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AH3sPqDdT0?si=Eo7ze-BAW1dOK73T
M. Glinka: Nocturne in E flat major (Olga Erdeli, harp)
글링카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1857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는 글린카는 10세 때부터 음악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삼촌의 집에는 러시아의 대부호만이 자랑하는 사설 관현악단을 가지고 있었다. 대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18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귀족 학교에 다녔는데,1818년 페테르TM부르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J.필드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졸업후인 1822년 작곡을 시작하여 아마추어로서 피아니스트 및 가수로 활동하였다. 1830년 가극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서 벨리니, 도니체티를 알게 되었다.
밀라노에서 작곡가로 인기를 얻었으나 러시아풍의 작곡을 지망, 1833년 귀국중에 베를린에서 덴에게 작곡을 배웠고 부친이 사망하자 러시아로 돌아가 러시아의 국민적 음악의 창조를 강조, 가극 《황제에게 바친 목숨》 등을 작곡하였다. 1842년에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를 초연하였으나 성공치 못하고 1844년 러시아를 떠나 파리에서 베를리오즈의 지원을 받아 관현악법을 배우게 되었으며, 그 동안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작곡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 등의 작품을 공부하였으며 오케스트레이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1825년에 피아노 변주곡을 출판하였으며 생애를 통해 이탈리아, 빈, 베를린, 파리, 스페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고 더구나 스페인에서는 민속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시도하였다. 스페인에서 민속음악을 수집하여 그곳에서 《스페인 서곡 제1번》을 작곡하여 성공을 하였다. 만년에는 러시아와 유럽을 여행하며 르네상스시대의 폴리포니를 연구하여 러시아 성가와의 접목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베를린에서 객사하였다.
1833년 에는그는 베를린에서 덴(Dehn 1799~1858)에게 작곡을 배웠기도 하였으며 음악 예술에 대해 올바른 개념을 겸하여 체득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음악이 서유럽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러시아의 국민적인 소재를 사용하였다. 그의 음악은 국민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결합으로 국민주의의 사상으로 성숙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오페라 [이반 수사닌 Ivan Susanin]과 푸슈킨의 시를 저본으로 한 오페라 [루슬란과 뤼드밀라 Rusoan i Lyudmila]를 1842년에 발표하였다. 1848년에는 오케스트라를 위한 판타지 [카마린스카야 Kamarinskaya] 등의 명작을 냈다.
1856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은사 덴을 방문하고 고대 악곡의 선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마침내 러시아의 음악을 세계적인 것으로 발표하게 되었다. 그는 민족성과 예술정을 결합시킴으로써 세계 최초로 국민 음악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이는 음악 분야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의 국민의 생활과 역사와 시정을 묘사하여 러시아 음악으 발전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의 창조 활동의 기반을 "음악을 창조하는 것은 국민이며, 작곡가는 그것을 편곡할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직접 국민의 소리와 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국민 대중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근대음악의 시조로 불리며, 뒤에 그의 지시에 따라 발라키레프, 세로프 등 젊은 음악가들이 그의 이념을 계승하여 국민음악파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영향권에 있던 러시아의 음악계를 진정한 러시아 음악의 창조를 제창하여 러시아 음악의 방향을 설정하고 민족성을 중시하여 빌리나(Bylina 러시아의 서사시, 민요)로부터 설화등 민족음악을 전승하였고, 외국의 민족음악을 연구, 고전적 형식과 단순한 화성, 온음계적인 선율 전개에 의해 러시아적 작풍을 완성하였다.그의 후배로서 이른바 러시아 5인조 외에 러시아 국민주의 작곡가들이 많이 나타났지만 글린카야말로 러시아 음악의 창시자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음악적 영향은 종교음악과 그의 가족이 소유했던 농노들의 악단의 연주를 들 수 있다. 1817년부터 페테스부르크의 교육전문학교에서 고전 음악을 공부한 뒤 필드, 이어 칼 마이어 Carl Meyer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또 요제프 뵘 Joseph Boehm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작곡가로서의 실제적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18세에 최초의 주요 작품인 피아노 또는 하프를 위한 모짜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했다(1822). 이듬해 카프카스를 여행하며 그 지방의 음악과 접촉했다. 수년 동안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한 그는 러시아어나 이탈리아어의 가곡과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악장의 소나타(1826)를 작곡했다.
1830년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3년간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는데 이탈리아에서는 벨리니, 도니제티, 롯시니 등의 오페라를 발견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베를린에서 5개월간 지그프리트 빌헬름 덴 Sigfried Wilhelm Dehn에게 대위법을 배웠으며 아울러 그의 음악지식을 체계화시켰다. 덴은 그의 단 한 사람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1834년에 러시아로 돌아온 그는 시인 바실리 안드레비치 주코프스키 Vasilii Andreevich Zhukovskii가 제안하여, 로젠 G. F. Rosen 남작이 각색한 역사적인 주제의 러시아어 오페라 이반 수사닌의 작곡을 시작했다.
이 주제는 이미 1815년에 이탈리아인 작곡가 카보스에 의해서 다루어진 것으로서 17세기 초에 한 농부가 책략을 써서 나중에 황제가 되는 미하일 로마노프를 습격에서 구하며 대신 이 농부가 희생된다는 줄거리이다. 니콜라이 1세의 마음에 들도록 이반 수사닌은 황제에게 바친 목숨라고 제목을 바꾸어서 1836년 구력 11월 27일(12월 9일) 페테스부르크에서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청중으로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용음악이라고 하여 몇몇 평론가로부터는 불만을 샀다.
1837년부터 1839년에 걸쳐서 글린카는 궁정 예배당 합창단의 합창장을 지냈다. 1840년에는 네스토르 바실리에비치 쿠콜니크 Nestor Vasil'evich Kukol'nik의 비극을 위한 부수음악 홀름스키공(公)을 작곡했다. 수년간 그는 두 번째 오페라, 푸시킨의 운문 이야기에 의한 루슬란과 루드밀라의 작곡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작곡을 시작하여 꼭 6년째가 되는 1842년 구력 11월 27일(12월 9일)에 상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연주목록에 반드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듬해에 이탈리아 극단이 페테스부르크에 도착함으로써 러시아 음악애호가의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실망한 글린카는 러시아를 떠나(1844)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그는 1844년부터 1845년에 걸친 시즌을 파리에서 보내고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었으며, 그의 덕택으로 1845년 3월과 4월 세 차례에 걸친 연주회에서 글린카의 작품이 몇 곡 연주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곡이 연주된 최초의 러시아인이 되었다. 그 후 스페인에서 2년 동안 체류(184547)하면서 스페인의 민속음악을 연구했다.
이 체류 기간 동안 오케스트라를 위한 두 곡의 환상곡 호타 아라고네사(1845)와 후에 정정하여 마드리드 여름밤의 추억으로 바뀐 카스틸랴의 추억 Recuerdos de Castilla(184849)이 만들어졌다. 1847년부터 1852년에 걸쳐서는 노보스파스코이에와 바르샤바, 그리고 페테스부르크를 전전했다. 1848년 카마린스카야를 작곡했는데, 이것은 러시아 민요의 두 주제에 기초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환상곡이다. 1852년부터 1854년까지 글린카는 파리에 거주했으나 건강이 나빠졌기 때문에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고골리의 타라스 불바에 의한 우크라이나 교향곡에 손을 댔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파기시키고 말았다. 페테스부르크로 돌아와서는 자서전의 집필을 시도(1854-55)했으며, 1856년 4월 옛 스승 덴과 옛 종교음악의 형식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삼아 러시아 교회 성가의 새로운 화음진행을 연구하기 위해서 베를린으로 향했다. 그러나 1857년 2월 15일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 중에서 러시아의 노래를 인용하거나 민족적인 주제에서 악상을 얻은 사람은 글린카가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일은 이미 디베르티멘토로서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파슈케비치 Vasilii Aleksee\vich Pashkevich, 포민, 그밖의 18세기 말의 작곡가들이 했다. 그러나 민족적 선율을 진정 자신의 어법에 넣어서 러시아 오페라에 연극적인 범위를 부여하고, 또 그것을 종교적 애국주의의 장엄성으로 바꾼 것은 글린카가 처음이다. 그의 두 편의 오페라에서는 번호 오페라식의 분할, 노래의 기교에의 치우침, 그리고 운율법에 대한 배려가 적다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이 분명히 보인다.
그러나 이반 수사닌의 합창과 아리아는 민중이나 민중을 대표하는 영웅에게 서정시적 위대성을 부여했고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를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루슬란과 루드밀라는 러시아의 옛 장면과 동양 취미적인 옛 이야기라는 면에서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이야기 오페라 속에서 재현된다. 글린카는 루슬란에서 우화적인 칸틸레나를 부르는 러시아의 음유시인을 처음으로 등장시켰으며, 그는 동양적 선율과 리듬을 사용한 최초의 작곡가이기도 했다(페르시아인의 합창, 레즈긴카, 체르노모르의 행진).
이미 홀름스키공에서 느낄 수 있었던 동양 취미는 스페인 환상곡에서 다시 나타난다. 러시아 교향악파의 원류가 되는 카마린스카야는 독일식 교향곡에 대항하여 주제의 패러프레이즈나 악기에 의한 변주의 독자적인 원칙을 세웠다. 글린카의 관현악법은 베를리오즈의 찬사를 받은 색채가 선명한 음색이나 음의 뉘앙스에 대한 감각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그의 화성의 대담성은 종종 뛰어나다. 글린카의 많은 가곡, 특히 연작가곡 페테스부르크에 의한 작별(1840)은 이탈리아풍의 아리아와 프랑스의 로망스의 영향을 느끼게 하며, 러시아의 노래와 낭만파의 발라드의 영향도 받고 있다.
피아노곡이나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들은 살롱음악에 속했고 그다지 흥미를 끌지 못하는 곡들이었다. 글린카는 러시아의 시와 문학의 진정한 창시자인 주코프스키, 푸시킨, 고골리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생전부터 오도예프스키 공작처럼 계몽된 애호가들의 지지를 받았고, 유명한 평론가인 알렉산드르 세로프와 블라디미르 바실리에비치 스타소프 등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았다. 그는 다르고미슈스키와 젊은 발라키레프의 음악적 사명을 고무했고, 5인조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tR1L8_IxYQs?si=Ldc6xGTQ7_QF6SCX
Glinka - Trio pathétique - Oistrakh / Knushevitsky / Obor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