 공연 및 이동백, 김창룡, 김연수, 박녹주, 김소희 일행의 일본 전국 순회공연에 반주자로 참여했다.
반주나 개인놀이 외에 판굿도 공연되었다. 전북 정읍 출신의 장구잽이 신기남은 이화중선이 조직한 남율회사의 단원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구술한 바 있다.
그때 굿허는 순서가 어떻게 됐는고니 앞과장이라는 것은 말허자먼 농악이여. 처참에 인자 저녁 먹고 취군(聚軍)을 허는디 취군은 사람을 뫼이라고 호적을 불고 뒤치배들이 나가서 치는 거여. 상쇠, 설장구는 안 나가고 그 사람들만 나가서 굿을 쳐. 치고 호적수가 나가서 불고 그러먼 손님들이 뫼야 든단 말여. 그리고 손님들이 만원될 만허먼 그때 나가. 그렁게 먼저 친 것은 공굿이여. 그리서 차례차례 질서 찾아서 딱 치먼 그게 인자 앞과장이여. 그것이 한 두어 시간 걸려. 허고 나오먼 바로 사원들이 나오지. 소리허는 사람들 말이여. 그것보고 무대과장이라고 혀.
취군(聚軍)은 근대 이후의 신파극단, 악극단, 창극단, 포장걸립농악단과 같은 유랑공연단체의 공연 전에 공연장 안팎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관객을 불러 모으는 호객행위를 의미한다. 판굿도 창극이나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전 과정을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고, 두세 번으로 나누어 공연했다. 이러한 공연형태는 가설극장 내 실내공연에 어울리게 농악의 판굿을 각색한 것으로, 전통적인 걸립농악의 판굿 공연 방식과 차이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가설극장 공연이 성행하면서, 이후 호남우도농악 판굿의 과장이 3-4개로 압축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야학경비 마련, 소방기구 구입, 불우이웃, 이재민 돕기, 교량건설 등 공공의 목적을 지닌 걸립농악이 활발히 행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걸립농악은 대개 전통적인 정월풍속인 마당밟이의 형태를 띠고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무라야마 지준이 1930년대에 전국의 민속놀이를 조사하여 펴낸 『조선의 향토오락』(1941)을 통해서도, 당시 많은 걸립농악대들이 활동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질굿, 마당굿, 조왕굿, 샘굿, 곳간굿, 고사소리 등을 조사했는데, 전북 남원 지역의 농악을 보고하며 "농악을 치는 방법으로는 길을 가다가 마당에서 치는 법, 부엌에서 치는 법, 우물에서 치는 법 등 32종류가 있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대규모 판굿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걸립농악이 비교적 성행했던 데 반해, 두레농악은 점차 쇠퇴 혹은 변질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농민들을 단합시키는 농악을 금지시켰다. 다수의 두레와 농악이 이 시기에 쇠퇴하거나 소멸했지만, 그것이 갖고 있던 사회적인 기능으로 말미암아 일제 초기까지는 그 생명력이 여전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일제가 많은 청장년층을 징병 및 징용하고, 전쟁 물자 수급을 위해 징·꽹과리·나팔과 같은 농악기를 몰수하면서, 두레농악을 이어갈 수 있는 여건 자체의 조성이 어렵게 되었다.
반면 일제는 1930년대부터 친일농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진흥회를 마을마다 설치하고, 각종 농악경연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향토오락』(1941)에서는 황해도 해주 지역의 농악대회(農桑契)에 대해, "20여 명씩으로 조직된 각 농악대가 악기(호적, 장고, 북, 꽹과리 등)를 준비하여, 수시로 연습하다가 일 년에 한 번씩 농악대회를 개최한다. 각 농악대의 기량을 비교 심사하여 등급을 정한다. 심사원은 지방의 유지들로 하고 입선한 농악대는 농기구를 상으로 받는다"라고 설명했다. '전조선 향토연예대회'와 같이 큰 규모의 대회 안에 농악이 포함되는 경우도 있었다. 동아일보 강릉지국에서 주최한 강릉농악대회에서는 식순에 황궁요배(皇宮遙拜), 전역장사(戰役壯士)를 위한 묵념, 황국신민서사 낭독, 천황폐하 만세삼창 등을 배치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발족시켰으며, 문화부장 야나베 에이자부로(矢鍋永三郞)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라는 목적을 위해 '조선의 향토오락예술 진흥'을 명했다. 손진태(孫晉泰), 송석하(宋錫夏), 이능화(李能和) 등이 이에 동조하면서, 그에 적합한 연희 종목을 보고했다. 농악경연대회를 비롯해 일제강점기 농악의 진흥은 총독부 및 당시 일간지들이 제창했던 '향토예술 및 농촌오락 진흥 모색'이라는 정책적 기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이는 식민정책을 홍보하고, 식민 통치의 강압을 무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평가된다. 또 이 시기 농악경연대회의 영향으로 농악패의 구성원들은 시공간이 압축된 인위의 장소에서 입상을 목적으로 농악을 연행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근대 농악의 정립 및 전승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농악경연대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으며, 다수의 농악단들은 포장걸립 형태로 공연했다. 1946년 5월, 미군정 하에서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도별 지역 예선을 거쳐 도 대표를 선발한 뒤, 서울 창경궁에서 본선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47년에 제2회 전국농악경연대회가 열렸고, 여기서 명성을 얻은 남성 농악인들을 중심으로 한 포장걸립농악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전문 농악인들은 다른 마을을 순회하며 그곳 마을의 구성원들과 농악 공연을 시도하고, 수많은 농악경연대회 및 각종 지역 축제나 난장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단체 활동을 지속했다.
한편 이 시기에 호남을 중심으로 각 지역에 확산되었던 여성농악단의 흥행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농악단은 1959년경 남원국악원에서 남원여성농악단이 조직되면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60년을 전후로 남원, 전주, 정읍, 부안, 김제 등 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다수의 단체가 만들어져 약 20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활동했다. 호남 지역 남성 전문 농악인들이 이루어 놓은 연예농악을 기반으로 조직된 여성농악단은, 여성들만으로 조직된 단체라는 희귀성과 우수한 공연 기량, 민요·판소리·창극·무용 등 다양한 공연 종목을 강점으로 하여 1960년대 중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여성농악단으로는 부안여성농악단, 춘향여성농악단, 전북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호남여성농악단, 정읍여성농악단, 한미여성농악단, 백구여성농악단 등이 있다. 남성 농악인들의 포장걸립농악은 여성농악단의 흥행으로 인해 점차 활동이 어렵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성농악단의 강사로 들어가는 남성 농악인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여성농악단의 흥행은 196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공연자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데 실패한 것이 쇠퇴의 큰 요인이었는데, 기존의 공연자들까지 결혼으로 인해 활동을 중단하거나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면서 더이상 정상적인 흥행이 불가하게 되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급변하는 정치 상황 및 새마을 운동의 영향으로 농악이 대중들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었고, 결국 70년대 말까지 남아있던 호남여성농악단, 아리랑여성농악단, 백구여성농악단 등이 해체되면서, 여성농악단은 완전히 소멸하게 되었다.
1978년 '사물놀이'라는 단체가 창립되면서 농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마을농악과 별개로 농악을 연행하던 전문 유랑공연집단의 후예들로 조직된 '사물놀이' 단체의 공연은 대중들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고, 이후 '사물놀이'라는 단체명이 농악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바뀔 정도로 그 반향은 매우 컸다. 그동안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던 농악 명인들의 다양한 가락이 사물놀이의 등장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는 농악의 음악적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발휘한 여러 개의 사물놀이 악곡으로 집중되었으며, 사물놀이 창시자들은 상모놀이, 진법, 연풍대, 두루걸이 등으로 농악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도 했다. 사물놀이는 국내의 대중적인 인기를 기반으로 해외 활동도 펼쳤다.
그리고 1970년-1980년대에 이르러 호남지역의 마을농악이 민중문화운동의 주요한 수단으로 채택되면서, 전국의 대학생 풍물패, 노동현장, 재야문화운동단체 등을 중심으로 농악의 전수 및 공연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민중문화운동 진영에서는 농악을 학습·보급하고, 공연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모색·정립하고자 했다. 다수의 농악 동호인들이 생겨난 것도 이 시기 특징이다.
1990년대 이후 탈냉전, 탈이데올로기의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농악을 주제로 한 연구나 공연도 이데올로기적 편향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현재 전국 각 지역에 위치한 농악 전수관을 중심으로 대중강습과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농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제11-1호에 진주삼천포농악(晋州三千浦農樂), 제11-2호에 평택농악(平澤農樂), 제11-3호에 이리농악(裡里農樂), 제11-4호에 강릉농악(江陵農樂), 제11-5호에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峯農樂), 제11-6호에 구례잔수농악(求禮潺水農樂)이 지정되어 있다. 여러 지역의 농악이 추가적으로 문화재에 지정되면서, '제11-가호'로 고유번호를 부여하던 것을 '가호', '나호', '다호'와 같은 한글 부호 대신 '1호', '2호', '3호' 등의 숫자 표기로 변경했다. 시·도무형문화재로는 경기에 제20호 광명농악·제46호 양주농악, 강원에 제15호 평창 둔전평농악·18호 원주매지농악, 충북에 제1호 청주농악, 대전에 제1호 웃다리농악, 경북에 제4호 청도차산농악·8호 금릉빗내농악, 부산에 제6호 부산농악, 경남에 제13호 함안화천농악, 전북에 제7-1호 부안농악·7-2호 정읍농악·7-3호 김제농악·7-4호 남원농악·7-5호 진안농악·7-6호 고창농악, 전남에 제6호 화순한천농악·제17호 담양우도농악·제27호 고흥월포농악·제35호 곡성죽동농악·제40호 진도소포걸립농악, 광주에 제8호 광산농악이 지정되어 있다.
내용 및 특성
농악의 형태적 공연요소는 치배와 치배 편성, 복색 및 기구, 악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농악대는 기본적으로 꽹과리·징·장구·북의 사물(四物)과 기(旗)대, 소고, 잡색, 나팔(새납을 포함) 등으로 편성되며, 그 조직은 대개 농기(農旗) 1인, 영기(令旗) 1인, 쇠 2인, 징 1인, 장구 2인, 북 2인, 소고 8인, 그리고 무동·중·각시·양반·대포수(또는 총잽이) 등의 잡색으로 구성된다. 이 중 농기, 영기, 새납, 사물을 일컬어 '앞치배'라 하며, 주로 연주를 맡는다. 소고(법고)와 잡색들을 '뒷치배'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대개 춤이나 극적인 놀이를 한다.
그러나 치배의 편성은 농악의 종류 및 지역별 농악대의 성격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두레농악에 비해 걸립농악의 편성이 다양하고 화려한 편이며, 지신밟기나 두레농악을 할 때는 주로 사물과 소고 위주의 간소한 편성을, 판굿을 할 때는 본격적으로 두루 갖춘 편성을 한다. 구성원들의 배역에 해당하는 잽이의 호칭도 지역 및 농악단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또 농기는 모든 지역의 농악 편성에서 나타나지만, 영기는 경상도 지역 농악에 없는 경우도 있다. 호남 지역의 농악은 쇠·장구·소고·잡색 중심의 편성인데 비해, 영남 지역의 농악은 징·북·소고가 중요한 기능을 맡는다. 무동은 경상도 지역 농악에 거의 보이지 않으며, 경기·충청 및 영동 지역의 농악, 전북 남원과 전남 진도 지역의 농악에 주요한 배역으로 등장한다. 호남 지역의 농악에서는 가면을 쓴 잡색, 1인 2역의 가장(假裝), 동물가장(動物假裝)이 존재하며, 영광농악의 잡색들은 나무로 된 가면을 쓴다.
농악대의 맨 앞에는 농자천하지대본기(農者天下之大本旗) 즉 두레기(旗)의 깃대가 선다. 농기의 호칭은 지역에 따라 농상기, 용당기(龍幢旗), 용기(龍旗), 덕석기, 성황기(城隍旗), 낭기 등으로 다양하다. 명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농기는 기본적으로 마을굿이나 무당굿의 신기(神旗) 혹은 신(神)대와 관련이 있다. 신대는 신목(神木)에서 분화된 것이며, 신기는 신대에서, 농기는 신기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농기를 가지고 집돌이를 하는 것은 신체(神體)를 모시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행위로, 여기에는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는 신앙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두레농악의 농기에 대해서는 풍우(風雨)를 조절하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다. 실제로 청룡과 황룡이 비를 내리며 하늘로 승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농기도 있다.
영기는 지역에 따라 군기(軍旗), 법기(法旗), 음양기(陰陽旗), 남성의 청기(靑旗)와 여성의 홍기(紅旗), 장군기(將軍旗) 등으로 불리는데, 농악을 진행할 때 지휘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당산굿을 할 때는 영기가 당산 입구에서 문을 잡아 잡귀의 침입을 막으며, 걸립패가 마을로 들어가며 문굿을 할 때는 마을 입구에서 영기로 문을 잡는다. 신령기(神令旗)로서의 영기에 잡귀를 막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전북 지역의 보매기굿에서는 농악대와 좌상(座上)의 감독 하에, 물꼬에 영기를 꽂고 그 순서대로 물을 대도록 한다. 여기서 영기는 법기로서의 기능을 지닌다. 또 판굿에서 진(陳)풀이를 할 때는 군령의 전달과 진군(進軍), 방어와 같은 군진법(軍陣法)을 수행하는 군기의 역할을 한다.
화주(化主)는 농악대의 총무로, 화주(花主)라고도 한다. 화주는 걸립을 할 때, 집주인으로부터 곡식이나 돈을 받는 역할을 맡는다. 『삼국유사』 「죽지랑」 조에 '화주(花主)'가 화랑집단의 통솔자라는 의미로 쓰인 예를 근거로, '화주'라는 말의 어원을 낭걸립의 화랑(花郞)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상쇠는 농악 가락을 대원들에게 전달하며 농악을 총지휘하는 대원이다. 축원농악에 해당하는 마을굿에서는 제관을 맡으며, 집돌이로 지신밟기를 할 때는 고사창을 하고, 판굿에서는 진풀이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농악 위주의 당산제로 마을굿을 거행하는 호남 및 영남 지역에서는 상쇠가 가지는 신관(神官)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잘 나타난다. 상쇠는 주술적 능력을 지닌 무관(巫官)이자 농군악(農軍樂)을 지휘하는 군관으로 여겨졌다. 상쇠를 따르는 쇠잽이로는 상쇠, 부쇠, 중쇠, 끝쇠 등이 있으며, 상쇠를 비롯한 모든 쇠들의 기능은 잔가락 연주에 집중된다. 그러나 개인놀이에서는 대무(對舞)를 맡기도 하며, 진풀이에도 앞장선다. 부쇠는 상쇠의 가락을 받아 착실히 연주하는 한편, 그 가락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징잽이는 징수라고도 부르며, 농악의 원박을 맞추어 주는 역할을 한다. 전란시에는 신호용으로 징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장구잽이는 설장구, 부장구, 삼장구, 끝장구 등으로 구성되며, 쇠와 함께 섬세한 가락을 연주하는 역할을 한다. 설장구는 개인놀이를 할 때 춤을 추며, 장구잽이 전원이 대무(對舞)를 하며 흥을 돋우기도 한다. 북잽이는 징과 함께 원박을 치면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며, 지신밟기에서는 반주를 맡는다. 설북꾼과 북잽이들이 집단적인 춤을 추기도 하는데, 이것이 과거 신고(神鼓) 혹은 군고(軍鼓)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고잽이는 지역에 따라 법구, 소고 등으로 불리며, 상법구(수법구)나 중법구(부법구) 등으로 위계를 나누기도 한다. 큰 소고는 원박과 엇박을 연주하며, 농사일을 할 때의 두레농악에 주로 쓴다. 작은 소고는 춤만 추는데, 주로 채상모놀이춤에서 사용하고 때에 따라 열두발상모를 맡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소고잽이가 춤을 추어 멋을 부리는 '농사풀이'라는 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잡색의 기본적인 배역에는 무동을 비롯해 대포수(총잽이 또는 초랭이), 각시, 양반, 중(또는 조리중), 화동(花童) 등이 있다. 잡색은 주로 농악 사이사이에 재담과 놀이를 벌이거나 춤을 춤으로써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전남 지역 농악에서는 말, 소, 곰, 호랑이, 닭 등의 암컷과 수컷이 나와 서로 애무하고 성행위를 하는 듯한 동작을 하는 잡색놀이가 연행되는데, 이러한 동물가장춤에는 여성의 다산과 농경의 풍요를 축원하는 의미가 있다. 강원·충청 및 경기 이천 지역의 농악에서는 집돌이에서 거북놀이가 성행했는데, 이때 거북은 집주인에게 장수와 복을 주는 동물이라 할 수 있다.
농악대의 무동은 마을의 상징인 신동(神童)에 해당한다. 대포수는 지방에 따라 '대포수(大砲手)' 또는 '대포수(大捕手)'로 불린다. 탈춤의 총잽이는 동물을 잡는 사냥꾼으로 분장하고 나와 총으로 양반들을 겨누지만, 농악에서 대포수가 총을 쏘는 것은 액풀이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호남 지역에서는 농악의 잡색놀이가 유난히 발달되어 있지만, 민속극으로서의 가면극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농악의 잡색놀이와 민속극으로서의 가면극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농악의 복색은 쇠복 또는 쇠옷이라고도 부르는데, 초기에는 광목 또는 무명저고리와 바지, 짚신 차림에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문적인 걸립농악의 영향을 받으면서 농악대의 패장들이 지위에 따라 각기 다른 복색을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농악에 해당하는 두레농악의 복색은 비교적 소박하며, 직업적인 농악단의 복색은 화려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농악의 오락·예술적인 면모가 점차 강조되면서, 농악의 복색도 전반적으로 화려하고 다양한 모양새로 변화되고 있다. 농악의 복색이 변화하게 된 요인으로, 포장걸립농악단이나 여성농악단과 같은 연예농악단의 영향 및 각종 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한 경험 등을 꼽을 수 있다.
상쇠는 농악단의 지휘자로, 옷이나 장식품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일례로 이리농악의 상쇠는 양팔 소매에 깐치동으로 색동을 댄 검은색 혹은 빨강색의 창옷에 흰 바지저고리를 입는다. 등에는 황, 홍, 청의 삼색드림을 하고 허리에도 삼색띠를 맨다. 머리에는 부포(꽃상모)가 달린 전립을 쓴다. 지역에 따라 상쇠의 등 혹은 복색의 앞뒤 가슴에 일월을 상징하는 둥근 거울이나 쇠붙이를 2개 붙이는데, 이는 상쇠의 지위와 위엄을 나타낸다. 두레농악의 상쇠는 전립 대신 고깔이나 흰 머리띠를 쓰고, 흰 옷을 입는다. 강원도 고성 지역의 농악에서는 상쇠가 쾌자를 입기도 한다. 다른 쇠잽이들의 복색도 상쇠와 유사하나, 상쇠에 비해 장식이 없는 편이다. 이른바 '가세침복'이라 하여, 청색띠를 허리에 감고, 오른쪽 어깨에 황색, 왼쪽 어깨에 적색띠를 두른다. 모자는 전립이나 고깔을 쓴다. 징잽이의 복색은 쇠잽이와 비슷하며, 전립 대신 패랭이나 고깔을 쓰는 차이가 있다. 장구잽이나 북잽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고잽이의 복색은 종이로 만든 꼬리가 달린 채상모를 쓰는 경우와 고깔을 쓰는 경우로 나뉜다.
농기를 드는 농기수는 흰 옷에 패랭이 또는 꽃수건, 고깔 등을 쓴다. 삼색띠를 허리에 두르거나 매어 장식하며, 걸립농악의 경우에는 먹장삼과 홍잠삼을 입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 농기 대신 생목(生木) 가지에 방울과 백지, 실, 헝겊을 매단 신대를 사용하는 곳도 있으며, 대부분은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글씨를 쓴 농기를 든다. 농기는 대나무로 되어 있으며, 두레패 농악의 깃대가 걸립패 농악에서 쓰는 깃대보다 긴 편이다. 깃대의 꼭대기에는 꿩장목으로 깃봉을 다는데, 지역에 따라 꿩장목 대신 생목가지, 짚으로 만든 유지지, 시누대 잎 등을 달기도 한다. 김제나 익산 지역의 용기나 광양, 보성, 여천 지역 등의 덕석기에는 용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농기는 풍우를 조절하는 주술적 기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영기를 드는 기수의 복색도 농기수의 복색과 비슷하다. 지역에 따라 쾌자나 더그레를 입는 경우, 상모 없이 전립을 쓰고 꽃두건을 쓰는 경우가 간혹 있다. 영기의 색깔은 흰 바탕에 흑색으로 '영(令)'자를 넣고, 깃발은 흑색을 비롯해 청홍(靑紅)으로 한 것, 바탕을 청홍으로 하고 '영'자를 흰색으로 한 것이 있다. 영기의 기폭은 사각형이나 삼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더러 역삼각형 형태도 보인다.
잡색 중 무동은 고깔을 쓰고 남쾌자를 입는 것이 보통이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다. 강릉농악의 경우에는 붉은 치마와 노랑 저고리에 남색 쾌자를 걸치고, 색띠를 매며, 손에 수건을 든다. 고깔에는 얇은 종이를 백·청·황·적, 여러 색으로 물들여 만든 꽃을 30-40개가량 빽빽하게 단다. 대포수의 복색은 일정하지 않으나, 어깨에 총을, 등에 꿩이나 토끼 가죽 등을 망태에 담아 메는 것은 공통적이다. 양반은 두루마기나 흰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갓 또는 정자관을 쓴다. 밀양 지역의 가짜 양반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 꽃을 달기도 한다. 각시의 복색은 저고리와 치마로 구성되나, 초록 저고리에 빨간 치마, 노랑 저고리에 빨간 치마, 흰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 등으로 그 색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중은 눈이 찢어지고 흉한 가면을 쓰기도 하나, 대개 장삼에 송낙(또는 조리)을 쓰고 허리에는 바랑을 진다. 짚으로 엮어 만든 송낙의 꼭대기에 꽃을 길게 달기도 하며, 손에 목탁과 나발을 드는 경우도 있다. 창부(倡夫)의 복색도 화려한 편이다.
김제 지역의 두레농악에서는, 벼슬을 하고 금의환향할 때 쓰는 '어사화(御史花)'를 꽂은 모자를 머리에 쓴 창부가 춤을 춘다. 이리농악에서는 창부를 화동이라고도 하는데, 흰 바지저고리에 노란색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는 역시 어사화를 꽂은 패랭이를 쓴다. 할미광대는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얼굴에 광대탈을 쓰며, 머리에는 수건을 쓴다. 등에 헝겊 등을 넣어 곱추 모양을 하고, 손에 부지깽이를 짚는다. 나팔수는 대체로 평복을 입지만, 지역에 따라 검은 더그레에 짧은 상모를 단 벙거지를 쓰는 경우가 있다. 또는 흰옷에 더그레를 입고 어깨와 허리에 삼색띠를 두른 뒤, 머리에 꽃수건을 쓰기도 한다. 새납의 복색도 나팔수와 비슷한데, 고깔을 쓰는 차이가 있다.
농악에 쓰이는 악기에는 꽹과리를 비롯해 징, 장구, 북을 포괄하는 사물(四物)과 소고, 나팔, 호적 등이 있다. 과거 절걸립을 할 때 바라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꽹과리 즉 쇠는 음색에 따라 높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숫쇠와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암쇠로 나뉜다. 상쇠는 이 중 숫쇠를 치는 것이 상례이다. 징에도 암징과 숫징이 있으며, 그 음이 세 번 파동을 치며 울린다고 한다. 북은 이전에 대북·중북·소북의 셋으로 나누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체로 같은 크기의 북을 쓴다. 영남 지역의 농악에 쓰이는 북이 조금 크고, 호남 지역의 농악에 쓰이는 북이 조금 작다. 장구의 채편에는 암소리가, 궁채편에는 숫소리가 난다. 소고 가운데 법고라고 부르는 큰 소고는 소리가 고우며, 작은 소고는 춤 도구로 사용된다. 나팔에는 나무로 만든 것과 쇠로 만든 것이 있으며, 역시 저음과 고음을 내는 암컷과 수컷으로 한 쌍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호적은 흥을 돋우는 악기로, 새납, 태평소, 날나리라고도 부르는데, 오래 전에는 호적에도 암수가 있었다고 한다.
농악의 내용적 공연요소는 음악, 무용, 연희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농악에 쓰이는 장단을 쇠가락이라고 하며, 쇠가락의 명칭에는 '채' 혹은 '마치'라는 말이 붙어있다. 농악의 삼채굿, 오채질굿, 길군악칠채 등에서 볼 수 있는 '채'라는 말은 '두드리다'나 '때리다'라는 뜻의 '치다', '차다'에 유래한다. 농악의 외마치, 두마치, 세마치, 잦은마치, 단마치 등에서 볼 수 있는 '마치'라는 말은 '겨냥하여 때려 맞힌다'는 뜻의 고어 '마치다'의 명사형인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길굿장단을 제외한 농악 대부분의 장단은 3분박 4박자가 기본형이며, 장단 중 비교적 빠른 것은 판소리나 산조에 쓰이는 자진모리형 장단으로, 흔히 삼채굿(세마치) 또는 덩덕궁이라고 한다. 조금 느린 것은 판소리나 산조의 중중모리형 장단으로, 흔히 굿거리라 부른다. 자진모리형 장단에서 더 빨라지면 자진가락, 세산조시, 다드라기 등으로 불리는 닷모리 장단이 된다. 자진모리장단에서는 흥겹고 구성진 춤을 추며, 굿거리 장단에서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춤을, 닷모리 장단에서는 활기차고 격렬한 춤을 춘다.
농악의 기본은 쇠, 징, 장구, 북의 연주로 다양한 가락을 만들어 흥을 돋우는 데 있다. 상쇠가 새로운 가락을 짜서 부쇠에서 주면 부쇠가 그것을 받아치고, 동시에 설장구도 같이 응하면서 가락이 연주된다. 그러나 상쇠는 가락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을 안배하거나, 가락을 맺고 푸는 역할만 할 뿐, 자신은 지휘를 하거나 춤을 추기 때문에 실질적인 가락 연주는 주로 부쇠가 맡는다. 섬세한 가락은 이처럼 쇠와 장구가 주고받는 형태로 연주되며, 징은 주박을 치고, 장단을 맺으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북도 징처럼 주박을 치면서 흥을 돋우고, 소고는 원박과 엇박을 번갈아 친다.
농악의 춤에는 쇠꾼이 추는 부포놀이춤과 발림춤, 장구잽이들이 추는 설장구춤, 북꾼들의 춤, 소고잽이가 추는 긴춤과 채상모놀이춤, 잡색인 무동들의 긴춤과 여타의 잡색들이 추는 허튼춤 등이 있다. 또 농악의 춤을 상모놀이 위주의 빠른 윗놀이춤과 손짓 발짓 위주의 느린 밑놀이 춤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쇠꾼들의 춤은 주로 판굿에 등장하며, 쇠발림이라고도 부른다. 농악을 진행할 때 하나의 신호로 추기도 하고, 농악꾼들이 개인놀이를 할 때 이를 유도하기 위해 추기도 하나, 판굿의 개인놀이 때 상쇠 한 사람이 부포를 놀리는 부포놀이춤, 꽹과리채를 들고 추는 긴춤, 부쇠 혹은 쇠꾼 전원이 대무(對舞)하면서 추는 부포놀이춤이 본격적인 형태이다. 부포놀이춤에서는 쇠꾼들이 부포를 세워 다양한 원을 그리는 동작인 목놀이가 특히 돋보인다. 목놀이로 인한 부포의 움직임은 전령(戰鈴)의 신호나 꽃모양, 황새의 걸음, 남자의 성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장구춤은 설장구춤이라고도 한다. 본래 호남 지역의 농악에서 개발된 것이나, 이후 전 지역의 농악으로 확산되었다. 장구를 왼쪽 허리에 띠로 동여매고 추는 발동작 위주의 춤으로, 손짓춤은 장구를 치며 간간이 한다.
북춤은 북을 힘차게 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춤으로, 본래 신을 부르는 의미가 있었다. 북춤은 첫 박에 북판을 힘차게 치고, 다음 박에는 북테를 치는 등 철저하게 원박에 맞춰 추는 남성적인 영남형과 북판과 부게를 번갈아 치되, 북 치는 가락이 섬세하고 다양하며 유연한 호남형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외북채를 치면서 북춤을 추나, 전라도 진도나 경상도 금릉·김해 지역에서는 쌍북채를 치면서 북춤을 춘다.
소고춤에는 채상모를 돌리면서 추는 채상모소고춤, 소고놀이를 하면서 추는 고깔소고춤, 소고잽이들이 집단적으로 하는 놀이춤 등이 있다. 소고놀이춤에 등장하는 주요한 춤사위는 소고를 머리 위로 뒤집어 올렸다가 엎어서 몸 앞으로 내리는 동작이라 할 수 있다. 소고놀이춤에는 물푸는 동작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일동작과 사물의 모방동작이 많이 나타나는 편이어서, 이로부터 농경모의의 흔적을 찾기도 한다. 채상모소고춤에서는 고갯짓 즉 목놀이를 위해 작은 소고를 사용하며, 호남 및 경남 지역의 농악에 특히 발달된 형태로 나타난다. 고깔소고춤에서는 고갯짓을 하지 않으므로 큰 소고를 쓰며, 이것을 두드려 소리내기도 한다. 고깔소고춤은 호남 지역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이밖에 잡색들의 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춤사위가 두드러지는 것은 무동춤이라 할 수 있다. 호남 지역의 무동춤에서는 놀이성이 강한 무동타기가 주축을 이루는데, 이를 신동(神童)의 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단적으로 쾌자자락을 날리며 추는 무동춤은 불교적인 나비춤에 가깝다. 농악꾼 두 사람이 허수아비로 만든 무동(舞童)과 무녀(舞女)의 인형을 어깨에 올리고 인형의 팔에 줄을 연결해, 마치 인형이 춤추는 것처럼 연출하는 무동춤도 있다. 또 대포수, 각시, 중, 양반 같은 잡색들의 춤은 배역에 따라 풍자적이고 연극적인 형태를 띤다. 농악의 춤에는 농악대원의 춤은 물론 구경꾼들의 춤도 포함된다. 농악의 판굿에 춤판이 벌어지면, 지켜보던 이들도 나와 보릿대춤, 절굿대춤, 홍두깨춤, 몽둥이춤과 같은 허튼춤을 자유롭게 추었다.
농악에서의 놀이로, 열두발이나 되는 긴 상모끈을 앉거나 누운 자세로 돌리는 열두발상모놀이, 무동이 농악꾼의 어깨 위에 올라가 곡예를 하는 무동타기, 소고잽이들이 여러 가지 농경모의를 행하는 농사풀이, 상쇠의 지휘에 따라 여러 행진놀이를 하는 진풀이 등을 들 수 있다. 열두발상모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주로 걸립농악에서 행해진다. 무동타기는 평택농악과 강릉농악에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소고잽이들이 집단적으로 춤을 추며 행하는 농사풀이는 주로 영동농악과 영남농악에서 볼 수 있다. 판굿에서는 진풀이가 특히 중요하며, 다른 놀이에 비해 역동적이고 전투적이다. 각 지역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진풀이에는 군진법을 비롯해 진(陳)싸기, 멍석말이(나선형), 삼방진, 사방진, 오방진, 미지기 등이 있다.
농악 가운데 잡색은 연극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밀양농악의 잡색에서는 대포수, 하동(가짜양반), 사대부의 세 사람이 투전을 소재로 잡색놀이를 벌인다. 통영농악과 예천통명농악의 잡색에서는 양반, 각시, 포수가 등장한다. 판굿의 극놀이로, 적군의 첩자를 색출하여 체포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김제농악의 일광놀이, 김제농악과 임실필봉농악, 화순한천농악의 도둑잽이가 있다.
농악은 그 형태와 목적에 따라 마을농악, 걸립농악, 판굿으로 나눌 수 있다. 마을농악에는 당굿을 비롯해 대동적인 성격의 우물굿, 지신밟기와 마당밟기를 포함하는 집돌이, 비를 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기우제굿, 음력 10월에 당산에 금줄을 치고 농악을 울리며 제사를 지내는 당산굿, 음력 섣달 그믐날 밤 벽사진경을 위해 행하는 매굿, 무당과 농악대가 함께 풍어와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배굿(선창굿 또는 서낭굿), 풍년기원굿에 해당하는 벼가래굿 등과 같은 축원농악이 있다. 또 모내기두레와 김매기두레, 보매기굿, 풀베기, 들법고, 백중놀이굿, 기맞이굿 등 농사일과 결부된 두레농악도 마을농악에 포함된다. 특정한 의식 없이 마을사람들의 친목과 단합을 위해 벌이는 축제적 성격의 연예농악도 마을농악의 일종으로, 주로 판굿으로 구성된다. 오락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의 판굿은 주로 명절날이나 씨름 경기, 줄다리기, 기싸움 등을 할 때 연행한다. 마을의 농악대가 주체가 되는 호남 지역의 주당매기, 통영 지역의 액풀이굿, 진도 지역의 도깨비굿, 강릉 지역의 풍어제굿도 마을농악의 범주에 속하며, 상여 행렬이나 사냥에 농악을 치는 일도 있었다.
걸립농악은 지역사회나 특정 단체에서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직업적인 농악꾼들을 고용해 행하는 농악을 지칭한다. 걸립패에는 화주를 우두머리로 하여 승려 혹은 승려 출신의 비나리, 여성인 보살, 풍물잽이, 산이, 탁발(托鉢) 등으로 구성된 절걸립패, 당골인 모갑(某甲)이를 정점으로 해 서낭을 모시고 다니는 낭걸립패(또는 신청걸립패), 그리고 마을의 공공사업을 위해 조직하는 마을농악패가 있다.
판굿은 다양한 놀이판에서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연행되는 농악이다. 작은 규모의 판굿은 지신밟기를 할 때 같이 하기도 하나, 보통 집돌이가 모두 끝난 뒤 마을의 요청에 따라 금품을 받고 했다. 큰 판굿은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혀놓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판굿에 들어가기 전 상쇠는 그날 노는 판굿의 진행 절차와 종목을 정했으며, 대개 다양한 가락을 치는 채굿, 쇠꾼들이 열 지어 움직이는 진풀이, 쇠꾼들이 개인적인 기예를 발휘하는 개인놀이, 〈사거리〉·〈달거리〉·〈농부가〉 등을 부르는 소리굿(노래굿), 도둑잽이나 농경모의, 무동놀이, 잡색놀이와 같은 극놀이 등이 포함되었다.
역대 명 연희자
진주삼천포농악(晋州三千浦農樂)은 1966년에 중요무형문화재 11-1호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진주농악단의 상쇠로 솟대쟁이패굿을 보유하고 있었던 황일백(黃日白, 1903-1976)과 삼천포농악단의 상쇠로 걸궁패와 관련이 깊은 문백윤(文佰允, 1910-1981)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0년에는 상쇠 이영우(李永雨), 1991년에는 설장고의 박염(朴稔), 2000년에는 상쇠 김선옥(金善玉)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전수교육조교로는 소고(小鼓)의 정태수(鄭泰守)가 1991년, 설장고의 이부산(李富山)이 1992년, 수법고의 조갑용(曺甲龍)이 1994년에 인정되었다.
평택농악(平澤農樂)은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문적인 걸립패와 민속극회 남사당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평택농악을 조직한 상쇠 최은창(崔殷昌, 1915-2002)과 상법고(상버꾸) 이돌천(李乭川, 1919-1994)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2002년에는 상쇠, 법고(버꾸), 무동놀이의 기능을 보유한 김용래(金龍來, 1939- )가 추가로 인정되었다. 전수교육조교로는 법고(버꾸)의 이경일(李敬一)이 1987년, 장고의 방오봉(方五鳳)이 1991년, 법고(버꾸)의 손기영(孫基永)이 1992년, 상법고·무동놀이의 김종수와 상쇠 조한숙이 2009년, 태평소·장고의 김양원(金良元)과 쇠·장고·법고의 황영길(黃永吉)이 2012년에 인정되었다.
이리농악(裡里農樂)은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읍농악단의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이리농악단을 조직한 설장고의 김형순(金炯淳, 1933- )과 상쇠 김문달(金文達, 1903-1989)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전수교육조교로는 상쇠 박용택(朴容澤, 1952-2006)이 1988년, 소고의 양승렬(梁承烈, 1953- )이 1989년, 상쇠 이동주(李東珠)가 1992년에 인정되었다.
강릉농악(江陵農樂)은 1985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되었으며, 농악패 무동 출신으로 홍제동 농악대를 이끌다가 답교농악을 조직한 상쇠 박기하(朴基河, 1920- )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9년에는 사천면 하평농악을 이끌다 함께 답교농악 조직에 참여한 부쇠 김용현(金龍泫, 1929-2003), 2006년에는 월호평동 농악대의 상쇠 정희철(鄭喜澈, 1934- )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전수교육조교로는 두산동 풍물패의 상쇠·새납 최현규(崔鉉圭, 1919-2008)가 1987년, 저동 풍물패의 상쇠 차주택(車柱鐸, 1940- )이 1992년, 소고의 김남수(金南洙, 1955- )와 상쇠·장고의 손호의(1959- )가 2006년에 인정되었다.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峯農樂)은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으며, 1962년부터 임실필봉농악단의 수장으로 활동한 설장고의 박형래(朴炯來, 1927-2007)가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1년에는 상쇠 양순용(梁順龍, 1940-1995), 2008년에는 상쇠 양진성(梁晋盛)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이들은 전판이-이화춘-박학삼-송주호-양순용-양진성으로 이어지는 필봉농악 계보상의 전수자이다. 전수교육조교로는 장고의 박병권(朴秉權)과 상쇠 임종식(林鍾植)이 1990년, 상쇠 강재근(姜在根)이 1992년, 태평소의 양순주와 장고의 양진환이 2007년에 인정되었다.
구례잔수농악(求禮潺水農樂)은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었으며, 특정인이 아닌 구례잔수농악 보존회를 보유단체로 인정했다. 1954년부터 작성된 『농악위친계칙(農樂爲親契則)』에는 구례잔수농악의 상쇠 서학현(1889-1968), 벅구놀이의 명인 김재일(1901-1988), 부포짓의 명인 김영환(1898-1974)을 비롯해 계원 28명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상쇠 김대진(1929- )과 설장구의 이현호(1938- )가 구례잔수농악의 전승에 힘쓰고 있다.
다른 지역의 사례
농악의 전승 권역은 대개 경기·충청, 영동, 영남, 호남우도, 호남좌도 등으로 구분하며, 하나의 권역을 북부/남부 또는 동부/서부로 세분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문화의 교류가 산과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사실을 고려해, 강의 유역권별로 농악의 전승권역을 나누기도 하며, 농악을 중부 이북의 웃다리농악과 중부 이남의 아랫다리농악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호남 우도농악과 좌도농악 그리고 웃다리농악과 아랫다리농악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며, 1960년대 이후 고착된 분류 방식이다.
경기·충청 지역의 농악은 정초의 지신밟기, 여름의 두레굿, 겨울의 걸립굿에서 연행되며, 초파일에 등대굿, 단오에 난장굿을 칠 때도 있다. 이 지역 농악의 내용 및 형식은 걸립농악의 영향에 의해 조정된 측면이 있으며, 여기에 걸립패 혹은 남사당패 출신의 뜬쇠들의 역할이 있었다. 1980년대에 평택군 팽성읍 평궁리를 중심으로 경기농악단이 조직되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때 평택·안성 등지의 전문적인 농악인들이 경연대회 준비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기예가 전수되었고, 이 지역의 농악은 연예농악적인 면모를 띠게 되었다. 평택농악, 이천농악, 부여 추양농악, 대전 웃다리농악이 이 지역에 분포하는데, 이 중 최은창 명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전문연희패 농악인 평택농악은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영동농악은 농기 대신 신대를 사용하는 사례가 있고, 사물·소고·법고·무동 등 잽이들의 수가 각각 동수(同數)로 4분화되어 있으며, 머리에 쓰는 고깔에 달린 꽃의 수가 여타 지역에 비해 매우 많은 것이 특징이다. 소고잽이들이 1년 동안의 농경생활을 모의 재현하는 농사풀이나 어른 잽이들과 어린이가 함께 연행하는 삼층 무동타기도 독특하다. 강원 지역의 농악은 크게 원주, 횡성, 춘성 등지의 영서농악과 강릉, 삼척, 평창 등지의 영동농악으로 구분되는데, 영서농악이 경기농악과 유사한 반면, 영동농악은 나름의 지역적 개성을 가진다. 강릉농악, 평창 옥포농악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수차례 참가했으며, 홍제동 농악대의 박기하와 사천면 하평농악대의 김용현이 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답교농악이 198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강릉농악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여기서 강릉농악은 두산동 농악대, 월호평동 농악대, 저동 농악대, 사천 답교 농악대 등 4개 마을 농악대의 총칭이다.
영남농악은 경북농악과 경남농악으로 나뉘며, 인근 지역과의 근접성에 따라 영동농악이나 호남좌도농악, 경기·충청농악과의 유사성이 엿보인다. 판굿보다 제의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지신밟기와 같은 축원농악이 성행했으며, 대기(성황기·천왕기) 또는 신대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지신밟기가 토착화되어 있어 사설도 비교적 다양하며, 개인놀이에 비해 집단놀이가 발달하여 줄당기기·동채싸움·횃불싸움과 같은 대동놀이가 함께 연행된다. 청도 차산농악, 금릉 빗내농악, 대구 고산농악, 예천 통명농악, 부산 아미농악, 진주농악 등이 영남농악으로 분류되는데, 이 중 진주농악은 1958년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했고, 삼천포농악은 1965년 같은 대회에 참가해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이듬해인 1966년, 진주농악과 삼천포농악은 농악 부문 최초의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호남우도농악은 전라도 서부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농악을 가리킨다. 당산제와 마당밟기를 중심으로 한 축원농악, 기싸움굿·주당매기굿·화전굿·보매기굿 등의 두레농악, 걸립패들에 의한 걸립농악을 다채롭게 보유하고 있다. 꽹과리와 장구의 비중이 높은 편이며, 잡색들의 배역이 대포수·양반·각시·조리중·할미·무동·구대진사(九代進士)·참봉(參奉)·창부(倡夫)·집사·상좌·비리쇠·홍적삼 등으로 다양하다.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호남우도농악의 가락은 그 종류와 변주 양상이 매우 다채롭고 복잡한 편이다. 좌도농악에서는 부들부들한 깃털 덩어리를 단 부들상모를 쓰는 반면, 우도농악에서는 뻣뻣한 뻣상모를 썼다. 뻣상모 부포놀이, 그리고 정읍농악에서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이라는 설장구놀이도 특색 있다. 영광농악과 광산농악에서는 잡색이 나무탈을 착용한다. 김제농악, 이리농악, 영광농악, 진도 소포농악이 우도농악에 포함되는데, 이 중 이리농악은 익산 새실마을에 내려오는 마을농악의 전통을 기반으로, 김제와 정읍 등지에서 전문적인 농악을 배워온 잽이들을 받아들여 1959년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리농악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이리농악은 198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호남좌도농악은 전라도 동부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전승되어온 농악을 가리킨다. 당산굿에서 농악이 주요한 역할을 하며, 마당밟기·기굿·두레굿·걸궁굿·판굿 등이 다양하게 연행된다. 잡색의 배역과 연기/놀이가 타 지역 농악에 비해 두드러져, 대포수·양반·각시·조리중·무동·창부·농구(예비상쇠)·화동·할미·비리쇠 등이 등장한다. 이 지역 잡색극에서는 대포수-각시-조리중 혹은 양반-할미-대포수-조리중 등으로 잡색들이 서로 짝을 지어 갈등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농악 가락은 우도농악에 비해 빠르고 거친 편이나, 영남농악보다는 느리다. 개인놀이보다 집단놀이, 밑놀이보다 윗놀이가 발달된 것이 특징이다. 임실 필봉농악은 1974년 제1회 전북농악경연대회와 198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장원을 수상하고,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남 구례읍 신원리 신촌마을에 전승되어온 구례 잔수농악은 당산제와 마당밟이 위주의 마을농악으로, 좌도농악 특유의 가락 구성을 갖추고 있으며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순 한천농악, 여천 백초농악도 이 지역에 분포한다.
인접 국가 사례
농악은 고대 사회의 제천의식(祭天儀式)과 구나의식(驅儺儀式),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산악(散樂) 백희(百戲) 등의 전통연희,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불교행사, 두레를 중심으로 한 공동노동의 습속 등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악가무희(樂歌舞戱)로, 그 형태 및 목적에 따라 마을농악, 걸립농악, 판굿으로 구분할 수 있다. 마을농악에는 벽사진경을 목적으로 연행했던 축원농악, 피로를 덜고 일의 능률을 높이거나 두레패 행사의 일환으로 연행했던 두레농악, 명절이나 대동놀이판, 난장 등에서 연행했던 연예농악 등이 포함된다. 걸립농악은 굿중패(절걸립패), 낭걸립패(신청걸립패), 마을농악패 등이 기금 마련을 목적으로 연행했던 농악이며, 판굿은 전문적인 연희패가 밤새 다양한 형태로 판을 벌였던 오락연예적인 농악이다. 농악은 이러한 성립 배경 및 유형의 측면에서, 중국의 앙가(秧歌)와 앙가희(秧歌戱), 일본의 덴가쿠(田樂),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가믈란(Gamelan)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중국의 앙가는 명절이나 민간의 각종 행사에서 행해지는 모든 민속놀이를 총칭하는 광의의 앙가 즉 '요앙가(鬧秧歌)'와, 주로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행하는 민속놀이 가운데 한 종목을 가리키는 협의의 앙가로 구분된다. 한국의 농악과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이 중 협의의 앙가이다. '앙가'는 농부가 모를 심거나 들에서 노동하면서 부르던 노래라는 의미로, 중국 북방지역에 주로 전승되었다. 중국 청(淸)나라 때 굴대균(屈大均, 1630-1696)은 『광동신어(廣東新語)』에서 "농부들은 매년 봄이면 수십 명 단위로 부녀들이 밭으로 가서 모내기를 한다. 나이 든 이가 큰 북을 치면 북 소리 장단에 맞춰 무리들이 노래하며 모내기를 하는데,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이것을 앙가(秧歌)라 한다"라고 하여, 앙가의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앙가는 가창의 형태는 물론, 각종 배역에 맞게 분장하고 춤을 추는 형태 또는 서사가 있는 이야기를 연출하는 극의 형태로도 연행되었다.
앙가의 기원으로 언급된 송대의 촌전악(村田樂)부터가 농부 분장을 한 연희자가 도롱이에 풀로 짠 삿갓을 쓰고 춤을 추는 방식이었으며, 청대의 항조분(項朝棻)은 『앙가시서(秧歌詩序)』에 파계승, 난봉꾼, 화고(花鼓)잽이, 납화(拉花)잽이, 농부, 고기잡이 여자, 멍청이 장사꾼이 등불로 장식된 거리를 활보하면서 구경꾼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극적인 앙가 연행의 장면을 묘사하기도 했다. 앙가는 점차 양식적으로 발달하게 되면서, 맨 땅에서 공연되는 도보앙가(徒步秧歌, 지앙가(地秧歌)라고도 부름)와 다리에 긴 막대를 묶고 공연하는 고교앙가(高蹺秧歌)로 분화되었다. 역할에 따라 분장한 앙가의 연희자들이 노래하고 춤출 때 연주되는 악기는 북, 징, 태평소 등으로, 이들은 한국의 농악에서도 주요하게 사용되는 악기이다. 또 농부나 농사일을 소재로 한 앙가는 우리의 두레농악에 비견되며, 분장한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극 양식의 놀이는 잡색놀음을 연상케 한다.
한편 앙가의 연행을 살펴보면, 걸립농악 및 축원농악적 면모도 발견된다. 기록에 따르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역귀(疫鬼)를 몰아내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구걸할 때에는 연화락(蓮花落)이나 앙가와 같은 소곡(小曲)을 불렀다고 한다. 또 매년 음력 설날의 행사 전에 앙가대(秧歌隊)가 신회(神會) 회장(會長)의 인솔 하에 신묘(神廟)를 알현한 뒤, 다음날 집집마다 다니면서 길상(吉祥)과 평안을 기원하며 신년을 축하하는 '연문자(沿門子)'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는 농악대의 지신밟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덴가쿠는 모내기를 비롯한 농사일을 하면서 흥을 돋우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노래와 춤을 연행했던 연희이다. 『에이가모노가타리(栄花物語)』에는 1023년 5월, 죠우도우몽인쇼우시(上東門院彰子)가 궁중의 논에서 모심기가 행해지는 장면을 구경한 소감을 "덴가쿠라고 해서, 이상한 모양의 북을 허리에 차고 피리를 불며, 사사라(ささら)라는 악기를 연주했고,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춤을 추었으며, 이상한 옷차림의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기분 좋은 모습으로 10명 정도가 지나갔다"라고 남겼다. 모심기를 하는 중에 연희자들이 북과 피리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두레농악의 연행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
『타이헤이키(太平記)』에는 덴가쿠가 가장 성행했던 14세기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출가승이 술에 취해 추는 춤이었으므로 풍류에도 맞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신자(新座)·혼자(本座)의 덴가쿠 전문가 10여 명이 홀연히 나타나 가무를 함께 했으며, 그 흥이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 어느 사람은 주둥이를 둥글게 해 마치 솔개의 모습과 같았으며, 어느 사람은 몸에 날개를 달아 마치 야마부시(山伏)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류이형(異類異形)의 귀신이 사람으로 둔갑한 것처럼 보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1332년 교토에서 덴가쿠가 매우 유행하면서 그 연행계층이 승려 및 전문 연희자에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승려의 덴가쿠 연희는 굿중패의 농악, 신자와 혼자의 전문 예인들에 의한 덴가쿠 연희는 전문 광대패의 연예농악과 비교될 만하다. 그리고 후자의 덴가쿠 연희자들이 분장을 하고 여러 대상을 흉내 낸 것은 농악의 잡색놀음과 비슷하다. 한편 『니혼키랴쿠(日本紀略)』의 998년 기록에 의하면, 마츠노오진쟈(松尾神社)의 축제날, 야마자키(山崎)에서 온 나루터 사람들이 덴가쿠를 공연했다고 한다. 야마자키의 덴가쿠 연희자들은 전문적인 연희패로, 축제 행사에 초청될 만큼 기예가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사당패나 남사당패와 같은 전문적인 유랑 광대패도 외부의 초청에 응해 장소를 이동하면서 농악을 연행한 바 있다.
인도네시아의 가믈란이란 자바어로 망치를 뜻하는 '가믈'에서 유래된 말로, 이것은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가운데 슬링(Suling)이라는 관악기가 곁들여지는 합주음악이다. 북이나 장구와 같은 타악기가 주축이 되고, 태평소와 같은 관악기가 따르는 농악의 형태도 이와 흡사하다. 다만 태평소를 제외한 농악의 악기가 모두 무율(無律)타악기인데 반해, 가믈란에서는 북 이외의 다른 악기들이 유율타악기이다. 농악과 가믈란 모두 즉흥 연주의 특성을 띠며, 농악에서는 쇠잽이인 상쇠가, 가믈란에서는 북 연주자가 지휘자의 역할을 맡는다. 한편 가믈란은 마을의 공동제의 또는 오락행사로서의 와양쿨릿(그림자연극)에서 연행된다는 점에서, 당굿 또는 대동놀이에서 행해지는 마을농악과 기능적으로 유사하다.
한편 농악의 주요 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 나팔 등은 우리 문화와 밀접한 교접이 있었던 중국 문화권이나 실크로드 문화권 등에 존재하는 민속악기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농악에 쓰이는 장구는 인도의 다마루(Damaru)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징은 자바의 공(Gong)이나 태국의 콩(khong)과 모양이 비슷하다.
의의
정월의 동제를 비롯해 줄당기기, 차전놀이, 석전과 같은 연초 행사, 오월의 단오놀이, 여름의 모심기·김매기 두레 및 백중놀이, 8월의 추석, 12월의 매구 등에 이르기까지, 농경사회에서 농악은 일 년 내내 생활예술로 자리잡고 있었다.
농악의 기능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 볼 수 있다. 첫째, 풍년과 벽사진경, 마을민들의 무사태평과 평안을 기원하는 의례적 기능이다. 농악은 제의적 기능을 지니는 공공의례로, 이러한 기능은 마을굿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둘째, 마을민들이 함께 모이는 놀이나 행사에 흥을 돋우는 기능이다. 농악이 곁들여질 때, 대동적인 성격의 놀이나 행사도 더욱 신명나게 즐길 수 있다. 셋째,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 힘을 돋우어 주는 기능이다. 두레농악은 마을민들의 생업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생산을 촉진시키는 역할도 한다. 넷째, 걸립농악이나 지신밟기에는 부의 재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걸립농악이나 지신밟기 중에 이루어지는 추렴과 식리(殖利)를 통해, 부의 재분배가 실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농악은 오랜 세월을 거쳐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전승·연행되어 왔으며, 이미 전통예술로는 물론 대중문화로서도 그 기반을 확고히 다진 민속연희라 할 수 있다. 제의성과 놀이성 그리고 연극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행 현장의 구성원들에 의해 집단적으로 향유된다는 점도 농악의 중요한 특징이다.
한편 농악에서는 음악적·무용적 요소의 축과 연극적·놀이적 요소의 축이 각각의 핵심적인 공연의 구조와 문법을 형성한다. 이 두 개의 축은 농악의 연행 과정 내에서는 물론, 농악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교차 또는 경합·공존하면서, 농악의 표현 형식과 표현 내용, 그 성격과 의미를 규정해 왔다. 음악적·무용적 요소들은 가락과 연주법, 각 공연자들의 춤과 율동·너름새 그리고 해당 신체의 움직임 등을 발달시켰으며, '사물놀이'의 공연 양식은 음악적 요소가 가장 극대화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연극적·놀이적 요소들은 뒤치배나 앞잽이로 불리는 잡색들에 의해 구현되는데, 이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인물이나 대상의 성격을 해석하고, 농악의 연행 속에서 극적인 이야기를 구성해 구경꾼들과 소통한다. 예를 들어 잡색으로 등장하는 양반광대가 양반의 행동과 표정 그리고 분위기 등을 재구성하여 극적으로 재현하는 행위는, 함께 판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집단 심성과 인식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컨대 농악은 농경사회에서 생활예술로 자리 잡으며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는바, 음악적·무용적·연극적·놀이적 요소의 적절한 교직 혹은 결합을 통해 그 사회적·문화적 의미가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