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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신학 세미나
강사: 정용성 교수
일자: 2023년 8월 29일 화요일
정용성 교수와 함께하는 톰 라이트 배우기
전화번호 070-8638-2973
이메일 yj60@hotmail.com
충무교회(이기엽 목사)에서
8월 29일 점심 때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 이 세미나에는
5인의 목회자가 참석했다.
강의 요약과 소감 그리고 추가적 묵상
1. 2024년에 한국에서 로잔대회가 열린다. 이것은 로잔협약 30주년 대회다. 로잔대회는 진보적인 WCC보다는 온건하며, 극우에 해당하는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의 ICCC(국제기독교협의회,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1948년)보다도 중도적이다. 로잔대회는 르완다의 비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존 스토트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르완다 인구의 80%가 기독교인 국가에서 살육이 자행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로잔선언을 발표했다. 특히 2024년도 한국에서의 로잔대회는 사도행전을 함께 읽는 대회이기도 하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아마 300만원 정도의 참가비를 낸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그 동안 국내에서 로잔협약 관련하여 연구를 한 사람들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 중심으로 이번 대회가 운영된다는 점이다.
2. 오늘날은 신학자보다 예술가가 더 중요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질리게’ 전달되어서는 시대와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BTS같은 이들이 복음의 정신을 이해하고 대중과 소통한다면 그 영향력은 대단할 것이다. 예컨대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작품들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3. 성경의 이야기들은 제국주의적 배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사실 911테러는 제국주의로 고통을 겪은 무리들과 신자유주의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제국주의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제국의 주변부에서 생산한 것을 제국의 중심부는 끊임없이 소비를 하기에 그 영역을 계속 넓혀 나가야 하는 시스템이 제국주의라 하겠다. (정용성 교수는 8월 27일 주일, ‘제국의 그늘 아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 설교는 고대의 제국 이집트의 그늘에서 살던 야곱과 요셉, 그리고 출애굽의 과정을 소개하며, 오늘날 우리가 제국의 그늘에서 바른 예배를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또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도전하신 질문이 매우 정치적이었음을 소개하면서 신앙은 본질적으로 현 세대에 대하여 저항적임을 강조한다.)
4. 그 제국주의는 자기의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 민중을 길들이는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한다. 로마의 작가들은 로마 제국의 탄생과 영광을 노래했으며, 수많은 건축과 예술에 로마제국을 찬양하는 이야기들을 담아서 제국 전역에 퍼뜨렸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전쟁은 일종의 스토리텔링의 대결장이라고 할 수 있다.
5.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도 바울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나와 세상의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씨름했다. 스데반 집사의 사도행전 7장 설교도 일종의 스토리텔링이라고 하겠다.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이 세상이 운영되는 위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어떤 배역을 맡았는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제국주의라는 권세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새로운 백성공동체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 새로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 에클레시아다.
6. 이렇게 보면 사도들로부터 배움을 받은 교회는 구약에 바탕을 둔 유다인들의 이상을 담은 거대한 이야기, 곧 일종의 메타내러티브를 가지고 로마제국이 들려주는 거짓 이야기를 대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상과 상상력,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한 교회는 로마제국의 곳곳에 마치 ‘알박기’처럼 세워지고 뿌리를 내렸다. 사도 바울 등이 세운 교회들은 로마제국이라는 체제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그것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알박기’라고 할 수 있다.
7. 사도 바울이 들려준 새로운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우선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회심(Conversion)이라기보다는 재소명(Re-calling)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다메섹 이전과 이후에 사도 바울이 읽은 성경은 동일하며, 그가 섬긴 하나님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당시의 동족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유배(포로생활)가 계속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쉐키나)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왕으로 돌아오시기를 기다렸으며,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왕으로 다시 찾아오셨음을 선포했다.
8.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새로운 왕이 등극했다는 소식이 로마 전역에 전달될 때 그것을 당시 사람들은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바로 그 단어를 사용하여 사도들은 새로운 왕의 등극을 알렸다. 바로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선포였다. 복음은 그런 점에서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이며 전복의 성격을 띤다. 그 사실을 가장 빨리 알아챈 사람들은 로마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유대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고소할 때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어지럽게 한다는 말은 곧 전복한다(ἀναστατώσαντες οἰκουμένην, upset the world, 행 17:6)는 의미다.
9. 사도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참 인간(true human)이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다시 이어갈 참 이스라엘(true Israel)이셨다. 그리고 옛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온 인류의 이야기가 된다고 사도들은 전파했다. 그 이야기는 로마의 시인들이 들려준 허접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갈증을 느끼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실 버질이나 베르길리우스 등이 만들어서 당대의 사람들에게 선전한 로마의 건국 이야기는 트로이전쟁 이후에 피난 온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그들의 후손인 로물로스와 레무스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 로마를 세운다는 신화적인 이야기였다.
10. 놀라운 사실은 막시스트들이 성경 이야기를 연구하여 그 속에서 세계를 주도할 새로운 이야기 소재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911테러와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종말 조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동안 세계를 호령하던 이 거대 이야기를 대체할 새로운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 세계는 스토리텔링이라는 운동장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11. 누가 이 시대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새롭고 강력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누가 시대의 문제에 대한 적실한(relevant) 답을 제공할 수 있을까? 존 바클레이의 책, ‘바울과 선물’은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우리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이야기에 참여할지를 깨닫게 하고 결단할 수 있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 같은 분들이 역사학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구하고 영광스러운 역사 이야기를 동포와 후대에게 들려주면서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의 배역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12. 신자의 삶이 복음의 이야기에 동참하고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강화하면서 자신의 배역을 찾고 그 배역을 수행함으로써 앞으로 열리게 될 세상을 꿈꾸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를 압축한 신앙고백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의 사도신경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너무 낡은 이야기들로서 21세기 현대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의 희망 또는 삶의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기에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의 배역을 찾고 노래하고 동참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간명하게 정리하여 신자들과 더불어 함께 노래하고 복습하며 꿈꾸고 동참할 그런 구호와 신앙고백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13. 영국인들이 이슬람교에 귀의하는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불안(Angst) 때문이다. 엄격한 이슬람식 신앙을 배우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마음에 위안을 받으려는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 교회가 구도자예배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문턱을 낮춘 것은 기독교 신앙의 차별성과 독특성을 삭제해버린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스타벅스는 그 자체의 양식과 전통을 고수함으로 그 브랜드에 충실한 고객층을 유지한다. 교회가 세속과 차별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교회에 머물고자 할 필요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이 문제가 본질과 양식 두 가지 모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없는 형식은 빈껍질에 지나지 않는다. 형식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이야기로 나타나며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현실에 대한 해석의 관점, 그리고 자신의 소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14. 교회가 신자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배역과 소임을 명확하게 가르쳐 줄 수 없다면 그 신자들은 그리스도께 충실하기보다는 교회의 예배에서 소비자가 되고 말것이다. 그들은 예배에서 소명이나 소임 또는 자신의 삶의 목적과 과제를 인식하기보다는 가정을 최고로 여기거나 자기애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결혼식마저 하나님 앞에서 소명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자기애를 표현하는 무대로 전락한다.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Alexander Schmemann, 1921~1983)이 말하기를, 오늘날 가정이 우상화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이혼률은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정용성 교수의 묵상글 참조, 정교수는 사순절을 보내는 동안에 예전과 그 의미에 대한 슈메만의 책, 대사순절을 요약하고 소개한다.)
15. 톰 라이트의 신학방법론은 비판적 현실주의(Critical Realism)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인간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교정하면서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다. 그런 방식의 학습을 스스로 발견해 나가는 접근법(heuristic approach)이라고 한다. 톰 라이트는 신약성경을 읽을 때 세 개의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문학적, 신학적.
16. 톰 라이트가 소개하는 신약성서의 예수 이야기는 야훼의 귀환이라는 주제로 풀어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책, ‘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How God Became King?)에 자세하게 소개된다. 그 개략적인 내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7. 제2성전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유배생활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심정을 드러내는 본문이 느헤미야 9장 36절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은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보십시오. 오늘 이처럼 우리는 종살이를 합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좋은 과일과 곡식을 먹고 살라고 우리 조상에게 주신 바로 그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습니다.’(9:36, 표준새번역성경). 메시아께서 오신다면 이 유배생활이 끝날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간절한 염원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가득했다. 그런 기대를 보여주는 본문은 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고치시고 싸매어 주실 것을 말한 호세아 6장과 그 백성이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 다니엘 12장 3절, 그리고 에스골 골짜기의 회복을 그려주는 에스겔 37장이 그것이다.
18.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다시 오시는 날, 야훼께서 방문하시는 날에 대한 기대가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 진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이런 저런 방식을 취하며 그룹을 형성했다. 쿰란공동체가 그들이며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그들이다(마가복음 3:6). 심지어 헤롯왕은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되게 하려고 성전을 재건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로마로부터 세금을 막아주는 자로 자처했다. 그것은 백성을 길들이기 위한 헤롯의 이데올로기였다. 동시에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 황제가 진정한 왕이라고 홍보하는데 열을 올리기도 했다.
19. 반면에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야훼의 귀환에 대한 예언자들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전파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심으로 왕으로 등극하셨다고 사도들은 들려준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사도들이 묘사한 방식은 왕의 행렬을 암시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곧 영광을 얻으신 것이라고 소개함으로 예수님이 야훼의 귀환과 방문이었음을 증언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여러 진영에 대한 배타적인 선언이며 로마 황제에 대한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20. 사도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고, 예수께서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셨다. 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0장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와서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은 사실 세례 요한을 염두에 둔 것이다.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에게 이혼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창조의 섭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고정불변의 지침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의도를 가진 자들의 함정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음이 고려되어야 한다.
21. 예수님은 언제나 세상의 통치자들에 굴복하라는 압력을 마주하고 사셨다. 예수께서 추종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누가복음 9:58). 이 말씀에서 여우는 헤롯왕을, 그리고 공중의 새는 로마황제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의미는 더욱 강렬해진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권세들이나 제국의 상황 가운데서 이해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의 대답을 풀어보면 이런 의미가 될 수 있다: ‘네가 헤롯을 따른다면 삶이 보장될 길이 있을 것이고, 로마 황제에게 충성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른다면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따르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실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22.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므나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까? 정용성 교수는 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 2021년에 있었던 ‘청매 사건’을 소개했다. 정교수는 청소년 매일성경에 므나 이야기를 해설한 김재수 목사의 시도에 대한 논란과 그에 대한 자신의 변호를 블로그에 담았다. 정 교수는 자신의 블로그에 므나 이야기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소논문을 소개한다. 열 므나의 비유, 달란트/므나 비유해석을 위한 단서들 등). 이 모든 논문과 글은 므나 이야기가 당시의 농부들에게 이해된 방식은 오늘날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서구인들의 이해 방식과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착취하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동시에 악한 통치자들에 대한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자들의 저항정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정용성 교수의 블로그에는 톰 라이트와 관련하여 535개의 글이 실려 있다.)
23. 유대의 통치자들과 로마의 황제들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유익했다. 다음의 주제들에 대하여 톰 라이트는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대한 글을 정 교수의 블로그(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읽을 수 있다: 헤롯 아그립바, 그레꼬-로망 맥락 속의 예수와 초기 교회, 복음과 제국, 페르시아 시대에서 로마제국시대까지의 유대 역사 등). 이 글들은 강의안 수준의 깊이와 무게를 가지고 있다.
24. 다음 강의 일정은 10월 24일(화) 낮 12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