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국이 난 클루미 티셔츠를 입은 나와
너는 자동차 본네트에 걸터앉아
서로에게 괴담들을 들려준다
괴담이 하나도 무섭지 않으면
그때마다 저녁이라는 말이 등 뒤에서
테레민이라는 말을 잘못 발음한 소리처럼 타이핑되어 흘러가는 기류에
기운이 빠졌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워크맨과 헤드셋을 저 멀리 벗어놓고 있으면
악기가 화기로 변한 것 같은 소리가 들리지
이거는
이거는 너무 오래 된 옛날 이야기야
이를테면
공기에 비유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공기가 없었을 것 같던 시절의 이야기
모든 괴담은 옛날 이야기 아니었니?
하지만 그런 건
시절이 아니라 계절처럼 느껴져 오고
계절처럼 느껴진다 싶으면
그냥 계보라는 이름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싶었다
어째서 괴담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괴담 속에서 외로워 보이는 걸까
온 세상에 사람이 마흔 일곱명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마흔 일곱명이 돌아가면서
단 일초도 쉬지 않고 마흔 일곱 개의 괴담을 발설해도
첫 번째 괴담
두 번째 괴담
세 번째 괴담……
마흔 일곱 번째 괴담
그렇게 모든 사람 수 만큼의 괴담을 쌓아 올리고 또 올려도
여기와 똑같은 세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주인공들은 이 지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로워진다면
끝내 외로워지고야 만다면
그때는 소름이 끼쳐오도록
나 강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인간의 스물세 살이라고 허공에 중얼거려 보는 시간
그건 분명
짐승의 스물두 살을 생각해도 같은
계보로 상상되는데
스물세 살인 너의 허리에 고개를 파묻고 심장이 터질듯 웃어보면
너는 네 스물두 살의 계보가 아닌 것 같이
뜨겁고
뜨거워서 잠이 쏟아지고
너의 유년은 네 계보가 아닌 것
같고
계보가 아니라면 계절일까
혜린아 너는 어느 행성의 계절일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악기소리가 화기소리로 들려오는 행성과
목소리는 아무리 멀리서 들어도 목소리인 행성이
같은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이
녹아내려 가는 체리향 아이스크림처럼 되돌아가며 상기된다
그런 기억은 왜 이렇게 독한 것인지 항암제보다도
필로폰보다도
마음이라는 어는점이
괴담에서 계단으로 계단에서 제단으로
하강하는 일은
괴담이라는 단어도 계단이라는 단어도
제단이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추동되는 걸까
등 뒤가 서늘해져 오는 건
죽지 않아도 시신의 냉기를 가질 만큼 너무나도
생명력이 지독한 사람과 사랑에 푹 빠져 버리는 기분이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생명만 있는 것처럼
조심조심
조심조심
그런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주석과 발문들이 이끼처럼 돋아나도
끝끝내 사람만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건 영원히 괴담으로 남을 것 같아
결말은 있지만 영원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네가 들려주는 음성은
숨이 끊어지는 소리까지도 윤문되어 있는 듯 울려나갔다
서령아, 귀신도 아닌데 귀신의 질료를 가진 것들이 사방에 너무 많아
천사보다 아름다운 것들이 이 땅에는 넘쳐나는데
천사만 없다는 사실이
나를 공포에 질리게 해 서령아
정말로 공포에 대해 생각하면
그다음엔 절망하기에도 어색하고
간절해지기에는 더욱더 어색하고
아무런 불순물 없이 홀로 남은 공포의 주인은
얼마나 아리따울까
내가 오로지 나의 공포만을 원형으로 가진다면
오로지 나의 애정만을 원본으로 가진다면
나는 얼마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울까
찢어진 클루미는 펄럭이고
너와 난 자동차 본네트에 걸터앉아 괴담을 주고받았다
워크맨이 툭
하고 꺼지는 소리에 우리가
마음이 뒤바뀌어 버릴 듯 화들짝 놀란다
본네트는 흔들리지 않고
본네트는 찌그러지지 않고
그림으로 그려본다면
귀신보다
사람보다 위협적인 것을
그려 넣어야 할 것이라고 상상되었다
서로를 과녁처럼 너무 오래 바라보던 중이어서
누군가 오래오래 목을 조른 것 같이
목이 시큼했다
그건
내 목이 나도 모르게
혼자서 꾸는 꿈이라고 믿었다
[출처]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 좋은 시 300[180]2020년 7월 9일 (목) 소름의 역사 - 서요나 ■ 웹진 시인광장 2020년 7월호 |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첫댓글 근데 뭐지 이 소름은?
본네트와 괴담이 무슨 상관이지?
그 답은?
그건
내 목이 나도 모르게
혼자서 꾸는 꿈이라고 믿었다
그런 악몽이라는.
수고하심에 꾸벅^^
늘 평안하셔요.
다래투 올림
괴담 속 그녀들도 과거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을 겁니다.
간절함은 공포도 사라지게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