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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의 복(시146:1-10)-2018.8.26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소망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소망을 갖고 인생을 사는 사람과 소망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질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며, 인생의 결국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이고, 소망의 종착점이 어디냐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소망은 참된 소망도 있고, 헛된 소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격조 높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이 피폐할 뿐 아니라 주변인을 피곤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인생은 어떤 소망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조건 소망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끼면 안됩니다. 세상은 죄에 대한 소망들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소망도 많고, 거짓된 소망도 많으며, 헛된 소망들로 넘쳐납니다. 그런 소망들은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부질없는 소망에 매력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추구합니다. 그런 소망은 얻어도 배부르지 않고 만족이 없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영혼을 갈증 나게 하고, 취하면 취할수록 병들게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추구하는 소망은 어떤 것들일까요? 성공이라는 소망입니다. 이른바 부귀영화를 통한 성공을 추구한다는 말입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을 소망합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을 위해 목숨을 겁니다. 과정이야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컨닝을 해서라도 성적만 높일 수 있다면 부정행위를 마다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을 뽑아서라도 부자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것들은 죄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것들이 소망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문제는 기독교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목회성공이라는 단어를 흔하게 사용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부르짖는 성공적인 목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그런 소망을 마치 영적인 소망인양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부흥은 모든 교회의 소망이요, 모든 목회자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부흥이 하나님의 소망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흥을 꿈꾸는 교회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성공이라는 말이 타당할까요?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목회성공을 교회를 크게 짓고 많은 사람들을 긁어모으며 많은 재정을 확보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목회는 성공이 없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내가 공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목회성공이라는 말보다는 목회승리라는 말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큰 교회는 성공목회요, 작은 교회는 실패한 목회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목회는 성공이라는 단어보다 승리라는 단어가 훨씬 더 성경적일는지 모릅니다.
지나친 성공주의 신화가 목회자들 속에도 팽배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기대하는 목회성공을 위하여 목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냅니다. 교회도 그 일을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어떤 관심도 갖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어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른바 천국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돈을 버는 것을 잘못된 소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돈을 추구하는 목적과 방법이 선하지 못하면 바른 소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17절은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망이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안에서 바른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소망에 대한 기준을 바르게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망에 대한 기준이 바르지 못하니까 영적인 소망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영적 소망에 관심이 없습니다. 때문에 세상이 교회를 향해 어떤 소망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소망이나 세상의 소망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는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산 소망은 영적인 소망입니다. 영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이 산 소망이요,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영적 소망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혹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으로 수양 받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을 얻어가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소망을 담아야 하고 품어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모든 소망의 가치를 하나님께만 두어야 합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영적인 소망을 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산 소망을 제공해야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전해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소망을 교회를 통해서 얻을 수 없다고 불평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교회는 하나님의 소망만 증거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소망을 바르게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그러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절대 다수의 교회와 성도들이 말입니다. 어쩌면 교회가 세상의 소망을 더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적인 방법을 가지고 전도하고, 세상 사람들이 즐겨하는 테크닉을 교회에 접목시키기도 합니다. 마치 비즈니스 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교회 부흥을 꿈꾸며, 교회의 재산을 증식해 가는지 모릅니다. 물론 듣기에 불편할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번쯤 우리 자신을 성경에 비춰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소망이 하나님의 소망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소망은 모든 교회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의 소망이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만 소망해야 합니다.
(1) 세상을 소망하지 말라(3-4절)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소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도 충분한 매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별다른 의식 없이 영적인 소망보다 눈에 보이는 소망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로마서8장24절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소망은 육신의 소망이요, 육신의 소망은 죽음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소망보다는 눈에 보이는 육신의 소망이 훨씬 더 자극적이고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창세기13장에 나오는 아브람과 조카 롯과의 소망을 비교해 보십시오. 롯의 소망은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온 땅에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성에 큰 매력을 느낀 것입니다. 그 땅을 소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였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육신의 소망은 착시현상과 같습니다. 매우 달콤하게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소망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때문에 성도는 일시적인 것에 소망을 두면 실패합니다. 시편 기자는 당부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방백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방백들은 어느 정도의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방백이 되기를 소망하고, 최소한 방백들과 친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방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허무하고 허접합니다. 잠간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도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도울 수 없거니와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 인생은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방백이나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는 세상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다 소멸되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때문에 인생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을 소망하라(5절)
세상의 소망은 끊어질 소망이요, 불타 없어질 소망입니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은 영원한 소망이요, 참된 소망이며, 산 소망입니다(벧전1:4). 이 소망은 썩지 아니하고, 더럽히지 아니하며, 쇠하지 아니하는 소망입니다. 한마디로 완전하고 완벽한 소망입니다. 하늘의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9편7절에서 다윗은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고 고백합니다. 때문에 다윗왕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했으며, 모든 이들의 존귀함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도 소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종교도 영원한 소망은 없습니다. 단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규범을 제시하므로 일시적인 소망을 주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모든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소망은 허상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도 역시 하나님의 소망을 먹고 사는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교회와 성도는 세상적인 소망으로 일희일비하지 말고 하늘의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소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소망입니까? 하늘의 소망입니까? 이른바 육신의 것을 소망하십니까? 영적인 것을 소망하십니까?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육신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를 구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5절은 우리에게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복을 받을 수 있을까요? 6절 이하에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하신 분이시요, 만물을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기자는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찬양하며 찬송하겠노라고 고백합니다(1-2절).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소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이 받게 될 복은 어떤 것들일까요? 본문을 통해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3)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의 복(6-10절)
하나님은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의도적으로 절망의 상태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셔서 철저하게 자신을 절망시키신 후에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게 만드는 원리와 같습니다. 때문에 절망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소망의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절망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소망하는 영적인 타이밍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절망의 순간이 없었다면 과연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최소한 당신의 주머니가 구멍 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지 않았다면, 혹은 당신의 삶속에 좌절과 절망의 순간이 없었다면, 당신의 삶 가운데 고독과 외로움이 없었다면 과연 당신이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미안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의 순간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주님 앞으로 나올 수 있는 소망을 얻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과정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절망의 옷을 입히신 후에 소망의 옷을 예비하여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물질로 절망의 옷을 입히십니다. 때로는 건강에 절망의 옷을 입히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실패라는 절망의 옷을 입히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옷을 벗기시고 소망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대부분의 인생들이 절망하지 않으면 소망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올라오지 못하고 우물 벽에 붙어서 죽겠다고 야옹거립니다. 한 사람이 구해주려고 네모난 막대기를 갖다 대고 올라오라고 해도 자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나무 막대기를 타지 않은 채 소리를 지르더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막대기로 고양이를 쳐서 물속에 빠트린 후에 나무 막대기를 갖다 주니까 얼른 나무위로 기어 올라와서 살았다합니다. 이처럼 사람들도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안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절망을 기다리고 계신지 모릅니다. 절망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 7-9절을 보십시오.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7절에는 압박당하는 자, 주린 자, 갇힌 자, 8절에는 소경, 비굴한 자, 9절에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나옵니다. 모두가 다 상황이 좋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절망하기 좋은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소망은 무엇일까요? 압박당한 자의 소망은 공의의 판단이요, 주린 자의 소망은 식물이며, 갇힌 자의 소망은 자유와 해방입니다. 눈먼 자의 소망은 보는 것이요, 비굴한 자의 소망은 일으킴을 받는 것입니다. 나그네의 소망은 인도를 받는 것이요, 고아와 과부의 소망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소망이 과연 이 땅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줄 수 없는 소망입니다. 일시적으로 미봉책은 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영원한 소망은 줄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의 소망이십니다.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분께 소망을 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소망은 우리 인간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소망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머물게 됩니다. 영원 형벌을 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소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세상을 사랑하시는 소망입니다. 모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당신의 모든 소망을 담아서 우리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 소망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시고 우리 가운데 살기 위하여 나를 성전삼고 성령과 함께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소망입니다.
그 예수를 나의 주, 나의 왕, 나의 전부로 받아드리고 사는 자는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 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소망은 당신의 은혜로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 것이지만 원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만이 당신의 소망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주님이 하나님의 소망을 가지고 우리 안에 오셨고, 우리가 그 소망 안에서 살기 원하십니다. 때문에 모든 소망을 내 안에 계시는 주님께 두고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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