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畵) 이불 / 황동규
2011년 1월 16일, 일, 마냥 맑음.
서울 최저기온 영하 17.8도, 낮 영하 10도
눈 속을 한없이 걷는 것처럼 오전을 보냄.
차 등에 덮인 눈 쓸어주려 나가보니
연고처럼 살이 달라붙는 추위.
베란다 화분들에게 거실 문 좀더 열어주고
가벼운 추위 속에서 가볍게 책을 읽음. 문득
나도 모르게 거실 마룻바닥에 깔리는
건너편 동과 동 사이 나무들의 묽은 그림자와
베란다 난들의 짙은 실루엣이 만나며 실시간으로 만드는
긴 네모꼴 묵화.
겨울 해가 건너편 동 뒤로 넘어가며 거실 빛을 거두고
조금 후 동과 동 사이를 건너가며 깔리기 시작해서
십여 분 후에는 언제 그런 게 있었냐는 듯 사라지는
그림자 무늬가 제대로 펼쳐지는 건
겨울 중에도 지금 바로 이때,
마룻바닥 한가운데에 잠시 이불처럼 덮였다 벗겨지는 묵화.
그 속에 들어가 몸을 눕혀본다.
내 몸의 넓이와 길이에 얼추 맞는다.
이곳에서 스물 몇 겨울을 살아내면서
묵화 이불 속에 들어온 건 이게 처음이지?
느낌과 상관없이 '따스하다'고 속삭인다.
벌레처럼 꿈틀거려본다.
지금까지 바른 느낌과 따스한 느낌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늘 바른 느낌이 윗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 허전한 따스함이 지금
식어가는 마음의 실핏줄들을 다시 뎁혀주는구나
- 황동규,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