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성경에는 두 중류의 일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일군과 삯군입니다. 단어의 뜻대로 보면 일군은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이고, 삯군은 삯(댓가)을 우선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을 해도 달리 합니다. 일군은 일이 보여서 하고, 삯군은 일의 댓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켜야 일을 합니다. 또 일을 하고 난 다음에 일군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줘서, 누가 있었기 때문에, 혹은 주님이 하셨습니다.”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삯군은 자기가 한 줄 알죠. 주인의 입장에서 누가 더 마음에 들까요? 당연히 일군입니다.
삯군이 아닌 일군 감사함으로 일하고 기쁨으로 일하고 그 모든 열매와 영광을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돌릴줄 아는 주님의 일군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감사를 묵상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일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예전에 한 어른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자리는 일자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보니 그 말이 맞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자리는 늘 부족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하느라 애를 써왔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가정이 하루를 살아가려면 한 데나리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하루 종일 일을 하면 일당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일군들과 포도원 주인이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한 것은 당연한 계약입니다. 그 시대의 일군들도 시장에 나와서 일이 필요한 곳으로 불려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갔고 주인은 일군이 필요하기 때문에 수시로 시장에 나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일군들의 입장에서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제 십일시 오후5시쯤에 포도원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그 주인에게 감사했을까요?
젊고 건강할 때는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의 제목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얼마든지 일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일자리를 감사하지 못하면 어느 자리에 가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내 작은 힘과 지혜와 능력을 필요로 하는 일터가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보면 교회에서 한번 불러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감사합니다. 현역에 있을 때 새벽/수요일/금요일/주일 수도 없이 서는 강단이지만 은퇴하면 그 강단에 한번 서보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이되는지... 있을 때 잘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할 자리가 있고 기회가 있을 때 감사하기 바랍니다.
저는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한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예신 교회의 일군이 되고 싶다.”목회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선 여선교회 중창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세 번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렸는데요. 공식적으로 중창단의 이름을 공모하겠습니다. 우리 예신 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의 일군 되게 해주세요. 기도하고 실천하여 주의 일에 동역하는 성도들이 되어 하늘의 상급으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일군들, 새벽에 들어온 사람이나 오후 늦게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사람이나 모두 일할 기회를 준 주인에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 심정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요,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던 자신을 회개시켜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부활의 주를 만나게 하셔서 일군 삼아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자기의 생명을 바쳐 헌신했던 사람이 바울입니다. 고전15:9-10절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저를 포함해서 모든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들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있지만 일 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도 일할 것이 있고, 직장에서도, 교회에서도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감사하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데나리온을 감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딱 알맞은 것보다 좀 더 있어서 여유있는 삶에 대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성경적인 원리에서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감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하루를 살아갈 양식 이상을 구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넉넉한 양식이 아닌 일용할 양식을. 이 가르침안에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욕심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위험이 주는 경고를 두가지로 요약하면 먼저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 많은 것이 의지의 대상이 됨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의 양식을 필요한 것만큼만 공급하신 하나님의 훈련이 주는 교훈을 기억하고 일용할 양식이 있음을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당부드립니다.
중학교 시절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실명한 후, 이어 모친과 누나를 잃고 맹인 고아가 되었던 강영우 박사가 세상을 떠나지 전“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속에서 천대를 받으며 병신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실명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어머니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졸지에 가장이 된 큰누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평화시장 봉제공으로 취직해 2년동안 일만 하다가 어머니를 따라 하나님 곁으로 가 버렸습니다. 누나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는 어린 두 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며‘세상에 이런 가혹한 형벌이 또 있을까?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크게 지었다고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건지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망은 그의 인생을 삼키지 못했고, 노년에 걸린 암도 그의 인생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썼습니다.“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받았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습니다. 감사합니다.”우리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도 이런 감사의 고백으로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강영우 박사와 같은 현실을 마주했다면 우리가 감사했을까? 원망했을까? 아마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은 우리의 삶에 단 하나의 유익도 줄 수 없습니다. 일용할 양식이 있음에, 하루를 살아갈 힘과 마음을 주신 것에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일군들도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했을 것입니다. 한 가정이 하루를 살 돈을 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아침 일찍 포도원에서 일한 농부들은 감사하지 못하고 주인에 대한 원망으로 품고 말았습니다. 자기 위주로 세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일을 마치고 임금을 계산하는데 늦게 온 사람부터 임금을 주었습니다. 저 같으면 아침 일찍 온 사람들부터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줘야 늦게 온 사람이 얼마 받았는지 모르지 않겠어요?
그런데 늦게 온 사람,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마음에 “야 이것봐라 한시간 일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다니 그럼 우리에게는 더 많이 주겠는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일입니까? 아침일찍부터 일한 자기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따지지 않겠습니까?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주인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따졌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갑질을 주인이 한 것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주인의 말이 더 심합니다. “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것 갖고 내 마음대로 주는게 뭐 잘못이냐? 와! 노동청에 고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제가 말씀드렸듯이 한 가정에 한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주인은 늦게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굉장히 힘든 일이죠. 한시간 일하고 10만원 받아가는데 8시간 일하고 10만원 받아가면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10만원 주신 것 정말 잘하신 일이다. 이렇게 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그리스도인들 밖에 없습니다.
나도 일용할 양식을 구했지만 하루종일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애가 타던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아 식구들과 하루를 살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댜. 이런 마음으로 살면 세상에 천국될 것입니다. 탐욕으로 인한 전쟁과 창조의 질서의 파괴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의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마음을 한 데나리온 약속을 기억하며 버리고 살아가기를 당부드립니다.
빌4:11-12절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감사합니다.
감사가 자기 중심적인 것이라면 자기가 손해보는 일에 대해서 절대로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주님이 중심이 되면 손해를 봐도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본문의 일군들에 대한 주님의 처사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주인의 갑질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에게 필요한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준 공평한 행동입니다. 우리는 겟세마네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를 자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막상 어떤 일이 내 뜻대로,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감사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낍니다. 감사 대신에 원망이 슬며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는 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품었습니다.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죽다가 살아나왔지만 여잔히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시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욘4:9절에 요나가 박넝쿨이 해를 가려주다가 벌레먹어 사라지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대놓고 대든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를 통해서 사람이 얼마나 자기 고집대로 하고 싶어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뜻앞에서는 자기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뜻을 이루려고 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아멘!
일할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감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