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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애 金淳愛(1889 ~ 1976)】 "상하이에서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1889년 5월 12일 태어났다. 고향의 소래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전신)로 진학한 친오빠 김필순(金弼淳)의 인도로 1901년 식구들과 상경하였다. 새문안교회에 다니며 정신여학교에 입학해 근대 학문을 수학하였다. 1909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김필순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므로 1912년 함께 만주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9월 만주 퉁화현에서 난징(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1월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였다. 김규식은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다. 김규식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활동하던 1906년경에도 혼담이 오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기에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규식은 군수를 지낸 조순환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1917년 지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결혼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결혼은 정신여학교 동창으로 학창 시절부터 가까웠던 김규식의 부인이 임종 전에 “꼭 김순애 여사와 결혼하라”라고 부탁하여 성사되었다고 전해진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이어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은 당시의 약소민족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운형(呂運亨) 등 한국 청년들도 이를 기회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개최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위한 진정서 제출과 대표자 파견 계획을 수립하고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뽑았다. 이 제안을 수락한 김규식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1919년 1월 하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여 당내 유일한 여성당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을 선전하며, 국내와 일본,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 당원을 파견하여 독립 선언을 촉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1월 말 김규식이 파리로 출발하였을때, 선우혁(鮮于爀)·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2월 중순경 부산에 도착한 뒤 국내의 중요인사와 접촉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및 한국 독립 선전을 위한 동조 시위를 촉구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대구의 백남채(白南採) 등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이를 알렸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함태영(咸台永) 목사와 평양 지역 주요 인사들에게도 거사 계획을 비밀리에 전하였다. 그 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활동이 일제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만주로 향하였다.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여 압록강을 넘은 뒤 헤이룽장성에서 활동하던 친오빠 김필순을 찾아갔다. 여기서 중국인 유지의 협조를 얻어 한인 동포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영사관에 연행 취조를 당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풀려나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애국부인회가 서울과 평양 등지에 조직되었다. 이에 같은 해 7월 이화숙(李華淑)·이선실(李善實)·강천복(姜千福)·박인선(朴仁善)·오의순(吳義順) 등과 같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주된 활동은 임시정부 지원이었다. 7월 13일 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 등의 발의로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적십자회가 상하이에서 복구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사검(査檢)·이사로 활동하면서 대한적십자회의 선언을 발표하고 국제적십자 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대한적십자회를 알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이듬해 1월에는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간호원 양성 활동도 겸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이에 발맞춰 같은 해 1월에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교통부차장 김철, 국무원비서장 김립(金立), 재무부차장 윤현진(尹顯振), 경무국장 김구 등과 함께 대한의용단(大韓義勇團)을 발기하였다. 의용단은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국내외에서 군사 활동을 실천하며 의열투쟁을 전개한 비밀결사였는데, 여기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취지 아래 1920년 9월부터 상하이의 대한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국외 한인 교육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민족교육 기금 조성 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솔선수범하였다. 당시 여운홍(呂運弘)이 교장으로 있던 상하이 한인 동포 자제의 민족교육 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비를 지원하고, 교사 신축비를 모금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달 30일 열린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총회에서 18인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 1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 대표가 독립운동 방략과 조직의 재정비를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까지 개최된 이 회의에는 국내외에서 12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해체 후 새 정부 조직을 주장한 창조파와 유지 및 개편·보완을 주장한 개조파가 서로 대립한 것이다. 이 회의에 대한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애국부인회의 입장인 개조론 대신에 창조론을 찬성한다고 밝히며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하였다. 이 일로 대한애국부인회의 대표직을 상실하면서 부인회와 결별하였다.
1926년 7월 안창호·염온동(廉溫東)·엄항섭(嚴恒燮)·송병조(宋秉祚) 등과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지원책을 모색하여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였다. 정위원·후보위원·회계검사위원 등을 두었는데, 안창호·조상섭·조마리아·진희창·금보연 등과 같이 정위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자금난 해결을 위한 동포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적극적 원조의 실행을 목적으로 한다는 방침 아래 인구세 납입 외 매년 1원 이상 무제한의 후원을 동포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오랜 유랑 시기를 거친 끝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였다. 1940년대 임시정부는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우선 1942년 4월 좌파 진영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군사 통일을 이루었다. 곧 이어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의 대표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받아들여 통일의회를 구성하였다. 나아가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 김구와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을 주석과 부주석으로 선임하고, 국무위원을 좌우 진영에서 선출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충칭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감찰위원을 맡아 김규식 중앙집행위원회 주석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1943년 2월 충칭의 각계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여성계 통합을 추진해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다른 간부로 부주석 방순희(方順熙)·서무부 최소정(崔素貞, 최선화)·조직부 연미당(延薇堂)·훈련부 정정화(鄭靖和)·선전부 김윤택(金潤澤)·사교부 권기옥(權基玉)·재무부 강영파 등이 선출되었다. 재건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와 직접 연결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조직이었으며,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는 여성단체의 대통합이 목표였다. 한국애국부인회는 홍보를 중요활동으로 여겨 중국 중앙방송국을 활용하여 세계 각지에 산재한 국내외 여성 동포들에게 민족 독립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각지 여성 조직의 분발과 긴밀한 연락을 호소하였다. 3월 8일 국제부녀절에 세계 여성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여 독립운동뿐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 광복군에게 위문품을 지원하였고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한국인 위안부 여성 10여 명을 인계받아 치료하고 재교육하여 독립운동에 동참시켰다.
특히 1943년 3월에 개최된 워싱턴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지도자가 전후에 한국을 독립시키기 전에 국제 감시 보호 하에 두기로 합의하였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5월 한국애국부인회는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때는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홍진(洪震)·김기원(金起元, 김붕준)·김규광(金奎光, 박건웅)·유월파(柳月波, 유림)·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추대되었다. 한국민족 독립, 임시정부 승인, 민족 단결, 연합국 참여와 물자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4개항의 재중국 한인대회선언을 채택하여 국내외에 거족적인 결의를 공표하였다.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단결, 연합국 참가와 지원을 촉구하면서 세계 각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주장한 것이다.
1945년 8월 광복하자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1차 환국 때 김규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부녀신생활사(朝鮮婦女新生活社) 사장, 민중동맹(民衆同盟)과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이사로 재직하였다.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김규식이 납북되자 정계를 은퇴하고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1976년 5월 17일 서울에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川里)에서 1889년 5월 12일 태어났다. 고향의 소래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전신)로 진학한 친오빠 김필순(金弼淳)의 인도로 1901년 식구들과 상경하였다. 새문안교회에 다니며 정신여학교에 입학해 근대 학문을 수학하였다. 1909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근무하던 김필순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으므로 1912년 함께 만주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5년 9월 만주 퉁화현에서 난징(南京)으로 옮겨 명덕여자학원(明德女子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1월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하였다. 김규식은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같은 새문안교회의 교인이었다. 김규식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활동하던 1906년경에도 혼담이 오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신여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이기에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규식은 군수를 지낸 조순환의 무남독녀인 조은수(趙恩受)와 결혼하였는데, 그녀가 1917년 지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결혼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 결혼은 정신여학교 동창으로 학창 시절부터 가까웠던 김규식의 부인이 임종 전에 “꼭 김순애 여사와 결혼하라”라고 부탁하여 성사되었다고 전해진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이어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은 당시의 약소민족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운형(呂運亨) 등 한국 청년들도 이를 기회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개최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을 위한 진정서 제출과 대표자 파견 계획을 수립하고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뽑았다. 이 제안을 수락한 김규식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1919년 1월 하순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에 입당하여 당내 유일한 여성당원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한국 독립을 선전하며, 국내와 일본,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 당원을 파견하여 독립 선언을 촉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같은 해 1월 말 김규식이 파리로 출발하였을때, 선우혁(鮮于爀)·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 등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2월 중순경 부산에 도착한 뒤 국내의 중요인사와 접촉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및 한국 독립 선전을 위한 동조 시위를 촉구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대구의 백남채(白南採) 등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하여 이를 알렸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함태영(咸台永) 목사와 평양 지역 주요 인사들에게도 거사 계획을 비밀리에 전하였다. 그 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활동이 일제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만주로 향하였다. 2월 28일 중국 여자로 변장하여 압록강을 넘은 뒤 헤이룽장성에서 활동하던 친오빠 김필순을 찾아갔다. 여기서 중국인 유지의 협조를 얻어 한인 동포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영사관에 연행 취조를 당하게 되었으나 다행히 풀려나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외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애국부인회가 서울과 평양 등지에 조직되었다. 이에 같은 해 7월 이화숙(李華淑)·이선실(李善實)·강천복(姜千福)·박인선(朴仁善)·오의순(吳義順) 등과 같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주된 활동은 임시정부 지원이었다. 7월 13일 이희경(李喜儆)·안창호(安昌浩)·안정근(安定根) 등의 발의로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얻어 ‘독립전쟁으로 인한 전상병(戰傷兵)의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대한적십자회가 상하이에서 복구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였다. 사검(査檢)·이사로 활동하면서 대한적십자회의 선언을 발표하고 국제적십자 연맹에 대표를 파견하여 대한적십자회를 알리는 데 주력한 것이다. 이듬해 1월에는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간호원 양성 활동도 겸하였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군사 활동을 벌였다. 이에 발맞춰 같은 해 1월에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교통부차장 김철, 국무원비서장 김립(金立), 재무부차장 윤현진(尹顯振), 경무국장 김구 등과 함께 대한의용단(大韓義勇團)을 발기하였다. 의용단은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국내외에서 군사 활동을 실천하며 의열투쟁을 전개한 비밀결사였는데, 여기에 함께 참여한 것이다.
“교육은 우리 민족의 생명이다. 교육이 있으면 살고 교육이 없으면 죽는다”라고 하는 취지 아래 1920년 9월부터 상하이의 대한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국외 한인 교육의 기초를 확립하고자 민족교육 기금 조성 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솔선수범하였다. 당시 여운홍(呂運弘)이 교장으로 있던 상하이 한인 동포 자제의 민족교육 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유지비를 지원하고, 교사 신축비를 모금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달 30일 열린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총회에서 18인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 1월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와 지역 대표가 독립운동 방략과 조직의 재정비를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5월까지 개최된 이 회의에는 국내외에서 120여 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해체 후 새 정부 조직을 주장한 창조파와 유지 및 개편·보완을 주장한 개조파가 서로 대립한 것이다. 이 회의에 대한애국부인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애국부인회의 입장인 개조론 대신에 창조론을 찬성한다고 밝히며 김규식과 노선을 같이하였다. 이 일로 대한애국부인회의 대표직을 상실하면서 부인회와 결별하였다.
1926년 7월 안창호·염온동(廉溫東)·엄항섭(嚴恒燮)·송병조(宋秉祚) 등과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지원책을 모색하여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였다. 정위원·후보위원·회계검사위원 등을 두었는데, 안창호·조상섭·조마리아·진희창·금보연 등과 같이 정위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자금난 해결을 위한 동포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적극적 원조의 실행을 목적으로 한다는 방침 아래 인구세 납입 외 매년 1원 이상 무제한의 후원을 동포들에게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오랜 유랑 시기를 거친 끝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였다. 1940년대 임시정부는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일제를 공동의 적으로 하여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우선 1942년 4월 좌파 진영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으로 편성하여 군사 통일을 이루었다. 곧 이어 10월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의 대표를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받아들여 통일의회를 구성하였다. 나아가 1944년 4월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 김구와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을 주석과 부주석으로 선임하고, 국무위원을 좌우 진영에서 선출하여 연합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충칭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감찰위원을 맡아 김규식 중앙집행위원회 주석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와 함께 1943년 2월 충칭의 각계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여성계 통합을 추진해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다른 간부로 부주석 방순희(方順熙)·서무부 최소정(崔素貞, 최선화)·조직부 연미당(延薇堂)·훈련부 정정화(鄭靖和)·선전부 김윤택(金潤澤)·사교부 권기옥(權基玉)·재무부 강영파 등이 선출되었다. 재건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와 직접 연결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결성한 조직이었으며,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는 여성단체의 대통합이 목표였다. 한국애국부인회는 홍보를 중요활동으로 여겨 중국 중앙방송국을 활용하여 세계 각지에 산재한 국내외 여성 동포들에게 민족 독립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각지 여성 조직의 분발과 긴밀한 연락을 호소하였다. 3월 8일 국제부녀절에 세계 여성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여 독립운동뿐 아니라 여성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 광복군에게 위문품을 지원하였고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한국인 위안부 여성 10여 명을 인계받아 치료하고 재교육하여 독립운동에 동참시켰다.
특히 1943년 3월에 개최된 워싱턴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지도자가 전후에 한국을 독립시키기 전에 국제 감시 보호 하에 두기로 합의하였다는 신문기사가 보도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항의하고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5월 한국애국부인회는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하였다. 이때는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홍진(洪震)·김기원(金起元, 김붕준)·김규광(金奎光, 박건웅)·유월파(柳月波, 유림)·한지성(韓志成) 등과 함께 주석단으로 추대되었다. 한국민족 독립, 임시정부 승인, 민족 단결, 연합국 참여와 물자 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4개항의 재중국 한인대회선언을 채택하여 국내외에 거족적인 결의를 공표하였다.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단결, 연합국 참가와 지원을 촉구하면서 세계 각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주장한 것이다.
1945년 8월 광복하자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 1차 환국 때 김규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조선부녀신생활사(朝鮮婦女新生活社) 사장, 민중동맹(民衆同盟)과 민족자주연맹(民族自主聯盟)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1948년부터 1962년까지 이사로 재직하였다. 6·25 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김규식이 납북되자 정계를 은퇴하고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1976년 5월 17일 서울에서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