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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namu.wiki/w/%EC%95%84%EA%B0%80%EB%8F%99%EC%82%B0
1. 개요
1982년에 김기순이 창시한 대한민국의 협업마을형 신흥종교.
반면, 대법원 판결상 사이비 종교로 판정받지 않았지만 명백한 '사이비' 로 보는 시각도 있고, 제일 중요한 건 사이비 종교 여부를 떠나 피해자들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이다.
법원에서 교주 김기순에게 확정한 혐의는 조세포탈, 횡령 등이다.
2. 시초
2.1. 교주 김기순의 종교적 배경
교주는 김기순이라는 자로, 1940년 11월 1일(음력) 조선 경상남도 부산부(현 부산광역시) 태생이다.
교주가 되기 전엔 평범한 주부였으며, 1978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의 '주현교회' 라는 사이비종교에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주현교회는 이교부라는 사람이 이끄는 교회로, 신도들에게 머리를 밀게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삭발교' 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기이한 별칭에 걸맞게, 주현교회에서 일어난 일들도 참으로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교인들 폭행은 물론, 명색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예배 중에 신도들과 함께 천국으로 가자면서 옷을 홀라당 벗어던지고 껴안고 춤추는 나체 댄스 사건을 일으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교부는 당시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본받고자 특유의 스님 같은 차림을 한 것" 이라고 주장했지만, 나체 춤을 춘 것으로 물의를 빚으면서 말 그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거기에 충고하러 온 동료 목사를 폭행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 결정적인 사유가 되어 구속되었다.
그리고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감옥에서 지내게 되었고, 1981년, 출소 후 주현교회를 해산하였다.
1996년 당시 아가동산의 정문 입구. 사건 취재를 위해 언론사 차량이 정차돼 있다.
2.2. 아가동산의 시작
김기순은 1982년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대대리, 도리리 일대의 땅 4천 평 남짓을 구입해 '아가농장' 이라는 것을 세워 신도들을 모아 아가동산이라는 종교를 만들었다.
이 때 주현교회의 해산으로 갈 곳이 없어진 이교부의 신도들까지 빼내면서 덩치를 불려 나갔다.
이런 설립 과정에서 김기순은 멀쩡히 살아 있는 이교부의 영혼을 자기가 계승했다는 주장까지 하며, 자신이 이교부의 진짜 후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러한 행각은 이교부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이교부가 출소한 후, 과거 서로 돕고 지내던 이교부와의 사이도 원수지간이 된다.
김기순은 '갈 곳 없는 신도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고 떡 장사, 어묵 장사, 음반 장사 등으로 땅을 샀다.' 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 정도 장사로 어떻게 4천 평을 샀을지는...
특히 1982년에는 첫 수익사업체 '신나라레코드물류' 를 세워 초기에는 트럭으로 다른 음반점에 카세트 등 음반을 팔다가 1984년 서울 종로3가에 자체 매장을 처음 연 후, 특유의 가격파괴 전략을 세워 광속으로 음반도매업계를 장악했다.
또한 1992년 킹레코드를 설립하고 같은 해엔 하나레코드(대전), 1993년 명반레코드(인천) 등을 세우기도 했다.
교주 김기순
3. 기행과 악행
3.1. 어처구니 없는 행각
실제로 교주 김기순은 자신을 '아가야' 라고 지칭하며 꽃가마를 타고 나타나거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거나 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각을 보이곤 했다.
뉴스 보도 자료
아가동산은 얼핏 보면 일반적인 개신교 종파 중 하나 같겠지만, 실상은 개신교에서 예수만 빼고 그 자리에 자신을 대입한 전형적인 사이비종교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찬송가에 나오는 예수 혹은 예수의 상징을 '아가' 혹은 '아가야' 라는 말로 치환해서 김기순 자신을 찬송하게 만들거나 기성 종교에 대한 무차별 비난으로써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이 종교의 교리는 일단 김기순은 신이고, 3살짜리 아기이기 때문에 김기순은 어떤 말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이걸 '아가야 법' 이라고 부르며 신나라에서는 이 법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상당히 해괴한 주장이었다.
3.2. 노동 착취와 범죄
아가농장은 전형적인 노동착취형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농장관리, 장부관리, 의료관리, 학생관리, 세무관리 등 관리직을 놓고 철저하게 공동체 생활 및 공동작업으로 운영되어서, 신도들은 매일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장에서 CD 및 테이프를 만들며 일하는 식으로 원치 않는 투잡을 뛰었다.
물론 거기서 번 수익이 어디로 갔을지는 모른다.
지금도 신나라네이처팜이라고 아직도 이천시 도리리 일대에 있다.
"외부에서 파는 채소에는 독이 들어 있다" 고 신도들을 현혹시켰다.
당연하지만 과로로 죽는 사람도 수없이 있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폭행 및 살인, 암매장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대법원 판결상 폭행과 살해 부분이 무혐의로 밝혀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이 증언도 하였던 것으로 봐서는 정말 폭행과 살인이 없었는지는 여전히 진위가 의심스럽다.
특히 이곳에서 신도 3명을 살해한 것이 발각되었는데 1987년 8월 14일 밤 9시에는 7세 아동 최낙귀 군이 교주 김기순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돼지우리에서 신도들이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 며 1주일 동안 굶기고 폭행 후 죽게 했다.
이때 여러명이 돌아가면서 몇대씩 때리고 나오는 방식을 사용해 가해자들이 실제로 아동에게 자신들이 가하는 폭력의 수위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1988년 1월 2일 정오에 과수원 관리책임자이던 윤모 씨도 교주의 말을 잘 안 듣는다며 살해당했으며 11월 21세 강모 씨는 '교주의 아들을 현혹시켜 교리를 어지렵혔다' 는 명목으로 창고로 끌려가 부모에게 따귀를 맞은 후, 여러 신도들의 각목에 맞아 타살당했으며 교단 측은 '가출' 로 처리했다.
특히 사망자 윤씨의 아들이 이천경찰서에 진정서를 냈으나 아내가 "남편은 음독 자살했다" 고 주장하여 수사가 안 됐고, 병원 의사들도 사체검안 당시 최 군의 사인을 '선천성 심장질환', 윤씨는 앞서 말했듯 '음독 자살' 등으로 처리됐다.
이렇듯 경찰의 수사 비협조와 부실한 사체검안, 유족들의 비협조 등이 수년간 그 사건을 은폐했던 것이다.
또한 목격자들도 폭행 광경을 봤지만 실제 살해 과정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교인들에게는 1년에 딱 4번 휴가를 줬는데, 신정, 광복절, 크리스마스, 그리고 교주 생일이었다고 한다.
교주 생일에 쉬는 이유는 교주 김기순을 우상으로 하는 연극을 상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연히 주말과 추석, 설날 연휴에도 일했다.
그리고 텔레비전, 신문, 외부 출입, 가족 면회 등 바깥 소식을 접하는 건 아예 금지되었다.
가족도 김기순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 흩어 놓았는데 아버지는 아저씨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아줌마라고 부르면서 남인 것처럼 대하게 한 것도 모자라서 호부호형까지 금지했다고 한다.
심지어 부부끼리 동침도 금지했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신도들이 데리고 간 아이들도 대부분이 중졸 정도의 학력에 병역까지 고의로 면탈하도록 종용했다고 하는데, 특히 병역을 고의 면탈한 경우 형법상으로는 병역기피로 간주하기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된다.
또 김기순은 지상천국을 세운답시고 신도들의 재산 50억 원 정도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으며, 수사 당시 김기순의 은신처에 있는 금고에 만원권 지폐로 헌금 7억 원과 1996년 당시 환율로 1,600만 상당의 달러가 보관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러한 반인륜적 착취 끝에 6년 만에 4천 평이었던 땅이 13만 평으로 대략 32배나 늘어났고, 1993년에는 '신아영농조합법인' 을 세워 농림수산부로부터 '첨단기술농업시범단지' 로 지정되어 1994년 유리하우스 등을 세우며 정부와 경기도청 등으로부터 국고 23억 5천여만원을 지원받았다.
당연하지만, 악행과 고혈 위에 쌓은 그 권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4. 만행의 끝
4.1. 재판과 가벼워진 처벌
1995년 8월에 아가동산 이탈 주민들이 교단 측의 탈세와 사기 등 온갖 비리에 대해 경찰에 진정서를 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20일만에 내사 종결처분을 내버렸다.
이에 이탈 주민들은 1996년 7월 15일 경기도청에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하자, 이천경찰서가 재수사에 나섰다.
12월 1일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은 이천경찰서로부터 아가동산 관련 수사자료를 넘겨받고서 검-경 합동수사에 돌입해 7일에는 김기순과 관련자 6명에 대해 일부 주민 살해 및 사기 등의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김기순만 영장이 발부됐다.
동월 10일에 관리책임자 김씨 등 핵심신도 3명을 구속시켜 공개수사로 돌입했다.
그 사이 김기순은 영장이 발부된 후 남편과 함께 시골을 전전하다 동월 16일에 대외업무 담당 정문교 등 3명과 함께 검찰로 자진 출두했으나 관련 혐의에 대해서는 부인했고, 결국 구속됐다.
19일에는 실종자 강씨의 유해발굴에 착수했지만 유골은 찾지 못했고, 27일에는 김기순 외 10명이 살인 및 사기 혐의로 기소됐다.
1997년 4월 28일 김기순에게는 사형을 구형했으며, 나머지 간부들에게는 중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그 사이 노동법-안기부법 총파업 사태와 한보 사태, 김현철 스캔들, 황장엽 탈북 사건 등 숱한 사회적 이슈들이 잇따라 터지며 아가동산은 점차 잊혀졌고, 그해 1월 3일, 증거보전 청구심과 21일 검찰 조서에서 당시 신도 사체 암매장 혐의자였던 굴삭기 기사 윤씨가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무리수 의혹이 퍼져나갔다.
5살의 피해자 최모 군에 대해서도 최 군의 친모 역시 현장에서 진술을 번복해 "아이는 살해당하지 않고 선천성 심장병으로 죽었다" 며 교주를 감싸는 바람에 피해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결국 5월 20일, 주범 김기순은 수원지법 여주지원에서 조세 포탈, 횡령 등 혐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어 징역 4년과 벌금 56억원을 선고받았고, 신도 김씨 외 5명의 살해 혐의는 무죄, 신나라유통 대표이사 강활모에겐 징역 2년 6개월 및 벌금 60억원 등을 각각 선고했다.
이들 중 김기순은 10월 10일에 보증금 1억원을 내는 조건 하에 보석으로 일단 석방되었다.
1심 선고 당시 재판부는 "아가동산이 순수한 협업마을에서 시작되어 김기순을 지도자로 부각시킬 때 일부 변질은 있었으나, 종교의식과 포교 활동이 없는 것으로 보아 검찰의 주장대로 '사이비종교' 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는 식으로 증거재판주의에 입각해 발표했다.
이후 1998년 3월 3일 서울고법 항소심, 6월 23일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똑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신도 살해와 폭력은 위와 같은 이유로 무혐의로 재판 결과가 나왔으나, 아직도 이에 대해 증거하는 피해자들이 적지 않았기에 이에 대해선 뭔가 의심스럽다는 평이 많다.
또한 "그간 사람들을 착취하고 중노동시킨 죄과에 비해서는 너무 가벼운 처벌" 이라는 의견이 많았으며, 과거 아가동산의 노동력 착취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1심 판결 당시 한국기독교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 등 이단대책기구와 몇몇 개신교 주류 교단이 반발하기도 했고, 문제점도 제기했다.
2001년 7월 4일, 검찰은 굴삭기 기사 윤씨와 일부 신도들이 강씨가 암매장됐다고 주장한 유리온실 주변 부지 15평에서 발굴작업을 다시 했지만 유골은 또 못 찾았고, 2002년 4월 2일에 김기순에게 위증교사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하고 또다시 강씨의 유골을 발굴하려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월 29일, 김기순은 공소시효 만료로 수배가 해제되어 사실상 수사가 종결됐다.
여하튼 김기순이 신도들의 노력을 훔쳐 세운 아가동산은 김기순이 구속되고 난 후 그 세가 약해지기 시작해 신도가 줄어 사실상 와해 상태고, 2000년 8월에 완전히 출소한 김기순은 교주로써의 권력을 잃었다.
사건 이후에도 건재한 신나라레코드
4.2. 김기순 등의 근황
그런데 김기순은 징역 4년 판결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 벌금도 완납하여 유유자적하게 잘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사건 당시에 대해서는 "나는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신격화조차 안 했다." 는 식으로 변호했다.
사건이 터진 데엔 이교부가 배후에 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벌금도 내고 아가동산 간판도 내려 돈이 궁할듯도 싶은데, 마지막 남은 사업체인 신나라레코드를 아이돌 음반 판매 장사에 요긴하게 잘 이용해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런 사실을 아는 과거 아가동산의 피해자들은 "교주 김기순이 그간의 악행에 비해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모자라 석방 후 세상을 조롱하듯 부를 누리고 있다" 며 분개하고 있다.
게다가 사건 이후 인력들이 전부 떠나간 아가동산을 신나라네이쳐팜이라는 일반 개인 농장으로 바꾸고 추가로 운영하며 재정을 더욱 불리고 있다.
원래 신나라레코드 자체가 아가동산의 계열사로 설립되었고, 아직도 운영 중이며 용산이나 센트럴시티 등지에 지점을 갖추고 있다.
거기다가 아주 잘 나가고 있으며, 현재 한국에서 가장 큰 음반 판매 매장이다.
참고로 여기는 아직도 아가동산 명의로 된 회사다.
전술했듯 과거 아가동산의 교주였던 김기순은 현재도 신나라레코드의 회장으로 재임 중이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우선 아가동산의 명목상 대표이사는 신옥희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신옥희는 사건 당시 아가동산의 경리 담당으로, 김기순의 동생 뻘 측근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이 '신나라' 라는 건 신난다 → 신나라가 아니라 아가동산의 교리였던 '신의 나라' 라는 뜻의 신(神)나라다.
신나라 미디어 홈페이지에 가면 '노래, 춤, 웃음의 나라 신나라' 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아가동산의 교리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각 노래, 춤, 웃음이라고 한다.
2020년대에는 코로나19 여파로 많이 어려워졌지만, 김기순 본인 입장에서는 이미 돈을 벌 만큼 벌었고 어차피 저거 말고도 농장 등 일부 수입원이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듯 하다.
또한 이미 법적 처벌도 다 끝나버린 상황이다.
아가동산과 관련이 많던 이교부의 본거지인 주현교부 구건물
4.3. 아가동산 해체 이후 이교부의 행보
참고로, 앞서 구속되어 출감 이후 15년 동안 밑준비를 하던 이교부는 아가동산이 와해되자마자 '주현교부' 라는 사이비 종교를 또 설립해서 아가동산 신도들을 재흡수했다.
실제로 이교부는 같은 사이비종교 교주이면서도 아가동산이 와해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탈자들을 데리고 검찰에 출두해서 증언하기도 했는데, 물론 이는 순수한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김기순의 아가동산을 해산시킨 뒤 빼앗긴 신도들을 전부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려는 참 치졸한 목적이었다.
이교부는 김기순과 척을 진 후, 아가동산을 내분시키거나 아가동산이 자멸할 경우 신도들을 전부 되찾기 위해 작정하고 벼르고 있던 것이었다.
주현교부는 2010년대 들어서도 익산시에서 운영되고 있긴 하는데, <현대종교> 에 따르면 종교적인 활동은 줄어들었다고 하고, 오늘날에는 노인들이 모여서 식사하거나 친목 모임을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교리가 사이비이기는 해도 지역사회에서 크게 물의를 빚는 일이 없이 그냥저냥 잘 운영되는 듯 하다.
월간 <교회와신앙> 97년 2월 호에 주현교부와 아가동산 관련으로 간략한 역사가 나와있다.
2020년에는 옛 건물을 철거하고 신축했다.
아가동산과 주현교부 모두 원 안에 십자가가 있는 상징을 쓰고 있다.
5. 여담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강민구 검사가 2003년 8월에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실화소설 <뽕나무와 돼지똥> 을 내기도 했다.
이에 김기순은 저자 강민구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를 걸어 10억원 가량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는 한편, 서울지법 서부지원에 발행처인 해우출판사를 상대로 '출판물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 을 냈다.
이에 동년 11월 19일 법원은 김씨가 낸 출판금지 가처분신청을 수용했고, 2004년에 서울서부지법은 김기순에게 일부 승소 판결을 냈다.
고로 현재는 절판 상태이며, 굳이 보려면 국립중앙도서관까지 찾아가야 한다.
2001년 7월 28일에는 SBS의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싶다가 사건 5년 뒤의 후일담을 다룬 '우리는 속았다, 아가동산 그후 5년' 을 방영하려 했으나, 아가동산 측이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방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수용함으로서 방영이 무산되어 특집다큐 <원숭이와 함께 50년> 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아가동산 측은 같은 시기 비판 기사들을 낸 경향신문과 경기일보 등에 반론을 제기하며 정정보도문을 내도록 했고 2002년 11월에는 아가동산 측의 요청에 따라 연합뉴스와 경향신문 등 6개 언론사가 홈페이지에서 법원 판결기사를 뺀 관련 기사를 삭제해서 언론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이후로는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으면서 갈수록 잊혀져 가는가 싶더니 2023년 부로 다시 부정적 의미로 주목을 받고 있다.
2023년 작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5~6회에서 본 종교집단을 다뤘는데, 다큐멘터리의 파급효과가 워낙 커서 다시금 언론과 대중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중이다.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조성현 PD에 의하면 또다시 아가동산 측에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는데, 정확하게 "가처분 신청을 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면서 "혹시 모르니 영상이 내려가기 전에 봐달라" 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의 방영이 무산된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때와 같은 상황으로 보인다.
다만 다큐가 배포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감상한 시점에서 뒤늦게 가처분 신청을 한 것도 악수가 되었는데, 가처분 신청을 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은 아가동산, 협업마을, 신나라레코드가 언론에서 더 자세히 다뤄질 수 있을 것이고, 가처분 신청을 취소하면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최소한 신나라 레코드는 '사이비 = 아가동산' 이라는 공식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칠레에도 아가동산과 거의 평행이론 수준으로 흡사한 시설이 있었다.
다만 콜로니아를 운영했던 파울 섀퍼는 김기순과는 달리 당시 칠레의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으며, 사이비종교를 만들기 전에는 평범한 주부였던 김기순과 달리 섀퍼는 사이비종교를 만들기 전에도 아동 성폭행 전과가 있었고, 악행이 들통난 후 해외에서 장기간 도피생활을 했다가 붙잡히고 2010년에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며 죗값을 치뤘다.
그리고 교주들의 잠적(?) 후 교주들과 관계가 있던 사람이 훗날 떠나지 않은 교인들 중 대부분을 흡수하고는 현재까지도 집단생활을 하는 것과 1996년에 피해자들 30여명의 신고로 오랫동안 지속되온 악행이 끝이 났다는 것도 똑같고, 심지어 교주의 생일까지 비슷하다.
이유는 불명이지만, 육군부사관학교 뒷문에 아가동산 비석이 있다.
2023년 3월 13일 아가동산 및 김기순 측은 제작사 MBC, 조성현 PD, 넷플릭스서비시스코리아 등을 상대로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5, 6화에 대한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냈다.
첫댓글 아 진짜 너무 기분나빠
와 넷플 건까지… 진짜 부~~지런하네 소름이다 끝이 끝이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