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41
8월3일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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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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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LXowWTpD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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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부재(不在)시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
민물이든 바닷물이든 물이라는 것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잔잔한 호수, 유유히 흐르는 강물, 끝없이 펼쳐지는 망망대해... 물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 물을 만만하게 본다거나 방심하게 될 때, 물은 즉시 큰 두려움의 대상으로 돌변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물을 좋아하던 저였기에, 물 때문에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급류나 소용돌이에 휘말려 허우적대다가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꼴깍꼴깍 물 몇 모금 먹고 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끔찍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물 앞에서 자만했던 관계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도단 일행이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질러 가려다가 역풍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맞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파도가 얼마나 거세던지, 젖 먹던 힘까지 다 동원해도 배는 항상 그 자리였습니다.
기진맥진 탈진해져 제정신이 아닌 제자들 앞으로 예수님께서 유유히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에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스승이요 주님, 구원자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물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보고 사색이 되어 유령이라고 외쳤던 사도들, 그러나 막상 확인해보니 스승님이셨습니다. 무척이나 ‘뻘쭘’한 상황이요 어색한 순간, 가만히 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베드로 사도가 또 나섰습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그가 용기백배해서 물위를 몇 걸음 걸어 예수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스스로도 놀랐습니다.“아싸! 이제 나도 된다. 나도 스승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제자들 앞에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뻐겼을 것입니다. “자네들 나 봤냐? 나야 나! 나라구! 수제자!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될 거야.”
그러나 팽배했던 베드로 사도의 자만심도 촌각이었습니다. 유머감각이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잔뜩 기고만장해있는 그에게 한방 제대로 먹이십니다. 순식간에 거센 바람을 일으켜 베드로 사도 앞으로 보내십니다.
갑자기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는 여지없이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전의 그 자신감, 당당함을 순식간에 사라지고 큰 두려움에 체면불구하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치도 개그 프로그램 한 코너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수제자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순간입니다.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주님 부재(不在) 시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할 때 인간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탄 배 위로 승선하실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용감하고 씩씩하게 물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을 내려 깊은 물 속을 바라볼 때, 갑작스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할 때 강건해집니다. 주님만 바라볼 때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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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SJFhljhkj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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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 지려는 마음을 참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물 위를 걷는 베드로’입니다. 여기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보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가 더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며 자신도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교만일까요? 배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교만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다 할 수 있고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삶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지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우리도 다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보통 의사들처럼 살았다면 그 큰 믿음은 어떻게 드러날 수 있었을까요? 혹은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평범한 수녀님으로 남기를 원했다면 지금 사랑의 선교회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2센트만 가지고 커다란 병원을 지으려 했습니다. 평범한 성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범함을 거부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닮아가려 하는 우리 삶도 배 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평범함을 거부하기 위해 물에 빠져 창피를 당하는 두려움을 무릅쓸 수 있어야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평범함을 넘어서는 일이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은 것처럼 나중에는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도 병이 낫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병을 고치겠다고 무작정 안수를 주었다가 병이 치유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고 이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저는 이것 때문에 성당 내에서도 치유의 미사나 기도회가 많이 열려야 하고 사제들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기름을 바르고 안수를 해 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려면 치유되지 않아서 받을 수 있는 창피를 이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의 일입니다. 일본의 해군 장교 ‘가와가미 기이치’는 전쟁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눈 앞에 펼쳐진 현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군인들을 보면 “저것들 때문에 우리가 패전했다.”라고 손가락질하며 노려보는 사람들 때문에 매일 분노와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을 보내다가 급기야 그는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제외한 온몸이 마비되어 마치 식물인간처럼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병원에서 정신과 의사인 ‘호치라’ 씨의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호치라 씨는 기이치 씨에게 물었습니다.
“기이치 선생, 낫고 싶으세요?”
“예, 낫고 싶죠.”
“그럼 제가 시키는 대로 할 수 있겠어요?”
“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럼, 저를 한 번 따라 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매일 분노와 적개심으로 가득했던 기이치 장교는 갑자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니 입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부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일만 번씩 하셔야 합니다. 감사하려는 마음만이 당신의 마비된 몸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돌아간 후, 병석에서 자신 병의 치료를 위해서라도 감사라는 말을 되뇌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억지로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감사의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와 적개심이 사라지고 마음도 평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얼굴도 평화로워지고 표현도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를 대하는 가족들도 게이치 씨의 변화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막내아들이 감나무에 홍시가 발갛게 익은 것을 보고 ‘저 홍시를 아버지께 갖다 드려야겠다.’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들은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따서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감 드세요.”
그때 아버지 기이치 씨가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앗, 이럴 수가!”
신기하게도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던 손이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아들도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손에서 일어난 이 기적은 그 이후 팔, 다리, 몸 구석구석까지 이어졌습니다. 경직되었던 그의 몸은 마치 마법이 풀리듯 감사의 주문으로 풀리고 있었습니다.
기이치 씨가 베드로였다면 호치라 씨는 예수님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호치라 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는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자신이 하는 것은 그도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을 기이치 씨는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렇게 해도 낫지 않으면 그도 창피한 일이었습니다. 군인 장교가 그런 말을 믿다니요. 그러나 그는 믿었고 물 위를 걸었고 드디어 의사처럼 건강해졌습니다. 이렇듯 믿으면 평범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늘의 사람처럼 살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려움도 있겠지만 믿음이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만들고 하늘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두 발로 걷는 개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본인이 인간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연습을 하여 두 발로 걷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평범함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임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의 모습과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배에서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물 위를 걷는 사람들입니다.
믿는다면 평범함을 거부하십시오. 믿으면 저절로 평범함에서 벗어납니다. 평범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참지 마십시오. 골을 넣고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를 표하는 메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가 예상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더는 제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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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4,22-36 :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23절)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신 것은, 조용한 곳에서 항상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외딴 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때가 많다. 우리도 시간과 장소가 허락하는 한 그렇게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준다. 광야라는 것은 우리를 모든 소란에서 구해주는 고요함이요 은신처이다.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는데, 파도에 시달린다. 맞바람이 불어오자 제자들의 배는 폭풍 가운데에서 마구 뒤흔들린다. 배는 풍랑 속에 있어도 그대로 배이다. 이 배는 제자들을 태우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이 배는 그럼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다. 이 배로 주님께서 오신다. 그분은 크나큰 어려움에 처해 안절부절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신다. 주님께서는 “나다”(27절)하고 말씀하시며 두려움을 말끔히 씻어버리실 것이다.
이 배는 유혹의 맞바람에 흔들리고 있지만, 바다의 모든 파도, 즉 이 세상의 모든 권능 위를 걸으시는 영광스런 주님을 보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26절)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베드로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라고 하였다. “오너라.”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갔다(29절).
그러나 베드로는 호수와 바람을 보고는 어지럽고 겁이 났다. 그래서 물에 빠졌고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30절)라고 소리를 지른다. 베드로는 물위를 가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자 두려워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바람이었다. 호수가 바람보다 더 위험한 데도 호수와 싸우면서도 바람의 세차게 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주님께 구해달라고 소리친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미신다. 그러고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베드로를 구해주셨다. 자신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도움을 청한 사람이 죽음을 당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과 물결이 그쳤다. 그들은 모두 경탄하며 “참으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3절)하고 주님께 절을 하였다. 주님께서는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를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양떼를 그에게 맡기시며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6) 하고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배 안에 있으면서, 즉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이란, 하느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람이란, 결코 넘어지지 않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베드로처럼 쓰러졌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계속 주님께로 정진하려는 사람이다. 계속 새로이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쓰러질 수 있지만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며,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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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유령이다!” 두려워 소리 지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얼른 나서서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물에 빠집니다. 왜 물에 빠지게 될까요? 성경은 베드로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아마도 “오너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향하던 베드로의 눈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향하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과 함께 물결이 일어 그의 뺨을 때리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이 아닌 거센 바람 쪽으로 눈을 돌렸을 것입니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아, 내가 물 위를 걷고 있네…….’ 하며 예수님을 잊습니다. 갑자기 발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소리를 지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살려 주십니다. 물론 한 마디 하시지요.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물 위를 걷던 베드로 사도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물에 빠진 것처럼, ‘나도 사제로 살면서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보는 순간 유혹에 빠질 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내 안도의 한숨이 쉬어집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베드로 사도가 소리친 순간, 예수님께서는 바로 손을 잡아 구해 주셨습니다. ‘나도 예수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치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물론 한 말씀 듣겠지만, 매달리기만 하면 그분께서 살려 주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한 말씀은 “왜 의심하였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왜 마음이 둘로 갈라졌느냐?”로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만을 바라보는 삶의 자세가 우선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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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고 물 위를 걷는 일은, 바로 그 자연과 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 9,8) 따라서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모습을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증언하기 위해서,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서 그 일을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신앙인들은) 사도들의 증언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사도들과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마태 14,23-25)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져 있고, 맞바람과 파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는 교회로 해석하고, ‘맞바람과 파도’는 박해와 고난으로 해석할 때가 많은데, ‘맞바람과 파도’를, 예수님이 곁에 안 계시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느끼는 불안감, 두려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시편 23편이 연상됩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4) 우리는 주님께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슬픔이고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님에게서 떨어져 있게 될까? 죄 속에 있을 때와 믿음이 흔들릴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호수 한가운데에서 맞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습니다. 호수 위를(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타고 가실 배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려고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좀 더 빨리 가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꼭 필요한 때에, 또는 어떤 절실한 이유가 있을 때에 예외적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굳이 물 위를 걸어갈 필요 없이 그냥 물가에서 말씀만으로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하실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만들기만을 바라셨다면, 물가에서 그렇게 하셨겠지만,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신 것은 ‘제자들 곁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즉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물 위를 걸으신 진짜 이유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6-27)
어둠 속에서, 거센 맞바람과 파도를 헤치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구든지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자연현상이든지 미래의 일이든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든지 간에 다 마찬가지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라 너희의 스승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는 ‘어떤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것’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무서움’에서 벗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해서 두려워했습니다.(루카 24,37) 그런데 그때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즉 돌아가신 분이 갑자기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4,28-31)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왜 물 위를 걷고 싶어 했을까? 이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있는 곳에 거의 다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배 안에서 예수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고 싶어 한 것은, ‘예수님처럼’ 권능을 행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되고, 그러면 그것은 그냥 ‘호기심’에서 나온 요청입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은,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했던 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과 비슷합니다(마태 4,3).>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지 예수님의 권능을 흉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흉내 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요청을 받아 주신 것은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으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라는 말씀은, 단순히 거센 바람을 두려워한 것만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주님이시거든’이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님을 의심한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다.’ 라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그 사람이 정말로 주님인지 의심하면서, 시험해 보려고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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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가슴이 찡했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미국에 온 지 40년이 넘은 어르신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어느 날 여자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가 한국을 가고 싶어 해서 아들이 한국에 함께 갔습니다. 한국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여자 친구가 몸이 아팠고, 병원에서 검사하니 ‘백혈병’이었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 아들은 여자 친구를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백혈병인 여자 친구와 결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반대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엄마에게 ‘내일 일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말하면서 결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자 친구의 백혈병은 완치 되었습니다. 딸을 위해서 정성껏 간호해준 남자친구에게 양부모는 무척 감사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소유한 양부모는 기꺼이 딸 부부에게 재산을 상속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르신은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나의 신앙은 아들보다 많이 부족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아들보다 많이 부족했습니다. 성당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된 아들을 어머니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둘 다 놓친다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람들의 변명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를 뿌리면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아주 작은 씨가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나무 가지에 새들이 머물고, 그 나무 그들에 사람들이 쉰다고 하셨습니다.
주변을 보면 1인 3역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사랑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과 소중한 일을 식별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유지합니다. 명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눕니다. 3가지 일을 하면서 더 큰 성과를 얻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과 글이 어우러져서 감동을 주는 작품이 되기도 합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입니다. 신문사를 운영하고, 홍보하고, 좋은 지면을 만드는 것입니다. 작년부터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부르클린 신자들께서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우드사이드 성당의 장례미사도 도와드렸습니다. 고인의 유족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장지에 함께 갔던 봉사자들이 기꺼이 평화신문을 구독해 주셨습니다. 퀸즈 성당의 미사도 도와드립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신문 홍보를 하기로 했습니다.
커다란 댐이 무너지는 것은 태풍으로 물이 넘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구멍으로도 커다란 댐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은 아주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강한 군대를 가졌던 조조가 작은 군대를 지닌 제갈 공명에게 패배한 것은 부하를 믿지 못했던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갈 공명은 조조에게 의심이라는 아주 작은 씨앗을 주었습니다. 조조의 마음에 들어온 의심이라는 씨는 조조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전쟁 중에 훌륭한 장수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론과 미르얌은 모세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미르얌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의심했던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당신 앞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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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베드로의 의심 - 우리 신앙의 현주소>
마태오, 마르코 그리고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다음에 일제히 예수께서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예수께서 풍랑에 시달리던 제자들의 배에 오르시자 즉시 풍랑이 가라앉은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마태 14,22-33; 마르 6,45-52; 요한 6,15-21)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다. 원전(原典)으로 통하는 마르코복음(6,45-52)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한 베싸이다로 보내신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서 기도하신다. 그동안 날이 저물어, 즉 밤이 되었는데도 배는 역풍을 만나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었지만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신다.
시간은 흘러 새벽 4시쯤이었다. 이에 제자들이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비명을 지른다. 모두가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는 빵의 기적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렇듯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부각되고 있다. 물 위를 걸으시고, 예수님 앞에 풍랑도 복종하는 이변(마르 4,35-41 참조)을 통해 명실공히 예수님은 인간과 자연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저 놀라고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음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6,16-21)은 원전의 내용을 대폭 줄였다. 빵의 기적이 있었던 그 날 저녁 제자들만 배를 타고 호수 북쪽 가파르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어둔 밤이 되었음에도 예수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셨고,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래도 배는 힘들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제자들의 배로 다가가신다. 이에 제자들이 겁에 질리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에 모시려 하는 순간, 그들은 어느새 목적지에 가 닿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6장을 통해 ‘생명의 빵’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바,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그 가운데 삽입함으로써 “나는 나다.”(에고 에이미) 라는 구약의 하느님 현존(출애 3,14)을 예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이제 마태오복음을 살펴보자. 이야기의 소재는 같지만 마르코복음과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야기의 전반부는 거의 같다.(22-25절) 그러나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질려 엉겁결에 “유령이다!”(26절) 하며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예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라고 하신 말씀은 마르코, 요한복음과 같다. 마태오복음의 독창적인 부분은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다.(28-31절) 이는 마태오가 원전에 덧붙인 것으로써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마태오복음 공동체의 교회적 상황과 미래 교회의 교회론적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모두들 유령을 보는 것으로 여겼지만, 예수께서는 “나다.” 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일단 안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예수님 간에 펼쳐지는 기막힌 사건을 목격하면서 믿음을 가중시킨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친다. 이 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33절) 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 그 사이에 베드로도 깨달은 것이 있다. 자기도 물위를 걸어 예수께로 갈 때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거센 바람에 시선을 두는 순간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즉각 손을 내밀어 “주님, 살려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는 구해주신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뼈에 새겨야 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마태오복음 공동체는 나름대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공동체를 배 한척에 비긴다면 그 배는 지금 거센 풍랑에 시달려 목적지를 잃고 세상이라는 바다위에서 헤매고 있다는 말이다.
그 앞에, 아니면 이미 배위에 예수께서 계시지만 그들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환난과 박해의 풍랑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 속의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희미한 가운데 예수님의 현존을 바라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세파에 밀려 신앙을 잃고 물속에 빠져든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베드로의 의심과 나약함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이다.
교회는 우주만물 위에 군림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지만, 그 구성원인 신자들은 세상의 고통과 어려움 때문에 그분을 보지 못한다.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고, 그분을 보더라도 그분께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면 교회는 입으로는 신앙을 고백할지라도 세속의 풍파에 빠져들게 된다.
오늘 복음은 신앙과 세속 사이에서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겪는 우리에게도 좋은 교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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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미르얌과 아론은 겸손한 하느님의 사람 모세를 질투하고 비방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충실한 관리자를 비방한 그들을 엄벌하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미르얌의 치유를 위해 모세 성인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대신 빌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착각해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의 연약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용감한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물 위를 조금 걷지만 두려움을 느껴 곧 물에 빠지는 모습도 나옵니다.
이러한 제자들과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적 두려움과 믿음의 실상을 보여 줍니다. 교회 공동체가 세파에 흔들릴 때 우리는 인간적 논쟁과 비방의 소용돌이에 쉽게 빠져 버립니다.
주님께서 도와주고자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믿음이 약하여 여러 걱정과 허상에 빠져 버립니다. 세상이 깜깜해지는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누구의 손이라도 잡고 고통을 딛고 일어서려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와 무력함을 넘어서는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도미니코 성인은 극단적 순결주의자들인 ‘카타리파’와 극단적 청빈주의자들인 ‘발덴파’의 회개를 위한 설교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신앙생활은 비방과 질투, 오만과 방종의 극단에 빠지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랑과 신뢰로 주님을 알아 뵙고 중용의 길을 걷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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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처음에는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다가 예수님 덕분으로 안전한 뭍에 도착한 제자들의 배는 교회의 고전적인 상징입니다. 마태오 복음서가 편집되었을 때 초기 교회는 신앙의 여정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의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자들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여정에서도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것은 갖가지 위기 상황과 신앙에 대한 의심 그리고 온갖 두려움의 유령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굳건한 믿음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 안에 사랑과 우정이 메마르고,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가 서로에게 충실하지 못하며, 사회 안에서 생명에 대한 존중과 정의와 인권이 무시됨으로써 우리 곁에서 하느님의 표징이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또한 악과 거짓의 충동질 앞에서 선과 진실이 뒤로 밀려나 보일 때, 질병과 사건과 사고 그리고 불행이 씁쓸하게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믿고 사람들을 신뢰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신앙의 위기, 하느님에 대한 의심 그리고 거의 불가능한 인간적인 형제 관계 앞에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싸여 실의에 빠지게 되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덮칩니다.
이 모든 것은 젊은이든 어른이든 나약한 믿음의 명백한 표징입니다. 이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운 밤에 기도하셨고 베드로 사도가 물에 빠져 드는 위험 앞에서 외친 것처럼, 기도의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떨쳐 버리고자 하느님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믿음의 위기 앞에서 두려움의 유령을 떨쳐 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청해 봅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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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처럼, 당신께서 바다의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또한, <욥기>에서도 하느님을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로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는 동시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시며 야훼 하느님께서 현현하셨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라는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돛을 올리고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요,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오너라!”(마태 14,29)라는 주님의 말씀에 주저 없이 안전한 배에서 내려 파도가 이는 물 위를 걸어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휩싸여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떠받쳐주던 물이 이제는 그를 삼켜버리는 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안전한 배로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구명대를 던져달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은 들어 다시 주님이신 예수님께 향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마태 11,26)
그는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믿음을 붙들어주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1,31)
그렇습니다. 신앙의 길은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그러기에,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풍랑이 이는 길을 떠나야 하고, 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순종함으로써 신앙의 도약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하느님에 대해 알게 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복종할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신앙이란 순종이 있을 때에만 참이다. 순종할 때에만 비로소 신앙은 신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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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주님!
배 안에 머물러 있기만을 고집하지 말게 하소서.
풍랑이 위협할지라도 믿음의 구명대를 입고 물위를 걷게 하소서.
삼킬 것 같은 풍랑이 오히려 저를 떠받들게 하소서.
넘어뜨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오히려 저를 이끌게 하소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신 당신이 바로 ‘저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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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 역시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지 않을까?'에 마음이 머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 안에 머물러 보았습니다.
거센 풍랑이 이는 삶의 자리로 나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두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아닌지?
정말 예수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시길 바라고, 나와 함께 하시길 원하고 있는지?
"제가 지금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니, 천천히 오시고, 다음에 예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나는 아닌지?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고,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두려워하지 말고 물 위를 걸어 "오너라"는 예수님 말씀에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갑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넘어집니다.
그리고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14,31)
'예수님의 손'을 맞잡읍시다!
언제나 나를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구원의 손'을 맞잡읍시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풍랑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거세게 일고 있는 '코로나 풍랑'이 우리에게 던지는 외침은, "얼른 내 손을 잡으라."는 주님의 외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손을 잡으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낮은 곳에 계시고, 오늘 독서에서 모세의 모습처럼, 주님께서는 겸손한 이들 안에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일로, 지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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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마태오 14,22-36 (물 위를 걸으시다)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믿음>
짙게
드리우는
벗을 가리는
어두움을 뚫는
늘 한결같은
벗을 향한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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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통일한,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진나라의 황제가 진시황제입니다. 진시황제는 스스로 ‘하늘 아래 최초의 황제’라 칭하면서 자신의 왕조가 1만 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 예언했답니다. 그러면서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사상 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했습니다. 이를 분서갱유라고 하지요.
무엇보다 그는 불로장생을 꿈꾸었고, 그래서 ‘진사’라는 붉은 광석에서 얻은 붉은 알약을 불로장생약으로 알고 복용했습니다.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웠지만 진시황제의 통치는 불과 10년뿐이었습니다. 그가 세운 나라는 그가 죽은 후 4년간 내전을 겪다가 한나라에 권력을 빼앗기고 맙니다.
진시황제가 먹은 불로장생약은 액체 상태의 수은이 추출되는 일종의 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종 질병으로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고통 속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가 생각한 대로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예언도 하나같이 틀렸고, 그거 하고자 했던 것 역시 모두 엉터리였습니다.
자신은 대단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 착각이 많은 이에게 아픔과 상처만을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역사의 한 장면을 보면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겸손이 답이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자만이 아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목격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만나자 두려움이 생겨서 물속에 빠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구해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믿음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역부족과 현실의 어려움으로 인해 실의에 빠지기도 하고 절망에 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베드로가 물 위를 잠시라도 걸을 수 있도록 합니다. 불가능이 가능케 하는 능력으로 바뀝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믿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은 겸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앞서 진시황제의 교만이 그를 절망으로 이끌었듯이,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께서 가시는 방향과 정반대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믿음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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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하느님>
사제가 되고 나서 사람들이 제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안수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새 사제라서 그럴 것으로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자매님이 겉으로 봐도 아픈 것이 분명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는 안수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중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혹시 새 사제의 안수를 받고서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 엄마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느님이 기도해주시니 곧바로 나을 거야.” 아파하는 이 아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죄를 지었을 저인데, 저를 향해 ‘하느님’이라는 호칭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죄인인 내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제는 기도해주는 사람이다.’ 아파하는 이들에게 힘이 되는 기도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도를 해줄 분입니다.
죄인인 저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더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다짐을 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부족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당신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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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좋은 일도 어려운 일도 감당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려운 일 자체에 매달려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맙니다.
그리고 곤경에 빠져 자기 눈이 멀면 문제의 핵심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라” 하고 말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제자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하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곧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베드로의 청을 들어주셔서 베드로를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져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았을 때는 물에 빠졌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험한 상황이라도 그 안에서 정신을 차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으로 눈이 멀면, 자기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원자를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시련을 만나서 어려움만 생각하면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센 바람이 부는 고통의 바다가 아니라 그 한복판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문제는 곧 은총입니다.위기는 기회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신을 단련시키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고통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믿으면 발등을 찍히지만,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구원의 여정에 용기와 두려움, 믿음과 의심이 혼재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는 확실합니다. 주님은 믿고 사람은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믿음으로 손을 댄 병든 이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
"우리의 기도가 언제나 우리 믿음의 뿌리가 되고, 우리의 기도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오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믿음의 은총, 그것은 믿음의 선물입니다. 믿음을 책에서 배우지 않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그것을 청하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 믿음을 주십시오!'. "저는 믿습니다. 주님!" 하고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 그분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주님께 제가 청합니다. 제 작은 믿음을 도와주십시오'. 믿음으로 청하는 기도는 치유를 얻습니다. 주님께 청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은총을. 그리고 주님께 청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믿음을 넘어 우리에게 주실 그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우리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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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의 만남>
-“삶의 중심 자리를 마련하십시오!”-
“당신이 내리신 빛과 진리가 나를 이끌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산, 그 장막으로 나를 들게 하소서.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리이다,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시편43,3-4ㄱㄴ)
지금 메주고리에서는 2021년8월1일-8월6일까지 국제 젊은이들의 연중 기도 모임이 진행중입니다. 새벽 인터넷 확인시 이 모임에 보낸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 제목과 끝 무렵 일부 내용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용기와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마음과 온 삶을 채웁니다. 그분에 의해 구원받기를 허용한 이들은 죄로부터, 슬픔으로부터, 내적공허로부터, 고립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기쁨은 언제나 태어나고 또 계속 태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쁨의 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기쁨의 샘이신 주님을 만나는 우리들입니다. 이와 연관되어 떠오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의 다음 예수님 말씀도 참 반갑고 기쁩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Courage! It is I. Do not be afraid.”(마태14,27)
코로나 감염병으로 침체상태에 있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평생 화두로 삼고 싶은 말마디입니다. 바로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이기도 합니다. 성서에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은 무려 366번 나온다 하니 일 년 열두 달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강론을 쓸 때 마음에 길이 새기고 싶은 말마디는 옆에 괄호를 열고 한자나 영어를 병기하곤 합니다. 이 성구도 영어로 써 봤습니다. ‘나다’는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ego eimi)’로 영어 대문자로 하면 ‘아앰(I AM)’ 바로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느님을 이름을 주십니다. 얼마나 하느님과 깊은 일치 관계에 있는 예수님이신지 깨닫습니다.
여기에 필히 따라 붙는 두 말마디도 나눕니다. 역시 수차례 나눴습니다만 또 나눕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좋은 말마디는 늘 반복하여 들어도 새롭고 반갑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이 두 말마디가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중 주님의 마지막 확약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이래서 날마다 하루중 구체적으로 삶의 중심인 이런 주님과 만남의 자리와 시간은 필수입니다.
민수기의 모세와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새 모세 예수님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너무 서로 닮았습니다. 모세에게는 주님과 만남의 장소는 ‘만남의 천막’이 있고 수시로 필요한 시간에 여기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선 모세 이야기부터 나눕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소주제는 ‘미르암과 아론이 모세를 시기하다’입니다. 모세의 누이가 미르암이고 형제인 아론이니 한 혈육입니다. 한 혈육의 남매간에도 이 시기란 악덕이 따라 붙습니다. 세상에 시기, 질투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눈멀게 하는 시기와 질투요 이 또한 일종의 무지의 병입니다. 이들 남매와는 참 대조적인 모세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12,3)
예수님 역시 온유와 겸손의 인물로 자기를 정의하니 두분의 겸손이 막상막하입니다. 바로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주님을 닮아 겸손과 자비와 지혜요, 반대로 주님과 멀어질수록 교만과 무자비와 무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지혜의 빛이지만, 주님과 멀어질수록 무지의 어둠입니다. 시기에 눈멀어 모세에 반기를 든 미르암과 아론을 만남의 천막안에 불러 들여 준열히 꾸짖는 주님의 말씀도 실감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두려움도 없이 나의 종 모세를 비방하느냐?”
모세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신뢰와 사랑이 신선한 충격입니다. 아마 예수님께 대한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만이 모세를 능가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기에 모세의 겸손이요 간절한 기도임을 깨닫게 됩니다. 필시 예수님께서도 모세를 롤모델로 삼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마지막 모세의 누이 미르암의 치유를 위해 부르짖는 기도 여기 감동적입니다. “하느님, 제발 미르암을 고쳐 주십시오.”
모세에게 주님을 만나는 삶의 중심 자리가 만남의 천막이었다면 예수님께는 외딴곳이나 산이었습니다. 새삼 주님과 만남의 관상은 활동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공동전례기도는 기본이고 우리 역시 모세나 예수님처럼 개인적으로 혼자 주님과 만나는 삶의 중심 자리와 시간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중대기로시, 또 날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번아웃(burn out)’됐을 때 필히 찾은 외딴곳이나 산의 쉼터요 샘터였습니다.
어제 5천명을 먹이신 기적후 열광하는 군중의 유혹을 직감하신 예수님은 지체없이 군중을 돌려 보내신 뒤, 따로 혼란된 마음을 추스르고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십니다. 새삼 ‘관상과 활동’, ‘혼자와 함께’의 균형과 조화는 영적 삶의 리듬임을 깨닫습니다. 코로나로인해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의 위기를 겪는 신자들이 필히 회복해야 할 이런 영적 삶의 리듬입니다.
이런 하느님과 일치의 깊은 친교가 있기에 5천명을 배불리 먹인 사랑의 기적에 이어 물위를 걸어오시어 격랑의 파도로 위기를 겪고 있는 제자들을 구원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풍랑에 흔들리는 배가 상징하는바 우리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입니다. 인생 항해중 조난당하거나 파선된 공동체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삶의 중심 자리에서 주님과의 만남과 기도가 필수입니다. 물위를 걷는 것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하느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가 됩니다. 위기중에 발휘되는 베드로의 탁월한 영적 순발력과 영적 본능이 역시 주님의 수제자답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기도와 주님의 응답, 그리고 배안에 있던 제자들의 고백이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주님 사랑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을 크게 깨달았을 것이며 고백과 더불어 이들의 신앙도 깊고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날마다 외딴곳 성전에서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충실히, 한결같이 믿음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시편37,3-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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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겸손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제자들이 호수 위에서 파도에 시달리고 있을 때, 뭍에서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홀로 남아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새벽녘에 물 위를 걸어 배를 향해 걸어오십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지요. 이를 모르지 않는 제자들이 혼비백산해서 유령이라고 소리를 지르자, 이에 예수님께서 당신이라고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익히 아는 목소리로 그들에게서 두려움을 걷어내 주십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그 와중에 베드로가 용기있게 청합니다. 주님께서 자신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시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믿음까지는 아닌 듯 보입니다. 우리가 아는 베드로 사도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다분히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흥분에서 나온 외침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마태 14,30)
진짜로 '오너라' 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힘 입어 용기를 내 배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베드로는 실제로 물 위를 몇 걸음을 걷습니다. 그가 자신을 잊고 오로지 예수님만 주목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 순간 그만 두려움에 압도되고 말지요. 사람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걸 뱃사람인 그가 체험과 논리로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광야에서 일어난 모세의 형제자매 안에 일어난 갈등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민수 12,2)
아론과 미르얌이 모세를 비난합니다. 사실 사건의 발단은 모세가 동족이 아닌 에티오피아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인 일 때문인데, 비난의 쟁점이 빗겨났지요. 이민족과의 혼인을 나무랐다면 나름 정당성을 지녔을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너만 못한 게 무엇이냐'고 따지는 건 기회를 잡아 질투와 시기심을 드러낸 것밖에 안 됩니다. 이는 모세를 그 자리에 세우신 주님께도 불평이 됩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다.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민수 12,3)
성경 저자는 모세가 이토록 주님께 특별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이유를 그의 "겸손"에서 찾습니다. 최상급의 "겸손"으로 표현하였지요. 사실 온갖 위험과 불확실성이 점철된 광야에서 백성을 이끌 수장의 자질은 인간적 능력이나 물리적 힘, 말주변이 아니라 겸손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주님은 때마다 상황에 맞는 지도자를 백성에게 보내 주셨지요. 정복과 통일을 위해서는 다윗의 용맹과 순종을, 번영을 위해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쓰셨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어린애와 노인에 짐승까지 딸린 거대한 무리가 자기들 힘만으로는 생명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운 황무지를 통과하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가는 과정을 감수하려면, 자기기 누구인지 알고 주님이 누구신지 아는 겸손이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는 나의 온 집안을 충실히 맡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입과 입을 마주하여 그와 말하고, 환시나 수수께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님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민수 12,7-8)
주님께서 모세의 변호인이 되어 주십니다. 이민족 손에 길러지고 살인까지 저질렀던 모세를 이스라엘의 민족 정서로만 보자면 부족함과 결격 사유가 다분하지만, 그런 모세이기에 오롯이 주님께만 집중하고 그분 뜻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자신을 부르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 주님과 함께면 아무것도 아닌 자기가 무엇이 됨을 아는 이는 주님을 뺀 자신을 떠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투신하고 의탁합니다. 겸손은 거기서 나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물에 빠진 베드로가 외칩니다. 그는 자기가 잠시 물 위를 걸은 것이 오로지 예수님 덕분이었음을 즉시 깨닫고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예수님 없는 베드로는 아무리 뱃사람이어도 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맹목적 의존이나 도피가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을 주님과 연결지어 믿고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자신이 주님과 함께 누구인지, 주님 없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아는 이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책감이나 죄의식에서가 아닌 통찰과 자존감에서 우러나는 겸손은 비굴하지도 비하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믿음과 겸손으로 주님과 함께 새 역사를 써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가능해지고, 겸손으로 효력을 이어간답니다. 허락하신 삶의 모든 순간이 구비구비 기적이고 은총임을 경탄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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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CKZH8w-ylY&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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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 31)
파도가
거셀수록
우리의
믿음또한
주님을 향해
깊어간다.
파도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파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파도 속에서
더욱 활짝
꽃피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파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서고
바로 걷는
것이다.
파도가
있는 곳에
파도를
다스리시는
주님께서도
함께 하신다.
의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만나게 되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믿음이
약하기에
파도는
더욱 거세게
다가온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사랑하는
방식은 언제나
주님을 향한
믿음이다.
두려움과
시련 속에서
믿음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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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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