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國十八賢-7.
7.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 - 1519)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부친이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자 그 곳에 따라갔다가 17세(1498) 때에 무오사화로 인해 이웃 고을인 희천(熙川)으로 유배온 김굉필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중종 5년(1510) 2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4세때에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 )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으나 사양하고,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을 거듭하여 4년여 만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는 안팎의 많은 비판 속에 중종 14년(1519) 12월 훈구대신의 탄핵에 의하여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사상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이념에 의해 천리가 구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이념이자 실천운동)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할 수 있다. 조광조는 중종 12년(1517) 정 5품인 교리(校理)로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개혁 작업을 실행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바로 향약보급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촌에 구현하고 동시에 향촌은 사림파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변화시킴은 물론, 『가례(家禮)』의 보급으로 조선의 풍습을 일변시켰다. 동왕 13년(1518)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종 2품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인재를 과거제도가 아닌 천거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를 통해 사림의 세력이 확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을 배경으로 중종 14년(1519)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공격한다. 그는 반정공신의 수를 줄여야 한다며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이 훈작을 삭탈 당하게 된다. 결국 사림파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유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이황과 이이는 나라 다스릴 재주는 타고났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선조 즉위년(1567)에 사림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양현사(兩賢司), 심곡서원(深谷書院)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我國十八賢- 8.
8.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 - 1553)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었으나, 사림의 문초에 소극적으로 임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 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1547)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하다 명종 8년(1553)에 생을 마쳤다.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언적의 이러한 학문은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을 수립한 것이다. 다만 호가 '회재(晦齋)'인 점에서 회암(晦庵: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27세(1517)에 조선조 성리학사상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태극(太極)에 대한 개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언적은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에 가세한 것인데, 그는 정통 주자학의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였다. 곧 태극의 이(理)가 기(氣)보다 선행하여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가 된다.
이언적은 만년의 강계에서의 유배생활(1547 - 1553)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비록 주자의 『장구(章句)』와 『혹문(或問)』의 보충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주자와 다른 견해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는 주자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제를 벗어나 구경(九經:『중용』 22장,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柔遠人, 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을 해석하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구인록(求仁錄)』(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禮)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奉先雜儀)』(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1550)는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작이라 할 수 있다.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원(文元)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
我國十八賢-9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 - 1570)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12세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14세경 부터는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여 흠모하였다. 20세 경에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쳤으며, 이후로 병을 항상 달고 다녔다고 한다. 중종 22년(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3세경에 다시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 무렵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얻고 그 내용에 크게 심취하였다 한다. 동왕 29년(1534)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39세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년에 정국이 혼미해지자 낙향의 뜻을 세우던 중, 43세 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자 성묘를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하지 않은 것이 20여회에 이르렀다. 46세 때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 무렵에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그러던 중 자주 임관의 명을 받자, 중앙관직을 피하여 외직을 지망하였다. 48세 때에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전임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의 하사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니 바로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이 사액서원은 그 후 향약과 함께 사림들이 거듭 흥기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된다. 명종 7년(1552)에 학교가 폐이(廢弛)함을 근심하여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이황을 발탁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아 학문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60세(1560)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68세에는 선조의 명으로 대제학 지경연에 출사하여, 성군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조목인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를 올린다. 그리고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리학을 10장의 그림으로 풀이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다.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체계적이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거의 독학으로 대성하였다. 이황은 중종 38년인 43세 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입수하여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에 심독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숙시켰으며,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3세(1553)에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였고, 이로 인해 기대승(奇大升)과 7년 여에 걸쳐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54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 논쟁하였다. 57세에는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고, 58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자성록(自省錄)』을 완성하였다. 63세(1563)에는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을 지었고, 66세에는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며, 68세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로 이황은 동양 삼국의 학자들에 의해, 주자를 이은 최대의 학자로 칭송되며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 연구원이 창립된 이후,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소, 대만 국립사범대학 내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으며,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 독일의 함부르크, 본에 퇴계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6년 이래 해마다 세계 도처에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文純)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이황을 종사한 서원은 전국에 40여 곳에 이른다.
我國十八賢-10.
10.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 - 1560)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부친은 참봉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玉川) 조씨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중종 26년(1531)에 성균사마시(成均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및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어 세자를 보도(輔導)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채 1년도 안되어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집 남쪽 산골짜기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김인후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데,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보다는 시문집을 더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적 성과는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도학에 정통한 호남의 거유를 뽑자면 당연 김인후를 뽑을 수 있다.
김인후는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기대승의 설에 동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대승이 주정론(主情論)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게 된다.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이황은 김인후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율력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 我國十八賢-11.
11.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 - 1584)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증좌찬성(贈左贊成) 원수(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명종 3년(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후, 다음해에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23세(1558)에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해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한 후, 전후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려졌다.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여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이이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을 뿐더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이는 19세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류해 왔는데, 37세(1572)에 이르러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이루어진다. 성혼은 기대승과 이항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따르려고 하였다. 성혼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이에게 물었고 이로 인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을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율우논변(栗牛論辯)' 이라한다. 여기서 이이는 이황과 기대승은 물론, 서경덕, 노수신, 나흠순 등의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 대 제유(諸儒)의 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하게 된다. 이이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제유의 설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요지는 『성학집요』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모두 들어있다.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주리론적 관점에 서게 되고,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기론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정치활동에도 연결된다. 이황의 경우 정치 현실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려 한데 비해,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곧 34세에 올린 현실 개혁에 관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39세에 지은 [만언봉사]와 십만양병설과 대동법의 시행 등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과 심오한 학문은 많은 저술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전술한 『동호문답』, [만언봉사] 외에도 40세에 지은 『성학집요』 45세 때 지은 『기자실기(箕子實記)』 47세에 임금의 명으로 지은 [인심도심설]과 이해에 지은 [김시습전]과 [학교모범] 48세 때의 [시무육조]등을 들 수 있다. 이황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를 형성한 데 비하여, 이이는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된다.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성환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黜享)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자운서원, 송담서원 귀암서원, 운전서원, 백록동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어있다.
我國十八賢-12.
12.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1535 - 1598)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호원, 호는 우계(牛溪), 묵암(默庵), 본관은 창녕 이다.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종 9년(1554)에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대신에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하면서,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참소를 당하였으니,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 1602)에 연루되어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동왕 15년(1689)에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승무(陞 )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과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죽림서원, 물계서원 파산서원, 운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7. 문정공 조광조(文正公 趙光祖, 1482 - 1519) 동배향(東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개국공신 온(溫)의 5세손으로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부친이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자 그 곳에 따라갔다가 17세(1498) 때에 무오사화로 인해 이웃 고을인 희천(熙川)으로 유배온 김굉필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중종 5년(1510) 29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4세때에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 )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으나 사양하고, 같은 해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을 시작하였다. 중종의 총애를 받은 조광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을 거듭하여 4년여 만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조는 안팎의 많은 비판 속에 중종 14년(1519) 12월 훈구대신의 탄핵에 의하여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개혁사상은 지치주의(至治主義: 유학의 이념에 의해 천리가 구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 정치이념이자 실천운동)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할 수 있다. 조광조는 중종 12년(1517) 정 5품인 교리(校理)로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과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배경으로 개혁 작업을 실행한다. 그 첫 번째 작업은 바로 향약보급운동이라 할 수 있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는 것이다.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향촌에 구현하고 동시에 향촌은 사림파가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을 변화시킴은 물론, 『가례(家禮)』의 보급으로 조선의 풍습을 일변시켰다. 동왕 13년(1518)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소격서(昭格署)를 폐지시켰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종 2품인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올라 사실상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賢良科)의 도입을 들 수 있다. 인재를 과거제도가 아닌 천거로 등용하는 제도로, 이를 통해 사림의 세력이 확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사림 세력을 배경으로 중종 14년(1519)에 훈구세력인 반정공신(反正功臣)을 공격한다. 그는 반정공신의 수를 줄여야 한다며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공신의 3/4에 해당하는 76인이 훈작을 삭탈 당하게 된다. 결국 사림파의 독주에 불만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고,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당시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성균관 유생을 비롯한 1천여 명의 유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이황과 이이는 나라 다스릴 재주는 타고났으나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계에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
선조 즉위년(1567)에 사림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 문묘에 종사되었다. 죽수서원(竹樹書院), 양현사(兩賢司), 심곡서원(深谷書院)등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 我國十八賢- 8.
8. 문원공 이언적(文元公 李彦迪, 1491 - 1553) 서배향(西配享) 제4위(第四位)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게 되었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다. 중종 25년(1530) 사간이 되어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자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뒤 중종 32년(1537) 김안로가 몰락하자 다시 벼슬길에 올라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나자 추관(推官)이 되었으나, 사림의 문초에 소극적으로 임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 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1547)에 연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하다 명종 8년(1553)에 생을 마쳤다.
이언적은 조선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바로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시킨 것이 그것이다. 이언적의 이러한 학문은 스승에게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독자적인 학문을 수립한 것이다. 다만 호가 '회재(晦齋)'인 점에서 회암(晦庵: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르려 한 점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27세(1517)에 조선조 성리학사상 최초의 본격적 논쟁이라 할 수 있는 태극(太極)에 대한 개념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언적은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전개된 무극태극론(無極太極論)에 가세한 것인데, 그는 정통 주자학의 주리론의 입장에서 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주장하였다. 곧 태극의 이(理)가 기(氣)보다 선행하여 인륜도덕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의 견해는 이황에게 전수되어 영남학파 성리설(性理說)의 선구가 된다.
이언적은 만년의 강계에서의 유배생활(1547 - 1553)동안 많은 저술을 하였다.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1549)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은 비록 주자의 『장구(章句)』와 『혹문(或問)』의 보충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주자와 다른 견해를 여러 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1553)는 주자의 『중용장구』나 『중용혹문』의 체제를 벗어나 구경(九經:『중용』 22장,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群臣, 子庶民, 柔遠人, 懷諸侯)을 중심으로 중용을 해석하려는 독창적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구인록(求仁錄)』(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禮)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奉先雜儀)』(1550)에서는 유학의 핵심개념인 '인(仁)'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실천 규범인 예를 제시하였는데, 『봉선잡의』(1550)는 조선조 후기 예학파의 선구작이라 할 수 있다. 선조 즉위년(1567)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원(文元)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있다.
我國十八賢-9
문순공 이황(文純公 李滉, 1501 - 1570) 동배향(東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이며,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12세에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14세경 부터는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좋아하여 흠모하였다. 20세 경에는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쳤으며, 이후로 병을 항상 달고 다녔다고 한다. 중종 22년(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3세경에 다시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이 무렵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얻고 그 내용에 크게 심취하였다 한다. 동왕 29년(1534)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39세에는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러나 중종 말년에 정국이 혼미해지자 낙향의 뜻을 세우던 중, 43세 때에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제수되자 성묘를 핑계로 낙향하였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하지 않은 것이 20여회에 이르렀다. 46세 때는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 무렵에 호를 '퇴계(退溪)'라 하였다. 그러던 중 자주 임관의 명을 받자, 중앙관직을 피하여 외직을 지망하였다. 48세 때에 풍기군수가 되었는데, 전임군수인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의 하사를 청하여 이루어졌으니 바로 조선조 사액서원의 효시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이 사액서원은 그 후 향약과 함께 사림들이 거듭 흥기 할 수 있었던 주요한 기반이 된다. 명종 7년(1552)에 학교가 폐이(廢弛)함을 근심하여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이황을 발탁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아 학문을 진작시키도록 했다.
60세(1560)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68세에는 선조의 명으로 대제학 지경연에 출사하여, 성군이 되기 위해 지켜야 할 조목인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疎)]를 올린다. 그리고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리학을 10장의 그림으로 풀이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린다.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학자들이 성리학을 체계적이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주자학을 집대성한 이황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이황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거의 독학으로 대성하였다. 이황은 중종 38년인 43세 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입수하여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에 심독하여 자신의 학문을 완숙시켰으며,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53세(1553)에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였고, 이로 인해 기대승(奇大升)과 7년 여에 걸쳐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54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에 대해 논쟁하였다. 57세에는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하고, 58세에는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자성록(自省錄)』을 완성하였다. 63세(1563)에는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을 지었고, 66세에는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으며, 68세에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완성한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후일 영남학파를 형성함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로 이황은 동양 삼국의 학자들에 의해, 주자를 이은 최대의 학자로 칭송되며 성인으로까지 일컬어지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 연구원이 창립된 이후,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소, 대만 국립사범대학 내에 퇴계학 연구회가 부설되었으며,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 뉴욕, 하와이, 독일의 함부르크, 본에 퇴계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6년 이래 해마다 세계 도처에서 국제학술회의가 개최되고 있다.
선조 3년(1570) 영의정에 추증하고 동왕 9년(1576)에 문순(文純)이라 증시(贈諡)하였으며,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후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비롯하여 이황을 종사한 서원은 전국에 40여 곳에 이른다.
我國十八賢-10.
10. 문정공 김인후(文正公 金麟厚, 1510 - 1560) 서배향(西配享) 제5위(第五位)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담재(湛齋)이고,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대대로 호남의 장성에서 살았다. 부친은 참봉 김령(金齡)이며, 모친은 옥천(玉川) 조씨이다.
열 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으며, 중종 26년(1531)에 성균사마시(成均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중종 35년(154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중종 38년(1543)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겸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設書) 및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어 세자를 보도(輔導)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채 1년도 안되어 인종이 승하하고 을사사화(1545)가 일어나자 병을 칭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김인후는 인종을 지극히 사모하여 매년 인종의 기일인 7월 1일이 되면 집 남쪽 산골짜기에서 밤새도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 한다.
김인후는 조예가 초월하고 기상이 호매하여 도학, 절의, 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손꼽히는데, 도학(道學)에 관한 저술보다는 시문집을 더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적 성과는 유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도학에 정통한 호남의 거유를 뽑자면 당연 김인후를 뽑을 수 있다.
김인후는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이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해 논쟁을 벌이자, 기대승의 설에 동조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대승이 주정론(主情論)을 세우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게 된다. 또한 노수신의 [숙흥야매잠해]에 대해서도 논쟁을 벌였는데, 이황은 김인후의 뛰어난 견해에 미칠 수가 없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뿐만 아니라 김인후는 천문, 지리, 의약, 율력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정조 20년(1796)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大匡輔國 崇祿大夫 領議政 兼 令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 我國十八賢-11.
11. 문성공 이이(文成公 李珥, 1536 - 1584) 동배향(東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부친은 증좌찬성(贈左贊成) 원수(元秀)이며, 모친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웠고, 명종 3년(1548)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를 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한 후, 다음해에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23세(1558)에 이황(李滉)을 방문하고, 그해 겨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한 후, 전후 아홉 번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려졌다. 29세에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여 우찬성(右贊成)에까지 이르렀다.
이이는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을 뿐더러 학문적으로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이이는 19세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류해 왔는데, 37세(1572)에 이르러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이 이루어진다. 성혼은 기대승과 이항 사이에서 벌어진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따르려고 하였다. 성혼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이이에게 물었고 이로 인하여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논쟁을 두 사람의 호를 따서 '율우논변(栗牛論辯)' 이라한다. 여기서 이이는 이황과 기대승은 물론, 서경덕, 노수신, 나흠순 등의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 대 제유(諸儒)의 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하게 된다. 이이는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제유의 설을 비판하였으며, 특히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한다. 이 논쟁의 요지는 『성학집요』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 모두 들어있다.
이황이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여 주리론적 관점에 서게 되고, 이이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주기론적 입장에 서게 된다.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정치활동에도 연결된다. 이황의 경우 정치 현실을 떠나 산림에 은거하려 한데 비해,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에 나섰다. 곧 34세에 올린 현실 개혁에 관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39세에 지은 [만언봉사]와 십만양병설과 대동법의 시행 등을 주장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과 심오한 학문은 많은 저술로 나타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전술한 『동호문답』, [만언봉사] 외에도 40세에 지은 『성학집요』 45세 때 지은 『기자실기(箕子實記)』 47세에 임금의 명으로 지은 [인심도심설]과 이해에 지은 [김시습전]과 [학교모범] 48세 때의 [시무육조]등을 들 수 있다. 이황이 남인 중심의 영남학파를 형성한 데 비하여, 이이는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영남학파와 함께 쌍벽을 이루게 된다.
인조 원년 계해년(1623)에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숙종 7년(1681)에 성환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으나 동왕 15년(1689) 일시 출향(黜享)되었다가 갑술환국(甲戌換局, 1694) 때에 다시 종사되었다. 자운서원, 송담서원 귀암서원, 운전서원, 백록동서원 등 20여개 서원에 제향되어있다.
我國十八賢-12.
12. 문간공 성혼(文簡公 成渾, 1535 - 1598) 서배향(西配享) 제6위(第六位)
자는 호원, 호는 우계(牛溪), 묵암(默庵), 본관은 창녕 이다.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명종 9년(1554)에 같은 고을의 이이와 사귀면서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대신에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갔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과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하면서,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많은 참소를 당하였으니, 사후에도 기축옥사(己丑獄事, 1602)에 연루되어 관직이 추탈되기까지 하였다.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숙종 7년(1681)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동왕 15년(1689)에 출향 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다시 승무(陞 )되었다. 저서로는 『우계집』과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등이 있다. 죽림서원, 물계서원 파산서원, 운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