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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지 말라
마14:1~1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배척 받는 예수님에 대하여 상고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천국복음을 증거 하심도 보았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과 그 천국복음을 환영하거나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고 견제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배척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조용히 그리고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셨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소식이 분봉 왕 헤롯에게까지 들려졌습니다.
(1~2)/ “그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도다 하더라”했습니다.
여기 “운동하는 도다”라는 말은 “에네르게오/ 효과가 있다, 역사하다, 생산하다”라는 말입니다.
“권능”이란 “뒤나미스/ 성령의 영,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란 뜻이며,
“그 속에서”라는 말은 “엔/ 사람 앞에”라는 뜻입니다.
즉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능력이 만들어져 역사함으로 효과가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헤롯은 안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자기가 죽였으나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가진 것입니다.
헤롯은 사두개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까지 천국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던 내용과 달리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삽입됨을 봅니다. 우리가 살핀 13장에서는 계속 적으로 천국비유에 대한 말씀이 전개됩니다. 14장 13절 이후에로 가면 다시 오병이어의 사건, 즉 예수님의 사역의 기록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2사이에 헤롯과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의 연결성이 무엇일까요?
마3장과 4장에서는 세례 요한의 광야의 소리와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4:12에서 갑자기 세례 요한이 체포당하는 사건이 한 절 나오고 왜 투옥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비로소 오늘 마태는 그 이유를 기록합니다.
(3~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위한 그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깨끗하고 청빈했습니다.
당시 호의호식 할 수 있는 종교지도자로서 예루살렘을 택하지 아니하고 광야를 택했습니다. 권력과 부, 좋은 옷과 좋은 음식, 곧 세상의 가치를 택하지 않았고, 자신의 성공이나 야망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람이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의 삶과도 철저하게 연결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 다닐 수는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제자훈련도 받고, 교회를 위해 이것, 저것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고 (이제 하나님의 종 됨을 인정하고 그 기뻐하심의 뜻을 좇는 자라는 확신하는 믿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좇음으로 이루어가는 의에 이르는 삶, 곧 십자가의 도를 좇는 삶, 서로 사랑함을 가치 삼는 삶) 말씀에는 귀를 돌이키고 돌아섭니다. 자기 사욕을 좇아 귀를 시원케 해 줄 스승을 많이 두고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이 말씀에 대해 응답하는 믿음의 결단이 없으면 그래서 종교인인 것입니다.
종교인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직 그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여전히 옛 사람의 자리,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선하신 뜻을 좇아 포기했습니다. 떠났습니다. 광야를 택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할렐루야!
우리는 이제 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은즉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눅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선택이요 방향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도모하여 살 것인가, 여전히 세상의 낙을 좇아 살 것인가, 선택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 뜻을 이루는 의를 좇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례 요한의 다른 믿음의 면을 (3~4)에서 오늘 봅니다.
그는 불의와 타협치 아니하는 신앙입니다.
헤롯왕은 영토의 1/4의 통치권을 가진 왕입니다.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민족을 배반한 정치적 야망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의 권력은 달라는 대로 다 줄 수 있는 권력이요,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었습니다.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는 독재자요, 동생의 아내까지도 자기 욕심대로 빼앗아 취할 수 있는 파렴치한의 권력이었습니다.
헤롯의 이 죄악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헤롯이 무서워서 다들 침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서운 침묵을 깬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의 잘 못을 지적하고 교훈한다는 것은 손해 보는 정도가 아니라 곧 죽음입니다.
그 잘 못을 지적하지 않아도 요한은 깨끗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잘 못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과는 목이 잘려 소반에 올려지는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더러운 이를 위하여 침묵하고 눈을 감아 버리시겠습니까?
교회는 열심히 나오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 지식도 상당하고 직분도 그 신앙연조도 상당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손해를 입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의 앞에, 부정 앞에 비리 앞에 침묵합니다. 권력 앞에 아부합니다. 너무도 무력하고 무감각합니다.
한 술 더 떠서 사랑으로 은혜로 덮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궤변입니다. 실상은 자기 배를 위함이면서 하나님의 이름, 그 사랑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만 또한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죄는 벌하시는 분입니다.
출34:7/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자식은 물론 손자 대까지)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했으며,
출20:5~6/ “그것들에게 (손으로 만든 형상) 절하지 말며 (신앙하여 좇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이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가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경고했습니다.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례 요한은 헤롯왕의 죄악을 지적함으로써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3~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했습니다.
이는 종교적인 어떤 이유나 개인적인 삶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죄악을 지적한 이유로 결국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도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합당한 요구 적 삶을 도모하여 가치 삼고 좇으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입니다.
죽어도 불의와 타협치 말아야 합니다. 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면서도 불의와 타협하고 침묵함으로서 지금 이 세상이, 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이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치력의 부재가 아니라, 수많은 불의와 죄악에 대하여 은혜, 은혜, 사랑, 사랑을 남발하며 실상은 자기 배와 더러운 이를 좇으면서 침묵한 연고입니다. 스스로 속이고 속은 것입니다. 스스로 심판을 자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모든 사람이 침묵하는 불의에 대하여 단호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했습니다.
여러분!
나라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망하고 흥함은 악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 악과 불의, 부정과 비리를 보면서도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을지언정 언제나, 무슨 일에나 반드시 하나님의 의, 그 선하심과 온전하심의 뜻을 좇는 편을 선택해야 합니다./아멘!
세례 요한을 죽인 분봉 왕 헤롯이 어떤 인물입니까?
죄책감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2)에 보면 그는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혹시 다시 살아난 요한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아무리 많은 돈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그는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시32:1~11/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회개함으로 주를 좇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힘, 체력)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놓치지 말고)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모래로 (구원에 이르는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 미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요일1:7~10/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가운데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ㅇ뤼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했습니다.
또한 헤롯은 이 세상의 쾌락을 선택했던 사람입니다.
헤롯의 아내는 아립 왕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곧 제수를 빼앗아 아내로 취했습니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아내를 버리고 율법이 금하는 바 살아 있는 다른 남자의 아내를 빼앗아 새 아내를 취하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를 좇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가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르기를
약4:1~4/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고 행치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고도 세상의 정욕을 좇음이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헤롯은 세상, 즉 딸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종의 말씀을 좇아 돌이키지 아니하고 도리어 업신여기고 버림으로서 그를 죽인 죄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선지자로서 사랑하고 추종하는 무리들을 인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했습니다.
그런 중에 헤롯의 생일이 되었습니다. 잔치가 열리고 많은 하객들과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그날 그 앞에서 춤을 추게 되었고 헤롯은 즐거워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자신을 기쁘게 해준 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6~7)/ “마침 헤롯의 생일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했습니다.
막6:22~23에서는 이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면 주리라 하고,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약속합니다.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했습니다.
어찌 자기를 기쁘게 하는 춤을 추었다고 어린 아이에게 이런 맹세와 약속을 할 수 있습니까?
주님 말씀합니다.
마10:37~38/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좇지 않는 자는, 세상의 쾌락과 자기 기쁨을 구하는 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사단의 지배를 받아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헤롯의 맹세에 대한 헤로디아와 그의 딸의 구함이 무엇입니까?
헤롯은 막강한 권력으로 자기 죄를 은폐하고 정당화 하려고 요한을 죽이고 싶었으나 옥에 가두었지만, 하나님은 그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취할 만큼 그가 사랑하는 헤로디아와 그의 딸을 통해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했습니다.
(8)에서 요한의 목을 요구합니다.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와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근심합니다.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사단은 엄청난 도전을 할지 모릅니다.
헤롯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근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권력을 인하여 죄악을 선택합니다.
막6:19~20에 보면 헤롯은 세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 위신과 체면,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의식한 것입니다.
막6:21/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했습니다.
쟁쟁한 자기의 수하들 앞에서 자기가 한 약속과 맹세를 지키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이기 싫은 만용을 택한 것입니다.
막6:26~28/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했습니다.
(10~11)/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했습니다.
헤롯은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자기 체면과 위신, 사랑하는헤로디아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타협함으로써 결국 의인의 목을 베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우리 또한 종교인과 타협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자기 배와 권력과 타협하면 의인의 목을 구하는 헤로디아의 자리, 그에게 의인의 목을 내어주는 헤롯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왕의 그 권력을 충동질 하여 그로 하여금 대신 내가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상대를 죽임으로서 자기를 정당화 하려는 헤로디아를 경계해야 합니다.
실상은 요한의 목을 벤 곳은 시위병도 아니요, 헤롯도 아니요, 그의 딸 살로메도 아니요, 돌이켜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또 사랑을 버리고 복수심에 불타서 왕의 권력을 충동질하고 자기를 정당화함으로 죄를 덮으려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모는 음모를 꾀한 헤로디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 대충 대충하시면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감으로써 그 의를 도모해야 합니다.
타협치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를 십자가에 다 못 박아 버려야 합니다.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모든 된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시고도 다른 처방이 없이 그곳을 떠나셨을까요?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해야 천국이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즉 세례 요한은 이 땅에서 의를 위해 비참히 죽었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죽음이요, 천국을 얻게 되는 신앙의 본질이요 가치라는 말씀입니다.
그 본질에 대하여 이어서 오병이어, 물 위를 걸으심 등을 통해 구원의 주권자이신 예수를 나타내시고, 주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증거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 앞에 침묵함은 타협입니다. 주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세례 요한을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가치를 발견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