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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거토피아 원문보기 글쓴이: 산들
노점 일지
악세사리 노점을 시작한지 거의 3개월이 되어간다. 아직도 일 매출 10만원은 요원하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일 평균 매출이 10만원은 넘어야 했다. 내가 일 매출 10만원 돌파를 목표로 한 기간이 두 달이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실적으로 보면 나는 매우 무능한 장사꾼으로 증명된 셈이다.
원래 글을 쉽게 쓰지 못하는 나로서는 기록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미루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 노점을 시작할 때 간단히 기록해 두었던 노점 장소와 영업 시간, 일 매출에 대한 기록을 참조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거꾸로 쓰는 일기’를 써보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노점으로도 성공하고 싶다. 아니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다. 내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소신껏 일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부끄러움없이 하겠다던 첫 결심을 끝까지 지켜가지 못할 수도 있다.
3월 14일까지의 준비
노점에 대한 준비는 거의 두 달 정도 한 것 같다. 처음 인드라와 노점 얘기를 나누며 매력을 느꼈던 것은 작년 가을이었지만 책을 쓰기로 하면서 접어두었다. 작년 11월과 12월, 꼬박 책에 매달려 2달 동안에 초고를 완성했다. 이후 출판사와 접촉하고 교정을 보면서 인터넷으로 노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노점창업>카페를 비롯, 몇군데 노점 관련 사이트에 가입했다. 먹거리가 좋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지만,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먹거리는 가을부터 겨울까지 장사가 잘 되고 봄이 되면 쇠퇴기로 들어간다. 과일은 그 날 팔지 못하면 상품가치가 뚝 떨어지기 때문에 초보자가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
일단 접근이 쉬운 악세사리로 품목을 정했다. 하지만 이게 돈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몇몇 친구 교사들과도 노점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으며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1월 9일(일)에는 친구 교사와 답사를 가기로 했다. 명동과 정동 등 소문난 노점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그 곳의 노점은 마차마다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었다. 아무나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후 인터넷을 통해 얻은 노점에 대한 정보들은 나에게 용기를 주기보다는 겁을 먹게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노점이 원천적으로 인정될 수 없는 불법행위라는 것, 단속이 나오면 처음에는 경고로 끝나지만 두 번째부터는 벌금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도 발부될 수 있다는 것, 절대금지구역(대로변, 버스정류장, 지하철 입구 등)과 상대금지구역이 있어 차등 단속된다는 것 등... 어느 장애인 노점상이 단속에 걸려 벌금 70만원이 물렸는데 벌금낼 돈을 구하지 못해 만기일을 앞두고 자살했다는 신문 기사가 실려있기도 했다.
게다가 전노련(전국노점상연합회)이라는 단체가 있어 노점상의 권익을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이제 막 노점에 진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저지선이 될 수 있다는 점,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장사가 되는 자리’에는 권리금이 만만찮게 붙어 있어 돈을 주고 사지 않는 한 쉽게 자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정보는 나에게 “노점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함부로 들어올 생각 하지 마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노점 이외에 대안이 없었다. 아무 경험도 없는 주제에 턱 하니 점포를 얻었다가 얼마 안되는 퇴직금을 다 까먹으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울 수 있다. 돈을 지키면서, 실패해도 큰 손실이 나지 않고, 세상을 배우고 장사를 배울 수 있는 길, 결국 노점 뿐이었다.
게다가 나는 노점을 꼭 경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작년까지 입으로만 먹고 살았다. 내 생각과 다른 말, 내 신념으로 수용할 수 없는 말도 필요에 의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삯군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웃 사랑을 말했지만 내가 언제 이웃을 위해 제대로 봉사한 적이 있었는가. 학교를 떠난 지금, 비록 이웃에게 베풀 능력은 없지만 예수님 흉내라고 내보고 싶었다.
“어려운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서 보기라도 하자. 그래, 노점... 한 번 해 보는 거야...” 세상을 배우고, 얼마 안되는 퇴직금도 지키면서 장사도 배우고, 어려운 이웃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도 한번 서 보고...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아닌가...
나는 노점에 매력을 느꼈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반드시 노점으로 성공하리라.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그 때까지 내가 얻은 노점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웃기지 마라. 너같은 풋내기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비록 장사 실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쉽게 물러나는 나약한 인간은 아니라구...
아이디어가 중요할 것이다. 차별화해야 한다. 어떻게 할까? 1톤 트럭이나 800cc 경트럭을 사서 백화점 매장처럼 인테리어를 근사하게 꾸미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러면 일반 트럭은 곤란하고 탑차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 탑차의 문을 걷어 올리면 세련된 인터리어에 근사한 악세사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동식 매장을 꾸며보는거야...”
2월 20일(일) 저녁 6시. <노점창업> 카페의 오프 모임이 부평에서 있었다.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작년 가을 직장에서 쫓겨난 해직자이며, 월급쟁이 생활만 한 사람으로 장사에 대해서는 일자 무식꾼임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화곡동 유통단지를 비롯한 도매시장, 물건을 떼는 요령, 노점 자리 등에 대한 얘기들을 들었다.
카페지기가 내 창업 계획에 대해 물었다. 중고 트럭을 하나 사서 악세사리 노점을 하고 싶다고 했다. 30대 중반의 카페지기가 나에게 물었다. “장소는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 그가 “대단히 실례되는 얘기를 하나 하겠다”고 했다. 저 친구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장소도 없는 주제에 차부터 사시겠다구요? 장소부터 정하세요.” 그는 차를 사고 물건을 떼는데 돈 천 가까이 들인 사람이 보름도 못가 땡처리하느라고 수백만원을 날리고 그만두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다고 했다. 악세사리는 공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우선 갖고 있는 승용차로 시작하라고 했다. 물건도 많이 떼지 말고 20-30만원부터 시작하라고 했다.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대상은 처음에는 아가씨들, 주로 대학생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만날 수 있는 제자 아이들이 민망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중고등학생으로 바꾸었다. 조립식 좌판과 벨벳천을 구입했다. 장사는 일단 1000원 코너로 시작하기로 했다.
3월 14일(월), 남대문시장에서 악세사리를 도매로 구입했다. 아저씨 한 분을 만나 도와달라고 했다. 그가 근처에서 장사하는 분들을 소개해 주었다.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아주머니들이 추천해주는 물건들을 구입했다.
3월 15일, 드디어 첫 장사를 시작하다
3월 15일(화), 첫 장사를 나가는 날이다. 다큐멘타리를 찍기 위해 여러번 만났던 김상용 선생이 동행하기로 했다. 그 동안 지도를 보고 연구한대로, 상계동에 있는 중고등학교 정문 근처로 가서 하교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가 하교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낮 12시경에 초등학교에 가서 먼저 장사를 하고, 중고교 하교 시간에 맞추어 옮기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첫 장사는 초등학교 앞이 되었다. 예상 외로 물건이 잘 팔려나갔다. 노원초등학교 후문에서 낮 1시부터 3시 경까지 판매한 실적이 20,700원. 이 정도면 첫 장사치고는 괜찮은 편이다.
중학생들의 하교 시간에 맞추어 상원중학교 정문 앞으로 옮겼다. 3시 10분터 4시 20분까지 판매한 실적이 예상 외로 3,000원. 학생들의 발길이 뜸해질 즈음 수락한신아파트 정문 앞으로 옮겨 좌판을 폈다. 4시 30분부터 저녁 7시까지 판매한 실적이 7,000원... 하루 총 판매량이 30,700원이면 첫 장사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집에 와서 일정을 보고하자 식구들이 놀랜다. 10,000원 어치도 팔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3월 16일(수), 어제와 마찬가지로 노원초등학교 후문 앞에 좌판을 폈다. 11시 40분부터 1시 40분까지 판매 금액이 11,700원. 상계제일중학교 정문 앞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하교 시간을 놓쳤다. 3시 20분부터 3시 40분까지 판매한 금액이 1,000원. 하교 시간이 지나지 않은 재현중학교 정문 앞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4시부터 5시까지 한 시간 동안 판매한 금액이 1,000원. 도합 하루 매상이 13,700원이었다. 어제 가졌던 자신감이 사라졌다. 맥이 빠졌다. 우선 내가 떼어 온 물건이 중고등학생에게는 어필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용 물건이었던 셈이다.
이후 나의 하루 매출은 20,000원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3월 23일(수)에, 나는 최고 매출을 기록하게 된다. 초등학교를 찾아다닌 내가 “강남에 가 보라”는 말을 듣고 돌아다니던 중 양재역 부근의 언주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낮 12시부터 저녁 7시까지 45,500원 어치를 팔았다.
신이 난 나는 용기백배하여 강남대로변으로 자리를 옮겨 인도에 차를 대고 좌판을 폈다. 소리를 지르며 손님을 끌었다. “무조건 천원이요, 무조건 천원...” 나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니... 그 순간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렇게 일어서는 거야. 나는 할 수 있어...”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도 많이 왕래하는 강남대로변에서의 실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저녁 7시 30분부터 9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판매금액은 7,000원에 불과했다. 어쨌든 그 날은 총 52,500원의 실적을 올렸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나는 2달 후로 잡은 일 매출 평균 금액 십만원을 좀 더 앞당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가졌다. 일 매출 10만원만 넘기면 한 달에 100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나는 그만 코피를 쏟고 말았다. 세수를 하는데 코피가 흐르는게 아닌가. 나는 중학교때 조금만 피곤하면 코피를 쏟았다. 그러나 선인장을 갈아 마시면 좋다는 말을 들으신 어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그 이후 코피를 흘린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다시 코피를 쏟게 된 것이다. 걱정이 들었다.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다음 날인 3월 24일(목), 어제의 실적을 마음에 새기며 부푼 마음으로 다시 언주초등학교 앞에 좌판을 폈다. 낮 2시부터 5시까지 3시간 동안 판매한 금액은 7,500원. 힘이 들었다. 어제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원인 분석을 해야 하는데 잡히는게 있어야지... 나는 역시 사회초년병인가...
3월 26일(토), 남대문 시장에서 다시 물건을 구입했다. 아주머니들이 실적이 어떠냐고 물었다. 장사할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장사하는 요령 등에 대해 알려주며 팔릴만한 물건들을 골라주었다.
3월 28일(월), 다시 언주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12시 30분부터 5시까지 14,000원 어치를 팔았다. 강남의 대로변을 다시 탐색해 보기로 했다. 강남의 대로변은 인도가 넓어 좌판을 펼 수 있는 여유 공간은 충분한 편이다. 테헤란로에 신축건물을 짓는 곳이 있었다. 그 앞에 좌판을 폈다. 저녁 6시부터 8시 30분까지 판 금액이 14,200원. 그 날 총 판매 금액은 28,200원이었다.
3월 31일(목), 그 동안 지도로 대학 근처를 탐색한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덕대학교 부근에 좌판을 펴보기로 했다. 제자들과의 만남이 있을까 피해왔던 대학 근처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판매한 금액은 18,500원. 일 매출 십만원은 점점 멀어져 갔다. 판매 부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기 어려웠다. 내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4월, 인덕대 앞에 자리를 잡다
4월 들어, 나는 상계동에서 월계동, 공릉동, 태능, 의정부까지 그 동안 지도로 보아왔던 집 근처의 대학교 부근을 샅샅이 답사하며 돌아다녔다. 좌판을 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강남의 역 근처에 좌판을 펴 보기도 하였다. 이미 상권이 형성된 곳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만 한번 부딪쳐 보기로 한 것이다.
마침 어느 건물 앞에 빈자리가 있었다. 차를 인도에 대고 좌판을 꺼냈다. 수위가 나왔다. 여기서는 좌판을 펼 수 없단다. 잠시 멋적게 서 있던 나는 수위가 떠나자 다시 좌판을 펴 보았다. 수위가 동료 한 명을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란다. 이 쯤 되면 좌판을 접을 수밖에 없다.
노점을 하면서도 나는 창업 강좌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들었다. 노점만 계속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점포를 차려 세금 떳떳이 내고 장사하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싶었다.
4월에도 노점 실적은 형편없었고 될만한 자리를 확보하기는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자리를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몸싸움할 용기도 없었고, 남들이 하는 곳을 비집고 들어가 나눠먹기를 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사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학교와 싸우고 나왔는데, 가난한 이웃의 삶의 터를 조금이라도 빼앗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이 하지 않는 곳에서, 혹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곳에서 개척을 해야 하는데, ‘되는 자리’ 잡는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노점 자리 권리금이 수백에서 수천까지 간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뻔히 보이는 대로변에 자리가 비어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런 곳은 다 이유가 있었다. 섣불리 펴다가는 민망한 꼴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대부분의 창업강좌는 프렌차이즈 음식 창업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1억 이상의 자금이 없이는 접근하기 힘들었다. 내가 가진 퇴직금으로는 어림없는 돈이었다. 어쨌든 나는 고전을 하면서도 노점용 라이트와 진열대, 진열판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그 동안 번 돈을 썼다. 나는 시간을 들이고 땀만 흘릴 뿐 여전히 판매 대비 수익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다.
될만한 장소를 찾아 돌아다녀봐야 별 소득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나마 제일 낫다고 생각되는 인덕대 후문 앞을 내 자리로 잡기로 했다. 간간이 강남 지역을 탐색하고 언주초등학교 앞에서도 했지만 4월의 대부분은 인덕대 앞에서 장사를 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4월 4일(월), 자율학습으로 하루 쉬게 된 딸 지은이가 노점에 동행해주었다. 강남을 해매고 돌아다니다 전에 갔던 테헤란로 노변에 좌판을 폈지만 신통치가 않았다. 교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정문 바로 앞 인도에 차를 대고 좌판을 폈다. 이럴 때는 크기가 작은 경차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그러나 낮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판 금액이 26,000원. 그나마 지은이가 오는 손님을 끌여들여 그만큼이라도 판매 실적이 오른 것 같다.
힘든 일정을 억지로 버티던 나는 인덕대 앞에서 주차단속을 당했다. 그 곳이 주차금지 구역이라는 걸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단속을 당하고 나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단속을 당하는 경우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라던 어느 노점상 얘기가 떠올랐다. 그래도 나는 직접 ‘노점 단속’을 당한 경우는 없었다. 다른 노점상으로부터, 혹은 수위로부터 제지를 당한 적은 있었지만... 주위의 상인들로부터 가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단속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단속 시간을 피해 오후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장사하기로 시간을 정했다.
그러나 4월 들어 노점을 하는 날은 창업 강좌를 듣고 책 출판 막바지 작업으로 점점 줄어들었다. 덕분에 서너번 흘리던 코피는 멎었다. 4월의 실적은 노점을 나간 날이 총 11일에 4만원대 판매 세 번, 3만원대 판매 두 번, 2만원대 판매 두 번, 만원대 판매가 네 번이었다.
5월, 인덕대에서 다시 언주초등학교 앞으로
5월 들어, 책 출판을 앞두고 더욱 바빠졌지만, 가능하면 장사는 빠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가능하면 낮에 일을 보고, 늦어도 저녁에는 장사를 나갔다. 그러나 대학 앞에서 저녁 장사는 별 소득이 없었다. 다른 장소를 물색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시 자리를 물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정을 모르는 사람은 큰 길가로 가면 펼 자리가 많다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다시 언주초등학교 앞에서 자리를 정착해 보기로 했다.
5월에는 총 13일 동안 장사를 했고 10만원을 넘긴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러나 그 날은 언론인이 취재차 찾아와서 5명이 5만원 어치 정도의 물품을 구매해 주었다. 5월 7일(토)에는 아내와 함께 장사를 했는데, 89,200원 어치를 팔았다. 다음 날이 어버이날이라 꼬마들이 선물용으로 5,000원 짜리 셋트를 적지않게 사갔다. 아내의 친절하고 상냥한 장사 수완이 솜씨를 발휘한 덕이기도 한다.
언주초등학교 앞에 자리를 잡고 언론이 취재를 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도 생겼다. 일부러 물건을 사준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주차 문제가 또 생겼다. 공익요원이 단속을 나왔다. 좌판을 걷기로 하고 그 날은 무사히 넘겼다. 이럴 때는 난감해 진다. 그 날은 넘겼지만 다음에 이 친구들을 또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수도 없고...
나는 핸드카트를 구입하기로 했다. 차는 학교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 안에 두고 카트로 물건을 옮기기로 했다. 카트를 구입하고 차를 아파트에 댔다. 여기저기 아파트 경비들이 보인다.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이리 마음이 잦아드는지... 그들의 눈을 피해 카트를 꺼내 물건을 실어보았다. 커다란 좌판과 물건을 담은 큰 가방을 카트는 감당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차를 몰고 나왔다. 그 때까지는 몰랐던 글귀가 아파트 정문 앞에 적혀 있었다. 카메라로 드나드는 차량을 단속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5월 중순 이후로는 취재를 하러 오는 언론 관계자들을 계속 언주초등학교 앞에서 만났다. 그 곳이 한적하고 주변 환경도 좋아 얘기를 나누기 좋았지만 장사에는 방해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돈을 버는 것보다 내가 해야 할 말을 지속적으로 내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아무리 한국교회 문제 있다고, 개혁해야 한다고 떠들어보았자 전달이 안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를 이해해주고 내 멧시지를 전달해 주는 언론이 나는 한없이 고마웠다.
사람들은 내가 언론플레이를 한다는 둥, 언론이 나를 이용한다는 둥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느끼는 점은 다르다. 언론이 뭐가 아쉬워 나를 찾겠는가. 그래도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한국 교회 문제가 많다고 주장하는 내 신념과 행동에 이유가 있다고, 보도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에 나를 찾아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5월 중순 이후, 아직도 실적은 미미하지만 그래도 언주초등학교 앞에 정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루 매상이 5만원을 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단골이 생기는 조짐도 보이고... 장사하는 재미가 쏠쏠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매상이 5만원을 넘는 날에는 장시간 장사해도 피곤하지 않았다. 반대로 매상이 떨어지면 몇시간 일하지 않아도 금방 피곤해진다.
6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6월로 접어들었다. 그런대로 장사는 되는 것 같았다. 목표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대로 가면 하루 평균 매출 5만원대는 고정적으로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언주초등학교 앞에서의 주차단속이 강화된 것일까. 최근 들어 단속이 늘어난다 싶더니 어느 날, 전에 단속 나왔던 공익요원과 다시 마주쳤다.
“아저씨, 여기 주차 금지 구역인데 계속 장사하시면 어떻게 해요...” 이 젊은 친구야,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가. 부탁을 해 보았다. “내가 장사를 해야 하는데, 좀 이해해 주면 안될까요?” “어떻게 이해를 해요. 주차 금지 구역인데...” “알았어요, 치울께요.”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며칠 후인 6월 7일(화), 다시 한번 주차 단속을 당했다. 그 날은 오전 11시 경에 단속을 나왔다고 하여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인덕대의 경우도 그렇고, 대개 오전 11시를 전후해서, 혹은 오후 2-3시경에 단속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5시 40분 경, 다시 단속을 나온 것이다.
그 날은 다른 곳에 개척해보고 싶었지만 한 교육기관의 신문사 기자와 만나기로 한 날이었기에 할 수 없이 언주초등학교로 향했다. 낮 12시 경에 학교 앞에 도착했지만 좌판을 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 다시 공익요원을 만나면 이번에는 어찌될 것인가... 나는 2시 경에 조심스럽게 좌판을 폈다. 기자와 만나 인터뷰를 마쳤을 때는 3시 반경이 되었다.
그 날은 매출도 부실하여 3시간 40분 동안의 판매금액이 16,000원이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5시 40분경에 물건을 접기 시작했다. 악세사리는 물건을 진열하고 접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차를 등지고 한참 작업을 하고 돌아보니 주차 단속 요원이 막 딱지를 차창에 붙이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공익요원이 아니었다. 나이가 든 사람으로 구청 직원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차를 바로 빼라고 말하고는 딱지를 떼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