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성경 안에 일명 “비유장”,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3장, 마태복음 25장 등과 같은 곳을 보면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이 비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앞의 비유를 뒤의 비유가 발전시켜 줍니다. 때로는 뒤의 비유가 앞의 비유를 설명해 줍니다.
마태복음 25:1~13절이 열 처녀의 비유인데, 이 비유는 “깨어 있으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뒤에 나오는 오늘 본문의 달란트 비유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서 “깨어 있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열 처녀 비유는 결혼할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신랑이 오는 날이 지연될 뿐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먼 나라에 주인이 가면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눠주고 장사를 하라 합니다. 오랜 세월 후에(19절) 주인이 돌아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있지만 당장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멸망이 예수님이 말씀할 때부터 40년 이후 성취되지만, 예루살렘, 유대 나라가 망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오지는 않습니다. 승천부터 재림기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주님의 주권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청지기 역할과 그 기회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보면 마지막 날에 둘로 갈라집니다. 앞 단락이 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갈라지듯이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갈라집니다. 뒤 단락이 양과 염소로 갈라지듯이 합니다(31~46절). 갈라지는 대상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로 보면 모두 다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물려받는 사람도 있지만, 밖의 어두움에 쫓겨나서 슬피 이를 갈 사람도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는 삶, 재림 준비하는 삶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가르쳐줍니다.
제일 먼저 기억할 것은 종들에게 주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달란트를 나눠주는데 동일하게 나눠주지 않고 능력을 고려해서 차등 있게 나눠줍니다. 15절을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라고 말씀합니다. 각각의 재능이 다릅니다. 능력이 많은 자에게는 다섯 달란트, 그다음 종에게는 두 달란트, 또 다른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주인이 떠납니다. 똑같이 나눠주지 않는 이유는 능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달란트는 돈의 가장 큰 단위입니다. 달란트가 금 달란트인 경우도 있고, 은 달란트인 경우도 있고 구리 달란트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금 달란트일 때에는 한 달란트가 15년~16년 노동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한 푼도 쓰지 않고 만들 수 있는 돈입니다. 평생 모아야 가질 수 있는 돈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것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주인이 각자 인정해서 많은 종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에게만 맡기셨습니다. 맡겨주신 것이 감사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 감사했다면 모두 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인의 뜻에 따라서 귀하게 일했을 것입니다.
달란트를 영어 단어 “talent”의 의미와 같게 선천적인 “능력”이나 “재능”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어 어휘의 의미에 기초해서 1세기 용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잘못된 방법입니다. 영어 단어 “talent”는 15세기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도록 주어진 “책임성”, “기회”에 가깝습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따라 책임이나 기회가 다릅니다. 그 능력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비유하는 것이기에 한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가치를 예기하는 것입니다.
사명의 크기는 다릅니다. 하지만 사명의 내용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종으로 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을 안겨 주십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가슴에 담고 확장해 나가는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종을 보면 누가 가장 좋았을까요? 신났을까요? 행복했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16절을 보면 바로 가서(즉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종은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했습니다. 인정해 주는 것도 고마운데 어마어마한 달란트를 받아서 자기 재량껏 이익을 내보라 하고 갔으니,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희열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기쁨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하지만 16절의 “바로 가서”라는 말은 기분이 좋았다, 신났다, 행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어쩌면 가장 실망했을 것 같은데, 놀라운 것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를 본받아서 똑같이 했습니다. 똑같은 기쁨이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 기쁨이요 즐거움이 주인이 떠나고 돌아올 때까지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보고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절의 자랑스러운 보고를 합니다. 22절의 역시 자랑스러운 보고를 합니다. “보소서”라는 말은 그 기간에 즐거움과 기쁨으로 일했음을 표현합니다.
더 신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익금은 다 100% 종에게 주었습니다. 꿈에서도 상상 못 하는 일이 두 가지 일어났습니다. 먼저 원금과 이익금 모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자에게 그대로 주었습니다. 둘째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라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 ”즉, 동업자 지위로 올려줍니다. 29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달란트를 받아서 이익을 남긴 사람에게 플러스알파의 더 많은 것을 맡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 달란트는 하나님 나라의 무한한 가치를 말합니다. 마치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밭에 감추인 보화,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습니다. 보화, 진주를 소유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 인생을 다 투자합니다. 기쁨, 즐거움으로 투자합니다. 하나님의 보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기쁘게 즐겁게 신나게 살아갑니다. 마지막 그날에 이 땅과는 비교 안 되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으면서 그 나라의 엄청난 역할을 부여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그래서 신나고 기쁘게 살아가는 자가 마지막 때, 재림의 때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 위해 산 만큼 예수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감격과 기쁨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나 자신의 나라인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누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신나는, 즐거워하는 이유가 있다면 우리를 예수님 때문에 아들과 딸로 삼아서 그의 나라를 우리에게 맡기고 확대하는 삶을 살도록 하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지막 종은 어떠합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말씀할 때, “게으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크네로스”입니다. 신약성경에 딱 3번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떤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사로써,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해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우유부단한”, 또는 “주저주저하는”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해서 행동에 옮기지를 못했을까요? 이 종은 상대적으로 기분이 별로 안 좋았습니다. 18절을 보면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절 맨 앞의 “그러나” 단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는 앞의 두 명의 종과는 다르게 행동했다는 의미입니다.
앞의 언급된 16절의 “급히 가서”라는 단어는 17절의 “그같이 하여”라는 단어와 전혀 다른 “떠나가서”(18절), 즉 화가 나서, 기분이 상해서 마음 상태가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를 가지고 와서 자기가 아는 장소에 묻어버립니다. 주인이 나를 이 정도로 인정 안 하면 내가 주인 인정할 일이 무엇이 있나 하고 이제나저제나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분노를 삭이면서 주인이 올 때 무엇으로 쏘아붙일까? 계속 섭섭한 마음,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지금 앞의 두 종은 신나서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배우고, 아름답게 살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올 때 쏘아붙일 말을 준비만 합니다.
이 종은 주인이 떠나고 다시 올 때까지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예수님이 재림할 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 종의 잘못은 주인을 잘 몰랐습니다. 주인을 잘 모르니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를 모르니 주인이 좋아하는 일보다는 싫은 일을 합니다. 주인이 오자 화가 난 분기 그대로 24절에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종이 말한 핵심은 당신은 “인색한 주인, 나쁜 주인”입니다. “씨를 안 뿌리고 사람들이 열매를 거두면 이것 내 것”, “추수를 하면 키질하는데 쭉정이는 발라내고 알곡만 모으는 게, 이게 바로 헤치지 않는 데서 모은다는 것인데 그 알곡도 내 것” 그래서 주인은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 가지고 묻어버린 종, 즉 악하고 게으른 종에게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굳은 사람,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 즉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인자와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자입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는 자로서 동업자입니다. 모든 소득, 기쁨, 즐거움을 나누고 공유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29절을 보면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30절을 보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맡긴 일 달란트는 십 달란트 받은 자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 자녀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수 있는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복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 즉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삶이 예수님의 재림을 추구하는, 기다리는 삶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가정 일터에서, 각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즐겁게 기쁘게 행복하게 추구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상상을 초월해서 예수님 재림 때 영원한 기쁨, 최고의 즐거움을 느끼는데,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내 나라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 내가 주인인 것처럼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 상상을 초월하는 기쁨, 즐거움인지도 모르고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고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이 없고, 육신의 정욕에 끌려 살다가 마지막 날에 바깥 어두운 데로 추방된 삶을 살고 싶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