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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사공(司空)은 휘(諱)가 한(翰)인데 신라에 벼슬하여 태종왕(太宗王) 10세 손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았고, 시중이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고, 복야가 아간(阿干) 광희(光禧)를 낳았고, 아간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았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았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았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고,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았고, 충경이 경영(景英)을 낳았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았고, 충민이 화(華)를 낳았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았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았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고, 용부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 인이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고, 양무가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다.
전주(全州)에서 강릉도(江陵道)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겼다가, 삼척에서 바다를 건너 덕원(德原)으로 갔는데, 고려에서 그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하고, 고원(高原)에 진(鎭)을 설치하여 원 나라 군사를 막게 하였다. 당시 영흥(永興) 이북은 개원로(開元路)에 속하였다. 원 나라 산길 대왕(散吉大王)이 와서 쌍성(雙城 영흥)에 주둔하여 철령(鐵嶺) 이북을 차지하려고 계획하면서 목조에게 원 나라에 항복할 것을 요청하자, 목조가 부득이하여 김보로(金甫奴) 등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때는 고려 고종(高宗) 41년 갑인(1254)이니, 송 나라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이었다. 지원(至元) 갑술년(甲戌年 1274) 12월에 목조가 경흥부(慶興府)에서 흉(薨)하므로 성 남쪽에 장사하였다가, 뒤에 함흥부의 의흥부 달단동(義興部韃靼洞)에 이장(移葬)하였다.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숙(李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행리(行里)를 낳았으니, 이분이 곧 익조(翼祖)다.
적도(赤島)로 피란하였다가, 뒤에 덕원(德原)에 옮겨 살았다. 안변호장(安邊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에게 장가들고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 아들 낳기를 빌었는데, 아들을 낳고서 선래(善來)라 이름지었으니, 이분이 곧 도조(度祖)다. 휘는 춘(椿)인데, 어릴적 이름은 선래요, 몽고(蒙古) 휘로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다. 문하시중 박광(朴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는 자흥(子興)이요, 다음은 곧 우리 환조(桓祖)이니, 휘는 자춘(子春)이요, 몽고 휘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태중대부 사복경(太中大夫司僕卿)이 되었고, 집 한 구역을 하사받아서 거기서 머물러 살았다.
문하시중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으로 시호가 정효공(靖孝公)인 최한기(崔閑奇)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원 원년(至元元年), 충숙왕(忠肅王) 4년(을해 1330) 10월 11일 기미에 영흥부(永興府) 사적에서 태조(太祖)를 낳았다. 즉위(卽位)하게 되자, 4대의 존호(尊號)를 추존하되, 고조고(高祖考)를 목왕(穆王), 그 능(陵)을 덕릉(德陵), 비(妣) 이씨(李氏)를 효비(孝妣), 능을 안릉(安陵)이라 하고, 증조고(曾祖考)를 익왕(翼王), 그 능을 지릉(智陵), 비 최씨(崔氏)를 정비(貞妣), 능을 숙릉(淑陵)이라 하고, 조고를 도왕(度王), 능을 의릉(義陵), 비 박씨를 경비(敬妣), 능을 순릉(純陵)이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능을 정릉(定陵), 비 최씨를 의비(懿妣), 능을 화릉(和陵)이라 하여 봉상시(奉常寺)로 하여금 4대의 신주(神主)를 만들게 하였다.
○ 신우(辛禑) 때에 태조가 최영(崔塋)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 등을 죽일 때에, 태조와 최영이 정방(政房)에 앉았는데, 최영이 임견미와 염흥방을 등용한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와 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오래되어 모든 사대부(士大夫)가 다 그에 의해 등용된 사람들이다. 지금은 다만 그 재질이 현명한지 않은지만 물을 일이지, 어찌 지나간 일까지 허물하리오.”
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않았다.
태조가 호발도(胡拔都)를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안변(安邊)에 이르렀는데, 비둘기 두 마리가 밭 가운데 뽕나무에 앉아 있었다. 태조가 활로 쏘니 한꺼번에 두 마리가 다 떨어졌다. 길 가에서 두 사람이 밭을 매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충(韓忠)이요 또 한 사람은 김인찬(金仁贊)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탄복하기를,
“도령(都領)의 활쏘는 솜씨가 기묘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내 이미 도령은 지났다.”
하고, 인하여 두 사람에게 가져가 먹게 하니, 두 사람도 조밥을 마련하여 올렸다. 태조가 그들을 위해 음식을 먹자, 두 사람이 마침내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아니하여 뒤에 모두 개국공신(開國功臣)의 반렬에 참여하였다.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리기 전에 태조가 살던 마을에,
서경성 밖 불빛이요 / 西京城外火色
안주성 밖 연기로세 / 安州城外煙光
그 사이 왕래하는 이원수여 / 往來其間李元帥
백성 구제 소원일세 / 願言救濟黔蒼
라는 동요(童謠)가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군사를 돌리는 일이 있었다.
○ 군사를 돌린 후에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면서 《곽광전(霍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었는데, 인옥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론을 극력 진술하므로 태조가 왕씨의 후손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조민수(曺敏修)는 우(禑)의 외삼촌인 이임(李琳)의 척당(戚黨)으로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이색(李穡)에게 문의하여 드디어 의론을 확정하여 창을 세웠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문 앞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智異山) 바윗돌 속에서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 글에
“목자(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 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지경을 바로잡으리라.”
는 등의 말이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영접해 들이게 하였는데, 이미 떠나버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비장된 기록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고, 또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고려가 망할 무렵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또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 맞히는 혜징(惠澄)이란 자가 사사로이 그의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남의 운명을 점친 것이 많으나 이성계(李成桂)만한 이는 없었다.”
하였다. 그 친한 사람이 묻기를,
“타고나 운명이 비록 좋더라도 지위가 정승에 이를 뿐이겠지.”
하니, 혜징이 말하기를,
“정승쯤이면 어찌 족히 말하겠는가. 내가 알아 맞힌 것으로는 임금이 될 운명이니, 그가 왕씨를 대신하여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 정몽주(鄭夢周)가 도성(都省)과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조준(趙浚)과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이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공정왕(恭靖王 정종 定宗) 및 아우 화(和), 사위 이제(李濟), 휘하(麾下)인 황희석(黃希碩)과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변론하게 하였다. 태종이 숭교리(崇敎里)에 있는 옛 사저의 사랑(斜廊)에 앉아 걱정을 하면서 결정을 못하고 있었는데,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가 보니, 광흥창사(廣興倉使) 정탁(鄭擢)이었다. 정탁은
“민생(民生)의 이해(利害)가 이 시점에 결정될 것이요,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느냐?”
라고 극력 말하였다. 태종이 곧 태조의 집으로 돌아와서 공정왕, 아우 화, 사위 이제와 더불어 이두란(李豆蘭)을 시켜 몽주를 쳐 죽이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우리 공(公)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조영규에게 말하니 영규가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조영무(趙英茂)와 고여(高呂) 및 이부(李敷) 등이 길에서 몽주를 맞이하여 쳤으나 맞히지 못하였다. 몽주가 꾸짖으며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달아났는데, 영규가 뒤쫒아 가서 말 머리를 치니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급히 달아나니 고여가 추격하여 죽였다. 태종이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가 매우 성내어 태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은 본래부터 충효(忠孝)로 이름이 났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은 충신되고 효자되기를 바래서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와 같이 하였으니, 내가 약이나 먹고 죽어버리고 싶다.”
하였다. 강비(康妃)가 옆에 있다가 안색을 가다듬고 고하기를,
“공께서 매양 대장군으로 자처하셨는데, 어찌 놀라고 겁내기를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였다.
○ 가을, 7월 17일 병신에 태조가 공민왕비(恭愍王妃) 안씨의 교지를 받들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백관들이 반열을 지어 궁문 서쪽에서 맞이하므로, 태조가 말에서 내려 보행으로 전(殿)에 들어가 즉위하되 용상(龍床)을 피하고 기둥 안에 서서 군신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정유(丁酉 18일)에 비가 왔다. 그때까지 오래도록 가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흐뭇하게 비가 내리니, 인심이 크게 기뻐하였다.
○ 정사(丁巳)에 명을 내려, 전조(前朝) 태조(太祖)의 신주를 마전군(麻田郡)에 옮겨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전조의 혜왕(惠王)ㆍ현왕(顯王)ㆍ충경왕(忠敬王)ㆍ충렬왕(忠烈王)이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었으니, 마전의 태조의 사당에 같이 제사지내게 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조의 성왕(成王)이 중화(中華)를 높이 사모하여 문물(文物)을 일으키자,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고, 문왕(文王)이 근신하여 선대가 이룩해 놓은 것을 지켜 나아가 세상을 태평하게 하자, 백성들이 그 생활을 편안히 누렸고, 공민왕은 두 번이나 홍건적(紅巾賊)을 섬멸하여 삼한(三韓)을 흥복(興復)시켰으며, 상국(上國)을 잘 섬겨서, 온 나라를 편케 하였으니, 모두 동방에 공이 있습니다. 이들 역시 태조묘(太祖廟)에 같이 제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였다.
○ 공민왕 19년에 태조가 기병(騎兵)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고, 또 7백여 리를 행군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에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것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옮겼다가,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원경(李原景, 李吾魯帖木兒)이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얼마 후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도 본시 고려 사람입니다. 항복하여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이어 그 괴수 고안위(高安慰)를 쳐서 쫓아냈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 북으로는 동녕부, 서로는 해남(海南), 남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가 텅 비게 되었다. 황성은 옛날 여진(女眞)의 황제성(皇帝城)이다.
○ 태조는 높은 콧대에다 용(龍)의 상을 하여, 기특하고 웅장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어릴 적에 함흥과 영흥 사이를 다니며 놀았는데, 북도의 매[鷹]를 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하기를,
“이모(李某, 성계(成桂)와 같이 정기 있고 기특하게 생긴 사람을 얻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용맹과 힘이 남보다 뛰어나고 활쏘는 법이 신묘(神妙)하였다. 함주(咸州)에서 큰 소가 서로 싸우므로 여러 사람이 제지하려 하여도 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옷을 벗어 던지고, 어떤이는 불을 피워 던졌어도 오히려 금지시키지 못하였는데, 태조가 양손으로 갈라 쥐어 잡으니 소가 싸우지 못하였다. 신우(辛禑)를 따라 해주(海州)에 사냥갔는데 좌우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짐승을 잡되, 다 등성이를 맞혀라.”
하였다. 태조가 평소에 짐승을 쏠 때에는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鴈翅骨)과 왼쪽 넙적다리 앞 근처를 맞혔는데, 이날에는 사슴 40마리를 모두 그 등성이를 바로 적중시켰다. 또 임강현 화장산(臨江縣華藏山)에서 사냥할 때에 사슴을 쫓아 절벽에 이르렀는데, 높이가 수십 척에 지형이 험하여 사람은 내려갈 수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태조 또한 말을 채찍질하여 미끄러져 내려가 밑바닥에 이르렀는데, 말이 넘어져 일어나기도 전에 곧 사슴을 쏘아 죽였다. 길을 가다가도 엎드린 꿩을 만나면 반드시 놀라 날게 하여 두어 길쯤 높이 올라간 다음에 올려다 보고 쏘면 영락없이 맞혔다. 나무 공을 배[梨]만큼 크게 만들어 사람을 시켜 50~60걸음 거리에서 공중에 던지게 하고는 박두(撲頭)로써 쏘아도 번번히 맞혔다. 그러나 항상 겸손함으로 자처하여 남보다 위에 가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매양 남과 더불어 활쏘기를 비교할 때에는 다만 상대방의 능력과 맞힌 횟수의 많고 적음을 보아서 겨우 상대방과 동등하게 할 뿐이요, 이기고 짐이 없게 하였다. 권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한 한 번이나 더 맞히는데 지나지 아니하였다.
○ 신우(辛禑) 경신년(6년, 1380)에 우리 태조가 왜적을 운봉(雲峯)에서 크게 격파하여 그 장수 아기발도(阿只拔都)를 베고 개선(凱旋)하였는데,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적 소탕하기를 정말 썩은 가지 꺾듯 하였으니, / 掃賊眞將拉朽同
삼한의 기쁜 기색이 여러 장군 것이네 / 三韓喜氣屬諸公
충성이 환히 드러나니 하늘에 안개가 걷히고 / 忠懸白日天收霧
위엄이 청구에 떨치자 바다에 풍파가 없네 / 威振靑邱海不風
개선하는 빛난 자리에는 무훈을 노래하고 / 出牧華筳歌武烈
능연의 높은 누각에는 영웅을 그리리 / 凌煙高閣畵英雄
앓던 끝이라 교외에 환영가지 못하고 / 病餘不得參郊迓
앉아서 새 시나 읊어 위대한 공 칭송하네 / 坐詠新詩頌雋功
하였고, 삼사죄윤(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의 시에는
적의 칼날 꺾기 벼락과 같았으니 / 賊鋒摧挫興雷同
절제가 모두 우리 공에서 나온 것 / 節制無非自我公
충만한 상서 기운 독한 안개 녹이고 / 瑞霧葱葱銷毒霧
차가운 서릿 바람 위풍을 도왔네 / 霜風冽冽助威風
섬 오랑캐 간담 떨어트린 군사의 위용이 강성하고 / 島夷墜膽軍容盛
이웃 나라 심장 서늘케 한 사기가 웅장하네 / 隣境寒心士氣雄
온 나라 의관한 사람이 서로 절하며 하례하니 / 滿國衣冠爭拜賀
삼한 만대의 태평을 이룩한 공이로다 / 三韓萬代太平功
하였으며, 성균제주(成均祭酒) 권근(權近)의 시에는
3천리 사람이 마음과 덕을 다같이 하였으니 / 三千心與德皆同
군사 호령이 지금 다 공에게 달려 있네 / 師律如今盡在公
나라에 바친 충성은 밝기가 해를 관통하였고 / 許國忠誠明貴日
적의 칼날 꺾은 용기는 늠름히 바람나네 / 摧鋒勇烈凜生風
붉은 활이 빛나는데 은혜와 영화가 중하고 / 彤弓赫赫恩榮重
백우가 높고 높아 기세가 웅장하네 / 白羽巍巍氣勢雄
한번 개선하자 나라가 안정되니 / 一自凱旋宗社定
말 위에 기특한 공이 있음을 반드시 알리로다 / 須知馬上有奇功
하였다.
조무(趙武)는 원 나라 장수인데, 원 나라가 쇠약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孔州)에 점거하고 있었다. 이때에 태조가 동북면(東北面)에 있으면서 휘하 장명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결국에는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이다.”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서 쳤는데, 그의 용맹스럽고 날샘을 이끼어 쇠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로 수십 번이나 맞히니, 조무가 그제서야 말에서 내려 절하며 항복하여 끝내 하인이 되어 종신토록 심부름하였는데, 벼슬이 공조 전서(工曹典書)에까지 이르렀다.
○ 고려 말기에 국가에서 병적(兵籍)을 관리하지 않고 모든 장수들이 각기 점유하여 군사를 삼았는데, 이를 패기(牌記)라고 하였다. 대장 중에 최영ㆍ변안렬(邊安烈)ㆍ우인렬(禹仁烈) 등과 같은 사람은 오로지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그 막료(幕僚)와 사졸(士卒)이 뜻에 맞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꾸짖어 못하는 짖이 없다가, 매를 쳐 죽는 자까지 있으므로, 휘하 장병들이 많이 원망하였다. 태조는 유독 진심으로 휘하들을 예(禮)로 접대하여 평소에 꾸짖는 말이 없었으므로, 모든 장수의 휘하들이 다 예속되기를 원하였다.
○ 태조가 전쟁할 때에 탄 준마(駿馬)가 여덟이었다. 「횡운골(橫雲鶻)」이라 이름한 것이 여진산(女眞産)으로, 납씨(納氏)를 쫓아내고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두개를 맞았으며, 「유린청(遊麟靑)」이라 이름한 것은 함흥산으로, 오라(兀刺)를 잡고, 해주에서 싸우고, 운봉에서 승전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세 개를 맞았으며, 31세에 죽었는데,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 주었다. 「추풍오(追風烏)」는 여진산으로 화살 한 개를 맞았고, 「발뢰자(發雷赭)」는 안변산이요, 「용등자(龍騰紫)」는 단천산인데, 해주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한 개를 맞았으며, 「응상백(凝霜白)」은 제주산(濟州産)으로 압록강에서 회군(回軍)할 때에 탔던 것이며, 「사자황(獅子黃)」은 강화매도산(江華煤島産)으로 지리산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며, 「현표(玄豹)」는 함흥산으로, 토아동(兎兒洞)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다.
세종 때에 호군(護軍)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그 팔준마(八駿馬)의 형상을 그리게 하고 집현전(集賢殿)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찬(贊)을 지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 태조가 본시 경학(經學)을 중히 여겨, 비록 군중에 있을 때에도 매양 창을 놓고 쉬는 틈에는 이름난 선비를 불러다가 경사(經史)를 토론하였는데, 더러는 밤중이 되도록 자지 아니하였다. 가문(家門)에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태종에게 유학을 공부하게 하였는데, 태종이 날마다 부지런히 하여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매양 태종의 글읽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왜 나의 소생이 되지 아니하였을까.”
하였다. 신우(莘禑)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자 태조가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으며, 뒤에 제학(提學)에 제수되자, 태조가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 관교(官敎)를 두 번 세 번 읽어보게 하였다. 태조가 매양 손님들과 연회할 때에는 태종으로 하여금 시구(詩句)를 짓게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손님들과 즐기는 데는 너의 힘이 많다.”
고 하였다.
일찍이 오라를 칠 적에 무너진 담장 안에서 곡성이 나는 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았더니, 한 사람이 옷을 벗고 서서 울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원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한 사람인데, 귀국의 이인복(李仁復)이 나의 동년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장원이란 말을 듣고는 곧 자기 옷을 벗어 입히고 드디어 데리고 오니, 공민왕이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를 제수하고 성명을「한복(韓復)」이라 내려 주었다.
○ 태조는 천성이 인후(仁厚)하여 구족(九族)들에게 화목하였는데, 비록 10촌이 넘더라도 애호하기를 매우 돈독하게 하였다. 서형 원계(元桂)와 서제 화(和)와 더불어 우애가 극진하여 항상 같이 거처하였으며, 화(和)의 어머니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를 경저(京邸)로 맞아들여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나아가 뵐 때에는 항상 계단아래 꿇어 앉았었다. 공민왕이 자주 연석(宴席)을 마련하여 화에게 주어 어머니에게 드리게 하였고, 또 교방(敎坊)의 음악을 하사하여 표창하고 총애함을 표시하므로, 태조가 임금의 하사인 것을 영화롭게 여겨 전두(纏頭)를 많이 주었다.
처음에 환조(桓祖)가 돌아가시자 원계(元桂)는 자기가 장자라 하여 마음으로 태조를 꺼렸었다. 마침 태조의 양민(良民)이 되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자, 원계가 그의 누이동생인 강우(康祐)의 처와 공모하여 그 사람의 편이 되어 일을 내고자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였었다. 태조는 그것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전과 같이 대접하였다. 원계가 고려에 벼슬하여 장작판서(將作判書)가 되었다가 살인죄에 연좌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자 태조가 구제하려고 하여 두 번 세 번 극력 청하였으나, 되지 않으므로 심히 애통이 여기고, 여러 고아들을 부양하여 혼인시켰다. 강우의 처는 집이 가난하므로 태조가 그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었으며, 개국한 뒤에 원계의 아들들이 모두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다.
○ 고려 공민왕이 돌아간 뒤부터 천자가 매양 집정 대신을 부르게 되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가지 못하였는데, 신창(辛昌)이 즉위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색(李穡)이, 신창이 감히 가서 조회하고 또 왕관(王官)이 나와서 감국하게 할 목적으로 스스로 원 나라에 들어가 조회하기를 자청하자, 태조가 칭찬하기를,
“강개(慷慨)하도다. 이 늙은이여.”
하였다. 이색은 태조의 위풍과 덕망이 날로 성해지므로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변이 날까 두려워하여 태조의 한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태종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아 주었다. 도중에 한 관원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최영(崔瑩)이 정병 10만 명을 거느렸어도 이성계가 그를 잡으려 하면, 파리잡듯 쉽게 할 것이다.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성계의 망극(罔極)한 덕을 입고 있는데 무엇으로 갚으려는가.”
하였다. 명 나라 천자는 평소에 이색의 이름은 들은 터라, 조용히 말하기를,
“네가 원 나라에 벼슬하여 한림이 되었다 하니 응당 한어(漢語)를 알겠구나.”
하였다. 이색이 얼른 한어로써 대답하기를,
“고려 왕이 친히 조회하려 오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천자가 알아듣지 못하고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므로, 예부(禮部)의 관원이 전하여 아뢰었다. 이색이 오랫동안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한 탓으로, 말이 분명치 못하였던 것이다. 천자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한어가 바로 납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다.
○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한 중이 문 밖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주면서,
“지리산 바위를 속에서 얻었다.”
고 하였는데, 그 글에 「나무 아들이 돼지를 타고 내려와 다시 삼한의 강토를 바로잡으리라.(木子乘猪下復正三韓境)」는 구절이 있었다. (태조가 을해년에 탄생하였음)사람을 시켜 영접하려 하자 이미 가버려 찾을 수가 없었다.
○ 덕원부(德源府)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었다. 개국하기 1년 전에 다시 가지가 나고 잎이 피므로, 당시 사람들이 개국의 징조라 하였다. 도참(圖讖) 속에 「조명(早明)」이란 문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는데, 고황제(高皇帝)가 특별히 개국하는 호칭을 조선이라 명하였다. 예부(禮部)에서 자문(咨文)을 보냈는데. 이르기를,
“성지(聖旨)를 받들어 보니,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니 그 이름을 근본삼아 계승하여 하늘을 본받고 백성을 다스려 길이 후사(後嗣)를 번성하게 하라.’하였다.”
고 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자 예부에서 글을 보내 왔는데 이르기를,
“성지를 받들어 보니, ‘하늘과 땅 사이에 백성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크게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혹 흥하기도 하고, 혹 폐하기도 하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상의 명령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삼한의 신하와 백성들은 이미 이씨를 높이고, 백성들은 병화(兵禍)가 없어 사람마다 각기 하늘이 준 낙을 즐기고 있으니, 이것이 곧 상제의 명이다.’하였다.”
고 하였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가 들어가 조회하자, 고황제가 편전(便殿)으로 불러 보고, 한참 동안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천하를 얻게 되는 연유를 상세히 말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너희 임금이 나라를 얻은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하늘이 주지 아니하고 사람이 따르지 않는다면, 힘으로써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 경흥부(慶興府)의 남쪽 10리쯤에 있는 적지(赤地) 가운데 둥근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35보쯤 되고 둘레가 90보쯤 되며, 사방이 진흙이어서 통행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조(穆祖)의 덕릉(德陵)이 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장사지낼 적에, 중국 사람이 와서 보고 말하기를,
“뒤에 반드시 그 자손이 일어나 임금노릇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하였다.
○ 효공왕후(孝恭王后)의 안릉(安陵)도 덕릉의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0년에 야인의 난리로 인하여 두 능을 함흥부(含興府) 음란(吟蘭) 북쪽에 옮겨 합장(合葬)하였다.
○ 홍무(洪武) 갑술년(1394, 태조 3)에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등을 명하여 한양에 도읍터를 보게 하였는데, 전조(前朝) 숙왕(肅王) 때에 경영하였던 궁궐의 옛터가 좁고 협소하므로, 다시 그 남쪽에 터를 잡아 해산(亥山)을 주용(主龍)으로 하여 임좌 병향(壬坐丙向)으로 하였다. 이해 12월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 9월에 태묘(太廟)와 궁전이 낙성(落成)되어 임금께서 법가(法駕)를 갖추어 들어갔으니, 곧 경복궁(景福宮)이다. 병자년(1396, 태조 5)에 도성(都城)을 쌓는데, 정월달에 역사를 시작하였다. 서북 방면 안주(安州) 이남, 인부 18만 9천 명을 징발하여 취역시켰다가 2월 그금에 돌려 보냈고, 가을에는 강원ㆍ경상ㆍ전라 세 도의 인부 7만 9천 명을 징발, 8월에 시작하였다가 9월에 역사를 마쳤는데,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 등이 역사를 감독하였다.
○ 태종이 이색과 더불어 명 나라에서 돌아와 발해에 이르자, 객선(客船)이 동행하였는데 반양산(泮洋山 곧 전횡(專橫)의 식객 5백여 인이 자살한 곳이다.)에서 구풍(颶風)이 크게 일어나 두 객선이 다 침몰되었다. 태종이 탓던 배도 거의 구출되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엎어지며 자빠졌으나 태종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하였으며 결국 온전히 돌아오게 되었다.
○ 태조조(太祖朝)에 고황제(高皇帝)가 수조(手詔)를 내려 책하였는데,
“너희 나라에서 사람을 요동까지 보내어 포백(布帛)과 은(銀)을 싸가지고 와서 예(禮)를 행한다 핑계하고 우리 변방 장수를 유혹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여진(女眞)을 달래고 꾀어 몰래 압록강을 건넜다.”
는 등의 일이었다. 우리 조정에서 표(表)를 올려 변명하였는데, 그 대략은
“요동에 가서 예를 행한 것으로 말하면, 이 또한 상국(上國)을 우러러 사모한 것입니다. 사자(使者)가 왕래할 즈음에 있어 손님과 주인이 교제하는 의식(儀式)이 있는 것은 예의상 그러한 것이지, 어찌 감히 꾀었겠습니까. 여진(女眞)은 동녕(東寧)에 예속하였으므로, 이미 모두 군(軍)이 되어 차역(差役)에 당하고 있는데, 어찌 사람을 보내어 달래고 꾀었겠습니까. 다만 요동 도사(都司)가 탈환불화(脫歡不花)를 데려갈 적에 그 관하 인민들이 바로 따라가지 아니한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살던 곳을 옮기기 어려워 그러한 것이요, 신이 억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받치는 것도 없으며, 각자가 그 전일의 생업(生業)을 그대로 해가고 있습니다.”
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정도전(鄭道傳)의 글이었다. 황제가 우리의 올린 표(表)의 말이 거만하다 하고 더욱 노하여 요동에 명령하여 조선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므로, 사신이 요동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가 모두 다섯 차례나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라고 타이르므로 태조가 태종에게 이르기를,
“천자가 만일 묻는 말이 있게 되면 네가 아니면 능히 자세하게 대답할 사람이 없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신이 사직을 위한 큰 계획에 어찌 응당 핑계대고 회피하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태종에게 명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조반(趙胖)과 더불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명 나라 서울로 가게 하였는데, 태조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기질이 여위고 약한데 만리 길을 병없이 돌아오겠는냐.”
하였다. 이번 행차를 조정 신하들은 모두 태종을 위하여 위태롭게 여겼다. 참찬하부사(參贊門下府事) 남재(南在)가 말하기를,
“정안군(靖安君)이 만리 길을 가시는데 우리들이 여기서 편안하게 자서 되겠는가?”
하고, 모시고 가기를 자청하였다. 찬성사(贊成事) 성석린(成石璘)이 시를 지어 태종의 행차에 전송하기를,
아들과 신하 알아보는 지감이 밝으시니 / 知子知臣睿鑑明
사대하는 정성도 민생을 위해서로다 / 畏天誠意爲民生
사람들이 이르기를 조선 만세의 경사가 / 皆云萬世朝鮮慶
이 더위 장마속 발섭하는 행차에 달려 있다고들 하네 / 在此炎霧跋涉行
라고 하였다. 상국의 선비들이 태종을 보자, 모두 조선의 세자라 하면서 매우 존경하였다. 남경에 도착하자 황제가 두세 차례 불러 보았는데, 태종이 진술하여 아뢰기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하므로 황제가 우대하여 돌려 보내고 그제야 길을 개통하여 주라고 명령하였다.
○ 공양왕 때에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부름을 받고 귀양 살던 곳에서 서울에 돌아와 태조를 사택으로 찾아 뵙자, 태조가 놀라고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드리며 이색에게 마시기를 청하므로 이색이 사양하지 않고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겼다. 후일에 본조(本朝)가 되어서는 이색을 편전에 청하여 볼 때에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 태조가 즉위하여 어휘(御諱)를 고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자(字)를 지어 올리게 하므로, 도전이 교지를 받들어 「군진(君晉)」이라고 지어 받쳤다. 그 자설(字說)에 이르기를,
“일(日)에다가 일(一)을 하였으니,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이다. 진(晉)은 밝은 해가 떠오르는 뜻이니,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그 밝음이 넓게 비치게 되어, 어둡고 가리운 데가 소멸되고, 만상(萬象)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임금의 첫 정사가 청명하자, 온갖 사특한 것이 제거되고 온갖 법이 모두 새로워진 것이요, 하늘의 해가 이미 떠오르자, 그 밝음이 점차 퍼져가는 것이니, 곧 임금이 즉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천만세에 전하는 것이다.……”
하였다.
○ 태조가 일찍이 경신일(庚申日) 밤에 정도전 및 모든 공신들을 불러 술을 마시다가 얼큰하자 도전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이렇게 되게 한 것은 경의 힘이로다.”
하니, 도전이 대답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꼬.’하니, 관중이 대답하기를 ‘원컨대 공께서 거(莒)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마소서.’하자, 환공이 말하기를 ‘원컨대 중보(仲父)는 함거(檻車)에 있던 때를 잊지 말라.’하였습니다. 신은 원컨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지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도 항쇄(項鎖)에 묶이던 때를 잊지 아니하면 자손 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그렇다.”
하고, 사람을 시켜 문덕곡(文德曲)을 부르게 하면서 도전에게 눈짓하기를,
“이것은 경이 지은 것이니 경이 일어나 춤을 추어야 한다.”
하자, 도전이 곧 일어나 춤을 추니 태조가 웃옷을 벗고 춤추게 하고는, 드디어 귀갑구(龜甲裘)를 주었고, 밤새도록 매우 즐기다가 헤어졌다,
○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감찰 황보전(皇甫琠)과 더불어 새로 감찰이 된 김중성(金仲誠)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좌정승(左政丞)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비록 큰 집은 지었지만 어찌 능히 오래 살게 되리오.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다. 황보건이 이 말을 듣고 주부(注簿) 이양수(李養脩)에게 이야기하자 양수가 성귱악정(成均樂正) 김분(金汾)에게 말하였다. 김분은 조준의 문인이므로 조준에게 고하니, 조준이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조준은 개국(開國)한 원훈으로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데, 김부는 조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가 이것은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고 한 말이다.”
하고, 김부를 극형에 처하게 하고, 황보전과 이양수는 곧바로 조정에 고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황보전은 장형(杖刑)을 주고 양수는 태형(笞刑)을 가했으며 김부와 같이 술 마신 열 여덟 사람에게는 감찰의 직을 파면하였다.
○ 봉상시(奉常寺)에서 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안양(安煬)ㆍ안황(安荒)ㆍ안혹(安惑) 등으로 의논하여 예조에 보고하므로, 예조에서 문하부(門下府)에 보고하였다. 문하부에서 문서를 갖추어 결재를 청하였는데, 태조가 시호를 정한 봉상박사(奉常博士) 최견(崔蠲)을 불러서 묻기를,
“희계는 원훈인데, 시호를 주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심하게 하였는가. 또한 다만 그 사람의 허물만 논하고 그 공을 듣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는, 곧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문초하고, 또 봉상소경(奉常少卿) 안성(安省), 시승(侍丞) 김분(金汾), 대축(大祝) 한고(韓皐), 협률랑(協律郞) 민심언(閔審言), 녹사(錄事) 이사징(李士澄)을 가두었다. 이에 형조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 김백영(金佰英)과 이황(李滉) 등을 탄핵하고, 또 예조 의랑(禮曹議郞) 맹사성(孟思誠), 좌랑(佐郞) 조사수(趙士秀)를 탄핵하였으니, 이는 봉상시에서 시호를 잘못 준 데 대해 논박하지 아니한 때문이었다. 죄견에게는 곤장 백 대를 쳐서 김해(金海)에 귀양보냈고, 안성은 축산(丑山)에, 김분은 각산(角山)에, 심언은 순천(順川)에, 사징은 강주(康州)에 귀양보냈으며, (축산은 영해부 바다 가운데 있고 각산은 진주 바닷가요 강주는 곧 진주임.) 김백영ㆍ이황ㆍ맹사성ㆍ조사수는 모두 파직시키고, 다시 정희계에게 양경(良景)이라고 시호를 내렸다.
○ 홍무(洪武) 정축년(1397, 태조 6)에 정도전이 사명을 받들고 함경도에 갔을 때에 태조가 글을 보냈는데, 외면에 쓰기를 「삼봉행차개탁(三峯行次開坼)」이라고 썼으며, 내용에 이르기를,
“서로 작별한 지 여러 날이 되니 생각함이 자못 깊어 중추(中樞) 신(辛)을 보내어 행차에 가서 문안하려던 차에, 최긍(崔兢)이 마침 오게 되어 안부를 자세히 알고나니 다소 위안이 되고 마음이 풀리오, 이에 솜옷 한 벌을 이슬 바람을 방지하기 위해 보내니 받아주면 고맙겠소. 참찬관(參贊官) 이(李)나 절제사(節制使) 이(李)에게도 솜옷 각 한 벌씩 부치니, 부디 나의 간절한 생각을 전해주면 고맙겠소. 나머지 말은 중추 신의가 구전(口傳)할 것이오. 봄인데도 날씨가 추우니 철에 따라 몸을 보호하여 변방의 일을 마치시오. 이만 줄이오. 아무 해 달 아무 일에 송헌거사(松軒居士)는 서(書)한다.”
하고, 도장을 찍었다. (참찬과 절제는 부관임)
○ 태조의 신의 왕후(神懿王后)가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공정왕(恭靖王)이 둘째요 태종이 다섯째이며, 신덕 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가 방번(芳蕃)과 방석(芳碩)과 공주를 낳았는데, 공주는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태조가 일찍이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을 내전으로 불러 세자 세울 것을 의논하였는데, 극렴 등이 말하기를,
“시국이 평탄하면 적장(嫡長)을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 있는 이를 앞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니, 강씨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울었는데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으므로, 드디어 파하고 나왔다. 다른 날에 또 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다시는 적장이니 공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극렴과 조준이 물러나와 의논하기를,
“강씨가 반드시 자기의 소생을 세우려고 하는데 방번은 광패(狂悖)하고 그 동생이 조금 낫다.”
하여 드디어 방석을 세자로 할 것을 청하므로 정도전과 남은(南誾) 등이 방석에에 붙으며 여러 왕자를 꺼려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비밀히 임금에게 아뢰되, 모든 황자를 지방의 왕으로 봉하는 중국 예에 의하여 왕자를 각도에 나누어 보내기를 청하였다. 태조가 이에 따라 태종에게 이르기를,
“외간(外間)의 의논을 너희들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모든 형들에게 말하여 조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점장이 안식(安植)이 말하기를,
“세자의 이복형 중에 천명을 받을 이가 한 둘이 아니다.”
하자, 도전이 말하기를,
“곧 제거하면 그만이지 무엇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의안군(義安君) 화(和)가 알고 몰래 태종에게 고하였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에 태조가 병이 위독하자 도전 등이 임금의 거처를 옮길 일을 의논하겠다고 핑계대고, 여러 왕자들을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인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그 도당으로 하여금 안에 있으면서 모의하게 하였다. 전 참찬(前參贊) 이무(李茂)도 그 당이었는데, 모두 그 계획을 몰래 태종에게 누설하였다. 이 무렵에 태종이 여러 형들과 더불어 항상 근정문(勤政門) 밖에 자고 있는데, 원경왕후(元敬王后)가 그 동생 장군 무질(無疾)과 더불어 의논하여 종[奴] 김소근(金小斤)을 보내어 태종을 청하여 모셔오게 하였다. 소근이 말하기를,
“여러 형제분들과 더불어 같이 계시는데 무슨 말로 청해옵니까.”
하니, 후(后)가 말하기를,
“내가 가슴과 배가 갑자기 아프다고 네가 급히 가서 고하면 공이 응당 속히 올 것이다.”
하였다. 소근이 달려가서 고하자 화(和)가 청심환(淸心丸)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하기를,
“속히 가서 치료해 드리시오.”
하였다. 태종이 곧 집으로 돌아와 후(后) 및 무질과 더불어 둘러서서 한참 동안 비밀히 말하다가 후(后)가 눈물을 흘리며 태종의 옷을 잡고,
“대궐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어찌 죽음을 겁내어 가지 아니할 수 있으며, 또 여러 형이 모두 대궐에 계시는데 알게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후(后)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조심하시오. 조심하시오.”
하였다. 후가 그 동생 대장군 무구(無咎) 및 무질과 더불어 꾀하여 무기와 말 안장을 모두 몰래 정비하여 변란에 대처할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태종이 대궐에 당도하자 낮은 환관이 안에서 나오며 말하기를,
“주상께서 병이 중하여 다른 처소로 가 계시려고 하니, 여러 왕자들은 모두 들어오시오.”
하였다. 전에는 궁문에 모두 등불을 설치하였었는데, 이날 밤에는 등불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의심하였다. 태종이 변소에 가는 체하고 생각을 하려 하였는데, 익안군(益安君) 방의(芳毅),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 상당군(上黨君) 이백경(李伯卿)이 뒤따라서 외치기를,
“정안군 정안군을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왜 소리는 높이느냐?”
하니, 또 손으로 소매를 잡으며,
“계책이 없으니 어찌해야겠는가.”
하고, 방간과 방의, 이백경과 더불어 달아나 연추문(延秋門)으로 나갔다.
태종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광화문 밖에 말을 세우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정승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을 불렀는데, 조준이 바야흐로 점치는 사람을 마주 하고서 길흉을 점치고 있었다. 연이어 재촉하자 그제서야 왔는데, 갑옷 입은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예빈시(禮賓寺) 앞 돌다리에서 그들을 막게 하고, 다만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태종이 조준에게 이르기를,
“공 등은 이씨의 사직을 걱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조금 후에 조신(朝臣)들이 달려온 자가 많았다. 조준과 김사형이 정부에 들어가려고 하므로 태종이 의논하기를,
“만약 궁중으로부터 군사가 나오게 되어 우리 군사가 조금이라도 후퇴하게 되면 저들이 그쪽 군사 쪽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하고, 이르기를,
“우리 형제가 길에 말을 세우고 있는데 정승이 부중(府中)에 들어가 앉아서는 안 된다.”
하여, 운종가(雲從街)에 앉게 하고 백관을 소집하니, 찬성(贊成) 유만수(柳蔓殊)가 그 아들을 데리고 왔다. 태종이 갑옷을 주어 뒤에 서게 하였다. 이무(李茂)가 말하기를,
“만수는 방석의 당입니다.”
하므로, 태종이 죽이라고 하자, 만수가 말에서 내려 태종의 안장을 붙잡고 말하기를,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제가 마땅히 아뢰겠습니다.”
하였지만, 김소근이 칼로써 그의 목을 찔렀다. 우러러보며 쓰러지자, 그를 베고, 그의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태종이 무사를 거느리고 정도전 등을 찾으니, 이직(李稷)과 더불어 바야흐로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 등불을 밝히고 즐겁게 웃고 있었으며, 따라간 사람들은 모두 졸고 있었다. 이숙번(李叔蕃)으로 하여금 일부러 화살을 쏘아 지붕 기왓장 위에 떨어뜨리게 하고 인하여 불을 지르니, 도전이 달아나 그 이웃에 있는 판봉상(判奉常) 민부(閔富)의 집에 숨었는데, 민부가 소리지르기를,
“배가 불룩한 자가 우리집에 들어왔다.”
하였다. 군인들이 들어가 수색하자 도전이 엉금엉금 칼을 잡고 기어 나오므로 잡아 태종의 앞에 끌고 갔다. 도전이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만약 나를 살려주면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너는 이미 왕씨를 저버렸다. 또다시 이씨를 저버리려 하느냐.”
하며 즉시 그를 베고, 그 아들 유(游)와 영(泳)도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은 몰래 도망하여 미륵원(彌勒院)의 포막(圃幕)에 숨어 있었는데 추격하던 군사가 죽였고, 이직은 하인인 척하여 지붕에 올라가 불을 끄는 모양을 하다가 빠져 나왔다. 궁중에서 불이 일어난 것을 바라보고 크게 떠들며 포(砲)를 놓았다. 방석의 당이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하여 군사 봉원량(奉元良)을 시켜 성에 올라가 살펴보게 하니,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무장한 기병이 가득 찼으므로, 그들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귀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태종이 사람을 시켜 입직한 모든 군사들에게 말을 전하여 나오게 하니, 서로 따라 궁성을 넘어 나오므로 근정문 남쪽이 텅 비었다. 새벽에 태조가 청량정(淸涼亭)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조준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죄를 아뢰고, 또한 다시 세자를 봉하기를 청하니, 태조가 방석에게 이르기를,
“너에게는 편하게 되었다.”
하였다. 방석이 절하고 하직하자 현빈(賢嬪)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지만, 방석은 옷을 뿌리치고 나갔다. 또 방번을 내보내기를 청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세자는 그만이지만 너는 나간들 무슨 상관 있겠느냐?”
하였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가 옆에 있다가 오히려 칼을 빼어 두리번거리므로 공주가 이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부부가 만약 정안군 집으로 간다면 살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방번이 서문으로 나가자 태종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네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잘 가거라 잘 가거라.”
하였는데, 도당(都堂)에서 추격하여 중도에서 죽였다. 처음에 산기상시(散騎常侍) 변중량(卞仲良)이 방석에게 붙어 상소하여 모든 왕자의 병권을 빼앗기를 청하여 골육(骨肉)간을 이간시켰는데, 이때에 군중에 잡혀와서 말하기를,
“나도 근일부터 왕자에게 마음을 돌렸습니다.”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저 입도 고기 덩어리다.”
하고 죽였다. 공정왕(恭靖王)이 이날 기도 드리는 일 때문에 소격전(昭格殿)에서 재계하고 자다가, 사변을 듣고 도보로 성을 넘어 독음(禿音) 촌가(村家)에 숨었는데, 다음날 태종이 사람을 시켜 청하므로 돌아오자, 태조가 공정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 무인년(1398, 태조 7) 정사(定社) 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박포(朴苞)는 자기의 공이 많은데 도리어 여러 신하의 밑에 있다고 투덜거리고 불평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무(李茂)는 비록 정사의 반열에 참여는 하였지만, 공(功)이 사람들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못하고, 또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니,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어 박포를 죽주(竹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소환했으나 박포가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 그가 회안군(櫰安君) 방간(芳幹)의 집에 가서 장기를 두는데 이날 마침 비가 오므로 포가 말하기를,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겨울 비가 도로를 손상시키면 군사가 시가에서 교전한다.’하였으니 마땅히 조심하시오.”
하였다. 당시에 하늘에 붉은 기운이 나타났는데, 박포가 또 그 집에 가서 고하기를,
“하늘에 요망한 기운이 있으니 마땅히 조심해서 처신하십시오.”
하였다. 방간이 묻기를,
“어떻게 처신할꼬?”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병권을 맡지 말고 출입을 조심하여 의관을 바르게 하고 행동을 신중히 하기를 전조의 모든 왕씨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말하기를,
“다시 그 다음 것을 말하라.”
하니, 박포가 말하기를,
“형만(荊蠻)으로 도망해 가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처럼 하는 것이 그 다음입니다.”
하였다.
“또 그 다음을 말하라.”
하자, 박포가 말하기를,
“정안군은 군사가 강하고 여러 사람이 따라 붙는데, 공의 군사는 약하여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으나, 그를 공격하여 제거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방간이 믿고 그 말대로 하여 태종을 자기 집에 오라고 청한 다음, 난을 일으키기로 하였었는데, 태종이 가려는데 창졸간에 병이 생겨 가지 못하였다. 환자(宦者) 강인부(姜仁富)와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는 모두 방간의 인척이었다. 방간이 그 두 사람을 보고 자신의 뜻을 말하니, 이래가 놀라며 말하기를,
“공이 소인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동기간(同氣間)을 해치고자 하니, 차마 그 말을 듣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정안군은 왕실에 큰 공로가 있습니다. 개국(開國)하고 정사(定社)한 것이 누구의 공입니까?”
하자, 방간이 성을 내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인부(仁富)는 꿇어 앉아 손을 당기며,
“공은 부디 하지 마십시오.”
하였으며, 이래가 말하기를,
“그와 같이 하면 공이 대역(大逆)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래가 나오는 즉시 태종에게 고하기를,
“회안군이 미쳐 날뜀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방비하소서.”
하였다. 방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의안군 화(義安君 和)와 완산군 천우(完山君天祐)가 태종의 집에 가서 침실(寢室)로 곧바로 들어가 변란을 고하고 응전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눈물을 흘리며 굳이 거절하고 나가지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무슨 낯으로 외인(外人)을 보겠는가.”
하였다. 천우가 울면서 굳이 청하여도 따르지 아니하고, 즉시 방간에게 사람을 보내어 대의(大義)로써 타이르며 혐의를 풀고 서로 만나자고 청하였으나, 방간이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돌이키랴.”
하였다. 화(和)가 태종에게 아뢰기를,
“방간이 이미 극도로 흉하고 험악하니 어찌 작은 예절을 지키려고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돌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화가 태종을 힘껏 끌어 외청(外廳)으로 나와 천우는 태종을 안고 화는 갑옷을 입혀서 억지로 말에 태웠다. 태종이 공정왕에게 아뢰기를,
“마땅히 대궐문을 굳게 지키게 하여 비상사태를 방비하소서.”
하였다, 이때에 공신들 중에서 다만 박포와 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만이 방간을 따랐고, 그 나머지는 모두 태종을 따랐다. 승선 이숙번은 선봉이 되어 힘껏 싸웠다. 방간의 아들 맹종(孟從)이 평소 활을 잘 쐈는데, 이날은 병으로 활을 쏘지 못하였다. 방간의 군사가 패하자 태종은 방간이 피살될까 염려하여 친히 스스로 계속해서 외치기를,
“우리 형에게 범하지 말라.”
하고 또 사람을 시켜 전갈하여 타일렀다. 태종은 길가에다 말을 멈추고 소리내어 통곡하였다. 방간이 말을 달려 바로 성균관 뒷 동리에 이르러 활과 화살을 버리고 누우니 추격하는 군사들이 그를 사로잡았다. 방간이 말하기를,
“나를 유혹한 것은 박포다.”
하였다. 당시 태조는 상왕이 되어 공정왕과 더불어 모두 송도에 있다가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그 소 같은 사람이 어찌 이런 짓을 하였을까. 삼한(三韓)에 세족 대가가 많은데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박포는 처형을 하였고, 방간은 토산현(兎山縣)으로 귀양갔다. 뒤에 태종이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방간을 죽이자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따라주지 아니하였고, 또 속적(屬籍)을 끊지 아니하였다. 뒤에 방간은 병으로 죽고, 맹종(孟從)은 세종조에 이르러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로 인하여 죽음을 당했다. 태종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에 중외(中外)가 모두 태조에게 청하여 태종을 세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공정왕으로 세자 삼기를 청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의거(義擧)해서 개국(開國)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일이 모두 정인군의 공이니 내가 세자가 될 수 없다.”
하였으나, 태종이 사양하기를 더욱 굳이 하자 공정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에게 마땅히 조처할 도리가 있다.”
하였다. 공정왕이 즉위한 뒤에 남재(南在)가 대궐 뜰에서 크게 말하기를,
“지금 마땅히 정안군을 세워 저사(儲嗣)로 삼아야 하니, 이 일은 늦출 수 없다.”
하자, 태종이 듣고 노하여 책하였다. 뒤에 박포의 난을 평정하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몽주(夢周)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큰 일이 거의 성공되지 못하였을 것이오. 도전의 난에 만약 정안군이 없었더라면 어찌 또한 오늘이 있었겠습니까? 또한 지난번의 일로 살펴보더라도 하늘의 뜻과 백성의 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니, 청컨대 빨리 위호(位號)를 정하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매우 훌륭하다. 나는 곧 아우로서 아들을 삼겠다.”
하고, 드디어 세워 세자로 삼았다. 그제야 들어가 태조를 뵈니 태조가 말하기를,
“하려고 한다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 않더라도 될 수 없는 일이다. 네가 이미 저사(儲嗣)가 되었으니 군국(軍國)의 일을 힘써 할 지어다.”
하고, 쓰던 갓을 주고, 하여금 잔을 올리게 하면서 매우 즐기다가 헤어져 나왔다.
○ 태종이 송도추동(松都楸洞)의 잠저(潛邸)에 있던(즉위한 뒤에 중수하여 경덕궁을 만들었음) 기묘년(1399, 정종 1) 가을 9월에 날이 새려고 하여 별이 드문드문 할 때에 흰 용이 침실위에 나타났다. 크기가 서까래만 하였고 비늘이 있었는데, 광채가 찬란하였으며, 꼬리를 꿈틀거리며 머리를 바로 태종이 누운 곳으로 향하였다. 시녀 김씨(金氏, 곧 경령군 배(裶)의 어머니)가 처마 밑에 앉았다가 그것을 보고 달려가 선부(膳夫) 김소근(金小斤) 등에게 말하자, 소근 등이 또한 나와서 보았는데 조금 있다가 구름과 안개가 가리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 고황제(高皇帝)가 상보사승(尙寶司丞) 우(牛)를 보내어 우리 나라에 왔을 때에 태조가 종친들로 하여금 각지 연회를 베풀어 대접하게 하였는데, 그가 거만하여 가는 곳마다 예모(禮貌)가 없다가, 태종의 집에 이르러 태종을 보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례하여 의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니, 세자 방석의 당이 모두 기뻐하지 아니하여 서로 말하기를,
“천자의 사신이 배신(陪臣)에게 머리를 조아리다니 어찌 이런 예가 있는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여 인하여 태조에게 참소하려 하였지만 하지 못했다.
○ 정도전의 난에 원경왕후(元敬王后)가 자신이 직접 태종이 서 있는 곳에 달려가 화(禍) 당하는 것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나왔는데, 태종의 부하들이 극력 만류하여 주저하는 동안에 하인 김부개(金夫介)가 도전의 갓과 칼을 가지고 오자, 후(后)가 그제야 돌아갔다. 또 방간의 난에는 군사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태종의 집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 마구[廐]로 들어가는 것을 본 후(后)는 태종이 반드시 패한 줄 알고 자신이 싸움터로 달려가 태종과 죽음을 같이하려고 도보로 가려다가, 시녀(侍女) 김씨 등이 말려서 가지 못하였었는데, 조금 있다가 이웃에 사는 정사파(淨祀婆)라는 늙은 여인이 태종이 승전한 소식을 듣고 와서 고하므로 그제야 돌아갔다.
처음에 태조는 정도전의 무리가 하는 말을 듣고 여러 왕자가 관할하고 있는 군사를 해산시켰으며, 태종은 영중(營中)에 있던 군기를 모두 불태워 버렸었다. 무인년(1398, 태조 7)의 변 때 오로지 후(后)가 준비해 두었던 군기에 힘입었고, 여러 군사들도 창졸에 말 한 필과 칼 한 자루도 구할 수 없다가 역시 후가 준비한 무기에 힘입었었다. 뒤에 태종이《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왕건(王建)의 후(后) 유씨(柳氏)의 사적을 보고, 세종(世宗)에게 말하기를,
“정사(定社)하는 날에 너의 모후(母后)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매우 많았고, 또 여러 친정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무기를 정돈하여 대비하였으니, 유씨(柳氏)가 고려 태조에게 갑옷을 입혀준 데에 비하여 그 공이 더욱 중하다.”
하였다.
○ 공정조(恭靖朝)에 대성(臺省)에서 상소(上疏)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여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예속시키기를 청하므로 들어 주었는데, 문하부사(門下府事) 이거이(李居易) 등이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여 곧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자, 이거이를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폄출(貶黜)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박(趙璞)이 지협주사(知陜州事) 권진(權軫)에게 말하기를,
“거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준(趙浚)의 말을 믿었던 것이 후회된다.’하기로 ‘무슨 까닭인가’하였더니, 거이의 말이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할 때에 있어 조준이 나에게 왕실(王室)을 호위하는 데는 강한 군사가 제일이라.’하기로, 내가 그 말을 믿고 즉시 패기(牌記)를 바치지 아니하였다가 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더라.”
하였다. 뒤에 권진이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되자 조박의 말에 다시 더 보태어 헌신(憲臣) 권근(權近), 간신(諫臣) 박은(朴訔) 등과 더불어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과 거이의 죄를 논하였는데, 이때에 조종 신하들은 조준의 평소의 허물을 꺼집어내어 공격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조준을 옥에 가두고 참찬 이서(李舒), 순군만호(巡軍萬戶) 윤저(尹抵)ㆍ이직(李稷)ㆍ김승주(金承霔)가 국문(鞠問)하게 되었다. 권근 등이 그들을 각기 현재 있는 곳에 두고 국문하기를 청하자, 공정왕이 지신사 박석명(朴錫命)으로 하여금 태종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의논하기를 ‘거이와 조박이 있는 곳에 사람을 따로 보내어 문초함이 옳겠다’고 하니 어떻겠습니까”
하니, 태종이 대답하기를,
“옥(獄)에 관한 일에, 비록 지방에 있는 죄인이라도 반드시 서울로 올라 오는 까닭은 듣는 사람이 많고 분별하기를 명백히 하려는 것인데, 국문할 사람을 따로따로 보낸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므로, 공정왕이 명령하여 이거이와 조박을 잡아서 서울로 오게 하였다. 태종이 윤저(尹抵)를 불러 이르기를,
“상께서 경의 마음씀이 공정하다 하여 순군만호(巡軍萬戶)로 임명한 것이니 경은 신중하게 하라.”
하고, 대성(臺省)의 장(狀)을 보이며,
“태상왕(太上王)이 개국한 것과 주상(主上)이 왕위를 이은 것과 내가 불초한 몸으로 세자가 되어 오늘의 경사에 이른 것이 모두 조준의 공인데, 이제 전일의 공을 잊어버리며 허실(虛實)을 분명히 알아보지도 않고 다만 해당 관청의 장(狀)만을 믿는다면, 하늘이 매우 두려워할 것이다. 경이 만약 조준으로 하여금 죄를 받아 죽게 한다면 사람들이 어찌 경을 충신이라고 하겠는가? 조준이 만약 이런 말을 했다면 크게 죄가 있는 것이다.”
하였다. 윤저가 두 번 절하고 나와 조박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문초하니, 조박의 말이 대성(臺省)의 소장(疏狀)의 뜻과 같지 아니하였고, 또 권진을 가두고 문초하니 또한 소장의 뜻과 달랐다. 거이를 조박과 더불어 대질시키자 조박이 굴하여 대단히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공정왕이 권근 등을 매우 미워하였고, 조박은 이천(利川)으로 폄직(貶職)시키고 권진은 축산도(丑山島)로 귀양보냈다. 조준이 국문을 당할 때에 넔을 잃고 정신이 없어 빤히 쳐다볼 뿐이요 한마디 말도 못하여 옥사(獄事)가 거의 성립될 뻔하였었는데, 태종이 힘써 구원한 덕택으로 면하게 되었다.
○ 정도전이 잡혀 죽을 때에 방석(芳碩)의 당이 모두 달아나는데, 김계란(金桂蘭)이 홀로 가지 않았고, 남은이 도망할 때에는 시중하던 하인들이 모두 흩어졌는데, 오직 최운(崔沄)이 남은을 도와 호위하여 피해 숨고 끝내 떠나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불러다 부하에 두고 근시(近侍)의 직책을 맡겼는데, 김계란은 지위가 3품이 되었고 최운은 2품에 이르렀다.
○ 태조조(太祖朝)에 경상 전라 도안무사(都按無使) 박자안(朴子安)이 항복한 왜인(倭人)을 응접하다가 군사의 기밀을 잘못하여 죄가 참형(斬刑)에 해당되므로 이미 공문을 보내어 죽이게 하였는데, 일이 외국에 관계되어 비밀에 부치고 발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외인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그 아들 실(實)이 듣고 태종의 집에 나아가 집에 나아가 땅을 치며 통곡하여 아비의 목숨을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마음에 불상히 여겨 여러 종친(宗親)들과 더불어 대궐에 나아가 청하려고 하니, 여러 종친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가의 비밀스러운 일인데 주상(主上)께서 만약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시면 무슨 말로 대답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그 책임을 질 것이다.”
하고, 곧 함께 대궐에 들어가 내관(內官) 조순(曺恂)을 시켜 아뢰게 하니, 조순이 말하기를,
“이것은 비밀한 일인데 여러 종친이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사람을 형벌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인데 외인이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는가?”
하였다. 조순이 들어가 아뢰니, 태조가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자안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하더니, 조금 있다가 중추원에 명령하기를,
“내가 자안의 죄를 감해 주고자 하니 급히 말 잘 타는 사람을 불러서 문서를 전달하라.”
하였다. 중추원에서 심귀수(沈龜壽)로써 아뢰자, 곧 명령하기를,
“네가 힘껏 빨리 달려가 자안의 죽음을 구원하게 하라.”
하였다. 귀수가 명령을 받고 빨리 달리다가 중도에 말에서 떨어져 역리(驛吏)로 하여금 대신 보냈다. 문서가 도착되던 날 관아에서 자안의 형벌을 집행하려고 그 얼굴에 칠을 하고 옷을 벗겼으며 칼까지 이미 준비하였는데, 문득 너른 들판에 한 사람이 달려 오면서 갓을 벗어 휘두르는 것을 바라보고 관아에서 이상히 여겨 형의 집행을 정지하고서 기다려, 자안이 죽지 않게 되었다. 실(實)이 본래 학문도 없고 또 무예(武藝)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태종이 그가 아비를 살린 것을 장하게 여겨 금군(禁軍)을 맡겨 지위가 2품에까지 이르렀다.
○ 하륜(河崙)이 본래 사람의 상을 잘 보았는데, 민제(閔霽)에게 이르기를,
“내가 사람을 상본 것이 많지만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이가 없었소. 내가 보고자 하니 소개를 하여 주시오.”
하였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자네를 보고자 하네.”
하였다. 태종을 보고 하륜은 드디어 마음을 기울어 교분을 맺었으며, 뒤에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 5월 16일은 태종의 탄신일(誕辰日)이다. 각도에서 모두 방물(方物)을 바치는데, 풍해도 절제사(豐海道節制使) 유은지(柳殷之)는 무일도(無逸圖) 족자(簇子)를 방물과 아울러 바쳤다.
○ 야은(冶隱) 길재(吉再)는 고려의 신우조(辛禑朝)에 벼슬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었는데,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선산善山)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때에 길재와 성균관(成均館)에서 함께 공부하였는데, 세자가 되자 서연관(書筵官)과 더불어 유일(遺逸)의 선비를 논하다가, 태종이 말하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하였는데 보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은 길재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길재의 효행(孝行)을 갖추어 말하자, 태종이 영을 내려 부르니 길재가 역마를 타고 서울에 왔다. 태종이 공정왕(恭靖王)에게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가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아니하고 태종에게 글을 올리기를,
“제가 지난날 저하(邸下)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시경(詩經)》을 읽었습니다. 오늘 신을 부르신 것은 옛날의 정의를 잊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신조(辛朝)에 과거하여 벼슬하다가, 왕씨가 다시 서게 되자 곧 고향에 돌아갔으며, 장차 그대로 평생을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옛 정의를 기억하여 부르시므로 제가 올라와 뵙고서 즉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니, 벼슬을 하는 것은 저의 뜻이 아닙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자제가 말한 것은 강상(綱常)으로서 바꾸지 못할 도리이니, 의리는 탈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부른 사람은 나요 벼슬을 준 사람은 주상(主上)이시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
하였다. 길재가 드디어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본시 한미(寒微)한 처지로서 신씨의 조정에 벼슬하여 문하주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계집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鄕里)로 놓아 보내어 신의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餘生)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다. 공정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본 고을에 명령하여 복호(復戶)하게 하였다. 뒤에 세종이 즉위하고 태종이 상왕(上王)이 되자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사(義士)이다. 들으니 그가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 써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
하고서, 드디어 그 아들 사순(師舜)을 역마(驛馬)로 불러 종묘부승(宗廟副丞)을 제수하였고, 길재가 죽자 쌀과 콩으로 부의하도록 명하였으며, 또한 장사지낼 역군(役軍)을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증직(贈職)하였다. 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조가 너그럽고 어진 큰 도량으로 절의(節義)를 표창한 미덕(美德)이 바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놓아 보낸 것과 한 나라 광무(光武)가 엄자릉(嚴子陵)을 돌려 보낸 것과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일은 꼭 같으니, 이것은 모두 그 절의를 높이고, 그 뜻을 이어 주어 백세토록 그 고결한 유풍(遺風)을 격려하고 만세(萬世)토록 큰 기강(紀綱)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