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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타마히코는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을 보니 일본 내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식량 및 생필품 부족으로 일본인들의 삶이 땅바닥으로 떨어졌으며 황도파, 통제파, 해군 모두 이기는데만 집중하지 민중들의 고난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구상에 지옥이 있다면 일본 열도일 것이다.
신문 옆에 있는 사진에는 집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난민, 부모와 떨어져 우는 아이,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도시 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타마히코는 그중 한 사진에 눈낄이 갔다. 바로 처참하게 파괴된 기차와 그 기차 주변에 민간인의 시체가 흩어져 있는 사진이었다.
타마히코는 그 사진을 더 볼 수 없었다. 오래전 있었던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저 사진과 같은 일을 겪은 적 있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었다.
심란해진 타마히코는 시가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시곤 뱉었다. 뱉은 시가 연기가 위로 높게 올라갔다. 하얀 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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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2월 러시아. 증기기관차 한 대가 검은 연기를 폴폴 내뿜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 기차의 1등석에 탑승한 한 소년이 잔뜩 불평을 하고 있었다. 같이 온 다른 사람들은 그 불평을 듣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추워 죽겠네. 아빠는 대체 왜 날 이곳에 보낸거야?”
이제 14살이 된지 얼마 안된 한 소년. 링루이는 러시아국의 수도인 옴스크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링팡렁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에 곡물을 수출하며 꽤나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링팡렁은 아들에게 자신이 물려받을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경험을 쌓기 위해 아들을 보낸 것이다.
누가 보면 전쟁이 한창인 나라로 아들을 보내는게 미쳤다고 하겠지만. 링팡렁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는게 좋다고 생각해 러시아 출장을 맡겼다. 링루이와 같은 객실에 있는 이들은 링팡렁이 아들을 보좌하기 위해 보낸 보좌관들이었다.
“난방을 최대치로 했는데도 추워 죽겠네. 날 보낼거면 날이 좀 풀리고 보내지 왜 이럴 때 보내가지곤..”
객실 안 난로로 안을 덥히고 두꺼운 외투를 걸쳤음에도 시베리아의 추위는 막을 수 없었다. 객실 안에서도 입김을 불면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링루이가 한창 불평을 쏟아내고 있을 무렵. 갑자기 객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큰 소리에 의아해 문을 열고 복도를 보니 1등석이 있는 객차 앞칸에서 무언가 큰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해서 복도로 나와 그 칸으로 향했다. 다른 객차로 가는 문에 도착했을 무렵.
“어... 어?”
그때. 방금 전까지 자신이 있던 객실에서 무언가 폭음이 들리더니 객차와 땅바닥이 가까워졌다. 기차가 엎어진 것이다. 기차가 엎어지며 큰 충격이 가해졌고, 그 충격에 링루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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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으윽...”
폭발이 있고 나서 수십분이 지난 뒤 링루이는 눈을 떴다. 머릿속이 삐이 하고 울렸다. 그의 몸은 객차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충격의 여파로 흐릿한 눈으로 객차 안을 보니 창은 눈이 쌓여 있는 땅바닥과 합체되어 있었다. 아마도 기차가 선로에서 탈선해서 엎어진 모양이지. 그리고 이상한 군복을 입은 병사 둘이 객차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이. 여기 살아있는 놈은 없는 거 같은데?]
둘은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흐릿한 눈으로도 왼팔에 있는 빨간 완장이 눈에 띄었다.
[그러게. 1등석이라 뭐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둘은 엎어진 객차의 객실 안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었다.
[오히려 비어있는 칸이 더 많아. 부자놈들은 이미 다 튀었나봐.]
아무래도 둘은 1등석에 탑승한 상류층들의 시체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을 찾고 있었나보다. 그때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링루이는 눈을 감고 죽은척을 했다.
[쯧. 일본놈이나 중국놈 같은데 운 참 없구만.]
한 병사가 죽은 척 하고 있는 링루이를 보고 혀를 찼다.
[불쌍한 놈. 근데 이놈 몸도 뒤져볼까?]
[야. 어린 나이에 죽은게 불쌍하지 않냐?]
자신의 몸을 뒤지려는 병사를 다른 병사가 제지했다. 탐색을 다 끝냈는지 객차를 나갔다. 그러나 링루이는 한동안 죽은척을 하고 있었다. 저들이 다시 한번 들어올지 몰라서 그런 것이다. 1시간 후 링루이는 몸을 일으켰다.
객차 안은 난장판이었다. 유리란 유리는 모두 깨져서 볼품없었고 전등들은 모두 불이 나가있었다. 그리고 객차는 90도로 엎어져 있었다. 벽이 바닥이, 바닥이 벽이 되어 있었다. 자신이 타고 온 객실로 가보니 큰 구멍만 덩그러니 있었고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와 같이 왔던 보좌관들은 한명도 없었다.
슬픔도 잠시.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중요했기에 링루이는 일단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겨 기차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곳이 이렇게 되었으니 기차는 운행을 멈췄겠지. 그럼 걸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식당칸으로 향해 먹을걸 챙기기로 했다. 1등칸 밖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식당칸으로 향했다. 가보니 식당칸은 적군이 약탈했는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남은게 없나 살펴보았다.
탐색 결과 비스킷이 좀 남아있어서 그걸 챙겼다. 그리고 죽어있는 시체들의 품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해요. 내가 좀 빌릴게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을 뒤졌다. 뒤져보니 정말 기적적이게도 한 신사의 품에 성냥 한갑이 남아있었다. 링루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서류가방 하나를 가져와 거기에 비스킷과 성냥, 그리고 불을 지필 때 쓸 냅킨을 넣었다.
식당칸에서 탐색을 마친 링루이는 밖으로 나왔다. 시베리아의 추위는 언제 겪어도 적응이 안됐다.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기에 사력을 다해 철길을 걸었다. 자신의 기억에 따르면 아마 기차는 체렘초보와 앙가르스크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걸어서 갈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르쿠츠크까지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르쿠츠크에는 체코 군단이 있었다. 거긴 안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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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나와 철길을 한동안 걸었다. 어느세 하늘은 어두워졌다. 밤이 되면 기온이 더 떨어지기에 링루이는 바람을 피할 곳을 찾고 있었다.
계속 걸으며 주변을 보니 버려진 농가가 있었다. 이전에 살던 사람은 적군을 피해 피난가거나 백군에게 징집당했을 것 같았다. 암튼 바람을 피할 벽과 지붕이 있는 곳이 나타나 링루이는 환호했다. 농가에 들어가 난로에 불을 붙이곤 몸을 따뜻하게 했다.
오전까지만 해도 난방이 가득한 1등석이 춥다고 툴툴거렸지만 지금은 이 작은 난로가 그 무엇보다 따뜻했다. 비스킷으로 허기를 달래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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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링루이는 눈을 따갑게 비추는 햇살에 눈을 떴다. 어젯밤 활활 타오르던 난로는 이제 불씨만 남아 타닥타닥 잔잔하게 타고 있었다. 어쩐지 춥더라.
잠자리에서 일어나 비스킷으로 허기를 달래고 잠시 스트레칭을 해 잠을 날려보내곤 다시 갈 길을 걸었다. 이르쿠츠크까진 아직도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날 밤에는 지붕과 벽이 있는 구조물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링루이는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링루이는 눈집을 지었다. 나뭇가지로 골조를 만들고 그 위에 눈을 덮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릴적 아버지는 종종 자신에게 생존지식을 알려주곤 했다. 그땐 지루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때 아버지가 가르쳐준 생존지식이 진가를 발했다. 어쩐지 아버지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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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째. 오늘도 그제, 어제와 같이 계속 철길을 따라 걸었다. 3일째 하얀 눈만 그를 맞아주었다. 링루이는 점차 제정신을 잃어가는 거 같았다. 하지만 제정신을 지키기 위해 빰을 때리며 살아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돌아가면 하고 싶은거 다 할거야... 먹고 싶은 데로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자고, 하고 싶은 오락을 다 하고, 보고 싶은 책도 다 볼거야...”
다행히 오늘은 벽과 지붕이 있는 건물을 찾았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난로의 불을 쬐며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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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오늘도 다를 것은 없다. 걷고, 또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걸었건만 버려진 작은 마을이나 농가만 나올 뿐, 사람이 살아가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걸까?
오늘은 벽과 지붕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어 둘째 날처럼 노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비스킷이 점차 동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링루이는 먹는 양을 하루 2번에서 1번으로 줄이기로 했다. 이르쿠츠크에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데 식량이 바닥나선 안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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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째. 오늘도. 오늘도. 다를게 없다. 철길을 따라 걷고, 또 걸을 뿐이다. 눈에 발이 푹푹 빠져 걷는게 힘들었다. 링루이는 이러다 동상에 걸리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그는 건물에 잘 때마다 눈을 퍼와 난로 위에 올려 온수를 만들어 손과 발을 넣어 동상을 예방했다. 하지만 하루 단위로 건물-노숙이 반복되는지라 매일 그렇게 할 수 없다는게 단점이었다. 제발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신께 비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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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째.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오늘도. 걷는다. 걷는 것 밖에 하는게 없다. 매일 걷고 하얀 눈만 보니 정신이 나가는 것 같았다. 언제는 환상을 본 적이 있었다. 저 멀리 하얀 연기 같은 것이 꾸물꾸물 움직이는게 아닌가. 하지만 뺨을 때려 제정신을 되찾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제정신을 유지하는게 쉽지 않았다.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중 자신에게 무언가가 중얼거렸다.
“왜 네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거라고 생각해?”
링루이는 자신 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 설원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그건 너가 힘이 없어서 그런거야. 포식자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그 말은 타인의 말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마음이 보내는 소리라는 것이다. 링루이는 마음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충분히 힘이 있는데? 대지주고 부자라고.”
“그게 진정한 포식자일까? 돈만 많다고? 아니. 진정한 포식자란 돈, 권력, 무력 모두를 가지곤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을 뜻해. 그냥 돈만 있으면 호구잡혀서 잡아먹히는 쪽에 서게 될거란다?”
“에이. 사람들이 그런걸 보고만 있겠어? 날 도와주려는 이들도 많을거야.”
“사람을 그렇게 믿어? 인간의 본성은 매우 추악해. 당장 너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그 ‘인간’들 때문 아니니? 인간이란 돈뭉치만 보여주면 분노도 증오도 슬픔도 금세 잊는 멍청한 것들이란다?”
“다 그런 사람들만 있겠어? 날 도우려는 이들도 분명 있을거야.”
“없다면? 없다면 어쩔건데? 현실을 깨달으렴. 14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구나. 상냥함 따윈 한 푼의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것이야. 이 세상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권력, 무력, 그리고 돈 뿐이란다. 그 세가지만이 너를 영원히 지켜주고 배신하지 않을거야. 인간이란 그냥 이용만 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쓰레기처럼 버리면 되는거야.”
“너무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네. 모든 사람이 다 그런건 아니라고.”
당장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은 아무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천천히,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고 있었다. 스며든 말은 언젠가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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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째. 늘 같은 것만 반복되었다. 걷는거. 그거 말고 더 있겠는가? 그냥 계속 걸었다. 그것 말곤 하는게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주 큰 일이 있었다. 바로 비스킷이 바닥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제 먹을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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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째. 오늘도 걸었다. 밤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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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째. 오늘도 한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다. 극한의 추위에 배고픔이 더해지자 정신줄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살겠다는 본능 하나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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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째. 이젠 한계였다. 텅 빈 배로 계속 걷는다는건 불가능이었다. 그리고 먹은게 없으니 장이 안돌아가 몸에서 열이 안 났다. 하지만 살겠다는 본능이 뇌와 몸을 장악한 상태라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앞으로 향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저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링루이는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차피 환상을 보러 가도 죽고 여기서 계속 걸어도 죽을거. 환상이라도 보고 싶었다.
푹푹. 눈으로 뒤덮인 땅을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성큼성큼 힘차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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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근교의 일본군 주둔지. 한 병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에 따분해하며 하품을 크게 쉬었다. 그때, 저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왔다. 병사는 총을 들고 그 무언가를 향해 겨눴다.
“...줘요...!”
병사는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정확히 들으려고 했다.
“나좀... 살려...!”
그건 명백한 일본어였다. 병사는 놀라 안으로 들어가 상관에게 보고했다.
“무슨 일인가?”
“보고드립니다! 저 멀리서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다가옵니다. 그게 제게 뭐라고 말했는데 희미했지만 분명 일본어였습니다!”
“일본어라고?”
상관은 부하 몇 명을 불러 그 병사와 함께 주둔지 밖으로 향했다. 일본인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이상해서. 혹시 시베리아에 왔다 조난된 일본인 사업가인지, 아님 적군과 싸우다 전멸한 선두부대의 패잔병인가 해서 말이다. 멀리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살려줘요!”
분명한 일본어였다. 장교는 다가오는 사람이 일본인이라 생각해 부하들에게 명령해 데리고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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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링루이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을 보고 계속 걸었다. 그건 기적적이게도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일장기가 보이는 것을 보고 일본어로 도와달라 외쳤다. 어릴적부터 일본에서 산 그는 원어민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일본어가 유창했다.
“사람 살려!”
저 멀리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더욱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점점 가까워져서 눈으로 정확히 볼 수 있는 거리에 이르었다. 보니깐 일본군이었다.
“드디어 살...”
그 말을 끝으로. 링루이는 설원에 푹 쓰러졌다. 병사들이 빨리 그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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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에서 쓰러진 링루이는 한참 후에나 눈을 뜰 수 있었다. 일어나보니 자신은 한 막사 안에 있었다. 막사 한쪽에선 난롯불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일본군들이 자신을 구해준 것이리라.
자신이 살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을 무렵. 막사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병사는 자신이 깨어난 것을 보고 놀라 상관에게 보고했다. 한 장교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은 어떠십니까?”
“배풀어주신 친절 덕분에...”
링루이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인사를 했다. 장교는 감사인사를 받더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신은 일본인입니까?”
“예. 맞습니다.”
방금 전까지 설원을 해매던 링루이는 정신줄을 바로잡지 못해 무의식적에 맞다고 즉답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이라 답했기에 그냥 두었다. 만일 그가 중국인이라고 말했다면 화내며 설원으로 바로 내쫓거나 총살했으리라. 장교은 수첩에 글을 슥슥 적고는 다시 물었다.
“시베리아엔 왜 온겁니까?”
“주재원인 부모님을 따라왔다가 타고 있던 기차가 적군의 습격을 받아서...”
이건 그나마 정신줄이 잡히고 난 후 즉석에서 지어낸 명분이었다. 아빠가 고작 14살 먹은 아들을 업무 때문에 보냈다고 하면 장난하냐고 따질 것 같아서. 장교는 그 이후로 몇 번의 질문을 더 하고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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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일본군 후속부대가 도착했고 이들을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링루이는 마침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바람, 철썩이는 파도,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 모든걸 느꼈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 링루이는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만주의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얼마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후 여관방을 잡고 본가에 전화를 걸기 위함이었다. 그걸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또르르... 수신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그리고 반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집사였다.
“어 집사? 나야. 링루이.”
“도련님! 연락이 없어 걱정했습니다. 옴스크엔 잘 도착하셨습니까?”
“아... 저... 그게...”
링루이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타고 있던 기차가 적군의 습격을 받아 파괴된 일. 시베리아에서 열흘간 해매다 죽을 뻔한 일 등을 털어놓았다. 집사는 그 말에 놀라 급히 링팡렁에게 달려가 아들에게 있었던 알려주었다.
“그게 진짜냐?!”
아들이 죽을 뻔 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달려온 링팡렁은 수화기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예... 진짜에요.”
링팡렁은 잠시 침묵하고는 말했다.
“거기 꼼짝 말고 있거라.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마.”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마친 링루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비싼 호텔에 방을 잡았다. 사흘 후 링팡렁이 달려왔다.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링팡렁은 아들을 강하게 키우겠답시고 했던 일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일 뻔했다는것에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 앞에 무릎까지 꿇고 사과했다.
“앞으론 널 그런 곳에 보내지 않으마. 내게 자식이란 너 뿐이다. 너가 죽으면 이 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것이다.”
링루이는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사과하는데 받지 않을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링루이는 다음날 본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못했던 식사와 숙면, 오락을 모두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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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월. 링루이는 북양정부의 수도인 베이징 외교부에 도착했다. 지난번 시베리아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서 중화민국 정부가 합당한 조치를 취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링루이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양정부는 중앙에선 직예군벌, 안휘군벌, 봉천군벌이란 3개 대군벌이. 지방에선 온갖 소군벌들이 난립해 각자의 세력권을 만들곤 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내가 중국의 주인이 되겠다며 날뛰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때문에 뭘 어떻게 해보려 해도 될 리가 있나. 외국에서 일어난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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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택에 있는 자신의 방. 링루이는 자신에게로 온 편지를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가 솟구쳐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민국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분쟁지역에 간 것은 귀하의 잘못이며 중화민국 외교부는 외국의 내정에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습니다. 따라서 귀하의 요청은 반려되었습니다....”
실망스러운 답변이 담긴 편지를 꾸깃꾸깃 구기곤 쓰레기통에 확 던졌다, 외교부에 요청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교를 수립하지 않아 그쪽의 사과를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출국 비자를 내준 외교부에서 빈말이더라도 위로의 말을 보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ㅆㅂ 출국 비자를 내준게 누군데? 그래. 러시아 간건 내 잘못이다. 하지만 비자를 내준게 누군데?! 그 잘나신 외교부 아냐?
러시아가 위험하다는 사전 경고도 없었고 비자 발급 당시 '정말 가시겠습니까?' 같은 말도 안한 주제에 이렇게 뻔뻔 하게 나온다? 내가 비자 발급 받을때 내전 때문에 위험하지 않겠냐고 하자 '전쟁은 유럽에서만 일어나니 걱정마세요.'라고 했으면서?"
링루이는 중국 정부의 무능함에 크게 실망했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당한 피해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뭐? 조차지를 되찾겠다? 웃기고 자빠졌네! 일본군은 외국인도 구해주더만 이 나라는 자국민도 제대로 보호 못하네! 웃긴 것들! 이러니 침략이나 당하지!”
사실 그건 틀린 말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내밷은 말이라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일본인이란 질문에 맞다고 답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구해준 것이었다. 중국인이라 답했으면 구해주지 않고 당장 멱살잡고 주둔지 밖으로 끌어내거나 총살했을 것이었다.
”국가가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국가에는 충성할 이유가 없어! 나를 배신한 이따위 나라. 나라가 먼저 나를 배신했으니 나도 버리겠어. 난 이제 중국인으로 살지 않을거야.”
실망이 분노와 증오로 바뀐 그때. 시베리아의 설원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게 진정한 포식자일까? 돈만 많다고? 아니. 진정한 포식자란 돈, 권력, 무력 모두를 가지곤 모든 이들 위에 군림하는 이들을 뜻해. 그냥 돈만 있으면 호구잡혀서 잡아먹히는 쪽에 서게 될거란다?”
링루이는 갑자기 그게 떠올랐다.
“혹시 내가 그냥 돈만 있는 일반인이라 이렇게 나오는건가? 만일 내가 장쭤린이나 돤치루이, 차오쿤처럼 권력과 무력을 쥐고 천하를 흔드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나오지 않겠지?”
링루이는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는 이유가 그냥 돈만 있고 권력이나 무력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의심했다. 의심은 얼마 안가 확신으로 변했다.
“그게 맞을거야. 내가 권력과 무력이 없어서 그래. 돈만 있고. 돈은 있으니 권력과 무력만 쥐면 완벽하지. 그럼 내 말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거야. 또한 명성은 저절로 굴러들어 올거고. 그래,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이랬어.”
그 사자성어는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뇌는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했다. 이미 머리, 마음, 몸 모두 분노가 휘감아 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었다. 바꿔놓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는 수준이었지만.
“역시 가만히 있으면 안돼.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권력, 무력을 모두 손에 넣고 말겠어. 난 잡아먹히지 않을거야, 내가 타인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타인을 잡아먹는게 당연하지. 그게 세상의 이치이고 순리야. 난 포식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볼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이전에 그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온화하고 다정한 눈매와 눈빛은 아예 없어졌다. 날카로워진 눈매에는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 하나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독기 가득한 눈빛이 들어있었다. 언제나 포근한 미소가 있던 입에는 시베리아에서 직구한 차가움만이 감돌았다. 그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래. 이제야 좋은 얼굴을 하고 있네.”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1920년 2월의 일이었다. 죽어버린 한 사람의 시체 속에서 또 다른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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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933년 현재. 타마히코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자 잘못되었다면 자신은 없었을 것이다. 시가 연기를 한번 더 빨아들였다.
“후우.“
그때 있었던 사건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공산주의에 별 생각 없었던 그는 그 일이 있고나서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했고, 온화하고 친절하던 성격은 180도 바뀌었으며, 사람을 철저히 도구로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자신이 후지와라 타마히코로 살아간 것도 그때부터니까.
신문에 나온 사진에는 그때의 자신과 같은 이들이 수두룩 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마히코는 그걸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그냥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 정도면 그냥 ‘안타깝네’ 정도로 끝났겠지만 사진과 기사엔 과거 자신이 겪었던 일과 같은 일들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기억과 현재가 오버랩되며 일본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타마히코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1920년부터 지금까지 13년간 자신은 수많은 사람의 인생과 마음을 짓밟으며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에스페란토 학습회의 일원들과 함께하기로 한 이유가 만민협화에 대한 의지 같은게 아니라 그냥 그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하기 위함이었고.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니 이상이나 대의 없이 오로지 이득만을 쫓아 한 일들이 옳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그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저들과 함께한 것이 과거의 자신과 같은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았는데.
내 이득만을 중시한 내 인생과 행동이 과연 올바른 일이고 선택인지 궁금해졌다. 지난 13년간 그를 지배해온 생각과 가치관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민협화를 위해 이렇게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게 과연 옳은걸까? 시산혈해를 쌓고 만들어진 하나된 아시아보다 그냥 평화롭게 일본 따로, 조선 따로, 만주 따로, 중국 따로, 대만 따로 살림을 꾸리고 사이좋게 지내는게 더 좋지 않을까?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만들어진 협화 체제가 절대 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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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주인공을 구해준 것 때문에 일본군을 미화하는게 아니냐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절대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일본군이 착해서 주인공을 구해준 것이 아님을 밝히는 내용이 분명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전 절대 일본군과 일제를 옹호하지 않습니다.
@dear0904 뭐 그정도는 하겠죠.
댓글 투표가 우려되죠.
+ 지금 이거에 거부감이 드는건 주인공이 민족반역자인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주제에 그걸 합리화하는데 애쓰는 쓰레기 인간 말종으로 보여서라.(뭐 따로 살아 함께 힘을 합치자로 바뀐듯 한데.그래봤자 원작대로 만주에서 정변이 일어날 경우 만주에서 벌어지는 정책등으로 자폴렛은 강제 해산되고 재산도 손해를 볼텐데 퍽이나 가만 있겠네 하는 조롱밖엔 안드네요)
세탁하려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일단 전개가 되야 볼일일듯 합니다.
@931117 디어님이 말씀하신건 1인 RP 같은데 이게 왜 나옵니까?
@돈이 곧 진리 "근데 이것도 아마 소설형에 가까워서 좀 거부감 있긴 하실듯 합니다"라고 하시는데 제가 이거보고 거부감 느끼는거 보고 하는말인가 해서요
@931117 아... 저게 그렇게 읽힐수도 있군요 ㅋㅋ... 주어는 1인 rp가 맞습니다. 소설형과 비슷하다고 한 이유는, 원래는 참여자가 바꿀수 있는것이 엄청 크지 않기 때문 (위에 슈나이더님이 올린 링크가 참고 원본. 보면 댓글에 거의 번호만 가득...?) 이죠 ㅋㅋ... 여기서는 이거 이거 해봅시다! 하는걸 수용할 예정입니다만 ㅋㅋ...
@dear0904 그거랑 거부감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요.
일단 글은 혹시나 하는 심정이라 대충 봤는데 별건 없네요.
뭐 "또그러면 그만 하겠다는 각서 쓰세요"라는 식으로 나오면 얼마든지 오케이가 되는데.
기억이 안나거나 순간 욱해서 잊어먹고 어길 가능성을 스스로도 높게 보는지라
@931117 저번에 소설형으로 쓰는건 거부감이 있으시다고... ㅋㅋ... 그래서 이거 잘 되면 이거랑 비슷한거는 가능 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한 말이긴 합니다.
@dear0904 아 그거요...일단 소재부터 막힐터라 무리...
제가 전에 말했잖습니까 대체역사 설정 넣으면서 애착 가진 국가들이 늘었다고.
그래서 주연 국가 지정도 애를 먹었는데(77년이라면 소련,중국,미국 정도겠습니다만) 이렇게 1인 rp를 하라고요?
그것도 게임 기반으로 하면 한명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리거나 아직도 구 로디지아의 독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십중팔구 소재부터 고민하는걸로 땡이거나 예상 외의 상황에 휘둘린다 싶으면 아 망했네 하고 의욕부터 없어질걸요
그리고 어차피 무플이라 댓글 투표가 불가능하므로 의미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