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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D-13 ]
<D-13>은 전 세계를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몰아넣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기지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을 당시 대통령 특별 보좌관이었던 케니 오도넬의 시각으로 본 1962년 10월22일부터 11월2일까지의 13일간 벌어졌던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입니다.
제작진은 치밀한 연구와 고증 그리고 생생한 인터뷰 자료를 모아 당시의 현실을 완벽히 재현하여 영화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입니다.
총 8천만 달러의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이 영화는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필리핀 정글 속에 쿠바 미사일 기지와 美 공군본부를 다시 세웠습니다.
그리고 U-2 정찰기와 폭격기, 항공모함과 잠수함 등 실제 무기와 병력을 동원해 일촉즉발의 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당시 美 정찰기가 발견했던 65피트의 소련제 핵미사일(S4 Missiles)을 완벽히 재생해내 마치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LA 타임즈, 뉴욕 타임즈, 워싱턴 포스트 등 미 저명언론들은 <D-13>을 역사를 새롭게 재현한 지적이고 강렬한 드라마라고 치켜세우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긴박했던 백악관 내부 상황을 짧고 굵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브루스 그린우드 분)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스티븐 컬프 분), 그리고 대통령의 친구이자 보좌관이었던 케네스 오도넬(케빈 코스트너 분)이 극을 이끄는 주요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소련의 미사일 뿐 아니라 백악관 안에서 전쟁을 충동질하는 군부와 대립각을 세웁니다.
몇 장면을 제외하면 액션도, 전투 장면도 없지만 탁월한 각본과 연출로 긴장의 끈을 능수능란하게 밀고 당기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급격하게 변하는 국제 정세와 미국의 정치 상황이 적절히 병렬되면서 현실감을 더하고 있으며, 케네디 형제와 오도넬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드라마적 요소 또한 잘 버무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D-13>은, 3차 대전 발발 직전이라는 특정 상황을 헐리우드 스타일로로 이렇게 저렇게 다듬어서 잘 빚어낸 영화라는 평입니다. 깨알 같은 유머와 가족애 따위의 헐리우드 영화의 필수적인 양념을 곳곳에 버무려 놓은 것도 눈에 띕니다.
* 아래 당시 맥나마라 국방장관
피그만 침공 사건, 중간 선거 등 케네디 대통령이 직면하고 있었던 다른 정치 문제들은 산만하지 않을 정도로만 언급하는 선에서 가지치기를 했습니다. 왜곡이나 미화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영화의 깔끔함에는 크게 한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지 W.부시 미대통령은 취임 이후 백악관에서 처음 관람하는 작품으로 <D-13>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쿠바 및 러시아에서 특별 상영되는 이례적인 행사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습니다.
* ExComm회의(비상대책회의)
특히 쿠바에서는 그 당시 역사적 인물이었던 카스트로 위원장과 당시 사건을 책임지었던 정부 인사들이 동석했고, 그곳을 방문한 배우 케빈 코스트너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공식적으로는 처음 쿠바 땅을 밟은 미국 배우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국제 평화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이 영화가 상영되었으며 러시아 정부 관계자 美 무기전문가의 참석아래 당시까지도 존재하는 지구상의 핵무기 위기를 반추해보는 토론을 갖기도 하였다는 후문입니다.
*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가 분한 케네스 오도넬은 누구인가?
아일랜드 혈통의 케네스 오도넬은 영화 속처럼 케네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버드 재학 시절, 로버트 F. 케네디와 동급생으로 만나면서 케네디가와 인연을 맺었고 이후 존 F. 케네디의 상원의원 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도 참가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 집무실과 사무실이 직접 연결이 되어있을 정도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고 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62년 10월 16일, 쿠바 상공을 정찰하던 미군 정찰기가 미사일 기지 건설 현장을 포착합니다. 그 곳에 배치되고 있는 미사일은 얼마 전 소련이 대외적으로 공개하였던 신형 중거리 핵미사일이었고, 이것이 배치 완료된다면 쿠바의 위치 특성상 5분이면 미국 본토까지 도착하였기에 큰 위협일수밖에 없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과 그 동생 로버트 케네디, 그리고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은 비상 대책위를 소집해 대책을 강구하지만 내부에서도 그 의견이 엇갈립니다. 군부, CIA 등은 명백한 도전 행위로 간주하고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 왼쪽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가운데 케네디 대통령, 오른쪽 케네스 오도넬 보좌관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자칫 양측이 상대의 의도를 오판하면 3차 대전까지 갈 수 있었기에 신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미국이 어느 쪽으로 행보를 결정하던 간에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완성되기 전에 정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도 촉박하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되도록 평화적인 방안을 찾아보라는 말에 국방 장관이 제시한 의견은 해협 봉쇄. 함대를 동원해 소련에서 쿠바로 들어가는 일체의 군수물자 유입을 막음으로서 미국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외교적 협상으로 해결을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군부는 상황을 악화시켜 전쟁 쪽으로 끌고 가려는 의도인지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쿠바에 정찰기를 투입합니다. 만약 이 정찰기가 격추될 경우 전쟁은 피하기 어려웠기에, 오도넬은 이번 임무를 수행하게 될 조종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귀환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 뜻을 이해한 조종사는 임무 수행 중 총격을 받아 기체의 날개에 구멍이 난 것을 새떼랑 부딪쳐서 생긴 거라고 얼버무리면서 상부에 보고합니다.
군부의 돌발 행동으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이 일촉즉발의 타이밍에 남태평양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합니다. 전쟁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고, 오도넬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가족에겐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연락합니다.
UN 정상 회담에 나간 미국 측 대표는 소련 측 대표를 몰아붙이며 국제적인 여론을 미국 온건파의 의견 쪽으로 기울게 함으로써 약간씩 희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 사이 쿠바 봉쇄를 지휘하던 장군은 대치하던 소련 화물선을 향해 공포탄을 발사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지시는 자신이 허가하기 전까진 일체의 발포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공포탄은 실탄이 아니란 이유로... 혹시 소련 쪽에서 공격으로 보고, 맞대응을 하지 않을까 싶었으나, 다행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돌아가는 소련 선박
소련 흐루쇼프 서기장도 압박을 받고 있는지 개인적인 라인을 통해 협상 여지를 타진해옵니다. 미국이 터키 미사일 기지를 포기하는 대신 소련도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키는 것으로 정리가 되는 듯 하였으나, 소련 쪽에서도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협상이 다시 백지화됩니다.
미사일 기지에 대한 타격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되어가자 군부는 타격을 대비하여 저공 정찰을 시행합니다. 하지만 그 조종사가 격추 당함으로써 전쟁의 위기는 한발 더 가까워집니다. 그러다 극적으로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추가해서 소련 측과 협상에 성공하여 사태가 막판에 타결이 이루어집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 정부 사에 핫라인이 개설됩니다.
* 이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
What kind of peace do we seek?
I am talking about genuine peace, the kind of peace that makes life on earth worth living.
Not merely peace in our time, but peace for all time
Our problems are man-made, therefore, they can be solved by man.
For, in the final analysis, our most basic common link is that we all inhabit this small planet.We all breathe the same air.We all cherish our children's future.
And we are all mortal.
우리가 찾고자 하는 평화는 어떤 종류의 평화입니까?
저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에게 가치있는 삶을 부여하는 진짜 평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 시대의 평화만이 아닌 영원한 평화
우리들의 문제는 사람이 일으킨 것이므로 사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가장 기본적인 공통점은 우리 모두 이 작은 행성에 살고 있고, 우리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시며, 우리 모두 아이들의 미래를 소중히 하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죽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 쿠바 미사일 위기 ]
* 배경
1962년 당시 미군이 보유한 소련에 투발 가능한 핵전력은 미 본토에서만 탄도탄 170여 기에 B-52 전략폭격기 555대였습니다. 투발 가능한 전략핵탄두만 총 1,830기. 여기에 서유럽에는 중거리 핵전력까지 배치되며 소련 영토를 사거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소련이 가진 건 고작 66기의 ICBM과 SLBM 뿐. TU-95 전략폭격기를 동원해도 차이가 커도 너무 커서 선제 핵공격을 통해 미국을 제압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소련은 얼마 안 되는 핵무기를 다 사용하고 나서는 미국이 두들기면 두들기는 대로 그냥 맞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련 붕괴 후 밝혀진 당시의 핵전력 비율은 17:1로, 답이 안 나오는 막장 파워 밸런스였습니다.
게다가 미국은 터키와 이탈리아에도 주피터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터키에서는 모스크바를 사거리 안에 두고 있었습니다. 반면 소련으로선 중/단거리 탄도미사일로 미국 본토 타격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소련 정부와 흐루쇼프 서기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새로 대통령으로 당선된 케네디를 애송이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여겼던 흐루쇼프는 그와의 첫 회담에서 그를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위협했고, 소련의 미사일과 핵 공격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미국과 마치 한 판 붙을 것과 같은 자세를 취했습니다. 허장성세였던 겁니다.
한편 소련에 대한 정보를 잘 알지 못했던 미국은 정작 소련의 핵전력이 미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우월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는 소련이 쏘아올린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지속적인 소련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이 설마 소련 바깥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도발적인 전략을 취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소련이 동독에 준중거리 미사일과 핵탄두를 배치했던 전례를 볼 때 이는 터무니없이 안일한 생각이었습니다.
* 아나디르 계획과 쿠바 미사일 기지 건설
"쿠바를 보호하는 것 외에 우리 미사일은 서방이 '힘의 균형'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것을 대등하게 만들 것입니다. (...) 그들은 적의 미사일이 당신을 겨냥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니키타 흐루쇼프, 1962년 간부회에서 발언.
쿠바 혁명 정부의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혁명 성공 이후 여러 서방계 자본을 추방하고 토지를 국유화하는 등, 미국이 중남미에 다져놓은 정책적 기반을 뒤흔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정부는 CIA를 통해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제거를 시도했고, 피그만 침공을 진행하는 등 쿠바에 대한 미국정부의 물리적 경제적 압박이 이어졌습니다. 쿠바정부는 피그만 침공(아래에서 설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미국에 제대로 한방 멕였습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세계최강국 미국의 앞마당에 있는 현실상 미국을 혼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압박해 오는 미국의 위협에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바깥 기둥을 마련하고자 소련에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소련의 흐루쇼프도 서방 압박용으로 시도했던 61년 베를린 위기와 장벽설치가 오히려 케네디 등 서방국가들을 단합시키는 결과만 가져왔다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이후 엄청난 투자를 했던 핵미사일 사업도 생각보다 효과가 미미해서 장거리 탄도미사일 생산이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던 차에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카리브 해의 긴장이 고조되고 카스트로로부터 협조 용청이 답지하자 흐루쇼프는 얼씨구나하고 쿠바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공산주의 확산이란 세계적 목표를 바탕으로 쿠바를 지원해야 한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쿠바 침공이 임박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거기에 소련 지도부, 엘리트,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비롯한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와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고, 이들 제3세계 혁명가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까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들이 깔리면서 소련과 쿠바 사이에는 긴밀한 비밀 연락이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쿠바는 자신들 영토 내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쿠바는 미국에서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말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쿠바의 요청이야말로 소련의 치명적인 핵전력 열세를 일거에 평형 상태로 바꿀 수 있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이미 대량 생산된 중거리 탄도탄을 쿠바에 배치해 미국에 대한 추가적 공격 수단을 갖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던 겁니다.
흐루쇼프는 1962년 5월 21일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단박에 결정하였고, 간부회는 이 결정을 만장일치로 승인했습니다. 카스트로와 흐루쇼프는 1962년 7월 7일에 공식적으로 핵미사일 기지 건설에 합의합니다.
이 계획은 서방을 속이기 위해 마치 시베리아에서 벌어지는 작전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시베리아의 아나디르 강의 이름을 따서 아나디르 계획이라 불렀습니다. 이후 쿠바에 사정거리가 미국 동남부에 달하는 R-12 미사일과 여기에 탑재할 핵탄두를 9월 8일과 16일에 나누어서 보내주고, 이어서 당연히 미사일 기지를 설치할 전문 인력과 장비를 배달합니다.
이 미사일 기지는 총 9개의 사일로를 가졌는데, 이 중 6개는 R-12를 위한 사일로이고 나머지 3개는 이후 설치될 R-14용 사일로였습니다. R-14는 미 본토 전역에 핵 타격이 가능한 미사일이었습니다.9월 말, 미국 신문들은 소련 선박이 쿠바로 무기를 이송 중이라고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케네디는 국민들에게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 무기들은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그 발표가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케네디는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거대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 영화에서...
* ExComm(Executive Committee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비상 대책 위원회) 소집
그렇게 기지가 건설되던 중 1962년 10월 14일, 쿠바의 하늘을 감시하던 U-2기가 찍은 항공사진 몇 장이 펜타곤과 백악관에 전달됐습니다.어이없게도 소련 군부의 호언과 달리, 소련군 미사일 기지들의 위장 수준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농촌 도로에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다니고, 텐트들이 군 시설처럼 열과 오를 딱딱 맞추고 있었던 데다가, 부대의 상징 등을 땅에 그려놓은 걸 항공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촬영된 것은 소련이 쿠바에 건설 중인 미사일 기지 및 관련 시설이었습니다. 이후 반나절 안에 모든 미군 병력에 비상경계가 발령되면서 소련제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사거리가 계산된 보고서가 만들어졌습니다. 백악관과 펜타곤을 비롯한 미국 조야는 북미항공우주방위사령부가 그린 가상 전황도를 보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쿠바가 중심이 된 붉은 원은 말 그대로 미국 전역을 덮고 있었습니다.이미 배치된 R-12로도 수도인 워싱턴 D.C. 타격이 가능한 데다 R-14로는 워싱턴 주와 캘리포니아 일부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 지역이 사정권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련 극동 지방의 미사일도 고려하면 사실상 태평양의 섬들을 제외한 미국 전 영토가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즉시 비상대책위원회(ExComm)를 소집했습니다. 여기에는 린든 B. 존슨 부통령, 로버트 F. 케네디 법무장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더글라스 딜론 재무장관, 존 맥콘 CIA 국장,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 특별보좌관, 시어도어 소렌슨 특별보좌역, 케네시 오도넬 보좌관 등의 쟁쟁한 인물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책을 논의하였으나 의견들이 엇갈렸습니다.군부는 이를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폭격이나 미사일로 쿠바의 발사 시설을 날려버리는 방안이 최선이라고 왕왕 댔습니다. 특히 공군을 대표하는 커티스 르메이는 여러 루트를 통해 전면적인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과 쿠바를 초토화해서 아예 이들 국가들을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리자고 떠들어댔습니다.
후술되는 케네디의 비밀 녹음에 의하면 르메이는 회의에서 뮌헨 협정을 거론하며 케네디 대통령의 온건책을 비판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르메이의 이런 공박에도 일단 참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르메이는 이후 대통령이 자리를 떠난 이후에도 다른 군 장성과 실컷 대통령을 씹어댄 것이 비밀 녹음에 모조리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케네디의 민간 국방 전문가들은 미국인들이 놀랄 만큼 핵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보호 시설은 도시들에만 존재할 뿐이고, 시골에는 약간의 혹은 거의 아무런 보호 시설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골 지역에 5천만 명이 살고 있고, 도시 거주자들도 2~3백만 톤의 TNT의 파괴적인 위력에 직면해서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인류의 생존이 걸린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온건파는 다른 방안이 나올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케네디는 이 때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그 배경을 바탕으로 한 바버라 터크먼 여사의 유명한 역사소설 <8월의 포성>을 읽은 터라, 사소한 행위가 얼마나 쉽게 대규모 전면전으로 갈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바바라 터크먼 여사가 인류를 구한 것일 수 있었습니다 CIA의 보고 직후에는 ExComm 내부에서 폭격밖에 답이 없지 않느냐는 매파가 한때는 우위인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CIA가 찍어온 사진이 ExComm에 전달되었을 때,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의 첫 반응은 "이런 XXX들이"였고, 이후에도 공습을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매파의 강경책은 쿠바에 소련의 전술핵이 없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게 나가더라도 최소한 쿠바만 피해를 본다는 논지였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대로 쿠바에는 R-12 미사일과 함께 핵탄두가 충분히 배치되어 있어, 쿠바는 공격받을 경우 워싱턴 D.C.를 시작으로 미국 남동부와 중부의 주요 도시를 핵미사일로 날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ExComm 회의에서는 수도를 시애틀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는 후문입니다. 이후 묵인, 전면 침공, 공습, 회유 등의 갖가지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케네디는 봉쇄를 선택하게 됩니다.
다만 봉쇄(Blockade)라는 용어는 그야말로 전시에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는 검역(Quarantine)으로 선택했습니다. 케네디가 쿠바를 봉쇄하기로 생각을 정한 계기는 공군에서 공습을 하더라도 "90% 이상의 미사일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보고해 왔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 때 회의 내용을 몰래 녹음했습니다. 녹음 파일이 담기는 장치는 백악관 지하실에 있었고, ExComm 회의가 열리는 탁자 밑에 녹음기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케네디는 자신만이 아는 버튼을 통해 녹음을 키고 끌 수 있었습니다.
연필꽂이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케네디가 이렇게 비밀 녹음 장치를 둔 이유는 이전 피그만 침공 당시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참모들이 막상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들 딴소리들을 한 것에 대해 열불이 났었기 때문이었습니다.실제로도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녹음본이 공개되기 이전까지,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발언 취지를 바꾸면서 발언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로버트 케네디였습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는 ExComm 회의 당시 비둘기파보다는 매파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것이 녹음본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로버트 케네디는 처음 사진을 보았을 때 불 같이 욕을 해댔습니다. 로버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자신의 책에서도 자신이 매파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취지로 서술했습니다. 미국 대중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던 로버트의 증언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케네디가 형제들이 비둘기파였고, 나머지 관료들이 매파인 것처럼 인식이 되어 왔습니다.
이는 영화 <D-13>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실제 녹음본에서는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비둘기파였습니다. 물론 케네디 대통령도 처음 쿠바 미사일 배치 정보를 접했을 때 경악과 분노를 담아 이렇게 외쳤습니다. "흐루쇼프 그 자가 나에게 이럴 순 없어!"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TV와 라디오를 통해 소련이 미국 전역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건설 중이라고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전 세계의 정부와 언론들은 쿠바에 시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시설의 철거를 요청했지만 누구도 흐루쇼프가 순순히 물러서리라 보지 않았습니다.
* 치킨 게임
사실 22일의 케네디의 비난 성명에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쿠바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소련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거래를 할 것이라고 여겼고, 10월 21일까지도 소련 지도부는 이 환상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10월 21일,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소련의 '배신'을 공개적으로 규탄하고 나설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고 소련 지도부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상황이 '비극적'이 되었다고 간주했습니다. 소련 군부는 미국이 핵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고, 흐루쇼프는 핵 없이는 쿠바의 멸망을 막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소련 군부는 미국이 쿠바를 공격하면 전술핵무기 차원의 반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무상이었던 미코얀은 전술핵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핵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며 반대했습니다.
동요하기 시작한 흐루쇼프는 플리예프 장군에게 어떠한 핵무기도 사용하지 말라는 지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말리노프스키 국방상의 주장으로, 소련 해군은 핵탄두를 장착한 4척의 잠수함을 쿠바 해안에 접근시키기로 하였습니다. 10월 23일, 흐루쇼프는 케네디 형제가 겁에 질려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10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군에 데프콘3을 발령했습니다. 아울러 항공모함 8척을 포함, 무려 90척의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쿠바의 모든 영해를 봉쇄시켰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카리브 해로 미사일기지 건설 자재를 싣고 오는 모든 선박에 대한 강제 수색 명령을 내리고만약 전략 물자가 발견된다면 압수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를 거부할 시 격침시키라는 초강수를 둡니다.여기에 맞서 흐루쇼프는 미국의 쿠바 봉쇄를 "공해상 항행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제법 위반이자 해적 행위"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미사일 부품과 기술자를 태운 자국 선박에게 미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핵잠수함 6척의 호위 하에 쿠바로 강행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에 미 해군은 P-3 정찰기와 순양함을 급파했고, 동시에 즉시 보유한 모든 핵전력에 비상대기 명령을 하달, 주요 전략폭격기에 핵탄두 탑재 준비를 마쳤으며, 탄도미사일들은 발사 준비 절차에 돌입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NATO에도 비상이 걸리고, 동독과 서독은 물론이며 소련과 미국의 군사력이 맞닿는 모든 곳에서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상황. 인류멸망의 제3차 세계대전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네디의 초강경한 입장은 형식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명령에 불응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선박은 격침보다 나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도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봉쇄를 뚫고 지나간 선박들도 많았고, 흐루쇼프가 되돌린 선박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 미국의 방어망(검색선)
미 해군과 마주치기 직전 방향을 돌린 선박들 중 상당수가 미사일을 탑재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흐루쇼프 입장에서도 무력 충돌은 피하고 싶었거니와 자국의 최신 무기 체제인 핵미사일을 적의 수중에 넘겨줄 리가 없었던 거지요.
당시 소련 선박들은 핵잠수함의 근접 호위를 받고 있었으며 실제 격침은 고사하고 소련 선박에 사격이라도 했다간 바로 대규모 전쟁으로 번질 만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후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대서양에서 자칫하면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었던 대규모 핵잠수함 추적을 벌인 앤더슨 대장과 심한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한편 24일 전략공군사령부의 토머스 S. 파워는 합동참모본부의 지휘 아래 데프콘2를 발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단계의 경계태세인 준전시태세가 선포된 것입니다. 이에 따라 1,400대가 넘는 전략폭격기와 134기의 ICBM 전체에 비상이 걸렸고 B-52가 하루 평균 75회나 출격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10월 25일 UN에서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히 소집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미국 측 대사 스티븐슨은 쿠바에 배치된 소련 탄도미사일의 정찰 사진을 공개하면서, 소련 측 대사 조린에게 "귀하는 쿠바에 귀국의 탄도미사일이 배치 중임을 인정하시오? 통역 기다릴 것 없이, 예/아니오로 대답하시오(Yes or no? Don't wait for the translation: yes or no?)"라고 강하게 몰아붙였습니다.
이에 조린은 "여기는 미국 법정이 아니오. 검사가 범죄자를 취조하는 듯한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소"라고 응수했습니다. 이에 스티븐슨도 지지 않고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귀하의 대답을 기다리겠소(I am prepared to wait for my answer until Hell freezes over)"라고 다시 맞섰습니다.
유럽각국의 수도에서는 10월 24일 밤부터 25일에 걸쳐 반전론자들의 데모가 벌어졌으며, 런던의 대사관 앞에서는 성조기가 불태워졌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전시에 대비해 사재기 열풍이 불었습니다. 당사자인 미국인들은 더욱 절박해졌습니다.
공포분위기가 미국 사회를 휩쓸었고, 학교마다 “나는 죽기 싫어”라고 외치면서 흐느끼는 학생들의 울음소리로 술렁거렸습니다. 작가 노먼 메일러는 훗날 이때를 회상하면서 “온 세상이 벼랑 끝에 선 기분을 느꼈고...건물을 지날 때면 내가 저 건물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고 썼습니다.
* 영화에서...
* 검은 토요일
10월 26일에서 27일을 거치는 새벽, 카스트로는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에 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고 흐루쇼프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또한 자국군에게 미국 정찰기를 지체없이 격추시킬 것을 명령했습니다. 카스트로는 위기를 통제하고자 했던 흐루쇼프와 생각이 달랐습니다. 여기에 미국 군부가 군사 시설에만 핵공격을 퍼부어서 전쟁할 수 있다는 새로운 핵전쟁 교리를 들고 오자, 흐루쇼프는 자신의 핵 벼랑 끝 전술이 더는 먹히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미국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될 판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간부회에서 미국의 목표가 사람들이 핵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 영화에서...
한편 26일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미리 예정되었던 아틀라스 로켓 ICBM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데프콘 3이 발령된 상황에서 주변 ICBM에는 핵탄두가 장착되고 있었습니다.
태평양으로 발사될 예정이었던 이 미사일에는 핵탄두가 장착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소련이 이 발사를 포착하여 핵공격으로 간주했다면? 아찔한 순간들이 이어졌습니다.마침내 소련 시각 28일, 미국 시각 27일 오후 미국의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 양측 전투기들이 비통상탄두 미사일(일반 폭약 탄두가 아닌 탄두, 즉 핵무기를 뜻한다)을 탑재하고 날아올라 대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다행히 U-2가 소련 영공을 벗어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쿠바 영공의 다른 U-2 정찰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고, 같은 날 쿠바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미군 전투기는 대공포 사격을 받았습니다.이 때 양측 수뇌부는 이 상황을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U-2 정찰비행은 위 ICBM 시험발사와 같이 위기 발생 직전에 잡은 일정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뒤늦게 이를 안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노발대발하며 모든 비행 일정을 취소시켰습니다. 양측 전투기가 수칙에 따라 핵미사일을 탑재하고 이륙하여 대치했다는 사실은 양측 수뇌부 모두 상황 종식 이후에나 알았습니다.
* 영화에서...
또 다른 U-2 격추는 크레믈린이 아닌 소련군 일선 지휘관의 결정이었으며, 크레믈린 역시 상황이 끝난 이후에나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막장의 절정.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최고지도부들이 최일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쿠바 상공에서 U-2가 격추된 순간 미 수뇌부는 당장 쿠바를 침공해야 한다며 격노했으나, '24시간 동안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고 정하고 어찌어찌 용케 참았습니다.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날 저녁을 기억합니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 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 공포에 질린 것은 미국 수뇌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련 역시 공포에 질렸습니다. 모스크바의 중앙당 관리들은 가족들을 시골로 대피시키느라 소동을 벌였고, 난데없이 모스크바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을 본 지방 관리들도 사태의 추이를 알게 되자 경악하였습니다. 소련 곳곳에서 미친 흐르쇼프가 엄청난 혼란 속으로 자신들을 몰고 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10월 28일, '소련이 선제 핵공격을 했다!'는 경보가 북미방공사령부(NORAD)에 울려 퍼졌습니다. 플로리다로 핵미사일이 날아온다는 경고가 울린 것입니다. 워낙 급작스런 일이라 다들 한방 맞았구나 싶어 대통령에게 보복 핵공격을 건의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미 핵폭발로 사라졌어야 할 도시에서 "별 일 없는데요?"라고 해서 조사했더니 핵공격을 대비한 자체 훈련 프로그램으로 인한 오보였습니다. 사태 파악이 늦었으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핵전쟁이 터질 뻔했던 것입니다.
* 영화에서...
* 철수
결국 핵전력은 물론 봉쇄를 돌파할 만한 재래식 해상전력조차 없었고, 끝까지 가면 국가 멸망을 피할 수 없던 소련의 현실로 인해 흐루쇼프가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에게 터키에 배치한 미국의 중거리 탄도탄의 철수를 조건으로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하지 않겠다는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공식 루트가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언론플레이로 의심했고, 또 동맹국 터키의 안전보장 문제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그 제안을 거부합니다.그러나 미국의 의심과는 달리 흐루쇼프의 제안은 진짜였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제안을 한 이유 역시 경악스러운데, 이때 양국 간에 핫라인이 없어서 전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암호화하여 보내고 다시 이를 해독하고 또 통보하는 시간 등등을 합치면 거의 하루가 날아갑니다.
게다가 그 전보가 진짜로 상대국의 국가원수에게서 온 건지도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때 흐루쇼프는 두 번 전보를 보냈는데, 미국은 이게 정말 흐루쇼프가 보낸 건지 고민했습니다. 3차대전의 위기에서 양국 수뇌 간 의사교류에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려 문제가 더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라디오였던 겁니다.
흐루쇼프는 10월 28일을 기하여 선단에 회항 명령을 내리고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로서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인 끔찍한 핵전쟁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게 됩니다.
* 후일담
소련은 약속대로 선단을 회항시키고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시켰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했던 카스트로는 격렬하게 항의했으나, 인류가 절단 나느니 동맹국 하나 잃는 게 낫다는 논리에 따라 깔끔하게 씹혔습니다. 대신 경제지원이 늘어났지만...
그러나 쿠바는 냉전 내내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소련의 경제지원을 마구 퍼먹는 애물단지로 변합니다. 쿠바는 미국의 경제제재로 경제가 어려운 데다 소련에게 줄 수 있는 건 설탕, 럼주,시가,용병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쿠바에 대한 무력침공을 하지 않을 것을 소련에 약속했으며, 흐루쇼프가 10월 27일에 제안한 대로 터키에서 자국의 핵미사일을 철수시켰습니다. 터키 역시 자국의 안전 보장이 흔들린다며 항의했으나, 역시 3차대전 앞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대신에 터키를 위해서 지중해에 SLBM 탑재 잠수함이 배치되었습니다.이후 미소 양국은 위기 동안 양측 수뇌 간에 부정확한 의사소통이 있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양국 정상 간에 핫라인을 개설했습니다. 피그만 침공으로 타격을 입었던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강인한 지도력으로 전 미국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흐루쇼프는 훗날 회고록에서 “나는 가면무도회에서 방귀를 뀌었다고 해서 자살이나 하는 차르 시대의 장교가 아니다.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후퇴하는 것이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후퇴를 생각하지 않았던 카스트로는 이런 타협에 욕설을 퍼붓고 벽을 발로 차며 거울을 내던지면서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10년 후 대통령 후보였던 맥거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흐루쇼프보다 더 강경노선을 취할 수도 있었다. 그가 타협했을 때는 격분했지만, 흐루쇼프가 노련했고 현명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가 케네디와 멋진 화해를 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지도 모른다.”
반면 흐루쇼프는 미국에 너무 질질 끌려 다녔다고 비판받았고, 공산권 내에서 소련의 위신이 실추되었습니다. 결국 흐루쇼프는 2년 뒤인 1964년 10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투표를 통해서 쫓겨나고 브레즈네프가 당 총서기로 취임합니다.
[ 피그만 침공 사건 ]
이 사건은 1961년 4월 15일. 냉전시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미국 지원 하에 쿠바 반공 게릴라들이 벌인 쿠바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쿠바 망명자들을 훈련시켜 쿠바에 상륙, 게릴라전으로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그야말로 수년 전 쿠바 혁명군이 벌였던 쿠바 혁명의 재탕을 노린, 나름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 사로잡힌 침공군
원래는 아이젠하워 정권 말인 1960년 3월에 백악관과 CIA에 의해 ‘브루투스’라는 작전명 아래에서 계획되었습니다. 1,500여 명의 지원자를 모아 친미 군사정권이 있던 과테말라의 비밀 캠프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해 5월에 일어난 U-2기 격추 사건으로 인해 흐루쇼프에 의해 스타일을 왕창 구긴 아이젠하워는 실행 의욕을 잃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이 대신하여 진행하였으나 정권 말기라 그 이상의 물리적 행동은 어려웠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훈련 중이던 1,500여 명의 게릴라는 그대로 실미도 꼴이 나는가 싶었으나, 이 작전에는 이미 CIA는 물론, 국무성과 펜타곤까지 개입된 상태였습니다. 모아놓은 전력이 아까웠던 것입니다. 결국 실패의 가능성이 없다는 미국 최고의 CIA, 대통령 보좌관 등 소위 유능한 엘리트들의 의견에 의해서 작전은 재추진됩니다.
신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는 잘못하면 외교적으로 리스크가 크게 벌어질 이 계획을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험 많고 노회한 전임자 아이젠하워에 비해 믿음직스럽지 못한 애송이라는 이미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뭔가 확실한 정치적 업적을 필요로 했습니다.
결국 그는 쿠바에 침공군이 상륙하면 쿠바 국내의 호응이 있을 것이란 CIA의 위의 호언장담과 설레발만 믿고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불과 대통령이 된 지 4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을 거라는 그 작전에는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침공계획은 처음에는 소규모 게릴라를 야음을 틈타 쥐도 새도 모르게 잠입시킨다는 계획이었으나 CIA를 비롯해서 이놈 저놈 참견하다 보니 사전폭격기까지 포함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까지 커져버렸습니다. 펜타곤은 미 정규군까지 동원하려 했으나 깜짝 놀란 케네디가 이것만은 막았습니다.
뭣보다 CIA를 비롯한 보좌관들이 피그만 작전이 성공한다는 근거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카스트로 정권은 생긴 지 얼마 안되어 정권이 불안하다’, 그리고 ‘이전 바티스타 정권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쿠바 혁명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니 게릴라들이 쿠바에 상륙하기만 하면 카스트로 반대파들이 반드시 봉기를 일으킬 것 등등 ’이라고 지껄여댔습니다.
카스트로 정권이 이전 부패하고 독재적이었던 바티스타 정권보다 쿠바인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는 다는 점은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사전 계획 진행도 상당히 형편 없었습니다.
작전 수개월 전에 뉴욕 타임즈가 쿠바에 대한 군사행동이 있을 것이라는 특종을 내었고, CIA 국장이 "수개월 내에 쿠바의 공산정권은 무너진다."는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릴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규모 게릴라를 끊임없이 쿠바에 침투시켜 사보타지 공작을 벌였습니다. 설령 CIA가 얕잡아 볼 정도로 쿠바 혁명정권이 허접하다 하더라도 이 정도 전조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습니다. 쿠바는 전 병력을 동원해 해안선을 철통같이 감시했습니다.
아무튼 침공 계획이 사전에 누설된 점은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CIA는 는 작전을 그대로 밀어붙였고 상륙지점도 말도 안되는 곳으로 정했습니다.
애당초 초기 상륙 지점은 피그만이 아니었습니다. 피그만은 미국과는 반대편에 접해 있으며 날씨가 거친 곳이라 상륙 작전을 펼치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고립된다면 탈출하도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거의 탈출을 못했습니다.
원래는 미국에서 가까운 트리니다드가 상륙 지점이었지만 CIA는 이 작전이 니콰라과에서 출발한 쿠바 망명 세력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엉뚱하게도 상륙 지점을 피그만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출발하면 미국이 배후로 지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전은 15일 새벽, 은폐를 위해 국적마크를 지운 A-26 공격기들이 쿠바 공군기지들을 공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줌밖에 안되는 쿠바 공군은 이로서 작살났습니다. 하지만 계획했던 2차 폭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한번 폭격한 공격기가 바로 보급하고 다시 폭격하면 뒤에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는 요상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이에 전면전을 선포하고서 전군은 물론이고 민간인에게까지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반정부인사로 지목된 10만여 명을 체포하여 구금합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피그만 침공과 더불어 반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시민들의 폭동이 벌어져야 했지만 카스트로의 신속한 판단과 행동으로 이는 사전에 차단당했습니다.
17일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상륙부대는 피그만에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쿠바군은 상륙부대의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했고 최정예 공수부대와 전차를 선봉에 세워 반격, 곧 격렬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1년 이상 훈련을 반복해 온 정예 상륙부대에게 쿠바군은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나 병력의 차는 숨길 수 없었고 미 공군과 해군은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 명령전달이 늦어지며 아예 오지도 않았습니다.
쿠바 공군은 결국 2차 공습을 면해서 살아남았거나, 망가진 기체들을 긁어모아 수리하여 출격, 중화기를 실은 수송선을 폭격하여 격침시켰고 이로서 전세는 완전히 쿠바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피그만에 상륙했던 반군은 100여 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포로로 잡혔습니다. 카스트로 정부는 곧장 재판을 통해 주동자급 게릴라들을 처형하였고, 미국은 5천3백만 달러상당의 의료품을 쿠바에 지불하고 나서야 나머지 1,113명의 포로를 석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체포되었던 반정부인사들은 이 침공을 명분삼아 숙청당했으며 오히려 카스트로 정권 더욱 공고하게 됩ㄴ니다. 한편, 이 사건으로 미국의 위협을 느끼게 된 카스트로는 소련에게 SOS를 치는데, 이렇게 해서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전 인류가 핵전쟁의 공포에 떨게 되는 <쿠바 미사일 사태>였습니다.
피그만 침공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후 케네디는 “내가 어쩌다 그런 어리석은 계획을 추진했을까”라고 한탄했습니다.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이 벌어졌을까? 이와 관련하여 예일대학의 심리학자 어비 제니스는 ‘집단사고’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즉 낙관론에 집단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이는 응집력이 강한 집단의 성원들이 어떤 현실적인 판단을 내리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 경향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미국에서 집단사고의 대표적인 경우는 바로 케네디 행정부의 피그만 침공,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 인간 피델 카스트로 ]
* 638건의 암살계획 모두 피한 '신이라 불린 사나이' 90세 일기로 타계
쿠바 혁명의 주역이자 풍운아였던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2016년 11월 25일 90세의 일기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모든 적들에 맞서서 피델 카스트로는 오랜 세월 동안 쿠바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남아 있을 겁니다. 명석하고 카리스마를 가졌던 사나이. 웅변과 여론 조종의 달인으로서 카스트로는 조그만 섬나라를 혁명의 최전선에 머물게 했습니다.
1926년 8월 13일, 카스트로는 쿠바 극동부의 잘 가꾸어진 사탕수수 농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건장하고 용맹한 전직 스페인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규모 농장과 비랑이라는 소도시의 대부분의 빌딩을 소유하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카스트로의 아버지는 공공연히 정치에 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역의 사탕수수 생산의 대부분을 손에 쥐고 소와 목재까지 거래할 정도로 부를 거머쥔 지역의 유력 인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곱 자녀들에게 가난한 사람들과 쿠바의 대지를 깊이 존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셌던 카스트로는 초등학교 시절 질이 나쁜 골목대장들에 맞서는 싸움꾼이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는 모든 운동에 특출한 기량을 선보였고 특히 야구에는 일가견이 있었습니다.
* 혁명이 성공한 후, 맨 왼쪽 카스트로, 세번째 체 게바라
카스트로는 놀라운 암기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명문이었던 예수회 학교를 같이 다녔던 당시의 급우들은 그가 별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모든 교과서들을 줄줄 외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바나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카스트로는 단시간 내에 격렬했던 캠퍼스 정치운동의 줌심인물로 떠올랐습니다. 졸업하기 한참 전에 그는 쿠바의 리더가 된다는 거대한 목표를 세웁니다. 카스트로는 1890년대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은 그의 위대한 우상이자 쿠바의 국가적 영웅인 호세 마르티의 계승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카스트로는 법대에 재학하는 동안 이미 쇠락하고 있던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바티스타의 뒤를 이을 가장 유력한 사람들 중 하나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합니다.
바티스타를 내쫓는 쿠바 혁명이 성공한 후 승리자 카스트로는 1959년 4월 17일 미국의 부통령 닉슨과의 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합니다. 닉슨의 의심스러운 질문에 카스트로는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이듬해 자신이 규정한 미국의 경제적 압박에 맞섰습니다. 카스트로는 미국 소유의 정유 시설, 설탕 정제소, 발전소, 그리고 수억 달러의 가치가 나가는 외국인 소유의 재산들을 국유화했고 이후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는 많이 완화되었지만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이후 카스트로는 유명한 피그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앙골라의 재앙에 가까운 전쟁참여, 약 12만 명에 달하는 쿠바인들의 대탈출, 심지어 소련의 붕괴도 견디고 살아남습니다. 쿠바의 경제를 지탱해주던,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소련의 원조가 끊어진 상태에서 카스트로는 1천 1백만 인구의 쿠바를 힘들게 이끌고 왔습니다.
* "날 쏠 수 없을 걸. 넌 나를 사랑하니까"
1953년 쿠바 군사정권인 바티스타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쿠바혁명의 출발을 알렸습니다. 이 습격은 실패로 돌아가면서 감옥에 갇힙니다.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라는 어록을 남기며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2년 후 바티스타 정부가 특별사면을 해주자 멕시코로 망명해 혁명가로 명성이 드높은 체 게바라와 만나 중남미 해방운동 세력을 흡수, 1959년 쿠바로 돌아와 혁명에 성공했습니다.1961년 쿠바와 남미 일대의 혁명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퍼질 것으로 우려한 미국은 쿠바에 대한 봉쇄를 강화했고 이때부터 카스트로는 공산주의로 돌아서 소련과 친분을 두텁게 다졌습니다.
* 무하메드 알리와...
카스트로는 집권 기간 동안 피그만 침공부터 미사일 위기 등 냉전시대의 도화선이 될 만큼 미국의 집중견제를 받았지만 정권을 계속 유지하며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을 친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물려줬습니다. 동생에게 권좌를 물려준 것은 라울이 혁명 초기부터 같이 행동을 해왔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입니다.
미국은 카스트로의 독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을 내리고 카스트로의 암살을 꾸준히 시도했습니다. 카스트로가 집권한 48년 동안 무려 638건의 암살을 시도한 것으로 전해지나모두 실패했습니다.
실례로 담배에 독을 묻혀 독살하거나 카스트로가 자주 마시던 밀크 쉐이크에 독약을 타기도 했습니다. 또 연인관계를 가장한 여성을 매수해 암살을 시도하고 스쿠버 다이빙 수트에 세균을 집어 넣는 등 상상초월의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 만델라와...
이에 카스트로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행사에 내보내거나 20여 곳의 은신처를 만들어 지내는 등 미국의 암살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미인계 실패 스토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미국 CIA에서 암살자로 보낸 여성이 카스트로에게 반해 실패한 것입니다. 이 여성은 카스트로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다 적당할 때 암살할 계획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나중 피델 카스트로에게 권총을 겨누었으나 피델 카스트로는 "날 쏠 수 없을 걸. 넌 나를 사랑하니까"라며 되레 자기 가슴을 권총 앞에 들이밀었습니다.
이 여성은 끝내 권총을 쏘지 못했다고 인터뷰를 통해 털어놨습니다. 훗날 카스트로는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은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카스트로는 반미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존경했습니다. 한때 에이브러햄 링컨의 영묘에 방문했고 미국의 꾸준한 위협에 "미국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숭고한 정신과 거리가 멀다"고 쏘아붙였습니다.카스트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의 긍정적인 면은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을 꾸준히 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교류협력을 넘어 안보를 위한 군사영역까지 확대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군과 자이르 부대들이 앙골라를 공격하자 앙골라 대통령 아고스티노 네토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사 개입했습니다.
특히 앙골라 내전이 끝난 후 어떠한 대가도 원하지 않았고 나미비아 독립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북한에도 형광등을 무료 지원해 주는 등 국교를 맺은 국가의 어려움을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와 달리 자신에 대한 우상화나 신격화 정책은 철저히 배제한 것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쿠바에는 체 게바라나 여타 혁명 인사들을 기념하는 동상이나 초상화 등의 기념물은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카스트로와 관련된 기념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평론가들은 이러한 이유에 대해 그의 사상이 반미와 민족주의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내립니다.또 북한 김일성 일가들이 호화생활을 누린 것에 반해 카스트로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고 국가권력을 가족에게 일임하지 않았습니다. 국가평의회 의장을 물려받은 친동생인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 당시 함께 참여한 명목으로 권력을 줬다는 평가입니다.
소련의 붕괴로 동구권이 몰락하자 카스트로 정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기본적인 사회복지시스템을 유지했고 농업 체계를 도시농업과 유기농 위주로대거 개편, 자급자족에 성공하며 정권 몰락을 막아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입니다.
특히 군비를 줄여가면서 자국민의 배급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은 1990년대 중반 일명 '고난의 행군'으로 국민 백만 명 이상을 아사시킨 북한 정권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카스트로의 부정적인 면은 역시 독재자로서 반체제 인사나 언론에 대한 탄압을 들 수 있을 겁니다.
* 혁명 당시 체 게바라와...
* 갈 사람은 언제든 가라!
카스트로는 마이애미에 있는 망명 쿠바인들에게 친척들을 미국으로 데려가도 좋다고 선언했습니다. "갈 사람은 언제든 가라!"는 거였습니다. 카스트로는 이들을 쿠바에 남은 마지막 벌레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벌레들은 가급적 쿠바를 떠나는 게 좋다고 또다시 선언한 것입니다.
곧바로 쿠바의 마리엘 항을 통해 수백 척의 배가 몰려들어 망명객들을 가득 싣고 미국 플로리다로 갔습니다. 미국 카터 대통령은 이들을 모두 '열린 마음과 열린 두 팔'로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이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습니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간청을 받아들여 카스트로가 해안선 봉쇄를 선언할 때까지 무려 12만 5,000명이 쿠바를 탈출했습니다.
그 후 또 한 번의 쿠바 탈출사태가 일어났습니다. 1994년의 이 사건은 과거와 같은 정치적 난민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쿠바의 아바나 항에서, 또는 인근의 바닷가에서 나무상자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조악한 뗏목을 타고 해류에 의지해 미국의 마이애미로 향했는데, 이들의 숫자가 약 3만 명에 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두 경우 모두 난처한 입장에 처한 쪽은 카스트로가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쿠바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반체제 인사들을 돈을 받아가며 처분했고, 미국은 수십만의 골칫덩어리를 받아들인 셈이었습니다.
카스트로는 엄청난 야구광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대학생 시절 메이저리그에 입단하고자 뉴욕양키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입단에 실패했다고 합니다. 또한 시가를 즐겨 피는 애연가였으나 말년에는 담배를 끊는데 성공했습니다.
한때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되기도 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가 친 쿠바 성향의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신빙성이 부족한 음모론으로 규명됐습니다.
* 장례 행렬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와 매우 돈독한 사이였습니다. 차베스가 대통령이 되자교육과 의료수준을 높여야 한다며 교육용 교재와 의사를 적극 지원해줬고 쿠바는 그 대가로연간 3000만 배럴의 석유를 저가에 공급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어려움을 덜 수 있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2년 전 피델 카스트로의 부고를 헤드라인 뉴스로 전하면서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 대통령 11명의 숙적'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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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ㅇ덕분에 카스트로 무바 그리고 일촉즉발의 미 소 전쟁위기 등
공부 마니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