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개월을 벼르던 끝에 무작정 길을 떠났다.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을 후쿠오카행이 아니라 북쪽 아오모리로~
어머니 뱃속과 같은 후쿠행 비행기 탑승시간이 우연히 같은 탑승구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번은 그쪽이 아니야"
2시간 반 정도의 비행길엔 눈덮힌 산, 구름, 물, 나무, 흙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두 다 있다.
내가 갇혀살던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눈의 형질이 여행길엔 그대로 살아 있다.
운이 좋으면 눈으로 뒤덮힌 골짜기에서 황금빛 노을이라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오면서 겪게되는 모든 염려와 문제, 삶의 고단함,
그리고 눈 앞에서 나의 말초신경을 건드렸던 파치는 늘 나로 하여금 떠나지못하게끔 제약한다.
점점이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내 몸엔 기운이 점점 떨어지고
더불어 내 삶의 꿈도 서서히 도태될거란 의기의식에 이번 여행엔 입술을 깨물고 내가 앞장섰다.


니체는 이렇게 얘기했다. '탈피하지 않는 뱀은 죽는다.'
니체가 얘기하니까 멋있어 보이지만 뻔한 얘기 아닌가. 껍질 벗지않는 뱀은 죽은거다.
뱀은 주기마다 한번씩 허물을 벗는다. 그러면 다시 싱싱한 것이 나온다.
우리도 마찬가지겠지. 탈피, 주기마다 한번씩 탈피해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늘 싱싱한 모습으로 살아가 질 수있도록 하기위해...
잠시만이라도 파치에서 탈피하라! 대박의 허상에서 벗어나라~!
이번 여행은 파치로 인해 늘 근질거렸던 껍질에서 조금이라도 탈피하는 것이다.
'여행은 눈썹도 떼고 가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여행가가 그랬다.
여행은 홀가분해야 한다는 것이며 가장 홀가분한 여행은 혼자 떠나는거라고...
어차피 인생은 단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면,
이 무대의 주인공인 나는 주인공답게 나 자신을 위해서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늘 내 속에서 곱씹어졌었다.


오랜만에 차 뒷좌석에 앉아보았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자유가 몰려왔다.
잠시 눈도 감아보는 한가로움도 누리고, 무엇보다 자연인으로서의 감각이 살아났다.
고개를 돌려 전방위를 볼 수 있다는 작은 여유 하나가 내 온 몸의 말초신경을 두리번거림의 호기심과 탄성에 집중하게 했다.
파친코라는 기계가 주는 짜릿함 때문에 그동안 참 많은 것을 잃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길가에 잠시 차를 멈추고 깊은 심호흡을 하며 나와 길동무하는 구름에 친근한 눈길 한 번 줄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만족할 만큼의 상향그래프에 도달할 때까지 왜 그리도 레버만 땀나게 잡고 있었는지 반성이 된다.
뒷좌석은 시야의 제약이 있다. 그러나 마음의 여유가 시야의 제약을 넘어서게 한다.
운전석보다 더 많은 곳을 볼 수 있음은 창이 넓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넓기 때문이다.
본다는 건,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여유를 통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두리번거릴 수 있는 여유가 섬세한 시각을 갖게 한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파친코해소에 빼앗긴 시선을, 산과 구름과 하늘과 나무를 오래 볼 수 있는 여유가 나 스스로를 성찰하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아오모리의 대지가 아름다운 이유...
도시의 아스팔트라면 벌써 녹아 없어졌을 적은 눈. 그 적은 눈을 아오모리의 대지는 여전히 그대로 풍성하게 품고 있었다.
아! 그렇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작은 것조차 소홀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대지는 적은 눈을 품어 은하수도 부러워할 만큼 세상을 하얗게 만든다.
따뜻한 흙은 적은 눈을 소중히 다루어 도시보다 오래 눈의 눈부심을 선사한다.
가난해도 살 수 있는 곳이 자연이다. 소박함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곳이 자연이다.
"너 같은 존재도 이곳에서는 충분히 살 수 다"고 아오모리의 대지는 자신감을 심어준다.
아오모리에서는 적게 가지고 있어도 된다. 적은 눈도 깔보지 않고, 녹이지 않는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들 말한다. 권력이 높으면 하고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있다고들 생각한다.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존 능력과 정비례한다. 풍성함에 양성 반응을 보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잔인한 도시의 아스팔트도 폭설에는 백기를 들고 잠시나마 눈의 다스림을 인정한다.
하지만 적은 눈에는 참으로 잔인하다.
겨우 살아서 내려온 눈송이는 아스팔트에 닿자마자 검은 물이 되고,
그나마 살아남은 눈송이는 자동차 타이어에 무참히 짓밟혀 질척이는 물이 된다.
적은 것이 생존할 수 없을 때 자연성을 잃은 것일거다.
가진 것이 적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잃은 양 호들갑을 떨 때, 사람은 지저분해지는 것 같다.
▲ 동영상
아오모리 핫코다산은 매서웠다.
산을 넘고 능선을 타며 체감온도 영하 30도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체험했다.
회초리를 맞은 듯 이미 뺨은 얼얼하게 얼어붙었지만, 인간성이 회복된다는 건 이런 추위에 대한 양성반응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귀를 찢을 듯한 기계음향과 현란한 불빛, 손끝을 찌릿하게 하는 진동과 바람...
이 모든 기계적인 것에 매몰되었던 나였다.
겨울하늘에 떠있는 작은 구름, 아오모리 시골길 작은 실개천의 졸졸거림에 감탄할 때 내 마음은 여유로워짐을 느낀다.
그래프에 함몰되고 뒷박에 스트레스받았던 나였기에 더욱 그렇다.
시골집 일본 아낙네의 잔소리가 들리고, 벌써 구수한 된장찌개가 그립다고 동료와 수다를 떨며 발걸음을 재촉할 때,
사람은 태초에 아담이 누렸던 한가로운 산책길에 접어들게 되는 것 같다.
비록 곧 다시 후쿠행 비행길에 오를지라도...
잃어버린 균형을 조금이라도 잡은 듯 해서 내가 반갑다.



첫댓글 행님 멋지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힐링여행 아닌가요 ㅎㅎ 저 산에 저도 올라가고 싶고 저 온천에 저도 담그고싶네요 부럽습니다 ㅎㅎ
기회를 만들기를~ ㅋ
가만히 있으면서 기회가 찾아오진 않을 듯ᆢ ^^
그리고 이번에도 쑤시면 나오는 원정길이길 ~^^
안차장님 멋진 여행하고오셨네요^^
참. 지난 오랜만의 원정길은 재미 좀 보셨나요? ^^
@안차장ll인천 네.. 안차장님 응원 덕분에
조촐하게 쉬다온듯해요^^
좋은 글귀와 사진, 감사합니다.
예, 저도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멋진글 잘봤습니다~ 사과는없습니까ㅋㅋㅋ
유명하다해서 먹어봤는데 풋사과 맛이던데요 ^^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도 짧은 일본원정길에 가면 대부분 업장에만 있습니다 ㅋㅋ
구슬프게 힐링되는 글 입니다.
조~~으다.
배경은 속세를 떠날 태세입니다.
즐건 여행 하시고 돌아오세요. 꼭!
속세는요
조만간 후쿠에서 절 보게 되실 듯~ ㅋㅋ
좋은 글과 사진이네요. 잘보고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준급의 글의 향연이네요
값진 사진도 품위를 더하고
좋은 소식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대박나십시오 ^^
어디 책을 베끼신건아니시죠? ㅋ
제가 남큐슈를 갔던것도
기차차창밖을 뚜렷히 볼수있음이고 생각할수 있는 여유를 가지려했던거였지요 ㅋ 좋은여행길 되시길
아우님,
다음 큐슈를 향한 뱃길엔 아름다운 동반자가 꼭 있기를 바래요
좋은 사람과의 기차여행은 정말 멋지더군요 ^^~
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안차장님 굉장히 멋진 분이세요 아참 눈소리 생생하게 잘 들었습니다 ^^
눈밟는 소리~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멋지게 인생을 즐기실줄 아시는분 갔습니다 영상 보고 제가 힐링이되는 느낌입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여행 되십시요
과찬이십니다
아뭏든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혹시 작가가 본업 아니신지요
그건 아니고요
대단하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
뱀은 주기마다 한번씩 허물을 벗듯 우리도 주기마다 한번씩 탈피해야.. 여행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하는 마술램프!
늘 조절님께 도전받습니다 ㅋ
철학이 담긴 에세이 같네요.
멋집니다.^^
철학이라고 할 게 있나요
감사합니다
대단한 필력이십니다...완존 감동...
우리 회원님들 다들 멋쟁이십니다....
그렇죠?
회원님들이 대부분 참 좋죠?
격려, 감사합니다
엄청난 필력에 힐링되는 내용까지... 휴스턴 촌구석에서 기분이 갑자기 평안 해지네요
아, 지금 미국에 계신 모양이군요
감사합니다 ^^
작가세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