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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마실부녀회장
양간공파/ 군기감사공파/ 퇴촌공파/ 담암공파/
안동은 경북 북부 중앙에 있는 시로 동쪽은 영양군, 청송군, 서쪽은 예천군, 남쪽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 봉화군과 각각 접해 있는 고장으로 옛날 변진(弁辰) 24개국 가운데 기저국, 불사국(不斯國)이 이곳에 있었으며 <연려실기술(燃黎室기記述>등에는 창녕국(昌寧國), 구령국(驅令國), 소라국(召羅國) 등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가 이곳에 고타야군(古陀耶郡)을 두었다가 삼국 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하고, 직령현(直寧縣), 일계현(日谿縣), 고구현(高邱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곳의 호족들인 삼태사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 등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승리에 기여한 공으로 930년(태조 13) 안동부로 승격하였다. 그 뒤 영가군(永嘉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030년(현종 21) 다시 안동부로 개칭되어 3개 속군과 11개의 속현을 관할하였다.
1197년(명종 27) 안동도호부, 1204년(신종 7) 안동대도호부, 1308년 복주목(福州牧)으로 승격을 거듭하다가 1310년(충선왕 2) 복주로 강등되었다. 1356년(공민왕 5) 다시 복주목이 되었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이곳으로 피난해 옴에 따라 1362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일시적으로 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었으나 계속 <부>를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에 따라 안동부, 안동군, 1896년 경상북도 안동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예안군(禮安郡)이 폐지되고 몇 개의 면이 안동군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확대되었다. 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안동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63년 안동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안동시와 안동군이 분리되었다가 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안동군이 안동시에 통합되었으며, 98년 행정동이 통합되었다. 관할은 현재 1읍 13면 10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담암공이 정착한 풍천면 구담리는 서쪽에 위치하며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에 접해있다.
안동은 동쪽의 태백산맥, 북서쪽의 노령산맥이 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저산성 구릉지로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있다. 시 경계를 따라 보문산(643m) 학가산(870m), 불로봉(482m), 연점산(871m), 산지봉(890m), 황악산(782m), 등이 솟아 있다.
낙동강이 시 중앙부를 남류하여 안동호를 이룬 뒤 지류와 합쳐져서 서부로 흐르며, 강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풍산평야는 이 지역 최대의 농경지이다. 호수로는 안동호를 비롯하여 풍천면 도양리에 수리시설이 1970년도에 설치되어 안동시 풍천면, 풍산읍은 물론 예천군, 지보면, 호평면에 까지 관개(灌漑)되고 있고, 여기에 만운지(晩雲池), 여자지(女子池), 등이 있어 관개용수 및 생활용수를 공급해 주고 있으며, 안동댐과 임하댐이 있어 수자원이 풍부한 편이다. 산림대는 활엽수림계에 속하나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 및 참나무 등의 혼효림을 이룬다.
농경지는 풍산, 풍천 논이 80%, 밭이 20%로 수리안전지 논이 더 많다. 풍산평야 일대에서 쌀이 많이 생산되며 조, 수수, 메밀 등의 잡곡과 파, 감자, 토마토, 무, 배추 등의 채소 재배가 활발하다. 안동포의 원료인 대마도 많이 재배되며, 한우, 돼지, 닭 등의 가축사육과 양잠, 양봉도 성하다.
광업은 2001년 현재 12개 광구에서 석회석, 장석, 사문석 등이 채굴되고 있다. 공업은 전체적으로 생산시설 기반이 취약하여 거의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2001년 현재 3개의 농공단지에 33개 업체가 입주하여 있으며, 음식료, 섬유, 제지 등의 업종이 주를 이룬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시의 중앙을 통과하며 의성~영주를 잇는 국도가 중앙선을 따라서 중앙을 지난다.
안동시를 중심으로 영천, 예천, 영주, 청송, 봉화 방면의 국도가 연결되어 경북 중북부지역의 교통중심지를 이룬다. 안동호에서는 호운(湖運)도 다소 이루어진다.
안동은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을 비롯한 명현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안동향교, 예안향교, 도산서원, 병산서원, 역동서원, 호계서원, 고산서원 등 향교와 서원이 발달하였다. 매년 안동국제탈춤 페스티발과 안동민속제 등의 종합축제가 열린다. 전승되는 민속놀이로는 별신굿놀이, 풋굿, 화전놀이, 놋다리밟기 등이 있고 한국정신문화의 수부의 역활로 각광을 받는다.
이곳은 예로부터 유림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으로 퇴계 이황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도산서원, 서애 류성룡을 배향하는 병산서원, 우탁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역동 우탁(易東 禹倬) 서원 등 많은 서원, 향교가 있어 이러한 전통을 말해준다.
풍천면의 하회(河回)는 민속의 보고로 일컫어지며, 양진당(養眞堂), 충효당(忠孝堂), 북촌댁(北村宅) 등 보물로 지정된 건물을 제외하고도 300~500년 된 고택들과 마을구조 등이 조선시대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물.유적도 매우 많이 보존되어 있으며 국가지정문화재가 70점, 도지정문화재 121점, 문화재자료가 42점(2001년)이 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와룡면 가구리의 선돌, 남후면 하아리의 민무늬토기 등이 있으며, 삼국시대 고분으로 신안동고분군, 옥동고분군이 있다.
중요유물로는 하회탈 9개가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기록을 담은 <징비록/국보 132>과 <운천호종일기/보물 484>, 오천 군자리 문화단지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길안면 송사리의 소태나무(174), 길안면 용계리의 은행나무(175), 남후면 광음리의 측백나무자생지(252) 등이 있다. 이 밖에 하회마을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승지로는 풍천면 광덕리의 부용대, 백운정, 임하면의 경포대(景浦臺) 등이 유명하며, 1976년 안동다목적댐이 준공됨에 따라 안동호와 함께 관광자원이 개발, 정비되어 관광도시로서 활기를 띠고 있다.
구담에 정착한 입향조 담암 용석(潭庵 用石)은 퇴촌공의 증손으로 강화도호부사를 지낸 아버지 수(洙)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4남 중 넷째 아들로 단종 계유(1453년)에 한성 동문 밖 세제(世第)에서 태어나 점필재 김종직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 임진(1472년)에 진사과에 합격한 후 당시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장안십철(長安十哲)의 수좌(首座)로서 명성을 떨쳤으나 성종 연간의 어지러운 혼정이 장차 심화될 것을 예감하고 안동 구담으로 낙남하였다.
구담의 유래
구담은 안동 서남방 32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마을 앞에는 낙동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광산김씨(담암공파)와 순천김씨(국담공파)를 주축으로 하여 평산신씨(영벽공파), 진주류씨 일파 등 400여 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다. 구담에는 담암 김선생 유허비(숭정기원후 3 경진 7월 1760년 7월 세움)와 국담 김선생 신도비(1968년도 세움) 영벽 신선생 남하유허비(1982년도 세움)가 그 옛날을 일러주고 있으며,
동으로는 안동시 풍산읍 풍천면 가곡, 하회리, 서쪽으로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암천리, 신풍리, 남으로는 강 건너 평야에는 풍천면 기산, 신성, 구호리, 의성군 신평면 청운, 창농, 쌍로리, 북으로는 예천군호명면 금릉, 산합, 송곡리로 한 달 여섯번 장날(4.9)로 400여년의 전통 장날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구담은 이곳 교통의 중심지로 1978년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340미터의 새마을 대교가 가설되어 교통이 편리해졌으며 날로 경제권의 요충지로 발전하고 있다. 조선조 때는 낙동강 하구인 부산에서 이곳까지 소금배가 오르내려 물물교환이 원활하였다.
영가지에 이르기를 ...
풍산현에서 30리 거리이고, 큰 들판이 그 남쪽에 펼쳐져 낙동강물이 마을 앞을 지나고 화산고개 왼편 백산이 빼어난 그 오른쪽에 자리하다. 마을 앞 위 아래로 물이 흐르는 이 곳을 구담이라 일컬었다.
상주목사 권집경이 산천의 아룸다움을 사랑하여 터 잡아 살았으며 사람이 많고 큰 집들이 첩첩하여 강물에 비치었고, 명절 길일마다 사방에서 노래 부르는 소리로 이곳을 적은 서울이라 애칭했다.
절부 안처인의 처 김씨가 살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패배하는 왜적들이 이 동리에 몰려들었으나 동리 젊은 장사들이 서로 단결하여 밤마다 그들을 엿보면서 많이 죽였던 곳으로 왜적들은 분풀이로 사납게 분탕질을 거듭한 끝에 결국 죽거나 패퇴하였다.
구담은 오곡과 목화, 사과가 많이 나는 곳이다. 또한, 숭정원년 후 재임인 1772년 광산김씨 서악종회록에 황강(黃岡)선생 현손 김진옥이 안동부사 재임 시 끽첩(喫帖)에 구담 거주 종인들은 거주지명을 모두 구담(龜潭)으로 표기한 것을 미루어 볼 때 한 때는 한 때는 구담(龜潭)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선생이 구복음룡수 기생만년상(龜伏飮龍水 其生萬年像)이라고 구담을 예찬한 시가 전해오고 있다.
구담은 부인 순천김씨의 고향이며 구담에서 멀지 않은 가일(佳日)은 외가 곳이다. 안동권씨 복야공 후 화산군 권주(花山君 權柱)는 내외종간으로 외가와 처가로 연유해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이 공을 파조로 삼고 아호를 파명으로 하여 담암공파라 칭하며 세계를 잇게 되었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로 이어지고 있다.
담암공의 맏형 여석(礪石)은 충목공파조요, 둘째형 이석(以石)은 정랑공파조로 4형제 중 막내 3형제가 파를 형성하였다.
도봉공파조 득렴(得렴)은 담암공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참봉 황(篁)이다. 공은 장사랑을 지낸 아버지 언련(彦璉)과 어머니 풍천임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나 종숙(從叔) 유일재(惟一齋)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조 임오(1582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란에는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고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안동 풍천면 구담에서 세를 이어 후손들이 공의 아호 도봉(道峰)을 파명으로 하여 도봉공파를 형성하고 공을 파조(派祖)로 삼았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 - 도봉공파(得렴)로 이어지고 있다.
유적으로는 구담 낙동강 연안에 담암공 유허비각과 재사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담암공 종택 중락당(中洛堂)은 헌종 병신(1836년)에 중락당 도종(道宗)이 종가 터 전면에 건립한 청사로 그 규모는 내외 청사 33간의 우람한 건물이었다.
담암공이 터전을 마련한 때로부터 수백 년 뒤에 춘양목(春陽木)으로 개축할 당시 모든 공사는 재종질 행원(行源)이 맡아 하였다는 기록이 도종의 중락당 기문(記文)에 자세하게 나타나 있는데 이 건물은 화려하고 장엄하리만큼 웅대하여 문화재로 높이 평가되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타인의 소유가 되어 보전하지 못한 한을 남겼다.
담암공이 낙남한 사적을 담은 유허비각은 삼사와 광현(三思窩 光鉉)의 수창(首唱)으로 건립하였으며 담암공 종택 중락당, 둔정사(遯靖祠)와 섬계 영윤(剡溪 永胤), 동주 영국(東洲 永國) 형제의 소구(所構) 체락당(체洛堂)과 제각, 기타 선대 유적이 지켜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담암공 이하 누대 묘역은 정화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도봉공의 후손 중 송담 연(松潭 演), 침강 탁(枕江 鐸), 성암 영진(省巖 永晋), 삼락당 영하(三樂堂 永廈)는 학행으로, 낙암 수락(洛庵 壽洛), 삼우재 윤(三友齋 鈗)은 성리학에 뛰어난 유현으로, 중락당 도종(中洛堂 道宗)은 후덕한 성품으로 중망되엇다.
취헌 도협(翠軒 道協)은 경전에 해박하였고, 후재 도항(後齋 道恒), 창암 도준(蒼巖 道峻)은 행의로 중망되었으며, 무월당 도장(撫月堂 道章), 청전 창수(聽田 昌洙), 낙애 황수(洛厓 璜洙), 동림정 수영(東林亭 洙瑩), 도계 철수(道溪 哲洙)는 문장과 학행으로, 산수정 기영(山水亭 箕榮)은 문학으로 명세하였다.
모석 대현(慕石 大鉉)은 행의가 준엄하였고, 헌주(憲周)는 재예가 뛰어나고 예설에 해박하였으며, 훈모 영직(薰慕 永直)은 문학과 행의로, 동주 영국(東洲 永國)은 청수한 인품으로, 섬계 영윤(剡溪 永胤)은 경전과 예학에 뛰어났고, 기음 조수(箕陰 祖洙)는 엄의 강직하였다.
아주 진수(亞洲 晋洙)는 효행으로, 성균진사 경수(敬洙), 죽원 기수(竹園 琦洙)는 유현으로 명성을 떨치고 문호를 빛낸 인물이다.
세를 이어 담암공의 맏아들 참봉 황(篁)의 현손 옥음(玉音)은 아버지 인(인)과 어머니 연일정씨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아들로 선조 정유(1597년)에 태어나 누대를 이어 살아온 구담을 떠나 동해안의 영덕군 남정면 도천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여 그 곳 입향조가 되었고 후손들이 남정면 등지에 살고있다.
참봉공의 현손 옥구(玉九)는 아버지 함(함)과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선조 기유(1609년)에 태어나 구담에서 충청도 청원군 강내면으로 옮겨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며, 풍광이 수려한 이 곳의 지명을 연고로 하여 스스로 당곡이라 자호 하였는데 후손들이 아호를 파명으로 하여 공을 파조로 받들고 당곡공파(唐谷公派)라 칭하며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분파 세계는 퇴촌공파(閱:20世) - 직장공파(達孫:21世) - 담암공파(用石:23世) - 당곡공파(玉九)로 이어지고 있다.
공의 덕화가 후대에 크게 미쳐 문호가 번창하고 자손 가운데 많은 인재가 배출 되었으며, 후손 옥현(玉鉉), 성당 우현(誠堂 禹鉉), 창포 영학(蒼浦 永學), 영진(永振), 영년(永年), 영건(永建) 등이 정관계(政官界)와 경제계에서 가문을 빛낸 명사로 꼽힌다.
2005년 현재 후손 약 400여 세대 근, 1,200여 인이 구담, 의성, 예천, 상주, 경남 진주, 영덕, 청원, 충북 괴산 등지에 산재하였고, 세속의 변천에 따라 서울,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등 경남북 일원으로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다.
23세 용석(用石 1453~1521) 담암공파조
공의 휘는 용석(用石) 자는 연숙(鍊叔) 호는 담암(潭庵)이며,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행강화도호부사 수(贈吏曹判書 行江華都護府使)요, 어머니는 정부인 안동권씨 집의 항(貞夫人 安東權氏 執義 恒)의 따님이다. 공은 4남 중 셋째 아들로 단종 계유(1453년)에 한성(漢城) 동문 밖 세제에서 태어났다.
성종 임진(1472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점필재 김종직(점畢齋 金宗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조(成宗朝)에 가솔을 이끌고 부인의 고향인 안동 구담으로 은거하였다.
공의 성품이 청명간직(淸明簡直)하고 올바른 일에는 흔들림이 없으니 모두가 추증하였다. 성균관에 있을 때 월삭(月朔 = 1일, 15일)에 소학(小學)을 회강하여 주문공(朱文公)의 고사향약(故事鄕約)을 모방하였는데 이 때 선임된 이가 당시의 명사로 담암 용석(用石)과 차소 신종호(次韶 申從濩) 문숙 박연(文叔 朴演), 무첨 손효조(無첨 孫孝祖), 효곤 정경조(孝昆 鄭敬祖), 지경 권주(支卿 權株), 가회 정석형(嘉會 丁碩亨), 자온 강백진(子온 康伯珍), 자주 김윤제(子舟 金允濟), 공직 강응정(公直 姜應貞)은 모두 가장 우수한 분이라고 하였고, 세상에서 시기하는 이 들이 말하되,
이분들을 소학효자(小學孝子)의 계원들이 아닌가, 공부자(孔夫子)의 사성십철(四聖十哲)이 있는 것 같다고 야유하고 모함하였다. 이 사실이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의 사우록(師友錄)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학술이 순정하고 지려가 깊고 천문과 세시를 예지하여 은둔하니 연산 무오 갑자 양대 사화에 동문제현들은 화를 입었으나 홀로 신명과 자손들을 보존하였으니 지기함이 신과 같다 하였다.
공에 관한 일화 하나가 전해지고 있는데 공이 내종제 참판 권주(權柱)에게 가산의 분재를 요구하여 이르되 내가 이 곳에 객거하여 외가전업을 입어 고과(孤寡)가 의탁할 곳이 없자 공이 전일에 분재한 문권을 되돌려 외가 재산을 보존케 하니 지감(知感)의 명철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서안에 교류한 문적과 서간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 임종하니 문헌이 전해진 바 없고 아들과 조카에게 교시하되, 시례고가의 후예로 소과(小科) 진사시에는 응시하되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니 이는 당로한 위정자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벼슬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공의 고귀하고 청간한 인품을 많은 후인들이 흠모하였고 구세손 삼사와 광현(三思窩 光鉉)이 유적이 멸몰함을 두렵게 여겨 제종(諸宗)과 협모하여 구담 낙안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유허비명을 세마 눌은 이광정(訥隱 李光庭)이 찬하여 비를 세워 오늘에 보존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 한산 이상정(韓山 李象靖)이 비각기(碑閣記)를 지었고 묘갈명은 문학박사 진성 이가원(眞城 李家源)이 지었다
부인은 의인 순천김씨 익찬 형석(翊贊 亨石)의 따님이며 8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황(篁), 균(筠), 시(시), 주(籌), 관(管), 범(範), 지(지), 공(공)이요, 딸들은 김숙종(金淑宗) 무과에 급제한 진주 류원창(晋州 柳元昌)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중종 계미(1521년) 4월 16일 졸하니 묘는 구담 관동 축좌 쌍분이며 묘비가 있다. 실기(實記)가 있고 둔정사(遯靖祠)와 용계서원(龍溪書院)에 향사(享祀)하였는데 서원 훼철로 폐하였다.
[편집자 주]
공이 안동 구담으로 내려간 시기는 연산조(燕山朝)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 이전인 성종조(成宗朝)에 이미 낙남한 것으로 보인다. 구와 김굉(龜窩 金굉)이 쓴 담암공 실기 서문과 첨추 이광정(僉樞 李光庭)이 쓴 유허비명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쓴 비각기 용산세고 등 여러 문헌에 교동초(喬桐初=燕山朝)에 견기남하(見幾南下) "교동초설가 내은우구담 부인김씨지향"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성종 3년(1472년)에 편찬한 사마방목(司馬傍目)에 공의 거주지가 안동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공이 안동에 거주하면서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며 이후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처가와 외가가 있는 안동으로 낙남한 것으로 보인다.
구담에 대대로 전해져오는 구전설화(공의 백씨 충목공 여석(忠穆公 礪石)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 구담으로 아우를 찾아가 형제가 상봉하였다는 설화)를 사실로 미루어 보면 공의 낙남 시기는 연산조가 아니라 성종조였음이 더욱 분명해진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충목공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한 때는 성종 20년(1490년)이기 때문이다.
공이 타계한 해를 문헌(해동명신록, 추강사우록)에는 중종 계미(1523년), 담암공 종가 소장 30世 만우(萬宇)까지 수록된 가첩에는 신사(1521년) 졸, 향년 69세로 기록되어 졸년에 2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첩을 근거로 졸년을 1521년으로 기록함.
자료제공 : 부산종친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