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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원산부흥운동(元山復興運動,R. A. Hardie,1903~1906)
1903년, 하디의 “원산부흥운동”, 1907년, 길선주와 하디의 “평양대부흥운동”(한국의 오순절), 1909년, 스톡스(M. B. Stokes), 채프만(J. W. Chapman), 알렉산더(C. M. Alexander)의 “백만인구령운동” 등 한국의 3대 부흥운동은 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가장 치욕적인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시점에 일어난 부흥이었습니다. 세계열강들이 자국의 이익에 관한 셈법을 계산하고 있을 때 조선땅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세계열강들이 전혀 범할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대각성운동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웨일즈부흥운동, 그리고 인도의 부흥운동 등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령운동과 연결되어져 있었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부흥운동은 식민지국가로 가는 치명적인 좌절과 절망속에서 찾아온 한줄기 희망이었습니다. 또한 말씀과 기도와 예배속에서 은혜를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사경회운동의 연장선에서 폭발한 영적 분화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1) 부흥의 시작
“원산부흥운동”(1903~1906년)은 기독교가 전파된지 20년만에 일어난 대 부흥운동이었습니다. 1900년, “중국 의화단 사건”의 여파로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확산되어 복음전파가 좌초위기에 빠져 있을때였습니다. 1901년, 조선은 “신축년 대기근”으로 인하여 민중의 경제는 파탄에 빠져 아사자가 속출하는 절망이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조선반도에는 청일전쟁(1894년) 이후 1904년, 또다시 “러일전쟁”이 예고되고 있어서 정치적 불안감은 더욱더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과 초조감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 함경도 원산항에서는 기적적인 영적 대각성운동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북부지역은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함께 양대축을 이루며 성장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개성(송도)과 평양과 원산지역에서는 1901년부터 영적각성운동이 대두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01년 10월, 남감리교 선교회와 북감리교가 연합으로 개최한 “신학회”에서 성령이 강하게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2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 참석자들을 감동의 역사로 인도하였습니다. 1902년, 존스가 인도한 “속장과 권사들을 위한 서울 북남감리교 연합사경회”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습니다. 1903년 1월, 개성에서 개최된 남감리교 신년기도회에서는 선명한 성령의 역사가 집회장에 참석한 모두에게 강력하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선하심을 간증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좌절과 절망이 아니라 새힘과 새능력으로 더욱더 강해져 가는 신앙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어 존스가 인도한 서울집회에서도 동일한 성령의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각성운동은 점진적이지 못했고 강력한 각성이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의 북부지역 전도는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특히, 평양, 선천, 의주지역의 복음화율은 높은 신장세를 보여 주며 평양은 한국교회를 리더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자립적 중산층세대가 밀집한 인정이 넘치는 북부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한문을 배운 지식인이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특히 중국과 인접한 원산은 국제무역항으로 상업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약재 인삼상인 이응찬, 홍삼상인 서상륜, 인삼상인 이수정, 한약재상인 길선주, 포목상상인 조만식 등이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이후 심약해진 북부지역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하나의 희망이었습니다. 매켄지 선교사는 전도하고 성경을 교육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한국인들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북부지역은 한국인 스스로에 의한 선교사역에 적극적이었습니다.
북부지역의 복음전파 확산으로 “그레이험 리”(이길함)선교사는 황해도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마펫”(Samuel Austin Moffet마포삼열)은 평안북도, “드루”(위대모)는 평안남도를 순회전도 구역으로 분할하였습니다. 1898년 3월, 평양 장대현교회 전신인 “판동교회”는 이신행, 신반석, 박관선, 김성신 등이 “부인전도회”를 창립하였고, 1900년 봄, 선천읍교회에서 개최된 평북사경회에서는 김원유, 김경현, 안준, 양전백, 정기정이 “평북전도회”를 창립함으로서 “남전도회”가 발족되었습니다. 1897년, 그레이험 리는 판동교회에서 주일 5회의 주일학교를 운영하였습니다. 1898년, 장대현교회부지를 매입하고 63명을 회원으로 하는 여선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1900년 7월15일, 장대현교회 최초의 장로 “김종섭”이 장립식이 거행되었고 1901년 6월, 장대현교회는 1,400명이 회집하는 준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는 인근지역을 중심으로 18개의 예배처소를 관리하고 있었으며, 1903년, 수요예배의 참석자도 1,000~1,200명에 이르렀고 “길선주”가 두 번째로 장로로 임명받았습니다.
평양선교부는 1894년, 평안남북도 세례교인 52명에서 1904년, 예배처소 130개, 입교인 700명, 10,000명의 교세로 확장되었습니다. 서북지역 사경회는 지역교회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며 평양부흥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남자를 위한 사경회에 105명이 참석하고 여자를 위한 사경회에는 60명이 참석하는 등 사경회 참석자들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였습니다. 1902년 12월31일부터 1903년 1월13일까지 2주간 진행된 평양장로교 겨울 사경회는 610명이 참여하여 놀랍고 탁월한 변화에 감탄하였습니다.
1900년 5월, 지난 1년간 동록한 입교인에 대한 기독교 통계에 의하면 북장로교 3,690명, 남장로교 130명, 캐나다장로교 90명, 호주장로교 2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북장로교의 3,690명 입교인중 2,230명이 평양지역으로 서울 1,430명보다 790명이나 많았습니다. 북장로교 전체 출석교인 13,569명 가운데 평양이 10,055명으로 압도적인 성장을 보여주며 평양부흥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습니다. 주일학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장로교 주일학교 전체출석 8,668명 가운데 평양이 7,166명으로 타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1903년, 1,104명이 세례를 받고, 1,063명이 학습을 받았으며 평양의 교회위에는 날마다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양의 교회들은 안디옥교회(사도행전11:19~26)와 같이 스스로도 힘든 가운데 엽전 1,000냥을 헌금하여 가난한 교우들과 이웃을 구제하였습니다. 1896년, 감리교 선교사 노블이 평양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100명이던 교세는 1901년, 1,200명으로 성장하였고, 1903년, 7월12일, 평양시내 감리교회에는 매주일 평균 700명, 수요일 평균 400명이 참석할 정도로 왕성하였습니다. 부흥의 성지 장대현교회에서는 1,400명이 주일 오후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2) 원산부흥운동(元山復興運動, R. A. Hardie, 1903~1906년)
1903년, 남감리교 중국파송 여선교사 화이트(M. C. White)와 캐나다 장로교 여선교사 맥컬리는 부흥운동을 기대하며 날마다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남감리교 화이트, 캐롤(A. Carroll), 노울즈(M. Knowles), 하운셀(J. Hounshell), 캐나다장로교 맥컬리(I. H. McCully) 등 7명의 여선교사들은 하디를 주강사로 1주간 “연합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원산부흥에 있어서 이들 여선교사들의 노력과 헌신은 하나님께 정확히 전달되었으며 그 시작은 “회개”였습니다.
주 강사인 하디 선교사는 화이트와 맥컬리와 캐롤이 보낸 서신을 읽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결핍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디는 여선교사들과의 강론중에 성령충만을 간절히 염원하였고(누가복음11:13) 마지막 집회에서 하디는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는 영적 각성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디는 게일 선교사의 동창생으로 토론토대학YMCA의 지원을 받아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하디는 부산에서 사역하다가 원산과 통천을 중심으로 3년간 사역하였으나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지 못했으며 그로 인하여 절망감이 있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많은 회중들 앞에서 하디는 자신의 교만함과 강퍅한 심령과 믿음이 없었음을 고백하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기도하며 참회를 하였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민족적 우월감과 자신의 능력과 학력과 실력을 의지하는 자만감이 있었습니다. 각종 생활환경과 전근대적인 생활방식에서 선교대상인 한국인을 미개한 족속과 부지불식(不知不識)한 사람들로 저평가하는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선교대상자인 한국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이후 존 로스선교사의 어학선생 “진천수”가 회중앞에서 그동안 감추어졌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교만과 탐욕과 위선적인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회개하며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1903년 10월, 중국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연맹 “프란손”(F.Franson) 선교사가 “창전교회”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연합집회를 개최하며 하디의 회개운동에 불을 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후 하디는 특별기도회를 개최하였고, 그곳에서 성령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한국인들이 일어서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는 원산지역은 말이 아닌 진정한 회개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절망적이고 좌절감에 빠져있던 원산 기독교를 희망적이고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1904년 2월, 김화 “새술막교회”집회에서 그 교회 “윤성근”전도사는 과거 인천주전소에 근무하던 시절 회사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돌려주지 않았던 사실을 고백하고 그 돈을 마련해 탁지부에 되돌려 줌으로서 “양심전”(良心錢)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디로 촉발된 원산부흥운동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용기있는 “회개”로 시작하여 “중생”(거듭남)과 “성결”(성화)로 이어지는 영적 성장을 주도하였습니다.
하디와 더불어 선교사들에게도 이러한 영적 각성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캐나다 선교사 로브(A.F. Robb,업아력)는 1901년 함경남북도와 간도지방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장감연합선교회 집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누군가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임재하심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용기있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선교사와 한국인 신앙인들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이것이 원산부흥과 평양부흥으로 점화가 된 것이었습니다.
1904년, 강원도 지경터교회와 서울과 인천 송도로 성령의 불길은 퍼져 갔습니다. “지경터교회”에서 열린 2주간의 집회에서 사경회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놀라운 성령의 감동을 체험하였습니다. 1904년 2월26일부터 3월7일까지 “남대문교회”에서 개최된 “개성지방사경회”에서 “크램”(W. G. Cram)선교사와 함께 한국인 조사들과 권서인들이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복음의 능력, 죄에 대한 깨달음, 중생체험과 성령의 충만함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1904년 3월, 하디 선교사를 강사로 하는 서울 “자골교회”에서 개최된 10일간의 부흥회에서도 “유경상, 김계명, 지수돌”과 같은 교회 지도자들이 앞서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등 성도들이 모두 죄를 자백하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계속되었습니다. “부흥회”는 이제 기존 신자들에게 영적 각성과 함께 성령체험이라는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고,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최적의 복음사역이 되었습니다. 사경회와 함께 “부흥회”는 오직 하나님, 오직 성경, 오직 말씀, 오직 기도, 오직 은혜, 오직 성령, 오직 전도가 충만한 변화의 집회로 정착하며 곳곳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1904년 10월1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서울 “정동감리교회”의 하디 부흥회는 성령의 능력이 지배하는 회개의 도가니였습니다. 설교자, 전도부인, 성경공부반 지도자들, 주일학교 교사들과 이화학당 교사들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생의 체험과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전과 다른 복음중심의 사역을 다짐하였습니다. 10월16일에서 25일까지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개최된 하디 선교사의 “평양부흥회”는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선명하게 드러난 감동의 집회였습니다. 감리교 평양선교사 무즈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감격하였습니다. 11월1일부터 7일까지 개최된 하디의 인천 제물포 집회에서도 성령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회중 100여명의 교인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를 통하여 성령충만에 이르는 기적적 경험을 하였습니다. 함께 참여한 케이블 선교사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며 충격을 받았고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목도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죄를 숨기거나 은폐할수 없었습니다. 성령의 빛은 깊은 곳에 감춰진 죄악을 그대로 비추며 성도들에게 회개의 역사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수년동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존경을 받았던 한 집사는 거짓과 도적질과 간음이라는 충격적인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고백을 듣고 충격을 받았지만 성령의 은혜속에 잠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과 동시에 자신들의 죄도 고백하는 용기가 주어졌습니다. 크든 작든 사람들은 이미 죄를 지었고 모든 사람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와 함께 살아왔던 지난 날을 자백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회개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깨끗하게 보였던 사람들이었고, 청결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고백한 죄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지만 그로 인하여 상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치유가 되는 놀라운 성령체험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905년 2월 마지막 주, 강화 “홍해교회”에서 개최된 “강화 여자사경회”는 “밀러”(L.A. Miller) 선교사가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아침 경건의 시간, 말씀의 은혜를 깨달은 여성도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903년 8월, 하디 선교사로 시작된 놀라운 대각성운동과 원산부흥운동은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개의 자리로 강권하였고, 성령을 통하여 앞을 다투어 죄를 고백하는 용기와 성령을 체험하는 기적의 시간들이 1905년이 되어도 꺼지지 않은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5조약”체결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희망을 전하였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헌신했던 국가 지도자들에게 복음은 분명 돌파구였습니다. 감옥에 투옥중인 애국자들에게 성경과 소책자와 찬송가를 보급하였으며, 이승만, 이원긍, 이상재, 유성준, 김정식, 홍재기, 안국선, 이승인, 신흥우 등 신흥지도자들이 회개하며 조국을 위해 구국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투옥중에 복음을 전하며 “예수교가 대한제국 장래의 유일한 기초”라고 주장하였습니다.(1903년 3월8일 이승만의 옥중전도) 1905년 12월, “무즈” 선교사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였습니다.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기독교가 정치사회적 문제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기대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된 것이었습니다. 1905년이후 원산부흥의 성령불은 개성과 평양과 서울의 경계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원산부흥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고 일관된 것은 개인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와 결단과 간증이었습니다. 개인의 죄에 대한 정의와 고백없는 성장과 발전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러한 역사를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고백과 회개를 중심으로 중생, 성결의 중요한 과정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거짓없는 진실에 대한 고백과 진정어린 반성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전히 죄를 숨기고 감추려고만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성령체험과 같은 놀라운 기적은 생애 단 한번의 기회도 찾아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이 체결된 조선에서 장로교 감리교 연합공회는 1906년 1월 설날을 기점으로 전국 주요도시에서 부흥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무즈, 게일, 벙커, 레이놀즈가 함께하는 “특별신년부흥집회”는 그야말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민족의 빛을 기대하는 염원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집회를 위하여 서울 숭동교회와 정동교회에서 준비기도회가 개최되었고 말씀과 기도로 준비한 집회는 놀라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남산현교회(감리교회)와 장대현교회(장로교회)와 남문밖교회(장로교회)에서 개최된 “평양신년부흥사경회”와 선천읍교회에서 개최된 “선천부흥사경회”는 전국의 지축을 흔들며 18개의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는 영적 확장이 일어났습니다. 개성, 원산, 부산, 대구에서도 신년부흥성회가 개최되었고, 일본의 조선통치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예고하듯 하나님의 선한 빛이 교회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부흥운동과 평양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자였습니다. 1906년,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주권은 사실상 상실되었고 모든 국가권리가 일본제국으로 넘어가버린 상태였습니다. 신뢰 관계라고 생각하였던 미국의 돌발적인 행위에 대하여 배신감을 느낀 한국인들은 반미감정을 표출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분리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교사 자신들의 안위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복음적으로 쌓아 올렸던 조선에서의 기독교가 위축되거나 성령운동의 불씨가 꺼져 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06년 8월26일,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한주간 요한1서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전례없는 역사로 한국을 이끄시는 성령 세례만이 자신들과 한국인 형제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1906년 10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위원인 “하워드 존스톤” 목사와 “웨일즈” 선교사를 주강사로 하는 “선교회 부흥집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길선주 장로를 비롯하여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집회는 한국인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한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과 성령의 역사를 갈급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는 임하고 그가 가진 기대와 소망과 염원은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참석자들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1906년 10월, 남장로교 프레스톤 선교구인 목포에서 저다인(Gerdine, Joseph Lumpkin) 선교사에 의해 일어난 “목포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저다인 선교사는 하디와 함께 원산과 개성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성령충만한 선교사였습니다. 저다인은 조지아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조지아주 엡윗청년회 회장으로 평신도 사역을 하던 중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저다인 스스로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개최한 부흥집회는 그야말로 말씀과 기도와 영적각성과 성령의 단비가 내리는 은혜의 중심이었습니다. 목포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전라남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성령의 바람은 거세게 몰아치며 전라도로 향하였습니다.
1906년 11월, 목포의 부흥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강원도 북부지역에서 “참된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2월12일에서 22일까지 길선주 조사의 인도로 황해도 “재령 남자 도사경회”에서 이재선 장로가 통회하고 김익두 조사와 김원민 조사와 많은 교인들이 성령을 체험하였습니다. 진남포 사경회에서도 성령의 놀라운 임재하심이 나타나 참석자들을 감동과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였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회개와 영적 대각성 운동은 조선 전국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통일하였고, 대기근과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이라는 매우 큰 시련과 고통속에서도 결국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낭떨어지에서 그리스도라는 희망을 만나게된 조선인들은 성령의 강권하심을 통하여 망하는 나라와 민족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원히 멸망치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 보았습니다.
첫댓글 지금 이 시대에도..
영원히 멸망치 않는 하나님나라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