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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소씨(蘇氏)유래를 찾아서!
우리 소씨(蘇氏)는 풍이(風夷)의 후예로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 배곡(風州倍谷)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환국의 제가되어 전 국토에 무궁화(蘇:부소나무)를 심었다. 또한 새 울음소리를 듣고 음악을 만들었으며, 소(蘇)의 기강과 덕의 교화로 백성들에게 풍도를 숭상케 한 것이 蘇로 성을 삼게 된 까닭이다.
적제의 후손이 풍(風) 강(姜) 희(姬) 기(己)등의 여러 성씨가 되였다. 그 후 적제축융(복해復解)의 61세손 己昆吾가 제곡고신의 학정이 싫어 서숙신에서 동숙신으로 옮겨 기를 소로 바꾸어 소풍이 되었다 한다.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지금의 길림성)의 하백(河伯:하백)에 봉해졌고, 손녀딸 하백녀가 단군비가 되었으며 그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신 유(申 有), 진 기(陳 岐) 등과 더불어 경주로 내려와 (BC209년) 진한(辰韓)을 세웠으며, 백손공 5세손 소벌도리공이 신라 6촌중 고허촌장이며 불구내(박혁거세)를 왕으로 세우고 백손(伯孫)의 29세손 알천(閼川)은 636년(선덕여왕 1) 백제가 독산성(獨山城)을 침입할 때 장병을 이끌고 나가 이를 물리치고 637년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으며, 638년에 칠중성(七重域:적성)에서 고구려 군(軍)을 격퇴하고 이참 겸 각간(伊飡兼角干)이 되었다.
647년(진덕여왕 1) 2월에 상대등(上大等:신라 6대 귀족회의 의장, 수상)이 되었다. 654년(태종 무열왕 1) 진덕여왕이 서거함에 섭정(왕으로 추대)을 간청했으나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이미 늙었으며 또한 덕행(德行)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崇重)하고 실로 제세(濟世)의 영걸(英傑)이라 아니한 수 없다」하고 김춘추(金春秋)를 왕(태종 무열왕)으로 추대하였다. 656년에 태종 무열왕이 경(慶)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그의 조상 소벌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 무열왕 7) 3월 진주 구시동(九枾洞:지금의 상대동)에 이거(移居), 경(慶)으로 개명(改名)하고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족보에 실린 내용을 보고 우리의 조상님들을 찾아서 한단고기 등 10여권의 고대사와 인터넷 여행을 4개월 동안 꼬박 했다. 조상님 덕분에 관심도 없었던 상고사의 많은 것을 알았다. 책에서는 크게 얻은 것이 없었고 한단고기에서만 단군비 하백녀와 단군의 4명의 자손 부루, 부소, 부우, 부여를 찾았다. 부소갑(비서갑)의 하백녀의 자손.... 이름에서 부소갑 할아버지의 외손이란 것을 느낄 수 있어 반가웠다. 당시는 모계사회나 다름없던 시절이라 남자가 처가로 들어가 산다했다. 엄마가 살던 곳의 이름을 따서 자식들의 이름을 붙여주는 시대이기 때문에 부소갑의 부자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소는 더욱....적제 축융을 찾았는데 몇 군데 블로그에서 초대 한인천제로 묘사되었었다.
년도수로 보아서 초대는 아니고 끝이나 6대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신화에서는 황제 때 치우천왕과의 싸움에서 화공으로 큰 공을 세워 그공으로 남악 형산에 남방적제로 봉했다고 했다. 이것은 황제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선조도 그 아래로 끌어내리는 역사 왜곡이 되는 것이다.
「역대신선통감」에 의하면 천수에서 태호 복희씨 이전에 수인씨라는 인물이 나왔는데 그는 하늘의 별들을 28숙으로 나누고 1년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로 나누었다. 또 한 달을 30일로 정했다. 그는 또 나무를 마찰시켜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나무로 만든 그릇과 시루, 사발 등의 토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한다.
수인씨가 죽고 8대를 전하다가 용성씨, 사황씨, 백황씨, 속륙씨, 곤련씨, 갈천씨, 축융씨, 호영씨, 무회씨로 이어져 무회씨가 죽고 난 후 태호 복희씨가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신선통감에서 우리 족보와 맞음을 확인했다.
곤오공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아랫부분은 노중평님 (역사천문학회 부회장)께서 곤오공에 대하여 연구하신 것을 가져왔다.
<좌전左傳> 魯昭公 12년 기록에는 “옛날에 선왕 웅역熊繹이 창업을 할 때 형산에 있었는데, 그곳이 길을 울타리로 막고, 쪽빛실로 가리듯, 풀이 무성한 곳이었다. 황조皇祖가 백부 곤오였다. 옛날에 허락한 이 집이었다.8) 라는 말이 나온다. 웅역의 선조가 곤오라는 기록이 관심을 끈다.
8) <左傳> 魯昭公十二年記載 “昔我先王熊繹 辟在荊山 篳路藍縷 以處草莽 昔娥皇祖伯父昆吾, 舊許是宅 辟
<부소보서>에서 곤오는 적제 한인천제의 61세 손 기풍己豊이다.
전백찬翦伯贊은 <先秦史>에서 고증하여 설명하기를, “형산은 초의 선왕 웅역의 거소이다. 때문에 곤의 씨족이 된다. 형초로 이주하여 자리 잡았다. 곤오나 초의 선왕(황고) 백부이다. 그러므로 초의 씨족은 형초로 이주하여 남쪽에 자리 잡은 자이다”9)라고 하였다.
9) <金文氏族硏究> 翦伯贊先生在<先秦史>-書中考證說: “荊山者, 是爲楚之先王熊繹居所, 故昆吾之族, 實有遷於荊楚者.
이 말은 초나라를 일으킨 사람이 곤오인데 초나라를 일으킨 곳이 형산이라는 뜻이다. 곤오족의 웅역이 형산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청동 솥인 정을 제조하였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좌전左傳> 애공 17년에 곤어지昆吾之虛라고 한 곳은 유융주有戎州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성족己姓족이다10)라고 하였다. 초의 시조인 웅역의 근거지를 ‘곤오의 허’라고 하였고, 이곳을 유융주라고 하였으므로, 유웅주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곤오가 융족戎族의 조상이 된다고 볼 수도 있다.
10) <左傳> 哀公十七年 謂昆吾之墟 有戎州己姓
5) 昆吾己姓
<국어國語 정어鄭語>에도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정어鄭語에 기성곤오己姓昆吾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기성이 곤오라는 뜻이다.11) 이 기록은 <東槿舊譜序>의 기록12)과 일치한다.
11) <國語 鄭語> 己姓昆吾
12) <東槿舊譜序> 赤帝之後孫爲風姜姬己等諸姓至赤帝61世孫太夏公號昆吾諱豊本姓己改蘇
기己와 기杞는 나(余)라는 뜻인데, 기杞는 하후夏后가 된다. 하후 즉 하나라의 우임금이 기성인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기성이 하족夏族이라는 것이다.13) (이상 <金文氏族硏究> 14, 15쪽 참조) 하족의 선조가 기성을 가진 곤오가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몇 되지 않는 귀중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왜 이 기록이 중요한가를 다음의 예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金文氏族硏究>15쪽 余以爲己與杞-字變. 杞爲夏后, 故己姓昆吾, 亦當爲夏族 北京大學出版社 1988.
<竹書紀年>에 따르면 황제黃帝, 소호금천少昊金天, 전욱고양諯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堯, 舜의 6인을 夏이전의 제위로 기록하였고, 하夏의 제위는 우禹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록하였다. 상相은 우禹 , 계啓, 태강太康, 중강仲康에 이어 5위에 해당한다. 제곡고신의 아들 지摯를 빼어다가 소호금전에 갖다 붙여 제지소호씨帝摯少昊氏라고 하였다.
<죽서기년>의 저자가 제곡고신의 아들 지를 할아버지 소호에게 갖다 붙인 것은 제지가 중여곤에게 돌아가야 할 제위를 가로챈 때문이라고 본다. 중여곤을 夏族에게서 배제함으로써 1차 역사왜곡이 시작되었고, 지를 소호에게 갖다 붙임으로써 2차 역사왜곡이 시작되었다. 이상은 노중평님이 조사한 곤오공에 대한것이다
배달나라로 간 곤오공은 견이의 딸 유정과 결혼해서 삼형제를 두었는데 큰아들 갑은 하백이 되었으며 갑의 딸은 초대 단군왕비가 되었다한다. 정아라고도 하고 마니라고도 한다 했다. 단군왕검이 마니산 첨성단에서 제를 지냈다는데 마니의 이름을 따서 마니산이 된것은 아닐지....?
셋째 아들 흘이 아버지와 뜻이 안 맞아 요 임금께 벼슬하여 유소국을 하사 받아 전욱고양의 유허지로 돌아갔다.
흘은 돌아가서 자손 대대로 곤오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 같았다. 청동기를 만든 주역으로 나오기도 하고 기와를 제작하여 처음으로 기와집을 지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하나라의 부용국으로 아주 강대한 나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춘추오패에 오르기도 했단다.
하나라 말에 왕이 포악하여 반기를 들었다가 은나라를 세운 탕에 의하여 망했다고 나온다. 곤오국이 강대해서 먼저 친 다음 하나라를 다음에 쳤다한다. 하나라 제분 33년에 곤오의 아들에게 유소국을 하사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갈래가 되었다
합해져 주 나라 때는 자손들이 곤오공의 막내 동생 계련 후손과 초나라를 이루게 되는것 같다.
초나라는 황동태일(단군왕검)을 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유소국은 최소한 은나라말까지 있었든 것 같다. 은나라 마지막왕인 주의 왕비 달기가 유소국 딸이라 한다. 천하의 절색이며 악녀로 소문이 났지만 일본의 고대학자 진순신은 복사(거북 등껍질에 새긴 사기)에서는 달기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고 하나라의 마지막왕비 매희 이야기가 많이 섞인 것으로 보아 승자의 역사가 아니겠느냐고 했다. 너무 아름다워 죽일 수가 없어서 노인네를 시켜도 못 죽여 천을 덮고 목을 쳤다고 한다.
중국소씨도 같은 곤오공 자손이라는 소병석 부회장님의 글에서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찾아보았다. 출생 연대표는 다른 두 군데 블로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창의- 전욱고양-칭-권장-중려와 오회-육종-곤오공 6형제. 막내동생 계련(초나라 시조)
이계보에서 황제와 창의는 틀리고 신농-희화라고 한다. 그리고 너무 대수가 많아서 곤오공의 출생연도로 보아서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아서 수없이 찾아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금문의 비밀을 읽게 되었다. 낙빈기가 저술한 단축된 계보를 보고 곤오공 망명년도 등을 비교해 이계보가 맞다고 생각됐다.
신농- 희화-전욱고양-셋쩨아들 곤(일계,동생오회)-육종-곤오
낙빈기 도표
여기서 일계는 중여곤을 가르키는 말이다. 중여곤과 오회는 형제라는 것은 많은 곳에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곤오공은 곤의 친손자일까 아니면 오회의 손자일까? 곤이 죽은 후 오회가 대신 축융이 되어 화정관이 되었다고 했다. 사기에는 오회의 손자로 나온다. 오회는 순임금의 형으로도 나오며 요 임금의 딸들과 공동부부로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곤오공보다 생년이 늦다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되겠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신농은 삼황오제시대 8대 유망을 말한다.
중여 ,중여곤, 곤으로 된 최소한 두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그 사람들이 한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 같다. 왜냐하면 기원전 2412년에 만들어진 청동기 술그릇 형계유와 그 이듬해 만들어진 코뿔소 술두루미 26자의 명문이 새겨진 중여준과 삼병명 창칼에 새겨진 중여곤이 같은 인물이라고 하는데 이런 명문이 새겨질 당시는 사실상 연세가 꽤 됐을 것이다. 그리고 중여곤의 딸 간적의 아들이 우라는데 우가 사위가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사위가 되기에는 나이차이가 많은 것 같다.
제곡고신이 치수를 잘못했다고 또는 공공을 물리치질 제대로 못했다고 죽였다는 중여곤으로도 나오고 요때 죽였다고도 하며 순 때로 나오기도 하는 곤.... 이 모두가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전욱 고양임금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며 제곡고신의 장인이며 또한 사위이며 딸 간적. 강원이 제곡의 부인들이다. 이것은 당시의 가족 관계가 특이한 양급제, 푸나루아 모계제로 누비사돈이 되다 보니 그런 것이다. 신농계와 황제계가 번갈아 왕위를 물려받기 때문에 중여곤쪽의 곤오공은 다음 제위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다.중여곤이 아들이 없는 걸로 보아 장손이니까 다음 후계자로 키웠던 것 같다. 결국 제곡은 다음 왕위를 자기 자손들에게 넘기기 위해 신농파의 강대한 싹을 자르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고사성어중에 회록지재라는 말이 있다. 거기에서는 중여곤이 죽고 동생 오회가 화정이 되었으며 중여 아들 육종이 화정이 되어 세 사람을 불의 신으로 섬겼다고 한다. (검색창에 회록지재를 써 넣으면 나옵니다)
그리고 오회는 순임금의 형으로도 많이 나옵니다. 순임금과 요 임금의 딸들(아황 ,여영)과 공동 부부로요.그렇다면 사실 곤오공보다 생년이 늦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되겠습니까? 곤이 친할아버지가 된다는것이 시기적으로 맞는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단서가 된 창칼 세 자루
1900년대 초 청(淸)나라 말기, 국민당 초에 하북성(河北省) 보정(保定) 청원 남향(淸苑 南鄕)에서 「당우 삼과병명(唐虞 三戈兵銘)」이라는 청동으로 만든 창날 세 자루가 발굴됐다.
명문내용[금문자(金文字)]
첫째칼날
大 且 且 且 且 且 且
且 日 日 日 日 日 日
日 丁 乙 庚 丁 巳 巳
癸
둘째칼날
且 大 大 中 父 父 父
日 父 父 父 日 日 日
乙 日 日 日 癸 辛 巳
癸 癸 癸
세째칼날
大 兄 兄 兄 兄 兄
兄 日 日 日 日 日
日 戊 壬 癸 癸 丙
현재 요녕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세 자루 모두 창날에 상형문자 모양의 금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중국 역사학계가 자랑하는 사학자 왕국유는 「삼구병(三句兵)」, 즉 ‘갈고리 모양으로 칼날이 휘어진 병기로 상(商)나라 때의 것’으로 단정 지었다. 반면 문자학의 대석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곽말약은 ‘상나라 때의 것인지는 단정할 근거가 없지만 「삼병명(三兵銘)」이 과(戈․창)임은 단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낙빈기는 곽말약이 창으로 본 것은 정확하며, 상나라 때의 것이 아니라 상나라 때보다 1000년이나 앞서있는 바로 삼황오제시대 때 새겨진 상고문자라고 했다.
창날에 새겨져 있는 음각된 글자는 삼황오제시대 제왕들과 그 친족들의 족보를 새긴 것으로, 동이족의 시조인 신농의 손자 전욱고양(頊頊高陽․기원전 2467~ 2421)과 그의 아들, 또 손자들 3대에 걸친 이름이라고 밝혔다.
세 자루 창날 중 첫 번째 창날에는 고조선 제3대 임금 전욱고양을 비롯 전욱과 같은 대의 인물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중 ‘조일주(祖日珠)’가 전욱이며, 전욱의 이름 글자에서 바로 조선의 ‘조(朝)’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두 번째 창날에는 전욱의 자식대가 새겨져 있다. 이중 ‘중부일계(中父日癸)’는 전욱의 셋째 아들 중여 곤(衆艅 鯀)으로 여기에서 조선 ‘선(鮮)’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세 번째 창날에는 전욱의 손자들이 새겨져 있다. 이중 ‘형일계(兄日癸)’는 고조선 제7대 순임금으로, 한국이라는 ‘한(韓)’자가 바로 순임금의 이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어 우리나라의 이름 ‘조선, 한국’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증거 자료는 이것만이 아니다.
기원전 2412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년이 기록된 청동기 술그릇 「형계유(兄癸卣)」와 그 다음해에 만들어진 코뿔소 술두루미에 새겨진 26자의 명문 「중여준(衆艅尊)」은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특히 「삼병명」에 새겨진 ‘중부일계’가 코뿔소 술두루미에 새겨진 ‘중여’와 같은 인물임이 조선의 ‘선(鮮)’자를 통해 풀리고 있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외에도 삼황오제시대, 특히 제4대 임금 제곡고신(帝嚳高辛) 이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청동기 제기에 새겨진 다양한 명문들의 해석을 통해 신화 속에 뒤엉켜 있는 역사의 실타래를 하나하나씩 풀고 있다. 이런 글을 읽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우리조선이란 이름도 삼황오제의 식구들의 글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이 글도 지금 같지도 않고 그림 수준이든 것이 차츰 변해 반듯한 글씨가 되었다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귀한 문자라면 그때쯤에 만들었다는 우리 蘇 씨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생각해 보았다. 곤(鯀)의 魚 자가 양족인 신농계의 족표와 합해져 鮮이 되었다고 한다. 소자는 + 자가 두개로 ㅣ은 신농을 뜻하는 글이며ㅡ은 신농의딸 뉘조나 신농의 부인을 나타낸다고 한다.
조자도 +자가 두개지 않는가? 거기에 대한 부연은 많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의 자손이냐 하는것이 문제다. 열십 두개 아래 물고기魚는 곤도 나타내지만 신농 아들 희화의 족표라고 한다. 거기에 禾 자는 희화의 화자가 아닌가? 희화는 대화라고도 한다.
蘇자 하나만으로도 신농의 후예이며 전욱고양 임금님의 후예라고 우리의 족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우리성 蘇 자에도 조상님들을 모두 넣어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반신반의했던 확실한 계보를 알 수 있었다.
혹시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은 금문의 비밀을 읽어보세요~~
≪산해경≫「대황서경(大荒西經)」에 의하면, 전욱이 죽은 후에 북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지하의 샘을 밖으로 분출시켰는데, 이때 뱀이 물고기로 변하였다. 죽은 전욱은 뱀이 물고기로 변하는 순간에 물고기의 몸에 붙어서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인 '어부(魚婦)'가 되었으며, 사람 모양을 한 반쪽은 이미 쓸모없게 되었고, 물고기 모양을 한 반쪽만 제 기능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전욱이 죽은 후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다는 뜻도 되고 우리 풍이(뱀족표)의 족표가 물고기 족표로 바뀌었다는 것이 아닐지..... 어느 글에서 하백은 물고기 족표를 썼다는 글도 읽었다.
조상님을 찿아 나서는데 소벌도리공도 경주 형산에서 내려 오셨다는데 중국 형산이 자꾸만 나온다. 무슨 연관이 있을까....? 계속 의문이 들었다. 몇달이 걸려 의문이 풀렸다.
중국 형산은 신농이 치우천왕과 황제와의 싸움으로 제위를 소호금천에게 물려주고 산으로 들어가 신이 되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 산이 형산이며 릉도 이곳에 있다. 고양 임금님이 왕위에 올라 산으로 가신 할아버님을 위로 하도록 아버지 희화와 중여곤(축융)과 오회를 내려 보내서 그곳의 민정을 살펴 보게 하여 희화는 그곳에서 돌아 가셨다 한다. 회화의 릉 또한 그곳에 있다. 그곳에서 살다보니 곤오공을 그곳에서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명을 따서 곤오가 되었던 것 같다. 그곳의 제후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후손인 소벌도리공이 중국의 형산에 잠들어 계시는 선조를 못 잊어 또 곤오공의 고향이며 상징 형산을 이름이나마 신라로 모셔온 것 같다.
복희씨 후에 바로 성씨 기씨가 있었는데 족보에 풍 강 희 기 라는 대목에서 기씨는 늦게 생겨난 성씨로 알게 되었다. 먼저 생겼으면 앞에 쓸텐데 뒤에 쓴것으로 보아 그렇게 생각 되었다.
다음은 곤오공께서 살고 계실 때의 시대 상황이다.
■ 단군왕검 시대/단군조선과의 연관성(노중평)/
▶ 신농은 유망 가계의 시조
단군왕검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이다. 동이와 한족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대가 단군왕검시대이기 때문이다. 단군왕검이 다스리는 대제국이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우리와 하화족의 구별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다만 동이로 불릴 수 있는 동이만이 산동반도 일대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조의 시대에 황제가 동이로부터 독립해 나간 것이 하화족으로 불리는 한족이었다. 단군왕검이 출현하는 시대 이전에 중원에는 큰 물줄기를 이루는 세 종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신농을 조상으로 하였다. 이들은 신농으로부터 8대 유망까지 조상이 같았다. 유망대에 와서 황제와 갈라지고, 유망계열에서 4대를 내려와 배달나라의 태제泰帝가 나온다. 이렇게 세 종족이 중원을 가르게 되는 것이다.
유망의 가계 (동국역대東國歷代, 홍사한은鴻史桓殷)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소전). 8. 제유(유망). → ① 제괴 ② 제망 ③ 제성 ④ 泰帝 ⑤ 洪帝 ⑥ 檀君王儉
여기에서 8대 제유(유망)가 삼황오제 시대의 신농이다(희화의 아버지)
황제의 가계 (황제에서부터는 駱賓基 1917-1993 의 금문)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소전). 8. 황제(제유=유망의 이복동생) → ① 소호 ② 교극 ③ 제곡 ④ 제지 ⑤ 제요 ⑥ 제순 ⑦ 禹王
전욱고양의 가계 (유망에서부터는 낙빈기의 금문)
1. 신농 2. 제승. 3. 제임. 4. 제내. 5. 제백. 6. 제즉. 7. 제양(소전). 8. 유망 → ① 희화 ② 제전욱 ③ 곤
▶ 유망 집안과 황제 집안의 누비혼인
유망가계의 제양과 황제가계의 제양은 우리 역사와 중국 역사에서 소전少典으로 나오는 분이다. 소전은 유망과 황제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가 다르다. 유망가계의 제유帝楡는 유망이다. 유망과 황제는 아버지 제양 즉 소전에서 갈라져 나오고 이들은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의 중시조가 된다. 낙빈기에 따르면,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은 누비혼인(Punalua)라는 양급제兩級制로 맺어진다. 두 집안이 이복형제간 임에도 불구하고 모계사회의 특징인 공동남편과 공동부인의 가계를 이어가는 것이다.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는 그의 이복형 유망의 딸 누조와 결혼한다. 이렇게 사위가 된 사람을 자子로 불렀고, 아들을 남男으로 불렀다.
백伯은 외삼촌으로서 조카딸 자매가 있는 씨족마을로 장가든 사람이다. 이 제도는 순임금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혼인제도는 유망집안과 황제집안이 한 대를 건너뛰며 제위帝位를 물려받고 돌려주는 기이한 혈연풍습을 유지한다. 유망의 딸 뉘조와 유망의 이복동생 황제 사이에서 항아와 소호금천이 출생한다. 유망의 제위를 외손자 소호금천이 물려받는다. 따라서 제위의 대물림은 1대 유망, 2대 소호금천이 된다. 3대는 유망의 큰아들 희화와 황제의 딸 항아 사이에서 출생한 전욱고양(재위 47년)이 물려받는다.
4대 제위는 황제의 증손자인 제곡고신(재위 55년)이 물려받는다.그러나 제곡고신 대에 와서 제곡고신은 5대 제위를 전욱고양의 아들인 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기와 측실 간적 사이에서 낳은 아들 지에게 물려주어 지가 5대 제위(재위 8년)를 잇는다. 이때 제위상속제도가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제곡고신의 정실인 중규의 아들 요堯가 이복형제인 지에게 제위를 도둑맞았으므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제위를 찾아 6대 제요(재위 37년)가 된다. 이어서 순이 쿠데타를 일으켜 요를 죽이고 7대 제순(재위 9년)이 된다. 다음에 쿠데타를 일으켜 순을 죽이고 8대 제위를 이은 사람이 우(재위 8년)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곤오공은 곤의 후계자로 빼앗긴 왕좌가 억울해서 동숙신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 중여곤은 많이 늙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곡의 부인 강원과 간적이 딸이니까요. 곤오공이 이처럼 막강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혁다세 환웅(홍제)이 하백의 자리를 주고 손녀딸을 단군왕비로 삼는 것이지 그 혈족이 아니면 그렇게 높이 올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보셨지만 그 자손끼리 결혼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남의 피를 섞지 않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 풍습은 성골 진골로 신라 시대까지 이어지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도 제일먼저 족보를 작성한 것이 소씨였고 우리나라 역시 제일 처음 작성한것은 그만큼 자랑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조선 시대의 계보만 보아도 대단합니다. 그런데 강단 사학자들은 고조선이 없다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죠.
우리 소씨는 중국이 알아주는 사마천의 자랑스러운 계보가 그대로 있는데 단군왕검 시대를 말하는 것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금문의 해독으로 더 많은 연구가 되어 우리의 고대사가 밝혀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인천제 한웅 신농은 모두 우리의 선조입니다. 여러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족보가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우리 소씨 일가님 여러분! 옛날의 자랑스러웠던 전성기를 되찾기 위해 자손들의 교육에 힘 쓰셨으면 합니다.
소씨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