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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알프스를 가다
매년 9. 1.이면 내가 근무하고 있는 로고스 법무법인의 창립 기념일이다. 매년 창립 기념예배와 함께 축하 행사를 가졌지만, 올해는 사무실 문을 닫고 1박 2일로 멀리 경남 양산의 통도 환타지아 리조트에서 기념 행사를 가졌다. 리조트에서는 바로 앞으로 백두대간 구봉산에서 갈라져 나와 긴 여행 끝에 이곳에 도착한 낙동정맥의 긴 장벽이 여전히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도 남쪽으로 더 내려간 낙동정맥은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에서 남해와 동해를 바라보며 발길을 바다 속으로 잠그지.
바로 앞으로 보이는 산은 영남 알프스의 영축산. 20여 년 전에 부산에 근무할 때 올라가보고는 그 동안 서울에서 멀다는 핑계로 다시 찾지 못했던 영남 알프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발길을 돌릴 순 없지 않는가? 9. 1. 아침 일찍 콘도에서 일어난다. 한부장, 박부장, 백부장님이 나와 동행한다. 같이 가기로 하였던 몇몇 분들은 어젯밤 무리하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모양.
모처럼 영남 알프스를 타는 거라 욕심내어 신불산과 영축산을 같이 타기로 하였다. 방부장님이 친절하게도 우리를 신불산으로 데려다준다. 35번 국도를 빠져나와 작천정 계곡을 올라간다. 한여름이면 이 계곡은 피서 나온 사람으로 북적댔었지. 옛 선비들이 물가 바위에 앉아 시를 짓고 놀던 곳에 세운 작천정(酌川亭)은 어디에 있었더라?
산행 출발지점인 등억리 온천지구로 들어서는데 차가 지나고 있는 도로가 도깨비 도로란다. 착시현상으로 내리막이 오르막으로 보여 도깨비 도로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도깨비 도로가 있었던가? 신혼여행 때 제주 도깨비 도로에서 그 착시 현상에 신기해하였었는데, 여기서 다시 도깨비 도로를 보는구나.
6:30경 산행 시작하여 계곡을 조금 오르니 홍류폭포가 나타난다. 폭포수가 떨어지며 무지개를 일으키기에 홍류폭포(虹流瀑布)라고 하는 모양인데, 지금은 수량이 적어 무지개는 볼 수 없다. 안내문에는 홍류폭포를 바라보노라면 이백이 장시성(江蘇省)의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지었다는 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 나오는 비류직하 삼천척(飛流直下 三千尺)의 시구를 연상케 된다고 한다. 전에 정선이 그린 그림, ‘박연폭포’를 보며 ‘비류직하 삼천척’이 떠올랐지만, 글쎄다... 지금 홍류폭포를 보면서는...
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가팔라지고, 이에 따라 우리들의 숨결도 조금씩 거칠어진다. 아침의 해가 숲속 나뭇잎 사이로 빗겨 들어오면서 바위와 나무들을 생기 있게 물들이고 있다. 나는 아침의 햇살에 숲이 살아나는 이때가 참 좋다. 사진작가들도 주로 해가 떠오르는 시간과 들어가는 시간에 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하지 않는가? 아침의 햇살에 깨어난 뱀이 우리를 보고 급히 숨는다. 까만 몸통에 하얀 테를 머리에서 꼬리까지 규칙적으로 두르고 있는 너의 이름은 무엇이니?
길은 더욱 가팔라지기만 하지 조금도 숨을 돌릴 여유를 주지 않는다. 박부장이 점점 쳐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한참 기다리고 있는 동안 도착한 박부장은 급히 쫒아오느라 오바이트까지 하였단다. 이런! 박부장더러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오르라고 하며 우리는 다시 출발한다.
갑자기 눈앞의 나무들이 사라지고 널따란 바위가 가파르게 위로 향하고 있다. 이런 바위에 보통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바위에도 그런 이름이 있을까? 치마바위 끝나는 곳에 얇은 나무숲의 띠가 있고, 바로 그 위가 신불 공룡능선이다. 가파른 바위라 잡고 올라가라며 밧줄도 드리워져 있다. 밧줄을 잡고 조심조심 치마바위 끝까지 올라 뒤를 돌아보니 시원하게 펼쳐지는 경남의 산하. 오두산 능선 너머로 역시 1,000m 넘는 키의 고현산도 이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오늘 하루를 살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공룡능선 위다. 능선에 올라오면 좀 나아지려 하였으나, 지금부터 신불산 정상까지 펼쳐지는 능선은 온통 험한 바윗길이다. 이곳을 왜 공룡능선이라고 부르는지 알만 하겠다. 박부장을 기다려보나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전화가 온다. 자신은 그냥 내려가고 있다고... 14:22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하기에 박부장은 여러 가지 생각하다 포기하였나보다.
박부장을 위해서라도 우린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야겠다. 그래도 바위 능선을 함부로 걸을 수는 없는 법. 조심조심 신경을 집중하여 공룡능선을 오르니 마침내 8:44경에 신불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서니 북서쪽으로 신불산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간월산 너머로 양남 알프스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이, 서쪽으로는 천왕산, 남쪽으로는 영축산 등의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산세가 펼쳐지고 있으니 6.25. 때 이곳에서도 지리산처럼 빨치산이 활약을 하였겠지. 신불산 표지석을 이고 있는 빗돌에 쓰여 있는 문구. “동해의 찬란한 빛 태백의 높은 기상 품어 안은 이 빗돌. 쓰다듬고 가시는 이 새천년 꿈과 희망이 이루어질지어다.” 2000. 1. 1. 저 아래 삼남면의 면민들이 정성 모아 세운 빗돌인데, 우리 또한 이 빗돌을 아니 쓰다듬고 갈 수는 없다.
앞으로 이제 우리가 전진하여 나아갈 신불산 - 영축산 능선이 시야를 가로막는 나무들이 없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있다. 능선의 높낮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이 생각 같아서는 그냥 한달음에 뛰어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자, 이제 저 능선을 달려가자꾸나. 영축산을 향해 가는 능선의 오른쪽은 경사가 완만하게 내려감에 비하여 왼쪽은 뭐가 급한지 급하게 내리닫고 있다. 급하게 내리닫은 반대편에는 또 산지가 펼쳐진다. 여기서 보더라도 저 아래쪽 저지는 양 산지 사이로 길게 낙동정맥을 따라 내려간다. 바로 양산단층이다. 단층이기에 왼쪽 산사면은 이리 급하게도 내려가는 것이다.
우리는 기차시간에 늦지 않는 것은 물로, 예약된 식당에서의 점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 속보(速步)로 걷는다. 금방 신불재로 내려선다. 요 밑에 샘이 있기에 여름이면 이곳에서 비박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서 비박하며 무수히 많은 밤하늘을 쳐다보는 그 맛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겠지. 능선을 가면서 왼편으로 보이는 저 골프장은 무언가? 가만있자... 바로 어제 내려와 동료들과 골프를 쳤던 파인이스트 골프장이겠구나. 어제는 저 골프장에서 이곳 능선을 걷는 꿈을 꿨는데, 이제 거꾸로 여기서 저 골프장을 내려다보며 걷누나. 지금도 저기에선 사무실 동료들이 열심히 공을 치고 있겠지?
신불산 - 영축산 능선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억새. 지금도 억새들이 우리가 가는 길 양옆에서 하늘하늘 손을 흔들고 있다. 이제 조금 있어 억새 축제가 열릴 때에는 이곳은 완전히 장터가 되겠다. 억새 축제 때 이 평원을 수놓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가다보니 단조늪지와 단조성터 안내문이 나타난다. 억새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곳을 신불평원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단조늪지가 있고 늪지 바닥에는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식물이 변하여 이탄(泥炭)이 깔려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신불평원 너머로 긴 띠를 풀어놓은 듯한 단조성이라는 석성터도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며 큰 격전이 벌어졌었다는군.
부산진과 동래를 점령한 왜놈들은 양산단층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려고 했겠지. 그러기 위해 이곳 단조성을 반드시 함락하려고 했을 것이고... 당시 이 신불평원을 누비던 우리 의병들과 왜군들의 모습이 내 망막에 어지러이 교차한다. 그 때 단조성을 지키던 의병들은 왜군의 기습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들이 흘린 피가 못을 이룰 정도였다고 하였는데... 산을 다니다보면 군데군데에서 만나는 이런 왜놈들과 부딪치는 이야기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런데 단조늪지가 정확하게 어디일까? 이왕이면 안내문에 정확한 위치 설명을 해놓았으면 더 좋으련만... 신불평원을 전진하면서 어디가 늪지일까 둘러보나 늪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우리가 등산로를 벗어나 신불평원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키 큰 억새밭 너머의 늪지가 등산로에서 쉽게 보일 리는 없겠지.
가다가 잠시 서서 발밑의 양산단층 지대를 내려다본다. 단층지대를 종단하며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고, 바로 발밑으로는 삼성SDI 공장도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급하게 내려가고 있는 산사면에 톱니바퀴 같이 바위가 릿지를 이루며 내려가고 있다. 아리랑 릿지라고 한다는데, 바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장 저 릿지를 타보고 싶어 몸이 꿈틀하겠다. 그러고보면 신불산은 돌산과 육산(肉山)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는 산이라 할 수 있겠다.
다시 일어나 걷는데 신불평원 저 밑으로 돌성의 띠가 보인다. 아하! 저것이 단조성이겠구나. 단조성이 멀쩡하게 띠를 두르며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역사의 세월 속에 무너졌던 성을 다시 쌓은 것이겠지?
가다 보니 또 멀리 안내문이 보이는 것 같아 다가가는데, 안내문이 아니라 경고문이다. 왼쪽 양산단층 쪽 산 아래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으니 출입을 금지한다는 경고문이다. 실제 2005. 5. 누군가 사격장 내에서 산나물을 채취 하다가 40mm 고폭탄이 폭발하여 손목이 절단되는 사고가 있었고, 사격중에 출입하여 허벅지 관통상을 당한 민간인도 있다는 것이다. 사격장이 있는데 누가 그리 가지? 그런데 사격장 쪽으로 풀이 뒤덮여 희미하게 길의 자국이 나 있는 곳에도 또 하나 서있는 경고문에는 ‘금강폭포 하단부’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럼, 과거에는 금강폭포 있는 곳으로 등산로가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기존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등산로 근처가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던 곳에 사격장을 세웠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여튼 알겠습니다. 우린 그리로 안 갑니다.’
전방 왼쪽으로 신불평원 위로 낮은 구릉 같이 봉우리 하나가 솟아있다. 한부장은 저게 영축산일 거라 하는데, 나는 영축산의 봉우리가 저렇게 밋밋할 리가 없다는 생각에, 또 저 봉우리를 오르니 옆으로 우회하여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여야겠다는 생각에 봉우리를 우회하였다. 그러나 내가 영축산이라고 생각한 봉우리는 함박등이라는 봉우리였고, 한부장이 말한 봉우리가 바로 영축산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단축하려고 들어선 우회 등산로는 곧 자취가 희미해져 우리는 실종된 등산로를 찾아 헤매기도 하였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한부장 말을 믿고 영축산 봉우리로 향할 것을...
그러나 사실 기차는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다가 빠른 걸음으로 여기까지 걸어오느라고 많이 지쳤기에 저렇게 완만하게 보이는 봉우리도 오르기가 싫었던 것이 솔직한 속마음이었지. ‘영축산아! 네가 좀 더 멋진 자태를 보여주었더라면 힘들더라도 내 너를 보러 힘든 길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 아니니?’ 영축산은 인도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과 같다. 부처님이 이 산 밑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였는데, 통도사 뒷산인 이 산이 인도의 영축산과 비슷하다 하여 영축산이라고 한다나? 부처님이 연꽃을 말없이 들자 제자 가섭이 빙긋이 웃으며 이를 깨달았다 하여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하는데, 바로 부처님이 이 영축산 밑에서 설법을 할 때에 일어난 일이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란 말이 있는데, 부처님이 바로 영축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모임을 영산회상이라고 하는 것이지.
10:30경 괜히 영축산만 원망하고 함박재에서 능선을 버리고 통도사로 향하는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여기까지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니 이젠 지치는구나. 원래는 통도사까지 걸어가야 하나 극락암까지 차가 올라올 수 있다길래, 차 좀 보내달라고 전화를 하였다. 극락암을 지나 내려가는데 오과장이 모는 스타렉스가 올라오는 것을 보니 어찌 반갑던지... 산길을 꼬불꼬불 내려온 차는 금방 통도사 뒷담까지 다가간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을 줄이고 빨리 돌면 통도사는 볼 수 있겠다. 속보로 산을 돌아내려오느라 몸은 지치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불보(佛寶)사찰로서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와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불리고 있는 통도사를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한부장과 백부장님은 사우나에 몸을 담그고 싶다고 하여, 나 혼자 차에서 내려 통도사로 들어선다.
조그만 숲속 오솔길을 지나니 먼저 나타나는 것은 탑전(塔殿)이다. 탑전 뒤로 야트막한 둔덕 위로 5층 석탑이 있어 탑전(塔殿)이란 이름을 얻은 모양인데, 절을 다녀보지만 전각 이름을 탑전이라고 한 것은 처음 본다. 탑전 안에서는 몇 명의 불자들이 벽에 묵언정진(黙言精進)의 표어를 써놓고 바야흐로 한참 참선중이다. 이런 대낮에 주위에 가끔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데도 정진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이들의 묵언정진 경지는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갔겠다. 탑 앞의 설명을 보니 원래 이곳에 석탑의 기단부만 남아있고 주위에 부서진 석탑의 부재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1981년에 복원한 것이란다. 탑 안에는 다라니경과 경주 황룡사 목탑 심초석(心礎石)에서 나온 사리를 모셔다놓았단다.
이제 개울을 건너 본격적으로 통도사 탐사에 들어가자. 무지개다리를 건너 경내로 들어가니 전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이란 편액을 단 건물이 보이는데, 건물을 돌아서니 진신사리를 모신 계단(戒壇)이다. 건물의 편액을 보니 남쪽 면에는 금강계단이라고 되어 있지만, 벽을 돌아가면서 동쪽엔 대웅전, 서쪽엔 대방광전(大方廣殿)이라고 되어 있고, 금강계단이 있는 북쪽면에는 적멸보궁이란 편액을 걸었다. 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계단이 밖에 있으니, 당연히 건물 안에는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창문을 통해 계단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고...
통도사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부처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갖고 귀국한 자장율사에 - 스님들의 기강을 바로 잡아 律師라고 했다는군 - 의해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되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9마리 용이 사는 연못이 있었는데, 자장스님이 용들을 내쫒고 연못을 메워 절을 창건하였단다. 그런데 9마리 용 중 한 마리는 끝까지 이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하여 스님이 연못 한 모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두었다는데, 그것이 지금 남아있는 구룡지(九龍池)라는군. 지금 대방광전의 편액이 걸려있는 쪽의 마당에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연못 안에 사람들이 던져 넣은 많은 동전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구룡지인 모양이다. 구룡지 앞에는 아직도 붉은 꽃들을 자랑하고 있는 배롱나무(목백일홍)가 그 붉은 기운을 구룡지에 전사시키고 있다.
통도사(通道寺)라는 이름은 뭐가 통한다는 뜻이 아닌가? 실제로 절 이름은 절 뒤의 영축산의 모양이 부처님이 불법을 직접 전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고 하여,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고 하여 통도사라고 하였다는군.
계단을 참배하고 내려오니 옆에는 비각이 있는데, 편액에는 세존비각(世尊碑閣)이라고 되어 있다. 숙종 32년(1706) 계파대사가 계단을 중수하고 이곳에 봉안한 불사리의 행적을 비에 적었다. 당연히 자장율사가 사리 가져온 일이 제일 먼저 적혀있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두 개의 함에 담아 금강산의 서산대사에 보낸 일이 적혀 있다. 그 후 하나의 사리함은 태백산으로 가고, 또 하나의 사리함은 지금의 계단에 봉안하였다는군.
세존비각 옆으로는 3단 솟을대문에 개산조당(開山祖堂)이란 편액이 걸려있고, 그 뒤로 전각이 있다. 절에서는 이런 솟을 대문을 보기 힘든데? 이 통도사 산문을 연 조사를 모신 전각이라면 당연히 자장율사를 모시고 있는 것이겠지. 과연 전각으로 다가가니 안에는 자장율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자장율사의 영정을 모신 전각에 걸린 편액에는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되어 있다. 자장율사가 귀국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도 가져오셨다는데 그 대장경을 여기에 같이 모시고 있나?
용화전 앞에 있는 탑은 큰 주발을 올려놓은 것만 같은데, 다가보니 역시 보물 471호의 봉발탑(奉鉢塔)이다. 봉발탑은 석가모니의 식사용기인 발우(鉢盂)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데, 발우는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전법(傳法)의 상징물이다. 용화전은 미륵불을 모시는 전각인데, 그럼 왜 여기에 봉발탑이 있는 것일까? 이는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이 세상에 오실 미륵불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이런 봉발탑은 처음 본다고 생각하였더니, 실제로 이런 조형물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3대 사찰이라 전각들이 많다. 전각들 사이로 누비다보니 약사전과 영산전 앞마당에는 3층 석탑을 보수하려고 망으로 둘러쳐놓았다. 그런데 망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다. 차림새가 보수하는 사람 같아보이지는 않는데? 다가가보니 문화재관리국 직원이다. 본격적 보수공사 들어가기 전에 사전 점검하는 것일까?
돌다보니 천왕문을 지나게 되고, 천왕문을 지나니 일주문도 지나 통도사를 빠져나오게 된다. 택시를 타고 음식점으로 가니 이미 식사는 끝나가고 있는 중. 후유~ 부리나케 산을 돌아내려와 몸은 흠뻑 젖었지만,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영남 알프스를 조금이나마 맛보고 나니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피곤함 속에서도 한 줄기 상쾌한 기운이 단전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이 기분 좋은 피곤함 속에 나는 늦은 점심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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