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에페소 교회
에페소스 (라틴어: Ephesus, 그리스어: Έφεσος, 터키어: Efes,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에페소, 한글개역판에서는 에베소로 표기)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식민지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상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6세기에 건조된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과 로마 제국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 도미티아누스신전 (기원후 1세기)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로가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로가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바울로가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국 성공회의 폭스 신부가 쓴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제자인 디모테오가 주교로 사목한 교회가 에페소 교회라고 한다.
B,C 2~6세기에 에게해의 대도시로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그리스 상인들로 활기를 띄던 도시였던 에페소는 교회 역사에서 예수의 모친 성모 마리아와 제자 사도 요한과 관련곳으로도 유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AD 53년에 이곳에서 말씀을 전하며 교회를 세워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도시이기도 한곳이 바로 에페소였다.
사도요한 기념교회
성서의내용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 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을 거짓말쟁이 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계 2:2-6)
성서시대의 에베소는 소아시아서 제일큰 도시였다.
이미 BC11세기부터 도시가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BC2세기 시대에 가장 번성 했던 것 같다.지금의 거대한 유적들도 그 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서적으로는 사도 바울의 선교 중심지로 되어 있다.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가 당시 정치적 박해를 잘 참고 견디며 신앙을 지켜 왔으나 "처음 사랑(아가페)"을 잃어 버렸다는 것으로 경고를 받는다."처음 사랑"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이 있으나 에베소 교인들 간의 적극적 이었던 사랑의 실천 행위(요일 4:8) 가 소홀해졌던 것으로 해석한다.외부적인 박해와 내부적 이단에 시달리다 보니 교회의 현실적인 가장 중요한 사명인 형제사랑에 적극성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박해의 문으로 들어가는 순례단
이 문은 요한 교회 앞에 세워진 문으로 에베소의 원형경기장의 돌을가져다가
로마의 기독교 박해를 되새기는 뜻으로 세웠다 함
사도요한 무덤위의 기념교회는 비잔틴제국(동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527-565)가 건축했다.
밧모섬에서 에배소로 돌아온 요한은 자연사한 후 여기에 묻혔다.
요한 무덤위 성전 예배, 예배에 집중하는 외국인
모서리 4개의 기둥은 복음서의 4명의 제자를 상징한다.
성전 바닥 요한무덤 표지석↓
30분이 지나도 예배는 계속되고 비켜주지 않고 있습니다.
예배중 염치불구하고 한분께 비켜달라 요청하여 어렵게 요한무덤 표지석을 찰칵...
사도 요한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교회로 이 안에 요안의 무덤도 함께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후,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와 함께 이곳으로 온뒤, 생을 마감
할 때 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 사도 요한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큰(大)야고보의 동생입니다.
요한복음을 쓴 복음사가이며 신약성경 서간 3편과 묵시록의 저자이기도 한 요한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경에서 본 요한
요한은 성경의 12사도 명단 가운데서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형 야고보와 함께 언제나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시몬. 큰야고보에 이어 세 번째로(마르 3,17),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에 이어 네 번째로(마태 10,2; 루가6,14) 등장합니다.
이에 비해 사도행전에는 베드로 다음 두 번째로 언급됩니다(사도 1,13).
이 사실은 12사도 가운데서 요한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요한은 12사도의 으뜸인 시몬 베드로 및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을 지척에서 모신 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셨을 때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에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마르 5,37; 루가 9,28; 마태 26,37).
예수님 지시에 따라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러 간 제자도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였습니다(루가 22,8).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께서 12사도 가운데서 갈릴래아 호숫가의 고기잡이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와 요한을 얼마나 각별히 생각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두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함은 당신이 세우실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신다는 공적 차원을 띤다고 할 수 있겠지요.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고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신다거나
(마태 16,18-19), '내 양들을 돌보아라'하고 신신당부하시는 말씀에서(요한 21,15-19)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요한에 대한 각별함은 좀 더 개인적 차원을 지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후 만찬 때에 요한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은 것이나(요한 13,22),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신 것에서(요한 19,27)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부활 후에도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합니다. 예수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고(요한 20,5), 갈릴래아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이야기해 준 제자도 요한이었습니다(요한 21,7).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요한'이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밝힐 뿐입니다.
이는 요한의 겸손함과 함께 예수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또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확신했는지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강림 후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전면에 나타납니다. 베드로와 함께
성전에 올라가다가 불구자를 고쳐주고(사도 3,1-10),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또 최고의회 앞에서는 담대하게 설교를 합니다(사도 4,1-22). 나아가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를 통해 그곳 신자들에게 성령이 내리도록 합니다(사도 8,14-25). 바오로 사도는 이런 요한을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부르지요(갈라 2,9).
그러나 예루살렘 사도회의 이후 요한의 생애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중에 묵시록을 썼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입니다(묵시 1,9).
▶전승에서 본 요한
2~3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이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요한은 생애 후반기에 소아시아의 에페소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를 저술한 곳도 에페소로 알려져 있지요. 그리고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재위 81~96)
때에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유배되기 앞서 로마에서 체포돼 펄펄 끓는 기름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죽은 후 유배지에서 풀려난 요한은 에페소에서 살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제위 98~117) 치세인 100년에 사망했습니다.
요한은 죽기 직전까지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고 끊임없이 말했다고 합니다.
요한의 형 큰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반면에 요한은 사도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일부에서는 요한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하지만 이는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복음사가로서 요한을 나타내는 상징은 독수리입니다.
요한은 또 뱀이 있는 성작으로도 상징되는데 요한이 독이 든 잔을 받고 축복을 하자
독이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에 따른 것입니다.
6세기에 지어진 사도요한 기념교회는 37-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자 사도요한의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이다. 사도 요한의 무덤 위에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첫번째 교회는 에베소교회이다. 사도요한은 오랫동안 에베소 교회 감독으로 있었으며 이곳에서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기록했다.
▲ 사도 요한 교회 입구
에베소교회 셀죽성과 요한교회 올라가는 성문 일면 "박해의 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고 순교하였던 에베소 원형경기장의 돌을 가져다가 세웠다고 한다.
교회는 십자가 형태 에베소교회 셀죽성과 요한교회 올라가는 성문 일면 "박해의 문"이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인들을 처형하고 순교하였던 에베소 원형경기장의 돌을 가져다가 세웠다고 한다.
로 130m 길이에 전면에는 나르텍스로 향하는 아트리움이 있었다. 3개의 회당이 있었으며 본당의 동쪽에 반원형태로 튀어나온 부분에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요한은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제자들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십자가 형태의 무덤을 파 그곳에 누웠고 아주 평온한 모습으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고 한다.
사도요한 무덤 표지석이다.
사도요한 교회의 지평도이다. 리만이라는 항구가 있었지만 시대별로 해안선이 달라졌음을 바란색으로 표시를 해놓았다. 바다가 멀어져 배가 줄어들었다. 곧 사도바울 당시 번창한 항구도시 였지만 카이스트로스 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바다와 멀어졌다.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시 하늘색 점선이 있는 곳까지 배를타고와서 그곳에 나 있는 해안도로를 지나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에베소 교회의 모형도이다. 큰 돔이 6개로서 십자가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에베소 교회에 대한 설명서이다. 십자가 형태의 모습이 선명하다.
사도 요한 기념교회의 침례터이다. 침례식의 중요성은 흐르는 물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침례터는 물이 흐를수 있도록 만들어지었다고 한다.
사도요한 기념교회의 침례터로 십자가 모양처럼 보이나 여자의 자궁과 같다고 한다. 침례의 의미는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 이므로 자궁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의미에서 이런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시신을 염하던 장소 바닥의 모자이크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반원형 성전
야야슬룩 성(거룩한 언덕)이라고도 하는 셀축성은 이즈미르-에베소 고속도로의 오른쪽 언덕에 자리잡고있다. 아랍군들에게 저항하기 위하여 7~8세기에 세워졌다. 지금은 군사지역이므로 들어갈수 없다.
4세기경에 목조로 지어진 작은 예배당이다. 예배당 안에는 예수님, 성모마리아, 사도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교회 장례식 터이다. 사도 요한이 죽고 이곳에 뭍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장례식을 치루고 뭍히길 원했을 것이다.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장소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4배의 크기이며 아데미 신전중 최고로 큰 신전이 있었으므로 7대 불가이중 하나였다고 한다. 폭55, 길이102, 높이 20미터 였다고 한다. 에베소의 사도요한기념교회는 이 아데미 신전을에서 나온 돌들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 복원도이다. 세계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것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리스인의 구전에 의하면, “지금까지 태양이 운행하는 중에 아데미 신전보다 더 훌륭한 것을 보지 못했노라”고 하는 격찬의 말이 있다고 한다.
아데미 여신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이다. 아데미 여신의 머리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성이 있고, 몸에는 특이한 사냥꾼 니므롯을 상징하는 사자, 호랑이, 사슴 등의 다양한 짐승들의 부조로 새겨져 있다. 매년 5월 아데미 여신의 축제날이 되면 유방과 같은 수의 24명의 흰 옷을 입은 여자 사제들이 앞에 서고, 뒤에는 자신의 고환을 아데미 여신에게 바친 남자 사제들이 여신의 호위병처럼 뒤 따른다.
에베소 교회를 순례하고 우리가 점으로 비빔밥을 먹었던 하나식당이다. 터키의 아시아지역에서는 유일한 한식당이다.
사도 바울은 2차 여행때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 놓고 떠난다. 그리고 3차 여행 때에 와서 약 2년을 두란노 서원을 중심으로 말씀을 강론하게 됨으로 에베소는 엄청난 부흥이 일어난다 (행19장). 이는 곧 데메드리오 소동을 불러 일으키게되고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떠나게된다. 에베소 교회는 이후 참으로 초대교회에서 많은 일들을 한것 같다. 그래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들의 행위와 사랑과 수고 인내 악한 것을 용납지 않음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고 착한 일을 한 공동체였다(계2:2-3). 그런데 한가지 꾸중을 듣게된다. 첫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처음 사랑은 그들이 사도바울의 복음으로 갖었던 행 19장의 신앙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데로 사랑의 열정이 어디서 어떻게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 후 에베소 교회는 페허가 되는 역사를 맞게된다. AD 50년도 되기 전에 강을 따라 흘러내려온 토사에 의해 더이상 항구의 기능을 못하게 되고 그 백성들이 도시는 떠나면선 자연스럽게 도시는 돌보는 이 없이 폐허가 되고마는 것이다. 빈 집은 아무리 잘 지어진 집이라도 낡아지고 결국은 폐허가 되듯이 말이다.
AD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스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또한 사도 바울도 그의 2, 3차 전도 여행에 에페스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64년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 에페스 교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럴때 사도 요한에게도 박해의 시대가 오게된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요한이 황제의 목표가 되어 로마로 잡혀 가게되었다. 로마에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전설에 의하면 사도요한에게 독한 독주를 주었는데도 먹고 죽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하나님의 보호로 여러가지 기적들이 있었고 그래서 당시 가장 험한 유형지인 밧모섬으로 유배되게 되었다. 이 일이 AD 95년경이다. 그렇게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1년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요한계시록을 쓰게된다. 당시 밧모섬은 들어가면 3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서 나오게된다는 악명이 높았던 섬이었다고 한다. 그 섬을 지키는 군인들도 포학하고 무법천치의 장소였다. 그는 대리석을 채취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계시록"을 쓰게 된다. 그런 섬에서 1년 6개월을 나이 많은 노인으로서 견디어 내었던 것은 하나님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험악한 섬을 점점 평화의 섬으로 바꾸어 나갔다는 것이 의미있다. 강팍한 섬의 간수들과 죄수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복음을 받아드리고 침례를 받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도미티안 황제가 죽고 이 황제의 치하에서 유형을 간 사람들이 풀려나게 되어 사도요한도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시의 에베소 감독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였다. 노예해방의 성경적 근거를 주었던 인물로서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세어 만나서 제자삼고 그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위해 편지를 쓴것이 성경의 빌레몬서이다. 그후 오네시모는 도망자 노예에서 훌륭한 신앙인이 되고 교회 지도자가 되었다. 디모데의 뒤를 이어 에베소의 감독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에베소교회는 현재 사도요한 기념교회로 지어졌지만 사도바울의 신앙의 영향을 느낄수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 여기서 돌아가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하게 모르나 전승에 의하면 110세 이상을 장수하시고 자연사 하셨다고 한다. 그 분의 말년의 설교는 사랑의 사도 답게 사로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셀축(Selcuk)지역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셀죽 성이 보이며 바로 조금만 들어가면 교회가 나온다. 아야소룩 언덕에는 성 소피아를 세운바 있는 유스티니아누스(527∼565년 재위) 황제가 건축한 요한 교회(The Church of St. John)가 있다. 4세기에는 그곳에 요한의 무덤이 있었고 작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십자가형으로 교회를 건축했는데 특별히 복음서의 제자들을 상징하는 네 개의 기둥과 상석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기둥을 사용하였다. 교회에는 요한의 무덤, 헌금저장소, 성화가 있는 방, 성찬을 준비하는 방, 침례터, 잘례식장 등이 있다. 요한 교회 뒤쪽에는 셀죽성이 있고 그 밑에는 이사베이 회교사원이 있다. 이사베이 회교 사원은 1375년에 건축된 전형적인 회교 건물이다. 본래는 두 개의 첨탑이 있었는데 17세기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펀글> |
성모마리아의 교회
네스토리우스(Nestorius)가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장이 나중에 소요를 이르키자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에페스에서 종교회의를 열 것을 명령해 약 200여명의 권위자들이 약 3개월에 걸쳐 토론한 끝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결정하고 파문시켰다.
이 교회는 원래 2세기에 지어져 고등교육기관으로 쓰여졌다가 4세기에 교회로 바뀌었다.
7인의 잠자는 동굴(카타콤베)
파나지르 다흐 동북록에는 `7인의 잠자는 자'의 카타콤베(Catacombs, 로마에 있어서의 초대 기독교도의 지하 매장소로서알려진 지하 구조의 유적 명칭)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데키우스(Decius) 황제의 박해시(A. D 250년경) 7명의 청년이 동굴에 갇혀 잠에 빠졌다가 겨우 데오도시우스 II세(Theodosius II, 480- 450)때에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깨어났다.
그들은 사후 그 동굴에 장사되고 그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다른 많은 성인들의 묘도 그리로 옮겨졌다.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7인의 잠자는 동굴
글.사진출처:blog.daum.net/sungh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