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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공부하면서 참고자료로 쓸려고 작업한 것입니다. 나중에 소설쓰실 때 관직이나 그런것 참고해서 적으시면 됩니다. 참고로 대학교에서 배운 "군사제도론"시간의 한국군사제도 발전때 배운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부하이던 왕건이 4명의 장군들이 중심이 된(4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신숭겸 )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울랐다. 이것이 서기 918년의 일이었다. 그 이후 18년간 후백제의 견훤왕과 대립하면서 많은 간난신고를 극복하고 936년 외세에 의하지 않은 통일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과 통일 이후 거란의 요나라와 몽고와 대립과 항쟁을 거치면서 나라를 지켜왔으나 결국 말기에 이르러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관세력들에게 왕조가 바뀌게 되었다. 이것이 500년 가까운 세울의 고려사를 간단하게 줄일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이제 고려의 군사제도를 살펴보면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중앙군의 체제를 살펴보겠다.
고려는 지방호족들의 연합으로 세워진 국가이다. 이는 왕건이 지금의 개성지방의 해상을 기반으로 한 호족세력이었음에 기인한다.
그의 수많은 부인들도 호족세력의 딸들이었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후삼국 통일이후 거란족인 요나라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체계적으로 개편해 나간것이었다.
이것이 편성된 시기는 고려조 성종 14년, 즉 서기 995년이었다.
고려시대의 초창기에 지방호족들의 사병은 중앙을 위협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결국 사병을 해체시키면서 중앙군이 강해 질 수 있었고
병권이 중앙에 집중되면서 왕권은 많이 강해질 수 있었다.
당나라의 부병제를 모델로 해서 농민층을 선군대상으로 중앙군을 편성하고, 교대로 중앙에 번상(番上: 즉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번갈아서 온다는 것)하여서 근무케 했다.
잠깐 부병제를 살펴보면, 부병제(府兵制)는 중국의 당나라 시절에 완성된 농병일치의 군사제도이다. 이른바 삼경일무제(三耕一武制)로서,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과 지방에 위(衛)와 절충부를 두어서 장정에게 땅을 주고 땅을 받은 장정 가운데서 건강한 자를 위사(衛士. 병부)로 삼은 것인데 복무기간은 무려 30년이었다. 위사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조용조가 면제되는 대신 교대로 장안에 가서 숙위(宿衛)를 해야했다. 숙위는 궁궐내에서 생활하는 개념이다. 그러다가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위사들은 소집에 의해서 갑옷, 무기, 군복, 식량을 스스로 마련하여 출정했고, 전쟁이 종결되면 귀향해서 농사를 지었다. 즉 지금은 군수제도가 확립되고 보급체계가 정비되어 있어서 입대하면 보급이
자동으로 나오지만 이 때는 군수품을 자비로 사야 했다는 것이다.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를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겠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국왕의 친위부대였다. 6위는 각각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롤 구성이 되었다.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의 3개의 위는 주력전투부대의 임무를, 금오위는 경찰부대의 역할을, 천우위는 지금의 의장대의 역할을, 감문위는 수문부대의 역할을 담당했는데 종합하여 보면 국경의 경비와 도성, 궁문의 경비와 치안을 이들 6위가 담당햇던 것이다. 이들의 총병력은 45,000명 정도로 간부급이 3,000명, 병사들이 42,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세부적인 지휘체계를 살펴보면 최상위에 정3품인 상장군이 각 군단(2군 6위)의 사령관을 역임하고, 차상위인 종 3품의 대장군이 각 군단의 부사령관을 맡고, 정4품인 장군이 각 군단 밑에 있던 영의 지휘관을 밑었다.
1개영의 병력은 1,000여명으로서 42개영, 총합 42,000여명이 있었다.
다시 영의 세부 지휘체계를 살펴보면 정4품인 장군의 밑에 정 5품인 중랑장이 부지휘관을 맡았고, 그 밑으로는 정 6품의 낭장이 200여명을 지휘, 더 밑에는 정 7품인 별장이 부지휘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말단에는 정 9품인 산원이 40명, 위가 10여명을 지휘했고, 대정인 병사는 종 9품이었다.
각 조직의 세부를 살펴보면 응양군의 왕의 친위군으로 공학군으로도 불리어졌다. 상장군이 최고의 지휘관을 맡았으며, 대장군이 부지휘관을 맡았다. 고려의 최상위의 부대였으나 규모는 작아서 1령 1,000명으로 조직되었다. 그 밑에는 1명의 장군, 2명의 중랑장, 2명의 낭장, 2명의 별장, 3명의 산원, 20명의 위, 40명의 대정이 배속되었다.
용호군은 다른말로 견룡군이라고 불리었고, 중앙군의 핵심이었다. 고려의 현종때 설치되었고, 2령 2,000명으로 조직되었다. 상장군이 지휘관으로서 대장군이 부지휘관을 맡게 되었다. 장군이 령을 지휘했고 중랑장2명이 장군을 보좌했다. 200여명의 단위로 낭장 5명의 지휘, 부지휘관 5명의 별장이 지휘했다.
산원5, 위20, 대정 40명으로(대정: 병사 1000명) 정리하면 장군은 1,000여명, 낭장은 200여명, 산원은 40여명, 위는 10여명을 지휘했던 것이다. 우리가 2003년도에 방영되었던 무인시대에서 서인석씨가 열연했던 이의방이 견룡군 행수였던 것을 알 수있는데 행수는 다른 관직이나 계급개념보다는 우두머리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 것이다.
이제 6위의 세부내용을 살펴보겠다.
좌우위는 보승(보병)이 10령, 정용(기병)이 3령으로 도합 13,000명이었다. 신호위는 보승이 5령, 정용이 2령으로 도합 7,000명이었다.
흥위위는 보승이 7령, 정용이 5령으로 도합 12,000명이었다. 이들 3개의 위는 32령으로 구성된 중앙군의 주력으로서 개경과 국경에 대한 수비를 담당하였다.
금오위는 정용이 6령, 역령(죄수들의 복역을 감독)이 1령으로써 주로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의 역할을 수행했다.
천문위는 상령 1령, 해령 1령으로 구성되었는데 상령은 지금말로 하면 육군의장대, 해령은 해군의장대로 보면 이해가 쉬울것이다.
감문위는 감문령 1령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도성의 출입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병력의 충원은 보성과 정용은 번상군(농민)이, 기타는 상비군(직업군인)으로 충원되었다.
중앙군의 합좌기관은 군단급의 합좌기관인 중방이 있었는데 여기는 2군 6위의 정,부지휘관인 대장군과 상장군이 모여서 군사전략과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의장은 2군중 응양군의 상장군이 맡았고 정원은 18명이었다. 이 좀더 밑으로 작은 부대들인 영급이하의 합좌기관은 각각 장군방, 낭장방, 산원방, 교위방이 있었다.
그러면 이들 고려 중앙군의 신분과 처우는 어떠했던 것일까?
신분적으로 이들은 농민보다 높은 신분으로서 흔히 부병이라고도 불리웠다. 상비군은 군역의 의무를 세습하는 군반 씨족 출신 전문 직업군인이 복무를 수행하였다. 처우는 군인전이 지급되고 두 사람의 양호에게 경작을 위임해서 생활했다. 하지만 이미 고려 중엽부터 팽배한 숭문천무사상으로 인하여서 무신들에게 형편없는 대우와 문신들의 멸시가 지속되었고는 이는 1170년의 무신정변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중앙군의 정치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태조 왕건의 호족에 대한 견제책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조의 많은 혼인과 강대한 호족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중앙군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고,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무력 세력의 적절한 이용이 합쳐쳐서 중앙군이 탄생했던 것이다.
고려조의 중앙군은 왕조의 정치적 이념과 국방의 이념을 함께 충족시켜주었던 제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지방군을 살펴보겠다. 먼저 고려의 지방은 5도와 양계로 구성되었다. 5도는 전라, 경상, 서해, 교주, 양광도로써 안찰사가, 양계는 북계와 동계로서 병마사가 있었다. 안찰사와 병마사의 관계는 서로 병렬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병마사의 지위가 좀 더 상위의 지위였다.
특히 양계는 북방의 이민족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탓에 군사적 성격이 매우 컸다. 고려의 지방군은 5도의 각주, 현의 치안유지와 외적 방지가 주임무은 주현군과 양계에 주둔한 경비군인 주진군이 있었다.
먼저 주현군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혜종의 석연찮은 죽음과 패서계 호족들의 불만등 여러가지 이유로 왕규의 난이 벌어지고 왕건의 종제이면서 패서계의 대표격이었던 왕식렴이 이 난을 제압하고 혜종의 동생은 왕요를 왕으로 세웠다. 이가 정종이다. 정종 2년에 거란의 침입이 감지되자 광군을 편성했다. 광군은 호족들이 지배하고 있는 군사력(사병)을 중앙정권의 통제속으로 흡수하는 과정속에서 생겨난 군사조직인데 이는 상비군이 아니라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농민들도 구성되었다. 이들을 직접 지휘하는 것은 지방호족들이었으나 이들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곳은 중앙에 설치되어 있던 광군사였다. 즉 중앙정부와 호족의 공동지배에 놓인 형태의 군사조직이었다.
이것이 좀더 발전해서 주현군이 되는데 주현군은 보승과 정용, 일품군으로 구성되었다. 보승과 정용은 주현군의 핵심으로 치안유지를 담당했으며, 일품군은 일종의 노역을 담당하는 부대였다. 주현군은 군인전이 지급되지 않는 까닭에 자기 토지를 경작하여서 지방의 방위와 노역에 동원되었다. 정종은 광군은 30만으로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당시의 고려의 조정이나 내정의 상황에서 30만 병력을 보유하는것도 말이 안되는 것이고 이 병력을 유지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양계에 주둔한고 있는 주진군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주진군의 편성은 상비부대인 초군(중군), 좌군, 우군과 북계의 보창, 동계의 영새군(보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대의 종류에는 정용(기병), 마대, 노대, 신기, 보반, 해군, 공장, 일품등으로서 나누어졌다.
이들 군대의 구성성분은 대개 양반, 한인, 백정(白丁), 잡종, 투화인등으로 구성되었다.
신기, 백반, 보정은 상비군이 아니라 예비군으로 다양한 사회적 신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신기는 유마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양반출신들이 많았다. 백정대는 약 2,895대 70960명이었다. 특수한 양상의 부대는 서경에 해군이, 공장은 군수조달을, 전장은 수공업을, 여진족의 귀화인으로 구성된 투화가 그것이었다.
양계 주진군의 기간부대 52,341명, 북계의 신기, 보방, 백정대, 그리고 동계의 신기, 보반, 백정대의 3개의 합으로 도합 142,372명이었다.
주진군의 지휘구조는 각 주진군에는 최고지휘관인 제령이 있었는데 이는 특정한 관직이나 계급이 아니라 중랑장이 다수인 경우에 이들 중랑중 중 1명이 제령 중랑장에 임명되는 것이었다. 그 위계는 중랑장, 낭장, 별장, 교위, 대정의 순서였다. 주진군의 지휘관들은 진장(진)은 무관으로서 상비군인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및 영세군의 지휘관인 동시에 민정에 대한 책임을 졌다.
방어사(주)는 문관으로서 주의 군사 총지휘권이 부여되었다.
병마사는 양계지역에 행정관과 군사지휘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정 3품의 벼슬로서 고려말에는 주요 북방 경계지역에도 임명되었다. 한 예를 들자면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잠룡때 받은 벼슬이 동북면 병마사였다.
이들 주진군의 전술은 '견벽고수'였다. 견벽고수는 외적이 쳐들어오면 성안에 들어가 싸우는 것이다. 적이 깊숙히 쳐들어 오더라도 후방보급선이 차단될 가능성이 커서 성급히 들어오지 못하는데 때때로 성밖에 나가서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또 '수'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전방초소(GOP)와 같은 성격이다.이는 적군의 동태를 감지하고, 정보를 본진에 통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주진군의 구성은 경군에서 파견된 방수군과 남도지방으로부터의 주진입거군인 및 투화여진인과 사민정책에 의거하여 정착한 토착민으로 구성되었다. 진성내에 거주민은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영새군 등 상비부대 조직이었다. 진성외에 거주민은 상비군으로써 백정대를 조직하고 성내에서 전투를 했다. 상비부대라 하더라도 전정과 같은 토지를 경작하는 이유로 주진군은 둔전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시대의 해군을 살펴보면 건국 초기 6위 중 천우위의 밑에 해령을 두고 해군 1대를 만들었다. 해군관련 중앙부서는 사수시에서 관리하였다. 고려말에는 포왜사, 수군만호부, 군도만호, 수군만호로 불리웠다.
기록에는 삼별초가 탐라로 이동할 때에 1천여척의 배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원의 요구로 일본원정때, 4개월만에 전함 9백척을 건조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나 주지의 사실대로 왕건이 해상호족 출신이었다는 것에 비추어 볼대 고려의 해군은 막강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온창일, 『한민족전쟁사』, 서울: 집문당, 2001
-이현수, 『군사제도사개론』, 서울: 육군사관학교, 2003
-강성문, 『한민족의 군사적 전통』, 서울: 봉명, 2000
-안주섭, 『고려거란전쟁』, 서울: 경인문화사, 2003
-김홍, 『한국의군제사』, 서울: 학연문화사, 2001
-육군본부군사연구실, 『고려군제사』, 서울: 육군본부 1983
첫댓글 으.. 보기가 조금 불편한데 문단 나눠서 구분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읽다가 다 못 읽네요. ㅡ,.ㅡ 좋은 자료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