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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님은 부활이시요(김요셉)
나균용 목사님
요한복음 11:25-26
예수께서 이르수되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를 가르켜 말씀하실 때 <나는 부활이다. 나는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명한 이 말씀이 나오고요. 요한복음 11장 6절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말씀을 하시죠. 예수님께서 저는 부활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본적으로 잘 믿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마지막 때 인류가 부활한다고 하는 사실을 안 믿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들을 가리켜서 사두개인이라고 이렇게 부르죠.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것을 믿는다, 우리가 다 부활해서 심판을 받는다, 이거를 믿었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 자체를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안 믿었어도 그들은 제사장들이 많이 됐습니다. 제사장들도 됐고 유대교의 큰 종파를 이루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고 인간의 생각을 섞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던 무리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다면은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바로 눈앞에 다가올 이때에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이 세상 교회들은 어떨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겁니다. 그냥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 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라고 하는 게 있다, 그래서 심판받는다, 이거를 교리적으로만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짜로 우리가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내가 바로 부활이다> 이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예수님이 첫째로, 이것을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증거해 주셔야 되잖아요. 증명해 주셔야 되니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는 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데 우리 성경에 기록된 것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 마가복음 8장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그의 딸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둘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 지 죽어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상여를 메고 나가는 그거를 주님이 만나셔가지고, 상여를 멈추게 하시고 이 청년을 살려내시는 이런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셋째는 요한복음에 나타나죠. 11장 너무도 유명한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이미 무덤에 장사를 다 지냈는데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찾아오셔가지고, 울지 말라고 하시고,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내가 곧 부활이오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걸 말씀하시고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다짐까지 받으셨습니다.
자 예수님은 부활이시고 생명이시라,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려내신다, 먼저 이렇게 세 사람들을 살려내시는 역사를 하시고 그다음에는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되지만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언하신 말씀이 성경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마태복음 16장 21절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다.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바로 그다음에 <너희가 정말 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오 이렇게 믿느냐> 이렇게 믿는다면 그 말씀이 바로 이 부활과 연결된다는 거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나는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다음에 17장 앞부분은 변화산 이야기죠. 변화산에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셨었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이 세분들이 산상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이고, 이런 사역을 통해서 인류 구속의 대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하는 것을 서로 이야기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들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아뵙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분들이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이 사람들이 듣기는 들어도 이게 무슨 소린지 아마 잘 못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이 사람들이 성령 받고 그때의 일을 기억하다가 아 그때 이러이런 말씀을 나누셨지, 그게 바로 이런 뜻이로구나 하는 것이 깨달아졌단 말이죠.
그때 당시에는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더라도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니까 드디어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이 가득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고 나면 우리의 시각을 열어주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 알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하시는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뭐냐 그것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지만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다, 자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오뚝이처럼 다시 빨딱 일어선다, 아무도 우리를 해칠 자가 없고 우리를 무너뜨릴 자가 없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부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또 변화산에 갔다 내려오신 다음에 이제 그 간질병자 청년을 고쳐주시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다음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는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희가 이 변화산에서 본 것, 그리고 이 병자 고친 증거 이런 거 다 내가 부활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이러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도 계속 나옵니다.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지만 제3일에 살아나리라 말씀하셨고요.
27장 63절에 이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무덤에 넣어두고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이 하는 이야기죠.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기억하노니 무덤을 지켜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 가지고 로마의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첫째는 교리적으로 또는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된다. 둘째, 이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된다. 그냥 입술로만 믿는 게 아니고 체험해야 돼요. 그래야지 우리는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륫 유다가 죽고 대신에 맛디아를 새로 뽑게 될 때에 제자들이 한 사람을 새로 보충해서 열두제자를 채우자라고 말할 때에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냐,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시기를 시작하실 때부터 항상 우리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택하자, 이것이 첫째 자격이고요. 둘째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전할 사람이라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오늘날의 모든 선도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대원칙인 것입니다.
평소에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할 때에도 어린아이로부터 평신도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체험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게 기본적인 존재고 둘째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는 체험을 하고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 거죠.
이제 더 좋은 부활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더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예수님 설명하시기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요. 두 개의 부활이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이냐 심판의 부활이냐. 그러나 심판의 부활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받는 사람 죄짓지 않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는 더 좋은 부활이란 무엇이냐, 장차 우리에게 남은 거는 두 개의 부활이 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첫째 부활이라는 게 있고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때 부활된 사람은 복된 사람들이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넘어뜨릴 수가 없고 해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셋째로, 더 좋은 벌이란 무엇이냐. 예수님 말씀하셨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무슨 소리냐.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서 변화를 받아 부활체가 되는 부활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거죠. 동시에 이것은 현세에서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부활할 것이냐, 현세에서도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나갈 것이냐. 자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다 정말 아 이 세상 현세에서도 우리는 세상을 당당히 이겨나가는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했어요. 생기가 들어가니까 그 사람은 영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가 간절히 여러분들 모두에게 부탁하고 간과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마지막 대회 세상 따라가지 말고요. 형식적으로 믿는 그런 사람들 따라가지 말고 우리는 정말 예수님 잘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저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 저들의 하는 행동을 보는데 저들의 말은 듣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말은 성경 가르치니까 바르게 할 거예요. 물론 그것도 다 바른 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이 먼저 성경을 배워가지고 가르치니까 성경대로 가르치면 그대로 되는 거죠. 교리적으로도 부활을 믿는다, 그거 잘 믿는 거죠. 이렇게 하는 건 다 옳은데 그들의 행동은 외식하는 거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거짓되게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2. 나는 부활이요
나균용 목사님
부활이라고 하는 거는 우리 삶에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그것으로 끝났다면, 만약에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부활의 소망이 없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악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이 부활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에 대한 승리냐 말하는 거죠.
중요하게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마귀에게 이기신 것이다. 마귀와 그리스도와의 싸움입니다.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사망으로부터 이기신 것이다. 그래서 사망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셋째로 부활의 승리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한 승리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한테 승리하셨다는 게 무슨 얘기냐, 이것을 설명하려면 마귀라는 놈은 어떤 놈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먼저 알아야 돼요. 예수님께서 마귀에 대해서 설명하시는데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이 유태인들을 향하여 책망하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너희 아비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구나>
마귀의 특징은 첫째가 욕심쟁이입니다. 그래서 만족을 모릅니다. 끝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도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줘라 그러면 하늘로부터 하늘의 신령한 은혜 이러한 하늘의 보물을 내가 받게 될 것이다> 말씀했는데 이 땅의 보물이 더 크게 보이고 하늘의 보물은 무엇인지 모르고 이 청년이 개념이 없었으니 결국 슬픈 마음을 가지고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둘째는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이 악한 마음을 이거를 이것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설명하시기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그다음에 이어서 말씀하죠. <그의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말할 때마다 거짓을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의 아비가 되었으니라>
사망한테 이기는 것이 대관절 뭐냐? 유명한 철학자 킬케고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죠. 이 사람이 19세기에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였는데 이 사람이 지은 책 가운데 <사망에 이르는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유명한 책이 있죠. 그래서 그 책에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는 거는 왜 사망에 이르게 되느냐, 이것이 가장 큰 병인데 이것은 바로 절망이다. 마귀라는 놈은 우리에게 절망을 넣어준 틀에서 잘 사는 나라일수록 오히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요. 풍성한 나라가 오히려 이렇게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 욕심으로부터 나온 것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절망을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의 첫 열매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드리고 마치도록 이렇게 하겠습니다.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나무에 열매 과실수들의 첫 열매가 하나가 생기게 먼저 제일 먼저 생기고 그다음에 이제 둘째 셋째로 많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다니게 되는 거죠. 이렇게 열매가 많이 생기는데 성경에는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는 그럼 누구냐,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로 먼저 부활을 하셨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다음에 둘째 열매가 있고 셋째 열매가 있고 이렇게 생기느냐 물론 다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3절 24절 보면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요.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요. 그다음에는 그리스도께 붙은 자요 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요. 이렇게 설명했고요. 마지막 그다음에는 나중이니 이렇게 말씀했어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이러한 때에 인류의 총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을 말하는데 예수님은 첫째 부활이니까 그거는 빼버리고 앞으로 있을 두 개의 부활 가운데 첫째 부활이 있고 둘째 부활이 있다. 이것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 장차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받아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사람들이고, 이분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천년 왕국에서 훌륭한 몸을 가지고 육체를 가진 인간들을 돕고 이들을 다스리고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를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서 이 세상을 밝고 빛나는 아름다운 지상낙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게 될 사람들이 이 첫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둘째 부활이라는 거는 뭐냐 둘째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부활이에요. 천년 왕국 천년이 끝난 다음에 마귀가 잠깐 무저갱에서 올라와가지고 다시 세상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때에 세상 사람들을 다시 미혹해가지고 다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우게 만들고 하는 이런 악한 짓을 잠깐 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가지고 또 백마 타고 오시는 예수님이 그 입술의 기운으로 입에 검으로 저들을 다 쳐서 멸하시고 그래서 드디어 마귀의 세력을 멸하여 불못 지옥에 던져놓게 되는 이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에 이렇게 세상이 평정됐을 때에 드디어 천국이 이루어지는 거죠. 이렇게 해서 악인들은 마귀와 악인들은 불못에 넣어 심판에 던지고 나머지 인류는 총 부활을 하는데 이 지상에 있었던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가 다 살아납니다. 부활하는데 여기에서 양과 염소가 갈라집니다. 의인과 악인이 갈라집니다. 그렇게 해서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고 악인들은 영 벌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이렇게 큰 부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다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이왕이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러면 둘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다 지혜롭다느냐 그건 아니에요. 거기에서도 아까 얘기했지만, 양과 염소가 갈라집니다.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집니다. 이렇게 의인과 악인이 갈라지기 때문에 다 지옥에 가는 거는 아니고 어떤 사람들은 그 둘째 부활은 악인들의 부활이라고 그러는데 그건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성경을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고, 둘째 부활은 인류의 총 부활 이렇게 해서 그 가운데에서 양과 염소가 갈라집니다. 의인과 악인이 갈라집니다. 영생에 들어갈 사람과 영 벌에 들어갈 사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심판이 있게 되는데 우리는 이왕이면 둘째 부활에 참여해서 억지로라도 구원받으면 참 다행이고 즐거운 거지만은 이왕이면 그렇게 되기보다도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잠깐 더 사는 세상입니다.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살고 힘써 복음을 전해서 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서 지옥으로 향하여 달려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저 사람들 다 구원해낼 수 있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3.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또는 하늘을 공경하고 그래서 한 하나님이라는 소리 안 할려고 해 가지고 하늘을 공경하고 그랬는데 사실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막연한 하늘을 공경하는 건 아니죠. 인격이 없는 어떤 하늘을 공경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인격을 가지신 그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렇게 해야지 그것이 인생의 가장 올바른 길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옛날 공자는 우리 인생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인간 세상 인생살이에 대한 거를 주로 연구를 많이 해 가지고 거기에 대한 책을 이렇게 썼습니다. 이제 이것이 논어라든지 대학이라든지 이런 거에 다 이렇게 나타나는 것들이고요. 자 그런데 노자는 그런 인생의 문제를 다루기보다도 더 중요하게 이 하늘의 이치가 뭔가 하는 거를 많이 연구를 해서 이것을 책으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분들의 책들도 읽어보고 옛날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배웠는가 또 그분들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서 볼 때에 얼마나 접근하여 있는가, 이것도 우리가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구했어도 석가모니도 이 근본 도에는 이르지 못했던 거고요. 또 노자도 이르지 못했고 물론 공자도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냥 이렇게 도가 있다고 하는 거를 알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실상은 깊이 깨달아 알지는 못했던 거죠.
헬라에서도 똑같이 이 도를 로고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우주에는 어떤 큰 원리가 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쳤어요. 하늘의 별을 보고 날씨가 어떻게 되겠다, 이 땅에 어떤 재앙이 오겠다, 이 땅에 어떤 복이 내리겠다, 이런 거를 전부 보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런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새해가 되면 예언하는 사람들이 많죠. 금년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뭐 이런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그분들이 가르치는 게 결국은 다 공통된 거예요. 역천자는 망하는 거고, 순천자는 존재한다고 하는 존 자고요. 그래서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다른 말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는 다 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복을 받는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하나님의 도가 분명히 있는데, 옛날 성인들이라고 하는 분들이 이 도를 찾기 위해서 평생을 바치면서 애를 쓰고 고생을 했는데 이것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오늘 그들의 후손이 된 우리가 이 도를 깨닫기 위해서 애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을 쓴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설명할 때 예수님이 바로 로고스다. 예수님이 바로 우주의 근본 이치시다. 이 우주의 근본 이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태어나서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또 이 우주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시작할 때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하죠. 그러면서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14절에서는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는데 이렇게 육신을 입고 오신 그분이 예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그냥 사람으로 보면 안 되는 거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 다른 말로 막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예수님은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그렇게 말씀했으면 거기에 대한 대꾸는 <내가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을 해야지 되는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 하면 이루어지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예수님이 거하신다 그것이 뭐예요? 예수님의 말씀이 거하는 것이 예수님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는 거죠. 그 영이 바로 성령이시죠. 그래서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을 하신 거예요.
둘째로, 로고스라고 하는 말은 우리 인생의 이치죠. 우리 인생들은 옛날부터 도의라고 하는 거를 가르쳤고 도덕이라는 걸 가르치죠. 그리고 인생의 길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이것을 길 도자를 써서 가르치고 예의를 가르치고 부모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고 하는 이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냐 하는 거에 대해서 어려서부터 부지런히 교육시켰습니다. 타락이라는 건 뭐냐 이 인생의 길을 배우지 않으면 그게 타락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물론 우리가 국어도 배우고 수학도 배우고 과학도 배우고 다 배워야 되지만 그런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 내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바르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삼강오륜이라고 하는 것도 있구요. 화랑도에게는 세속 오계라고 하는 것도 있고,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하는 거를 우리 후손들에게 부지런히 많이 가르쳤습니다.
로고스라는 말의 셋째로, 중요한 뜻은 로고스란 말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경에 이성 없는 짐승 본능으로 행하는 이성 없는 짐승이라는 말이 두 번 나와요. 이게 2번 나오는데 <이성 없는>이라고 하는 말이 헬라말로 <알 로고스>, 로고스라는 말 앞에 알을 하나 더 붙였어요. 알은 부정사입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없는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로고스가 없는 것이 이성이 없는 겁니다.
인간은 삶에 있어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무엇으로 판별하느냐 이것을 판별하는 도구가 2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이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성이 마비되면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성을 가지고 본능으로 행하지 말고 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본능적인 욕심이나 이런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살지 말고 이성을 가지고 냉철하게 이것이 옳은 건가 그른 건가를 잘 판단해서 옳은 거를 택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과 악을 판별해내는 도구가 양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법률에 의해서 재판해야 된다. 둘째, 원칙은 양심을 따라서 재판해야 된다.
우리 사람의 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선이냐 악이냐, 의냐 불의냐 하는 것을 이렇게 이성과 양심 두 가지를 가지고 분별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러면 인간이 다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느냐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성을 살려내고 양심을 살려내고 하는 이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이 타락한 상태에서부터 구원해 내 주셔야지만 비로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는 물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니 우리를 구원하는 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되는 것입니다. 곧 세례라고 말씀을 하면서 세례라고 하는 것은 육체에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는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으므로 선한 양심이 살아나 가지고 이 양심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호소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이렇게 살아나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때 교회가 타락하니까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모스 8장 11절에 예언해 놓은 그대로 <보라 내가 이 땅의 기근을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오.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갈함이라> 로고스가 들어오면 여기에 인간의 이성도 찾아지는 것이고 인간의 양심도 살아나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44. 아브라함의 자손
[창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끌고 나가십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라고 말씀하시고 하늘의 별을 한번 세워 볼 수 있겠느냐 물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세워볼 수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너의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이게 15장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 처음 나오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 가나안 땅으로 보내주시는데 거기에 가서 살게 되면 내가 너에게 큰 복을 내려주겠다는 약속을 하시죠. 너는 복이 될지라~ 즉 복덩어리가 된답니다. 그래서 어느 곳에 가든지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시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13장에도 또 하나님께서 하늘을 보라고 하시지 않고 <땅을 보라 네 자손이 티끌 같이 될 것이다> 말씀을 하십니다. 15장에서는 밖으로 나오라하시고 저 하늘에 빽빽하게 있는 저 별을 쳐다보라고 하시고 저 별들을 네가 능히 다 셀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너희의 자손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 엄청난 약속을 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또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군가? 우리가 13장 보면 네 자손을 땅에 티끌과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15장에서도 네 자손을 하늘에 별과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까 이 자손이라고 하는 단어가 복수일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네 자손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한 사람을 가리켜서 네 자손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그가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설명합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복수가 아니고 단수다, 하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자손이라는 말들이 다 단수로 되어 있느냐? 아니에요. 그다음에 나타나는 자손이라는 말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 13장하고 15장에서는 이렇게 단수로 얘기를 했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에는 이렇게 복수로 나타나거든요. 그래서 22장 모리아 산에 이삭을 드리는 말씀 나오죠. 그때에도 <네 자손들에게 번성케 한다>는 약속을 또 주시고 26장에 가서 이삭에게 또 나타나셔서 말씀하실 때 <네 자손들을 번성케 할 것이다> 약속을 하십니다.
그래서 단수로 13장, 15장인데 아마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 자손이다, 하는 말씀은 창세기 15장 5절에 있는 말씀을 가리켜 설명하시는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복수로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단수로 내 자손이라 하셨으니 이 자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이거죠.
첫 번째로는 성경적으로 뭐가 잘못됐느냐? 갈라디아서 3장 15절~16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복수가 아니고 한 사람 자손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손이라고 하는 말은 싹 빼버리고 그냥 자손들 저 애굽 땅에 가서 종살이하는 그 자손들을 가리켜서 그것이 성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설명 했으니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신약성경의 첫 절 말씀이 뭐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 말씀으로 시작하잖아요. 그러니까 신약 성경의 첫마디 말씀은 구약 성경의 첫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라 한 이 말씀이나 모두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 엄청난 말씀인데 여기 신약 성경 첫 절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저 애굽 땅에 흩어져서 크게 번성한 그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는 성경적으로 봐서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노예 백성이 되었다. 그 사람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수가 많았지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 자손들이 나중에 쭉쭉 내려오다가 예수님 때에 이르러서는 무슨 짓을 했습니까? 그전에도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을 돌로 쳐죽였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대적하고 또 나중에는 아들을 친히 보내셨지만, 그 아들도 공경하지 아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가 AD 70년에 로마의 침략을 받아 결국 다 멸망당하고 성전도 다 무너져버리고 비참하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구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실한 성도들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이 번성하고 빛나게 될 것을 상징하고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설교 할 때에는 이렇게 성경 전체를 보고 구약에 있는 이 한 구절 말씀만 놓고 따져 보지 말고,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 말씀이 신약에서는 어떤 뜻으로 사용되는가, 이것을 종합적으로 보아서 설명을 해줘야지 완전한 설명이 될 수가 있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도 이 자손이라고 하는 말을 나온 것을 다 찾아봐야 됩니다.
네 씨라든지 네 자손이라든지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말씀들을 다 찾아서 이렇게 살펴보면서 13장에는 단수 15장에도 단수로 됐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22장, 26장에서는 자손이라는 말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또 내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해주겠다고 하시는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13장에서는 저 땅에 티끌과같이 많은 자손들, 또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많게 해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들을 종합해서 볼 때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자손이 있고 하나는 영적인 자손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22장이나, 26장이나 이 뒤에 가서는 자손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영의 자손이 있고 육신의 자손이 있다. 그러니까 이삭을 통해서 낳은 자손만 자손이죠.
그리고 이스마엘이나 후처가 낳은 여섯 아들들, 그들의 후손들은 성경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도 하지 않습니다. 육신을 따라서 난 자손들은 자손이 아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설명할 때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손만이 하나님의 자손인데 <이삭은 약속을 따라서 난 자고 또 성령을 따라서 난 자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도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누구냐? 저 땅 위에 티끌과같이 많은 그런 자손 아니고 바닷가에 모래와같이 많은 그런 자손이 아니라 우리는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자손들이 되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게오를 가리켜서 <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 하고 칭찬하셨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에 예수님이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하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첫째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가득하게 품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읽고 외우고 묵상하고 이 말씀을 정말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참 자손된 모습을 보여야 됩니다. 또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약속의 자손이고, 또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귀중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서 난 자가 돼야 되고, 성령을 따라서 난 자가 돼야 된다. 약속을 따라서 난 자는 어떤 사람이냐 약속을 따라서 난 사람은 약속이 그의 속에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으면 그 사람은 약속을 따라서 난 사람, 시편 1편에 있는 대로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다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은 약속을 따라서 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약속의 자녀, 성령님의 자녀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에 날마다 거룩한 주님의 백성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마지막 때 성령 충만함으로 마귀의 권세를 날마다 이기고 오직 예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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