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된 김용준 전 대법관(인수위원장)이 지명된 지 5일만에 전격 사퇴한 데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와 과도한 부동산 소유를 둘러싼 세간의 의혹(혹은 비난)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2월 1일 뒤늦은 해명자료를 통해 둘 다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를 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우선 하나도 아닌 두 아들이 모두 병역면제를 받은 것은 아주 드문 케이스라는 것. 최근 모 종편 방송사에서 출근하는 그의 장남의 만나본 결과 키가 170cm 정도이며, 체격도 보통 이상이라고 했다. 그 정도 키와 체격에 44kg이 나와 체중미달로 면제받았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차남이 '통풍'으로 면제를 받은 것을 두고도 의혹이 제기됐다.
또 하나는 부동산, 즉 ‘땅’이다. 이유야 뭐였든 간에 판사 시절 데리고 있던 법원 직원과 함께 땅을 보러 다녔고, 70년대 중반 7~8세의 두 아들 명의로 20억원대의 땅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본다. 특히 두 아들 명의의 서울 서초동 땅은 증여세도 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는 억울하다며 언론 탓을 했다.
그의 해명에 따르면, 그의 모친은 포목상을 해서 돈을 제법 모았고 게다가 그는 사회생활을 판사로 시작했으니 공직자 가운데는 고액 연봉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굳이 전국 곳곳에 땅을 사서 모았어야 했을까? 배우자가 취득한 마천동 토지는 채권을 변제받지 못해 대물변제 받은 것이라고 하나 대부분은 그 자신이 ‘투자’ 목적에서 구입한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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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땅부자였던 공주갑부 김갑순 |
‘땅부자’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으로 ‘공주갑부 김갑순’을 들 수 있다. 그는 당대에 발복(發福)해 당대에 막을 내린 케이스로, 그는 대전이 개발된다는 정보를 사전에 빼내 집중투자 하여 당대 최고의 땅부자가 되었다. <일제하 대지주 명부>에 따르면, 1930년말 그가 공주, 대전지역에 소유한 땅은 1천11만여 평으로, 당시 대전 전체토지의 40%가 그의 소유였다.
김갑순 만한 땅부자는 아니지만 ‘땅’ 얘기가 나올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박정희와 만주군관학교 동창생인 A씨, 또 한 사람은 서울지역 모 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한 B교수가 그 사람이다. 굳이 따지자면 A씨는 땅으로 생계를 유지한 사람이며, B교수는 ‘악의없는 투자자’ 정도로 여길 수 있겠다.
우선 A씨 얘기부터.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박정희처럼 만주군(일본군)에 근무하다가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다시 한국군에 들어갔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를 일으켰을 당시 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만군 시절의 인연으로 그는 ‘범쿠데타 세력’으로 불렸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김종필 등 박정희 친위세력이 주도한 ‘반혁명사건’ 회오리 속에서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출세는커녕 오히려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야인으로 지냈다. 지난 90년대 후반 나는 박정희를 취재하면서 그의 만주군관학교 선후배들을 여럿 만났다. 그런 과정에서 A씨를 두어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어느 날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다가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내게 들려준 적이 있다.
A씨는 자신을 도와준 ‘은인’은 60년대 후반 건설부에서 고관을 지낸 모 인사라고 밝혔다. 당시 강남개발이 서서히 꿈틀대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A씨는 별 직장도 없이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마침 이 고관과 인연이 있어 가까이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고관이 A씨를 불러 머잖아 강남 일대가 개발될 테니 그곳에 땅을 좀 사놓으라고 했다는 것. 그 고관으로서는 형편이 어려운 A씨를 배려한 것이지만 사실상 특혜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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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강남 개발 초기의 강남 압구정동 전경. 아파트 단지를 뒤로 한 채 소 몰고 논 가는 농부의 모습이 이채롭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60년대 중반 들어 산업화가 가속화에 따라 서울로 유입되는 인구가 폭증하자 박정희 정권은 60년대 후반 한강에 제방을 만들면서 강남개발에 시동을 걸었다. 70년대 초부터 한강 주변 압구정ㆍ반포ㆍ잠실ㆍ이촌동을 매립해 아파트를 짓고 황무지였던 여의도와 잠실도 개발에 나섰다. 과거 서울은 4대문을 벗어나면 대부분 논밭이었고, 나룻배로 건너던 강남은 경기도 광주의 시골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1969년 12월 한남대교 개통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영동구획지구 정리 등으로 강남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투기장으로 변했다. 한 예로 말죽거리(양재동) 일대 땅값은 66년 한남대교 착공시 3.3㎡당 200원~400원선이던 것이 71년경에는 1만4,000원~1만6,000원에 달했다. 여기에 강북의 명문고들이 대거 이전하고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 강남은 신천지로 변모해 갔다.
처음 A씨가 땅을 산 곳은 현 강남대로의 초입인 신사동 네거리와 논현동 언덕받이 인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그곳이 개발돼 땅값이 오르자 이를 팔아 절반은 생활비로 쓰고 절반은 한 블록 더 나가서 또 땅을 샀다. 즉, 지금의 신논현역 네거리나 강남역 일대에 기존의 규모 크기의 땅을 샀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생활비가 떨어지고 또 땅값이 오르면 그 땅을 팔아 절반은 생활비로 남겨두고 절반은 양재역 네거리에 또 땅을 사는 식이었다.
A씨의 경우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그야말로 땅짚고 헤엄치기식으로 ‘땅’의 덕을 보며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땅을 팔아 일가족의 생계를 유지한 정도였을 뿐 강남 일대에 조직적인 투기로 큰 돈을 번 ‘땅투기꾼’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그렇게 지내온 자신의 삶이 그리 떳떳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별다른 직업이 없었던 그로서는 그게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던 셈이다.
다음은 B교수 얘기인데 이 얘기는 그의 제자한테 들은 것이다. 60년대 중반부터 교수생활을 시작한 B교수는 학식과 인품으로 호평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좀 ‘별다른 취미’가 하나 있었다. 당시만 해도 관광이 그리 대중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음에도 그는 주말이면 더러 버스를 타고 교외 구경을 자주 나가곤 했다. 그런데 그의 교외행은 단순히 관광만이 아니라 또다른 목적도 있었으니 그건 바로 ‘땅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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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한 대가 비포장 시골길을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있다 | 그는 주말이면 혼자 간편 복장을 하고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가 무작정 아무 버스에나 올라탔다. 그리고는 한참을 가다가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역에 다다르면 무작정 내렸다. 그리고는 그 주변일대의 땅을 살핀 후 적절한 곳이 있으면 자금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땅을 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몇 달치 봉급을 모아 그걸로 몇 달에 한 번씩 서울 인근에 땅을 사모은 셈이다.
그러다가 얼마 뒤 자신이 땅을 사둔 곳엘 가보았더니 비포장도로가 포장이 돼 있었다. 60, 70년대만 해도 시골에는 비포장도로가 많았으며 재정자립도가 취약한 지자체들은 해마다 예산을 타서 도로포장을 확대해 가곤 했다. 그런데 시골에 포장도로가 생긴다는 것은 그곳 나름의 도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곳 땅값이 오른다는 얘기가 된다.
B교수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갖고 있던 땅을 처분하였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다시 살 땅을 물색하였는데 방식은 이전과 같았다. 땅을 판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나가다가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내려 다시 땅을 물색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수도권 곳곳에 엄청난 규모의 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대학의 교수사회에서 ‘땅부자’로도 소문났었는데 땅투기꾼 치고는 순진한 편이라고 하겠다.
B교수는 과거 진보정권 때 정계진출 기회도 없지 않았으나 땅 과다소유 문제로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3~4년 전에 들은 바로 B교수의 재산이 150억대라고 들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기 돈으로 땅 사는 것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문제는 세금 등 행정절차를 제대로 거쳤느냐 하는 점인데 고위 공직자의 경우 이것만이 끝이 아니다. 상식을 벗어난 정도의 과도한 땅 소유는 공직자의 품위 차원에서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