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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첫째 주)
하늘 소리와 땅의 소리의 만남
사43:1~7; 행8:14~17; 눅3:15~17,21~22
오늘은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이자 주님수세주일입니다. 우리가 매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교회력으로는 1월 6일 주현절을 지나게 됩니다. 주현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이방에) 드러나심을 선포하는 절기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부활절 다음으로 소중하게 여겼던 절기였습니다. 2세기부터 지켰다고 하니까 성탄절보다 먼저 있던 절기로 성탄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가, 나중에 성탄절이 따로 동지 즈음인 12월 25일에 지켜지게 되면서, 주현절은 예수님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신 것을 축하하는 절기로 바뀌었습니다. (동방 정교회는 지금도 1월 6일을 성탄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현절인 1월 6일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때에서 밤이 점점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는 때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주현절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선포를 통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간절히 “빛”을 기다리는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주님의 나심을 알게 되고, 또 그 별빛의 안내로 아기 예수께 찾아가 경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주현절을 상징하는 본문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동박박사는 별빛의 안내를 받아 아기예수를 찾아가 아기 예수께 경배함으로써, 그 아기 안에 있는 신성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 주었습니다. 동방박사는 동방, 즉 세상 끝에서 온 사람들로서 모든 시대에 걸쳐 진리를 탐구하는 현인을 상징합니다. 또한 별빛은, 사람들을 각자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아기”께 인도하는, 지성적이면서도 영적인 지식을 상징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최첨단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아기”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우주와 달나라까지 날아가면서도, 정장 자신의 가장 깊은 그곳은 가닿지 못합니다. “신성한 아기”는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알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진짜 우리 되게 하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무엇일 것입니다. 저도 다 안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제 안에 있는 그 “신성한 아기”를 만나러 제가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우리는 별빛의 인도를 따라 그곳으로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우리 안에 “신성한 아기”로 머물러 있다고 믿습니다. 주현의 빛은 우리에게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신성한 아기를 찾아가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또한,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을 통해 증거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을 “주님수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울려왔다고 하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너는 신의 아들,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우리의 세례 때도 울렸던 하늘의 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에 이르셨을 때, 요단강에는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선포했었지요. 혹시 기다리던 메시야(그리스도)가 요한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단 강가는 그야말로 인간들의 죄와 허물과 상처와 의심과 어둠의 장소였습니다. 요단강물도 그런 사람들에 의해 더럽혀졌고 오염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와 그 곳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요단강물이 예수님의 몸에 닿음으로써 성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로 말미암아 이제 그 물은 은총을 나르는 수레가 되었습니다. 요단 강물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이 은총의 무한한 원천으로 바뀌었습니다.
요단강물에 들어가 잠기심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다면, 요단강물에서 나오심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셨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이 모든 일들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우리가 사는 삶이, “땅의 일”만이 아니라, “하늘의 일”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죄와 허물과 상처와 의심과 어둠의 결과인 고통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경험함으로써, 결국 넘어서는 것임을, 은총의 무한한 원천으로 바뀔 수 있음을, 예수님은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이 하늘의 소리는 예수님에게만 울렸던 소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만 이 말을 하실 정도로 그렇게 인색하신 분이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들렸던 이 소리는, 우리의 세례 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늘상 들려주시는 소리라고, 우리는 들어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신의 아들, 신의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지금도 듣지 못하며, 그래서 그 의미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이 말의 본디 의미를 알기 위해서 이 땅에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란 말입니까? 예수님의 세례로 더럽혀졌고 오염된 요단강물이 성화되었고, 예수님의 세례로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이 “땅의 일”만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지지고 볶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이 아슬아슬한 우리네 삶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예수님의 세례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요,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 비참하고 우울한 감정으로 한숨짓는 우리네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겁니까?
“신성한 아기”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은행잔고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생기가 없으며, 스트레스 받고, 비참하다는 감정으로 휩싸이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 못한다는 죄책감까지 더 얹어야 하는 겁니까? 예, 우리가 막나갈 때(?)는 이런 질문이 나도 모르게 올라오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지지고 볶고, 비참하고 우울하고, 은행잔고가 없어 초조하고, 고통스럽고 생기 없고 스트레스 받을 때, 우리는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건너 뛰어 어디 딴 세상에 가 있는 건가요? 우리가 정말 이때도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땅의 소리와 하늘의 소리가 만나고 있는 거지요.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신성한 아기”를 찾아가고, 또 무슨 “하늘의 소리”를 듣는 일이, 우리의 리얼한 삶, 리얼리티, 실재와는 먼 저 세상의 얘기로만 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실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 위해서 신앙으로 도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신앙은 세상과 현실은 무시한 채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우리의 삶은 교리가 아니고, 좋은 정보가 아니고, 관념이 아닙니다. 삶은 그야말로 “사는 것”이지요. 토머스 머튼이 엄격한 규율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온 젊은 수도승들에게 늘 하던 말은, “여러분, 영적인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삶을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이었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이사야서 말씀은 주전6세기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유다백성들이 겪은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굴욕적으로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겪었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좌절 가운데 깊은 회한과 죄책감을 품고 그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시편137편은 이 포로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베르디의 나브꼬 중에 “히브리 노예들의 합장”(바 펜시에로)의 배경이 되고, 더 직접적으로 보니엠의 “Rivers of Babylon”의 배경이 되는 시편 137편은, 보니엠의 경쾌한 리듬과는 달리, 어둡고 암울합니다. “우리가 바빌론 강변 곳곳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리가 그 강변 버드나무에 우리 수금을 걸어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자들이 저희들의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노래 한 자락을 자기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이 노래는 “내 오른손아 말라 비틀어져 버려라, 내 혀야, 입천장에 붙어 버려라”라는 구절로 이어집니다.
이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익명의 예언자가 하나님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 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우리가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처한 처지를 생각한다면, 사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렇게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가장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한번도 본적 없던 범람하는 유프라데스 강물 한가운데로 건너가고 있고, 불 속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이런 걸 반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마치 부적처럼, 마술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실제로 그 한가운데서 겪는 고통은 간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와 함께 하고,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에만 우리 귀가 쫑긋하지, “물 가운데로 건너가고, 강을 건너가고, 불 속을 걸어가고 있다”는 말은 간과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일단 범람하는 강물 한가운데로 지나가야 봐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침몰시키는지 아닌지도 알 것이고, 불 속을 걸어가 봐야 불꽃이 태우는지 아닌지도 알 것입니다. 삶이 먼저이고, 신탁(말씀)은 나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탁을 명분삼아 삶을 무임승차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신탁은 소위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짜 삶을 살 수 없게 하는 온갖 생각, 개념, 정보, 이데올로기, 세상 가치관, 아집을 다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 비참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얼마나 비참한 포로생활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참한 포로생활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배롭고 존귀하여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라는 말도 진지하게 듣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단순히 현실의 고통을 덜어주는 아편으로 받아들이든가(그런데 아편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아니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말씀이라고 멀리 치워버리게 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하늘의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정말 “아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가 내 삶을 “Yes”라고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Yes”, 우리 삶의 긍정은, 단지 좋은 것만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요, 그 반대쪽도 충분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게 정말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참함과 고통 속에서(우리는 이 상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하였으므로”라고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하나님이 정말 그런가를 시험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여 여기며 사는지를 늘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은 하나님 혼자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사랑하심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을 통해 완성됩니다. 물 가운데를 지나가든, 불 가운데를 지나가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살아가도록 맡겨 놓으셨습니다.
물 가운데를 지나가고, 불 가운데를 지나가는 것은, 정말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싹 빼고 갈 수 없습니다. 누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데요? 라는 반문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런 질문은 자신의 진짜 “삶”을 회피하는 아주 교활한 수단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그것이 내 삶을 살아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러셨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이 사랑하던 제자를 보면서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이 대답하시지요. “얘야,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생각이 많아지고, 변명이 많아지고, 불평이 많아지는 것은 삶을 살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삶을 제대로 살 때 우리는 생각이 없어지고, 단순해지고, 삶을 긍정하는 잔잔한 감사가 배경으로 깔리게 됩니다. 우리가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고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을 덜하게 됩니다. 그냥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파커 파머의 글을 같이 읽으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실에 치열해진다는 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무엇인가.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 나 자신이다.
배반과 신실함, 실패와 성공, 모두 나 자신이다.
나는 나의 무지이고 통찰이며,
의심이고 확신이다.
또한 두려움이자 희망이다.”
온전함이란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서짐을 삶의 총체적인 부분으로 끌어안는다는 뜻이다.
완전함과는 거리가 먼 한평생 마구잡이로 헤쳐 온
구불구불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노년에 돌아보면서
나는 이 진리에 감사함을 느낀다.
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