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산재보험, 일하다 아프고 병든 노동자들 위해 거듭나야
“내 딸이 삼성 반도체 공장에 다니다가 백혈병에 걸렸어요…” 2007년 황상기 씨가 딸 유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리며 진상규명을 호소한 뒤 14년의 시간이 흘렀다. 황상기 씨는 11년을 꼬박 산재 인정과 삼성의 사과를 받기 위해 싸웠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고는 더 많은 피해자들을 반올림으로 규합해 함께 싸워나갔다. 삼성은 반도체 공장의 유독한 화학물질 정보를 철저히 감췄고, 치료비가 필요한 피해자들을 돈으로 회유해 산재 은폐를 일삼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삼성이 감춘 피해자보다 더 많은 피해자들이 드러났고 힘을 합쳤다. 그 결과 11년만인 2018년 삼성으로부터 사과, 보상, 재발방지대책에 대한 중재합의를 이뤄냈다.
피해자들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공식적인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끈질기게 싸워왔다. 공식 산재 인정이 되어야 직업병 문제의 대책이 마련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유미 씨 유족의 첫 산재신청 이후로 최근까지 170여 명의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폐암 등 암 피해자와 파킨슨병, 시신경척수염, 다발성경화증, 전신성경화증과 같은 다양한 희귀 질환 피해자들)이 산재신청을 제기해 왔다.
처음 수년간은 단 한 건도 산재 인정이 되지 않다가 2011년 서울행정법원이 황유미 씨의 백혈병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는 판단을 한 것을 시작으로 다른 피해자들의 경우도 조금씩 인정이 되기 시작했고, 2017년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대법원 판결(산재보험 취지를 고려해 노동자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판결)도 나왔다. 다만 아직도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는 대법원 판결에서 제시한 판단기준보다는 판정위원 배정이 어떻게 되는지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보다 승인율이 높아졌다지만 여전히 절반의 피해자들은 불승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색한 산재 인정으로 병든 노동자의 고통 가중
인정해주지 않으려 하는 산재를 신청한다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일과 같다. 피해자들은 조사 기간만 1년 이상(역학조사 기간이 2~3년씩 걸리기도 함)의 막막하게 긴 시간을 견뎌야 하고, 업무와 질병 간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부당하게 요구받는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수백 종 이상의 화학물질, 방사선 등 다양한 유해요인이 사용되지만 어느 공정에서 어떤 화학물질과 방사선이 얼마나 사용되고 노출되는지에 대한 객관적 기록은 피해자들은 구할 수 없다. 그런 기록은 고사하고 사업주 통제 하에 실시되고 있는 형식적인 작업환경측정기록조차 영업비밀이거나 국가핵심기술이라며 정보접근권조차 없다. 그러니 피해자로서는 어떤 증명을 할래야 할 길이 없다. 억울함이 배가된다. 번번이 불승인 통보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가장 건강해야 할 20~30대에 희귀병을 얻어 고통을 당하는 것에 더해서, 취업할 수 없으니 경제적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 이렇게 아픈 이들을 국가와 사회가 보듬고 제대로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마땅할 것 같지만 우리 사회 아니 국가와 정부는 이러한 인권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윤중심, 기업 중심, 돈 중심의 세상에서 아프고 병든 노동자의 몸은 성가신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동 존중, 인간의 존엄과 거리가 멀다. 아픈 노동자에게 증명을 요구하는 잘못된 산재법과 불편부당한 산재제도는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최근 불승인 판정을 받은 사건을 살펴봐도 산재판정의 인색함을 잘 알 수 있다. 똑같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이지만 비교적 최근(2014~2016년)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불승인을 받았다. 판정위원들은 황유미 씨 사망(2007년) 이후로 현장의 작업환경이 개선되었다는 믿음 하에 개인질병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피해자는 설비엔지니어로서 가장 유해하다고 알려진 설비 유지보수업무를 담당했다. 현장의 작업환경이 과거보다 개선되었더라도 설비유지보수담당자로서 설비를 분해, 세정하는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충분히 노출될 수 있었다. 보호구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출수준을 낮게 평가한 것도 큰 문제가 있다.
또한 백혈병과 같은 암은 매우 적은 양의 발암물질 노출로도 발병할 수 있는데, 판정기관에서는 여전히 발암물질에 고농도 노출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정태도는 대법원이 산재보험의 공적 부조 기능을 강조하며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대폭 완화시킨 판례기준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여전히 과거의 잘못된 판정태도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가 있어도, 산재법이 바뀌지 않으니 여전히 불합리한 개별 판정으로 피해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이번 백혈병 피해자는 얼마 전 골수이식(조혈모세포이식)수술을 했고, 몇 달간을 1인 무균실에서 항암치료를 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치료비를 산재인 정으로 해결하고자 했으나 이러한 꿈은 산산이 깨졌다. 아픈 노동자가 큰 병에 걸려 빚더미에 앉는 것이 과연 국가가 바라던 바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산재를 폭넓게 인정하도록 제도 대폭 개혁해야
산재승인 이후 발생한 휴업급여 부지급 재심사 사건에서도 인색함은 마찬가지였다. 폐암 4기(뼈전이 상태)의 삼성 디스플레이 여성노동자가 산재인정은 되었으나 병원에 통원치료(표적치료제 복용)를 하는 기간에 대한 휴업급여(평균임금의 70%)가 지급되지 않아 심사, 재심사청구를 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폐암 4기의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 재심사위원회는 취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취업가능여부에 대한 의학적 판단이 휴업급여의 지급요건인데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재발성 전이 암 환자로서 호흡도 거칠고 전신 염증반응에, 발톱이 3개나 빠지고 피부가 얇아져 손가락 지문조차 없어지는 고통 속에 있는데도, 자문의사나 재심사 위원들(대부분 의사)의 눈으로 볼 때는 취업할 능력이 된다고 본 것이다.
왜 이렇게 산재인정이 어려운 것인가? 여러 문제가 있지만 아픈 노동자 관점에서 산재보험이 설계되고 운영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업주에게 걷는 산재보험료만 걱정하고 의학적 기준만 가지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의사 중심의 판정기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산재보험은 아픈 노동자가 치료비나 최소한의 생계비 걱정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적 부조 성격의 국가보험이다. 의학적 지식은 참고사항으로 족하다. 산재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공공보험이 되어야 하는데, 산재인정 받기가 너무 어려워 아픈 노동자들을 우롱하는 보험이 되고 있는 현실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국민이 건강보험을 적용받기 위해 복잡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받지 않는데, 산재보험은 아픈 노동자가 사업주 눈치 보며 신청도 직접 해야 하고, 인정받기도 어려워 소수의 노동자만 구제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까지 의학적 증명을 요구하며 까다로운 심사기준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보험급여를 지급할 것인가? 노동자에게 증명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업주가 해당 노동자의 질병이 산재가 아님을 명백히 증명하지 못한다면 산재를 폭넓게 인정하도록 제도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아픈 노동자의 관점에서 산재보험 제도가 대폭 개혁되길 간절히 바란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1년 12월호, 이종란(노무사, 상임활동가(반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