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정`말정 형제의 김천 입향 후 구성면 상원과 상좌원에 뿌리를 내린 연안 이씨 문중은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지낸 충간공 이숭원과 형조판서를 지낸 정양공 이숙기가 각각 공신록에 이름을 올리며 김천을 넘어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 매김했다. 이들을 포함해 연안 이씨 문중에서는 8명의 판서와 12명의 목사가 배출돼 명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조선 초기 명문가로 튼튼히 자리매김한 연안 이씨 문중의 후손 중에는 예를 중시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 커온 탓인지 충신과 효자`열녀가 많이 배출됐다. 김천의 연안 이씨 문중이 정착 단계를 넘어 세를 확장할 즈음, 조선의 가례를 집대성한 이윤적`이의조 부자의 삶과 임진왜란 당시 정절을 지키고자 목숨을 끊은 부인과 그 부인을 그리며 정자를 지은 이정복의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이정복과 화순 최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담긴 방초정
연안 이씨 정양공파가 대대로 살아온 김천 구성면 상원리 입구에는 연못과 어울려 그림 같은 풍광을 가진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방초정이라 불리는 이 정자는 방초 이정복(1575~1637)이 처 화순 최씨를 기려 건립한 정자로 임진왜란으로 부인을 잃은 애틋한 사연이 전해온다. 상원마을 출신으로 16세이던 이정복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하로마을의 동갑내기 화순 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다. 하로마을에서 1년간의 꿈같던 신혼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이정복은 새색시가 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복했던 신혼생활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최씨가 신행(新行)을 출발하기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 당시 친정 마을 가까이에 왜군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최씨는 죽어도 시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가가 위치한 상원마을로 향했다. 40여 리 산길을 걸어 왜군의 눈을 피해 시가에 도착했지만, 시댁 식구들은 모두 피란을 떠나고 빈집만 남아있었다. 수소문 끝에 선대 묘소가 자리한 능지산에 피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쪽으로 향하던 중 왜군과 마주쳤다. 최씨는 '왜군에게 겁탈당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건질 바에야 깨끗하게 죽는 이만 못하다'며 여종 석이에게 자신이 입었던 옷을 건네며 부모님께 전해주기를 당부하고 자신은 명의(죽은 사람이 입는 옷)로 갈아입고 웅덩이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이때 여종 석이도 주인을 구하려다 함께 빠져 죽으니, 사람들이 이 웅덩이를 '최씨담'(崔氏潭)이라 불렀다. 훗날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확장해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號)를 딴 정자 방초정을 세웠다는 것이다.
화순 최씨에게는 1632년(인조 10년) 정려가 내려졌는데, 당시 인조 임금은 직접 쓴 정문을 하사했다. 1764년에 정려문을 세웠으며, 1812년 여각을 증축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려각 내에는 '절부부호군 이정복 처 증숙부인 화순 최씨 지려'(節婦副護軍李廷馥妻贈淑夫人和順崔氏之閭)라 새겨진 인조 임금의 친필 정려문이 걸려 있다. 세월이 흘러 1975년 최씨담 준설 공사 도중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라 새겨진 작은 비석이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다름 아닌 최씨 부인을 구하고자 웅덩이에 뛰어들었던 종 석이를 기리는 비석이었다. 절개를 지키고자 목숨을 버린 어린 신부를 향한 남편 이정복의 절절한 사랑과 함께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시대에 노비를 위해 비석을 세워주었던 이씨 문중의 마음 씀씀이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다.
◆2대에 걸쳐 집대성한 예학서 '가례증해'(家禮增解)
1794년, 상원마을 연안 이씨 문중 명성재에서 갓 완성된 '가례증해' 목판을 쓰다듬는 노인의 눈에는 어느새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아버지가 편찬을 시작해 2대에 걸쳐 완성된 목판은 아버지와 그의 일평생이 담겨 있었다. 영남 노론 학단을 대표하는 예학자로 불리던 경호 이의조(1727~1805)는 아버지 이윤적의 유업을 이어받아 '가례증해' 편찬 작업에 착수해 13년에 걸쳐 10권에 달하는 책을 완성했다. 1772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이후 1792년 '가례증해' 판각 작업을 시작, 3년 만에 완성해 일생의 숙원을 매듭지었다.
이윤적(1703~1757)은 숭례처사로 불릴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삶을 살았다. 이윤적은 관혼상제례의 전국적 예식 차이로 말미암은 국론의 분열을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그는 예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수집`해설해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자가례를 널리 보급하고자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수집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가례 해설서인 '가례증해' 편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초고만 작성해둔 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757년 5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의조에게 '가례증해' 완성은 평생의 숙원이 됐다.
'가례증해' 완성을 위해 그도 예학자의 삶을 살았다. 중거 성이홍(?~1750)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운평 송능상(1709~1758) 등과 교류했으며, 당대 석학이었던 병계 윤봉구(1681~1767), 김훈, 성담 송환기(1728~1807) 등과 교유하며 학문적 역량을 키웠다. 예학에 전념한 지 수십 해, 그의 나이 서른을 넘어 학문적인 역량이 갖춰지자 그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가기로 했다,
당시 조선의 예학은 17세기 무렵에 기반이 마련된 후 18세기부터는 그동안 미비했던 변례 부분과 조선사회에 맞는 예제를 절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가례증해'는 당시의 흐름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예서다. 즉 행례의 편의라는 측면에서 '상례비요'를, 고증과 훈고라는 측면에서 '가례집람'을, 변례의 정리라는 측면에서 '의례문해'를 집성했다. 행례와 고증과 변례를 한 권의 책에 집약해둔 '조선판 가례의절'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조정은 이의조의 학문적 공적을 인정해 72세 때인 1799년 공릉참봉을 제수했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이의조는 1805년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사후인 1824년 '가례증해'가 전국에 반포됐다. 현재 '가례증해' 목판은 김천 구성면 상원리에 있는 숭례각에 보관돼 있다. 이의조의 대표저서로는 '가례증해' 외에도 '의요보유' 2책과 '경의수차' 4책 등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