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항의 샘 ; 배설욕과 식욕 >
서태지와 신해철의 저항을 한계 짓는 것은 미디어만도 아니다.
문화 산업의 생산 시스템에도 이미 한계는 분명히 그려져 있다. 대중
음악에는 작가 외의 제작 환경이 탄탄하게 배열되어 있다.
창작은 가수나 작곡자만이 하는게 아니다. 매니저와 제작자의 '몫'.
그 몫은 가수의 창작 동기를 이윤 동기와 자본의 원리로 재해석하고 때로
는 강요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가수의 창작 욕구는 '나머지'로 전락
하기도 한다.
따라서 창작자가 저항의 의도를 갖더라도 제작 메카니즘에 들어가는 한
변형된 결과로 나타난다는 점은 상식이다. 방송국과 스튜디오를 놀이터
로 삼는 고유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서태지와 신해철의 저항을 보자.
그러면 그들의 가사에서 미묘하게 뒤틀려 들어 있는 시장에 대한 저항감
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스타덤이라는 자신의 현실과 모순되고, 결국에 자기 부정이 되어버리는
시장 혐오, 가수 생활을 통해 겪은 회의감, 그리고 시장 지배를 통해
그런 감정을 해소하려는 탐욕이 얽혀 있다.
시장 실패를 경험한 서태지의 4집 전체가 그러하며,
<머니>가 자가당착임을 알면서도 시장에 대한 애증을 논리적으로 언어화
할 능력을 갖춘 신해철이그러하다.
오히려 이들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국가에 대한 저항감이다.
기성세대의 불신을 칭한 <시대 유감>의 가사를 수정하라는 공윤심의에
반발하여 가사를 완전 삭제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서태지의 법률 사건
비화가 이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국가에 대한 저항감이야말로 젊은 세대
를 대표하는 대중가수들이 속 편하게 드러낼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한 것
이다.
음반을 통해서 벌어지는 일과적인 저항, 한 음반을 단위로 단절되는 일시
적인 저항, 그리고 사회를 암반 속으로 몰아넣는 일상적인 저항..
서태지와 신해철이 이처럼 미미한 저항에 어떤 동기를 갖고 어떤 식으로
저항을 '경영'하는지 보라.
서태지는 즐거움을 통해서만 저항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자신이 말들어내는 노래들 속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목소리가
표출된다.
노래는 출구이다.
그의 저항은 노래의 즐거움이 존재할 때에야 시작된다.
신해철의 경우, 자신의 노래들이 자유로운 잡음으로서 사회에 드러나길
바라는 듯하다. 노래의 즐거움 위에 저항을 디자인 하는 것이다. 노래는
이제 운반체가 된다.
즐거움이 생긴다면 저항도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리라.
그렇게 보면 서태지의 저항 동기는 '배설욕'이다.
말 못하고 열 받아온 마음 속의 열기를,
노래를 통해 사회 구석 구석까지 쏟아내는 것이다.
신해철의 저항 동기는 엄청난 '식욕'이라 하겠다.
그의 노래들은 세상 사는 문제들을 정보로 받아들이고 끌어들이는 의욕,
고민을 자기식으로 정리해 내려는 욕심의 산물 같다.
서태지가 자기 표현을 전략적으로 연출하는 음악 감독으로서 저항을 완성
한다면, 신해철은 지식욕으로 끊임없이 섭취하는 이지적인 작가로서 저항
을 출발한다.
이제 핵심은 이들이 저항했는지 아닌지 여부가 아니다.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고 자신만의 표현을 완성해가는 창작 과정에서,
제작 시스템과의 관계에서 최대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애쓰면서,
이들의 작은 저항들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도달하고 이해되는가 하는 것이
다.
그렇다면 이들이 대화를 건네고자 했던 대중은 과연 어떤 이들인지 역시
중요해진다.
지금까지는 이들이 저항을 통해 대중에게 어떤 꿈을 주려고 했는가를
생각했다.
이제는 다음과 같이 생각 해봐야 한다.
이들의 저항을 대중은 어떤 '꿈'으로 받아들이는가?
< 코리안 드림 >
대중의 시선을 돌리자. 아니, 대중의 시선으로 보자.
일상 비판이라고 할만한 서태지와 넥스트의 노래 가사가 왜 호소력을
가질까.
젊은 세대의 욕구를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학 입시에서 오는
스트레스, 대학 입학 이후의 공허감, 욕구를 발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기성 세대의 관습, 개성을 표현하고 정체를 형성할만한 준거 공간의
부재.
이에 비해 젊은이들의 인식은 급격하게 자유로워지고 있는데...
일상을 비판해온 서태지와 넥스트가 뉴 제네레이션의 상징이 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겠다.
이들의 저항을 대중은 생생한 삶이 아니라 꿈으로 받아들인다.
'신화'이다.
서태지를 통해 청소년들이 꾸는 꿈은 '현실을 넘어서는 성공'이다.
서태지는 학력 중퇴자이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음악으로 성공한 그를
통해 어린 대중은바늘 구멍과 같은 대학문을 비껴가는 혁명을 꿈꿀 수
있다. 반면 신해철은 명문대 출신이다. 학력의 혜택을 박차고 음악에
입문한 그를 바라보면서 대중들이 '현실적인 성공을 넘어서는 자유'를
꿈꾸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둘은 각각 암울한 현재를 어루만져 주거나
찬란한 미래를 그리게 만드는 꿈인 게다.
바로 그렇기에 둘은 저항의 상징이라기 보다는 희망의 상징이라 하겠다.
대중을 사로잡는 그들의 힘은, 저항의 노래 가사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희망봉이라는 점에 있다. 젊고 어린 대중들은 저항하는 그들의 모습에
매료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에 걸린 그들의 삶을 전설로서 흠모한다.
그들의 저항이 삶으로 튀어나오지 않고 노래 가사에 멈추는 연유도 일부
이점에 있다.
< 언제 앙가쥬망(사회참여)은 시작하는가 >
이처럼 수용자문화로부터 바라보면,
서태지와 신해철이 지닌 저항의 이미지는 어린 대중들이게 희망의 메시지
로 해석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에 있어, 진정 저항이란 무엇일까.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저항이 이처럼 작가의 저항과는 독자적인 영역이라
면 가수가 대중을 대변하고, 대중이 직접 그 노래를 부를 때야말로 저항
하는 음악이 되지 않을까. 그런점에서 보면 대중 음악은 저항의 잠재력
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대중이 따라부르기 쉬운 음악, 그것도 뉴 제네레이션의 욕구를 대변하고
저항 정신이라는 록 스피리트를 신봉하는 서태지와 넥스트 같은 대중 음
악에는 따라서 일단 저항 가요의 전통에서 서태지나 신해철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의의가 크다.
'비판가요'라는 신조어를 쓰면서 지난 시절 민중 가요의 고만에 저항의
잠재력을 가진 대중 가요를 연결지어 보려는 한 젊은이의 말부터 들어본
다.
"서태지와 넥스트가 비판가요라는 울타리에 묶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국가와 자본에 저항하는 세력이 있다면 배척하지 말고 그들도
저항세력에 포함시켜 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세 속에서는 그들이 주목
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성과 소비 문화가 팽창한 90년대의 현실에서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
는 저항적인 가요 역시 흔들려 왔다. 오늘날 민중도, 대학인도 대중 음악
의 놀라운 파급력에 빠져들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연스럽게 취향
이 변하였다.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는 민중 가요의 대중화를 선언했고, 천지인
은 나아가 민중가요에 록 음악적 요소를 부과하고자 한다.
이런 현실에서 서태지나 넥스트 같은 대중 음악에서 저항성을 찾고, 민중
가요의 입장에서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를 모색하는 일은 문화를
창출하는 창의적 의견이 될 수 있다.
70년대 청년 문화를 대변하고 대중 음악의 주류를 이루었던 김민기 류의
포크송이 80년대 운동권 문화의 민중가요로 연결되었듯, 90년대의 록
음악에 담긴 저항성을 80년대 저항가요의 맥락에서 포용, 차용할 수
있지 않을까. 수용자 문화의 변화로 볼 때 설득력 없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게다.
그렇다면 저항가요로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세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작가의 의도이다.
70년대 김민기는 자신의 정체를 굳이 '저항시인'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는 점에서 저항가요를 의도하지 않은 경우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노래가 저항가요가 되고, 작가는 그러한 저항의 상징성을 부여받은
경우이다.
밥 딜런의 경우 명백히 가사에 저항을 싣고 뚜렷하게 그 뜻을 비추었
던 '저항시인'이다. 하지만 그렇게 저항가요를 의도한 밥 딜런도 민중을
위한 운동대열에 있음을 천명하고 철저히 그 배경속에서 창작 활동과
공연 활동을 해온 노래 운동과는 다른 것이다.
노찾사 같이 명백히 운동적 저항의 전통에서 활동하지 않는 신해철과
서태지의 저항성은 어떤가.
김민기처럼 사회로부터 시대로부터 저항의 의미를 부여받을 것인가.
밥 딜런처럼 명백히, 의도적으로 가사에 저항의 의미를 싣는 것이며,
틈만 나면 인터뷰에서 난 저항하고 있다고 회치고 있는가.
흥미로운 사실은 대학인들에게 이들에 대한 평가와 강산에의 그것이 다르
다는 점이다. 같은 대중가수이고, 대중들이 가사에서 저항의 뉘앙스를
발견하곤 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강산에만은
강력한 저항의 의도없이 시대에 의해 받아들여진 김민기를 예감한다.
한 대수처럼 그 시대 청년들에게 호소력 있는 존재를 예감한다. 대학인에
게 와 닿을 수 있는 포크 송 취향을 록 음악에 섞었다는 이유가 설득력
을 가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서태지와 넉스트도 대학인의 취향이 록 음악 쪽으로 변하면
서 '간택'되지는 않았을까.
다른 예를 들어보자.
공일오비의 <신인류의 사랑 >이나 <아주 오래된 연인>의 가사가 일상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재치 있게 세태를 꼬집에도 대중이 저항의 이미지로
판단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강산에
게 아무리 '돈 많이 벌어 예쁜 여자랑 살테야'하고 노래해도 반어법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대중은 강산에의 한마디에서 신해철의 <머니>나 서태지의 <1996년 우리
가 지구를 지배했을 때>의 직설적인 세태비판보다 더 큰 호소력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찾사나 천지인처럼 민중가요의 메시지를
대중가요로 순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사에 알리바이가 없다면, 작가
스스로 저항함을 드러내야만 저항 가요로서의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 대중이 레지스탕스를 받아들일 때 >
여기서 역설적으로 저항가요에 가사의 전달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
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번때 요소는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가사라고 하겠다.
가사의 전달력은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제 사람들이 따라 부르고 있는 가사야말로 저항가요
를 결정적으로 탄생시키는 세 번때 요소이다.
가상의 나라에서 벌어진 무명 가수의 민중 지도자의 대화를 들어보자.
지도자 : 당신 노래, 가사가 빼어나군요. 당신과 같은 저항시인은...
가 수 : 난 그런거 모릅니다. 그저 내 노래는 편하고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멜로디를 가졌다는 생각입니다.
지도자 : 실망감을 느낍니다. 혁명 정신이 없군요.
훗날 이 노래는 민중 연대에 의해 실제로 불리워진다.
평이한 가사를 지녔던 다른 오래조차도 '노가바'로 거듭난다...
저항가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역시 저항의 출구로 수용자들이 인식
하고 습득해가는 문화적 차원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항가요가 되는 것이란 '노가바'로 재탄생하는 순간에
다름 아니다. 비록 작가가 전향적으로 저항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런
의미로 불러야 한다.
서태지나 신해철이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록 스피리트를 가졌는지 모른
다.
록의 정신에 따라 일상과 관습에 저항하듯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록 음악을 하면서 자기 삶의 레지스탕스였을 수는 있으나, 앙가쥬망으로
서 사람들의 노래를 만들었다고는 어느 정도까지 확신하겠는가.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답답하고 열받치는 삶의 부분을 드러
내는 레지스탕스 -그 순수하기에 투철한 저항의 모습,
혹은 이것이 사람들을 위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저항가요
로 비추어지길 기대하는 모습.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일상에서 앙가쥬망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저항의 노래로 재탄생하는 일은 사람들이 저항
을 목적으로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대중들이 모여 저항의 의미로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 대중문화, 그것은 대중의 힘이다 >
한 노래가 저항가, 참여가로 변화하는지는 가사와 같이 한눈에 보이
는 '결과'로만 알 수는 없다.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기준은
'작가주의'가 된다고 하자. 그 작가의 삶의 전개라고나 할까.
창작 과정을 봐야만 판정할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이는 그 작가의 삶의
환경, 이를 테면 사회 관계를 통해 결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특히 수용자 문화는 별개의
판단 기준이 된다.
수용 여부, 말하자면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되는 것이다.
'수용자주의'라고나 할까.
대중문화의 패러독스가 여기서 나온다.
작가는 스타 시스템을 통해 신격화되기 마련이지만 판단은 항상 대중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다.
바보로 설정하고 마케팅을 하던 바로 그 목표 지정들이 권력을 획득하는
순간, 작가의 무대에 불과했던 무생물이 생생한 지력을 가지고 작가의
생존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다.
기술매체 속에서 물화되었던 대중이 기술매체 속에서 인공지능을 확보하
고 다시금 생명 현상을 시작한다는 역설, 오늘날 수용자의 힘을 뜻한다.
대중문화란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다. 이는 대중 스스로의 영향력과 상통
한다.
굳이 록 스피리트를 상정하면서 서태지와 넥스트가 저항을 발신한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모습이 대중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수신될 때, 조용하면서도
거대한 일이 벌어진다. 아무 일도 없지만 큰 변화가 일상에 이미 벌어지
는 것이다.
어느 가수가 대중에게 '꿈'을 줄 때 이미 저항은 시작된다.
그러나 진정 저항이란 대중이 바로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다.
'노가바'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사람들이 저항의 의미를 담고 부르는
순간, 하다 못해 몇사람이 모여 희망을 얘기하면서라도 부르는 순간,
'노뜻바'는 일어나고 있다. 누가 부르는가. '노래 뜻 바뀌어' 저항가요
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 만일 상품에 꿈이 실릴 수 있다면 >
대중 음악은 소비함으로써 벌어지는 축제이다. 혹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
는 펴현적 소비의 욕구를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중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저항하는 의례가 되기도 한다.
대중 문화에서 반란의 맹아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상품화를 꿈꾸는 것은 바로 대중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상품에 꿈을 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대중 상품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꿈을 심는 음악, 꿈을 주는 가수,
그것은 물상화를 전복하는 상품 물신!
서태지와 넥스트가 부른 일개 대중 가요가
저항가요로 읽힐 수 있을지 생각하고 비판가요라는 말도 붙여 보는 이유
는 그런 꿈꾸기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
-- 高大文化 --
=================================================================
아..깁니다. 줄 맞추며 읽으며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만..-_-
암튼..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장하십니다. ^^
태지매냐에서 퍼왔습니다. 고대문화..라는 곳이 인터넷 웹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_- 일단 올려놓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