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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22일 토요일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1900년 무렵부터 성모 마리아께 ‘여왕’의 영예가 주어져야 한다는 요청이 많았다. 1925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해지면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늘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비오 12세 교황은 마리아께서 여왕이심을 선언하고, 해마다 5월 31일에 그 축일을 지내도록 하였다. 그 뒤 보편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마리아께서 천상의 영광을 받으셨음과 이 축일을 연결하고자 성모 승천 대축일 뒤로 옮겼으며, 축일 이름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로 바꾸었다. 이날 교회는 성모 승천의 영광을 거듭 확인하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도구가 되신 것을 기린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천사에게 이끌려 주님의 집으로 들어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스승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며,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3,1-7ㄷ
천사가 1 나를 대문으로, 동쪽으로 난 대문으로 데리고 나갔다.
2 그런데 보라, 이스라엘 하느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분의 영광으로 빛났다.
3 그 모습은 내가 본 환시,
곧 그분께서 이 도성을 파멸시키러 오실 때에 내가 본 환시와 같았고,
또 그 모습은 내가 크바르 강 가에서 본 환시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4 그러자 주님의 영광이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주님의 집으로 들어갔다.
5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6 그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는데,
주님의 집에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7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살 곳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 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이사 9,1-6)와 복음(루카 1,26-38)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고대 이스라엘에서 왕국의 여왕/왕비란 왕의 아내가 아니라 왕의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모후’(게비라)라는 호칭은 ‘주인’(게비르)이라는 단어의 여성형입니다. ‘태후’ 또는 ‘여주인’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1열왕 15,13; 2역대 15,16; 예레 29,2 참조). 실제로 구약 성경의 역사서에서 모후는 큰 영예를 누리는 자리였습니다”(브랜드 피트리, 『마리아의 신비를 풀다』, 107면). 이처럼 구약 성경에서 모후는 왕과 함께 왕관을 쓰고 오른쪽에 앉았으며(예레 13,18; 1열왕 2,19; 시편 45[44],7-10 참조), 변호인이자 전구자로서 행동하는(1열왕 2,13-14.17-18 참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야말로 모후는 왕의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 하느님께서 다윗의 왕좌를 주시어,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게 하신’(루카 1,32-33 참조)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새 임금이신 예수님을 소개할 때 마리아도 같이 소개되십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루카 복음서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내 주님의 어머니”(1,43)라고 인사말을 건넵니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표현은 왕을 가리키기도,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새 모후는 바로 마리아, 성모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도 사랑과 인내, 섬김과 봉사로 교회를 보살펴 주셨던 성모님께서는, 천상의 영광을 받으신 뒤에도 한결같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를 기억하며, 다 함께 성모님께 노래를 바칩시다. “모후이시며, 사랑이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유청 안셀모 신부)
저는 그저 당신의 이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만 부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을 맞아, 성모 신심이 돈독했던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성모님 체험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기도가 불가능할 때 저는 성모님께 의탁하며 외쳤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제가 한계에 도달했음을 아십니다. 저는 지금 어떤 기도도 암송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정성을 다해, 당신의 이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만 부릅니다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맡기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만 반복합니다. 당신께서 이 기도를 교회와 제 교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죽음과도 같이 혹독했던 시절,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하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제게 큰 위로와 도움이 되었습니다.
추기경님은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마자 즉시 체포 구금되어 독방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공산 정권은 그분 손에 그 어떤 기도서나 영성 서적도 지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찌는듯한 독방의 더위에 쓰러져 가던 그가 늘 바치던 기도는 성모송 뿐이었는데, 나중에는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만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10년, 20년, 50년 세월이 흘러가면 원치 않아도 독방생활 하게 될 것입니다. 안방을 내어주고 뒷방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아니면 요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게 되면, 정신도 오락가락할 것입니다. 기도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때 추기경님의 말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묵주를 손에 꼭 쥐고, 그저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만 반복해도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나자렛의 산골 소녀 마리아의 신앙이 성장하고 또 성장해, 이제는 하늘나라의 여왕 칭호를 받으시니,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봅니다. 아무래도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지녔던 그 올곧고 순수한 신앙, 겸손하고 단순한 매일의 응답을 높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한 단순성과 겸손함은 부르심 과정부터 하늘의 모후 왕관을 쓰실 때 까지 한결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를 당신 인류 구원의 협조자로 부르시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부름받은 인물들이 첫 번째 보이는 반응은 부정적인 답변입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떻게든 피해 달아나고자 발버둥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부담감과 당혹스러움이 마리아의 마음을 휘감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초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궁금한 점에 대해서는 질문도 던지시며 적극적이고 호의적으로 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응답하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그 단순하지만 영웅적인 피앗으로 인해 나자렛의 마리아는 지금 하늘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후배 신부님이 있는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성당을 중심으로 천천히 돌며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 주위를 돌며 기도하다 보니 우리 조상들의 ‘탑돌이’가 떠올랐습니다. 탑을 돌며 정성을 바치던 그 마음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내 삶의 간절한 지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신앙의 몸짓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모두 중심을 향해 도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달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듯이 우리 삶에도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이 없으면 삶은 흩어지고 맙니다. 중심축이 흔들리는 팽이가 곧 쓰러지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중심이 흔들리면 마음도 쉽게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중심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태양이 중심에 있을 때 지구가 빛과 생명을 얻듯이,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삶의 중심에 둘 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도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중심에 둡니다. 돈이 중심이 되기도 하고, 명예가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고집과 내 생각이 중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이라는 태양에서 멀어지면 우리 영혼은 차가운 냉기와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어 주님이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으리라.”
성당을 돌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이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빛을 향해 걸어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모후로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 모후이신 까닭은 세상의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누구보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희생을 말하는 사람은 희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눔을 말하는 사람은 직접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말의 장식이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성모님은 바로 이 말씀을 가장 아름답게 사신 분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고,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모님을 모후로 공경합니다. 성모님의 왕관은 권력의 왕관이 아니라 순명의 왕관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영광은 군림의 영광이 아니라 섬김의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우리 삶의 궤도를 다시 수정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나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어둠의 변두리에서 생명의 중심으로 옮겨가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중심으로 삼고 정성껏 삶의 여정을 걸어갈 때, 우리 인생은 가장 아름다운 빛의 원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는 태양 안에서,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을 품고, 섬김과 순명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섬기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섬김은
품음이니
참으로
열린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받듦이니
참으로
힘센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올림이니
참으로
높은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믿음이니
참으로
곧은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바람이니
참으로
맑은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사랑이니
참으로
넓은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섬김은
살림이니
참으로
바른 사람만이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켐블(John Kemble)
활동년도 : 1599-1679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켐블
영국 잉글랜드(England) 헤리퍼드셔(Herefordshire)의 세인트 위어나즈(Saint Weonards)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란 성 요한 켐블(Joannes Kemble)은 사제직을 위하여 프랑스 두에(Douai)로 가서 공부하여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즉시 영국 선교 길에 나서서 고향인 헤리퍼드셔와 만머스셔(Monmouthshire) 지방에서 43년 동안이나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티투스 오츠(Titus Oates) 음모의 희생물이 되어 펨브리지 캐슬(Pembridge Castle)에서 1678년에 체포되었다. 죄목은 찰스 2세의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그의 음모는 런던에서 개최된 프리비 회의의 조사 결과 무혐의로 판정되었으나, 가톨릭 사제임이 드러나 유죄 판결을 받고 80세의 고령으로 헤리퍼드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복자 베르나르도 (Bernard)
활동년도 : 1604-1694년
신분 : 수사
지역 : 오피다(Offida)
같은 이름 :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마르카의 아피냐노에서 어느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는 일곱 살 때부터 양지기로 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자가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고 카푸친회의 평수사가 되었다. 그는 여러 수도원의 잡일을 맡아 하면서 문전걸식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런 행동이 처음에는 인정되지 못하여 관구장에게 질책을 받기도 했으나, 일생동안 이런 일을 통하여 높은 성덕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주민들은 그분에게 음식을 들고 와서 영적 지도를 받았고, 수많은 죄인들이 개과천선하였던 것이다.
한번은 어느 가련한 부인이 죽어가는 아이를 베르나르두스에게 내보이며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그 아이를 팔에 안았는데 그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 부인은 이제 아들을 살려내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하였다. 성인은 그 아이를 안고 그곳의 성 펠릭스(Felix) 성당으로 가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선하신 성 펠릭스여, 이제는 당신이 저를 도와줄 시간입니다.” 그 후 그 아이는 소생하였다. 이 기적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큰 혼잡을 빚었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일기로 선종했는데, 수도원 문지기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1795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