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이란 의가 불의를 이겼으므로,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고 자유와 평등을 누리게 된다는 소식이다. 복음이 그러한 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좋은 소식이라면, 그 사회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회 구성원이므로, 그 구성원 각자가 정의와 공의, 자유와 평등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누리기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이 이루어 지는 시기는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사회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시기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여전히 악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단 말인가? 동시에, 당연히 그 시기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이 언제, 어느 시간에, 그런 모습이 될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될 시기를 찝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시기에 대한 관심보다 그 구성원들이 교화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교화의 첫 걸음은 좋은 소식을 나눔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은 평화와 행복이 가득찬 시기가 반드시 도래하며 우리 각자가 거기에 적합한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이 두 가지는 동시이행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시기를 안다는 것은 인간처럼 몇날 몇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만물의 원인이시기 때문에 결과의 발생도 필연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필연적이라는 것이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 필연성이 내가 저절로 그 사회의 일원이 된다거나, 되지 못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큰 마련(은혜) 안에서, 오로지 나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은 목적을 위해 마지못해 걸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 즐거움(성취감)이 깃든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러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현재의 모든 것은 즐거움이 될 수 있다. 그 확신이 희미해질 때, 우리는 불안과 초조에 빠지며 인생에 회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좋은 소식을 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좋은 소식은 우리에게 밝고 희망찬 미래를 현재에도 누리는 기쁨을 주기 때문에 좋은 소식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