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적지도 없이 걸어서 아무 데나 가는 '되는 대로 여행', 빨리 나가면 빠를수록 낮에 걷는 시간은 많아질 터였다. 지금은 겨울이니까.
그래서 서둘러 찜질방에서 일곱 시 경에 나와 영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었는데, 요즘 날씨가 포근하다고는 해도 안개가 껴서 음침하기까지 했다.
일단 '봉화'로 가긴 해야 했는데, 7 시 50 분에 첫차가 있었다.
그런데 거리 상으론 영주에서 봉화가 가까웠는데, 오히려 '영양' 가는 버스보다 그 횟수가 훨씬 적었다. 그만큼 봉화에 사람들이 덜 산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거기서 한참을 기다려 버스에 올랐고, 8 시 반 경에 봉화에 닿았다.
일단 내리긴 했는데, 생각보다는 훨씬 쌀쌀했다. 아니면 내가 추웠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갈까? '춘양'을 거쳐 '영월' 방향으로 갈까, 아니면 더 가서 '태백' 방향으로 꺾어질까?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 있던 관광지도를 보다가 나는, 어쩐지 태백 쪽으로 가고 싶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영월 쪽은 그 전에 A와 함께 차로 여행을 했던 적이 있어서, 그 쪽 경치를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도 아름다웠지만, 여기서는 거리상으로도 너무 멀었고, 한번 지난 곳보다는 아예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태백 쪽으로 가는 길이 더 재밌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머니에 돈이 거의 떨어져가는 상황이어서, 얼른 그 앞 농협에 가서 돈을 꺼냈다.
그리고 25분에 출발하는 태백행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는 그 중간의 '현동'이란 곳으로 정했는데, '울진' 쪽으로 꺾어지는 갈림길이었다.
안개에 젖었던 봉화의 음산했던 기운은, 버스를 타자마자 뒤늦게 몰려온 졸음으로... 나는 버스에서 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보다 훨씬 빨리 현동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내리기가 싫기까지 했다.
이렇게 춥고 을씨년스런 아침에 낯선 곳에 내리는 것도 썩 달갑지만은 않아... 가능하면 더 먼 곳까지 가면서 졸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동에서 내려야 했는데,
생각보다는 큰 마을이었고, 면사무소도 있었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
일단 농협 마트에 들러 초콜릿과 우유 등 비상식량을 샀고, 우유는 바로 마시면서... 나는 마을에서 20 분 정도 떨어져 있다는 기차역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그쪽으로 가야 '승부역'까지 가는 길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중간에 있던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그런 관청엔 지역의 지도 정도는 있을 거니까.
거기 직원 아가씨한테 지도를 볼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탁자 위에 유리에 덮인 지형도를 보여 주던데,
아닌 게 아니라 현동에서 승부역까지 도로 표시가 있기는 했다. 물론 주요 도로가 아니어서 '소로'로 표시가 돼 있었지만(특히 반절 넘게는 점선으로 표시돼 있었다.), 길이 있는 건 분명했다.
그럼, 됐다! 길만 있으면 못 갈 데는 없으니까......
터널 하나를 지나 울진 방향으로 갈라지는 소로 쪽으로 꺾어져 조금 올라가니 강이 나왔는데, 확실이 풍광 자체가 달랐다.
이 곳은 산촌이라 강폭은 넓은데 개천을 따라 골짜기 쪽으로 소로가 나 있었다.
여기 이 부근(춘양 등..)이 작년에 엄청나게 쏟아진 비로 홍수 피해가 컸던 곳이지?
그래서인지 새롭게 육중한 다리 공사도 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 모를 기대감과 호기심에 젖어 강을 거슬러 올라, 현동역에 닿았다.
그래도 아무래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정말 길이 있는 것인지......
그래서 현동역사에 들어가 역무원한테,
"이 길을 타고 승부역까지 가는 길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확실히 모른다면서, 바깥에 있던 철도 공사하는 사람에게 묻더니, 그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기도 모른다고 하자, 그 역무원은 손에 들고 있던 무전기로 저 앞쪽 길이 꺾어지는 지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묻는 모양인데,
길은 있는데 차는 못 다닌다고 하나 보았다.
그래서 내가,
"전 걸어갈 건데요. 걸어서 갈 수만 있으면 되는데......" 했더니,
걸어서는 갈 수 있을 거라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럼 됐지.
길 물어보는 게 힘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들의 표정으로는, 내가 참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가 보았다. 이런 을씨년스런 날씨에 남들이 잘 모르는 산길을 가겠다며 나타난 이방인이었을 테니......
그렇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길이 있다는데 뭔 문제?'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길은 콘크리트로 포장이 돼 있었지만 폭이 좁았고, 그만큼 차량의 통행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잘 됐어! 내가 원했던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정말 한적한 시골길... 이런 길을 걷고 싶었지. 아, 잘 온 거야. 어쩌면 오늘이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일지도 몰라......
나는 들뜨기까지 했다.
그렇게 길을 걸어 가는데, 요란한 굉음을 내며 태백선 기차가 지나갔다.
아마 이 골짜기를 따라 철도가 이어지나 보았다.
그리고나서 나도 다리를 건너 강 반대편으로 갔다.
비록 약간 쌀쌀한 아침이긴 해도(여긴 산중이므로..) 길은 한적해서, 너무 좋았다.
'혹시 가능하다면, 누군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음에 한 번 더 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는, 어쩐지 이제부터가 자유일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한껏 여유를 부리며, 얼음이 녹아가는 개울도 보고 자연도 관찰하면서 시골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다가 또 개울 쪽엔 웬 검은 새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잘은 몰라도 그건 '물까마귀' 같았다.
재수가 좋게도 나는 새가 날아가기 전에 사진을 한 장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셔터를 누르자마자 새는 잽싸게 골짜기 저쪽으로 날아가 제 몸을 감추고 말았지만......
골짜기는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산중에 산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올라갈수록 더 깊어질 밖에......
그런데 거기도 마을은 있었다.
내가 마을로 다가가니 어딘가 외출을 하려는 듯한 시골 노파 두 분이 걸어 내려오는데, 버스를 탈 모양이었다.
이런 곳에도 버스는 들어오나 보았다.
그래서 인사를 하면서,
"여기서 승부역까지 가는 길이 있다면서요?" 하고 물었더니,
의아한 눈으로,
"굉장히 멀낀데예......" 하는 것이었다.
"예, 멀은 걸 각오하고 왔습니다. 길만 있으면 되니까요." 나는 자신 있게 말을 하고 있었다.
"길은 있어예. 잘 가소." 시골 노파들답게 조금 염려스런 모습으로 말을 해주면서 그분들은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마을 입구엔 한 덩어리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거기도 비닐하우스 때문에 그 풍경이 다 깨지고 있었다.
"에이, 저놈의 비닐하우스만 없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고 나는 불평도 해댔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랴만......
그런데 마을을 지나는데, 거기 개울은 축사 등에서 나오는 오물로 오염이 돼, 보기에 흉측하기까지 해서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류에서 이렇게 썩은 물을 밑으로 흘러내려 보내는데, 나는 여기에 오면서 물이 맑다고 흥분까지 했다니......
마을을 벗어나니, 이제는 주변 밭에 아직 수거하지 않은 폐비닐이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었다.
'아이, 저것도 다 공핸데......'
그것도 모자라 비닐쪼가리들은 주변 나뭇가지에 칭칭 얽힌 채로, 꼴사납게 흩날리고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참 걱정이다. 전국적으로 저런 폐비닐이 널려있어서...... 미관은 물론, 앞으로도 자연을 오염시키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이런 오지(청정지역)가 이런 모습이면, 우리나라의 깨끗한 곳은 어디란 말인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또 한 마을을 지났다.
마을 언덕 길에서 얘기를 나누던 두 여자(주부)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기 길 있지요?"
"예, 있긴 한데.. 멀은데예......"
"예..."
"눈이 녹았을까 모르겠네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아서......"
"날씨가 이렇게 푹한데요, 뭐......"
지나가는 말로 인사를 한 셈으로 나는 마을을 지나쳤다.
몇 군데 집에서 개들이 단체로 짖어대는 바람에, 나는 어서 빨리 그 마을을 지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니 '입산 금지' 플랭카드가 보였다.
'나도 산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가? 아닐 테지......'
곧이어 콘크리트 포장길도 끝나고, 이제 흙길로 접어들었다.
아마 여기서부터가 정말 산골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차 한 대는 다닐 만한 길이었는데,
조금 더 오르니 급기야 길이 얼어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여기는 산이니까.'
응달은 얼어있고, 양지는 녹아 있고......
구불구불 몇 굽이를 돌았는지 모른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그 위에 집이 한 채 보였는데, 불교를 믿는지(?) 돌로 탑을 쌓아놓은 것도 있었다. 그 비닐 장막 안에서는 한 남자가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음식을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인기척을 만들어, 그가 놀라지 않게 했다.
이런 산골짜기에 갑자기 기척도 없이 외부 사람이 불쑥 나타나면 놀랄 테니까......
그러자 그는 비닐 안에서 나를 한 번 흘끗 바라보았으나,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다시 자기 일에 열중했다.
그래서 나도 그 집을 지나쳤다.
산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나는 곳이 골짜기여서 어떤 곳은 아늑한 봄날 같았는데, 여전히 응달진 곳은 찬 기운이 물씬 풍기기도 했다.
그렇게 또 얼마를 오르자, 허기가 졌다.
그래서 핸드폰 시계를 보니 11 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이쯤에서 요기를 하고 갈까?
이쪽은 양지라 따뜻했지만 바로 옆쪽 아래만 해도 얼음이 언 계곡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작지 않았다.
그만큼 깊은 골짜기였다.
나는 수로 공사로 일부 콘크리트로 포장된 바닥에 배낭을 내려놓고, 아직도 남아있던 가래떡과 사과.. 그리고 아침에 샀던 초콜릿으로 점심을 먹었다.
'험한 산에 오르면서 조금이라도 짐의 무게를 줄이는 게 좋겠다.'는 계산도 작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