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년 08월 13일 (목)
제목 :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오늘의 말씀 : 빌립보서 2:12-18 찬송가: 286장(구 218장)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중심 단어
구원을 이루다, 하나님, 그리스도의 날, 기뻐하다
주제별 목록 작성
행하시는 하나님
13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신다/ 각 사람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도움말
1. 어그러지고(15절): 원래 말라 비틀어진 나무를 가리킬 때 사용된 표현이다. 여기서는 영적으로 사악하고 왜곡된 것을 의미한다.
2. 전제로 드릴(17절): ‘쏟아붓다’라는 뜻이다. 전제는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다. 여기서는 복음을 위해 자신의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쏟아붓겠다는 순교적인 각오가 암시돼 있다.
말씀묵상
연합의 중요성
성도의 연합은 성화를 이루는 데 필수적인 요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며 고린도전서에서도 동일한 교훈을 전하고 있습니다(고전 3장). 바울은 분쟁을 일으키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성도 간에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은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성도의 교제를 이루느냐 그러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최종적인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성도의 연합은 이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의 모범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베풀어주셨던 그리스도를 따라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목숨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들의 삶이 온전한 산 제사가 되는 데 자신의 생명이 전제로 부어지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34-35).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을 통해 우리는 그가 시종일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주며 그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쟁적이고 시비를 가리기에 급급했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바울의 이런 희생과 섬김의 모습을 통해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도움질문
본문 관찰
1. 본문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나타내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12, 14절)?
3. 본문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깊은 묵상
1.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서 여러분이 감당해야 할 섬김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2. 구원을 이루는 방법과 성도의 섬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3.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특별한 말씀(깨달은 점, 느낀 점, 적용점 등)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묵상>
말씀 묵상을 통해 바울을 만날 때마다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내 안에는 한 가지 질문만 계속 반복하게 된다. “어떻게?”...
어떻게 바울은 이렇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교회와 성도들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빌립보서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다시 바울의 마음을 바라보며 내 빈 마음에 복음으로 채워보려고 기도하게 된다.
“1:3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바울의 사랑 안에는 언제나 복음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했던 것도, 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기도했던 것도 단순히 인간적인 정이나 친밀한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들꽃공동체가 들꽃가족이 ‘함께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 말씀을 붙들어 본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복음으로 연결된 관계는 이토록 깊고 끈끈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 나도 들꽃가족들이 이렇게 복음으로 연결된 끈끈하면서도 세겹줄로 묶인 관계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바울은 성도들을 바라볼 때에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보았다.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래서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부족함만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속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실 성숙하고 성장하고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울을 바라보면서 가장 부끄럽게 하는 것은 바울은 언제나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의 삶의 기준은 분명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사는가? 편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가? 유명해 지는가? 능력이 나타나는가?”가 아니었다. “내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존귀하게 되시는가?”가 삶의 기준이었다. 이런 모습 앞에 오늘도 입을 다물고 자책하게 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도대체 어떻게 죽는 것이 유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죽음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고 더욱 함께하는 것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래서 죽음은 더 이상 바울을 두렵게 하거나 협박할 수 없었다.
주님은 오늘 이 마음을 사모하게 하신다.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한 삶,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일” 그것이 오늘 내가 살아가야 할 목적과 이유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또 질문하게 된다. “어떻게 예수님이 한 사람의 삶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의 삶을 전제로 드릴 만큼 예수님이 삶의 의미가 되고, 심지어 죽음의 의미까지 될 수 있을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 말씀을 묵상할수록 바울의 기쁨의 수준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진다. 아니 창피할 정도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너희도 좀 알고 빨리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라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솔직히 내가 바울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너희도 나와 함께 이 고난에 참여하라.”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는다.
오늘 이 부분이 내게 참으로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과 섬김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을 그 제물 위에 부어지는 전제처럼 표현한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내가 죽어도 괜찮다. 내가 이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져 사라지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도 감사하다. 나의 생명이 부어지는 것도 기쁨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바로 서고 하나님께 드려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너희도 나의 이 기쁨에 함께 참여하라.”
왜 이 고백에 눈물이 나는 것일까? 이 모습은 결국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복음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통해 누군가가 믿음 안에서 살아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복음을 위해 부어지는 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았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살아나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다. 하지만 말씀 앞에 선 나는 아직도 부끄럽다. 나는 희생 없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 죽음 없는 사랑을 하려고 한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진다. 내가 힘들면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바울의 사랑은 그것조차 기쁨이 되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었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그리고 이어서 성도들이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2장 1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하였음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도 나는 바울의 목회가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섬겼던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목회자이니 내 말에 순종해야 한다”는 태도를 가지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권위가 아니었다. 오직 성도들의 변화와 성장이었다.
성도들이 여전히 원망하고 서로 시비하며 분열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면, 바울이 아무리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다고 해도 그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성도들이 원망과 시비를 넘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빛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야말로 바울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다.
너희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상 가운데서 빛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너희의 삶이 변화되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빌립보 성도들은 얼마나 힘을 얻었을까?
“그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세상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구나.”
그래서 성도들의 변화가 곧 바울의 자랑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정말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이 나의 기쁨인가?
성도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을 볼 때 내 마음이 가장 기쁜가?
아니면 성도들의 변화보다 내가 잘되고, 내 상황이 좋아지고, 내 환경이 편안해질 때 더 기뻐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도 바울을 통해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사랑의 주님 오늘 긴 묵상을 통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의 기쁨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내가 잘되는 것보다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기를 기뻐하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내가 인정받는 것보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자라는 것을 더 기뻐하고 기뻐하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할 때 전제로 부어지는 희생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누군가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면 기뻐할 수 있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바울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살아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그 사랑으로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돕는 섬기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ttps://youtu.be/df3nhrpTX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