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에서 5일(4-2)
(동자원과 동자사당)
瓦也 정유순
4-2. 동자원과 동자사당(2023년 8월 5일)
산동성박물관을 둘러보고 제남시에서 중국의 유학자 동중서의 유물을 보기 위해 덕주시로 이동한다. 덕주(德州, 더저우)는 중국 산동성에 위치한 지급 시이다. 산둥성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제남, 서남쪽으로 료성(聊城, 랴오청), 동쪽으로 빈주(濱州, 빈저우)와 접하고 북쪽으로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과 접한다. 덕주시는 2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대 문명도시로 내륙성 계절풍으로 사계가 분명하며 인구 약 530만 명에 이른다.
<덕주(더저우)시 위치도>
제남(齊南)에서 버스로 약 두 시간 달리면 덕주시에 도착한다. 이동 중에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황하(黃河)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복숭아밭이 쭉 뻗어 있는데, 아마 이곳이 복숭아가 특산물 같다. 한편으로는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은 곳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본다. 황하는 곤륜산맥에서 발원하여 장장 5464km를 흘러 산동성 북쪽 발해(渤海)로 흘러든다.
<황하>
도착하여 처음 찾은 곳은 동자원이다. 동자원(董子苑)은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조성한 호수공원 같다. 주변에는 한(漢)나라 때 유학(儒學)을 발전시킨 동중서(董仲舒)를 기리기 위한 조각들과 유물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어 배치되어 있다. 마침 내리는 보슬비는 그동안 흘렸던 땀자국을 씻어준다. 호수주변으로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한 숙박시설 같이 보이는 건물들이 구색을 갖춰 늘어서 있다.
<동자원>
호수 주변의 인물상들은 변발(辮髮)한 모습을 볼 때 청(淸)나라 시대 사람들로 보인다. 산책로를 따라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동자서원(董子書院)의 관계자가 나와 안내에 따라 기념관관으로 들어간다. 기념관 입구 마당에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동중서의 동상이 의연하게 서있고, 그 앞에는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태극(太極) 문양이 그려져 있다. 중국이 태극과 팔괘(八卦)를 이용한 조형물 등을 볼 때마다 우리 태극기의 뿌리가 의심스러워진다. 분명히 할 것은 우리의 근본을 되찾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동중서상과 태극문양>
동중서(董仲舒)는 생몰(生沒)연대가 불분명하나 진시황 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학문을 없애버린 시기이고, 6경(經)이 지리멸렬해진 시기인 BC 170년경에 출생하고 BC 12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동중서는 휘장을 내린 채 열심히 학문을 닦아 큰 사업에 마음을 기울였으며, 훗날의 학자들이 통일된 길을 걷도록 하고, 모든 유학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동중서상과 동자기념관>
당시에는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위(無爲)를 정치의 기본원칙으로 삼고, 관리는 백성들에게 가급적 간섭하지 않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이 주류를 이루었고, 왕실 사람들은 불로장생을 하고자 도가의 술사들에게 관심이 더 컸었다. 한편 공자에서 비롯되는 유가(儒家)는 진나라 때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겪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중국의 최대 학파 중 하나의 저력을 갖고 있었다.
<동자원 호수>
실제로 한고조 유방은 “천하를 다스리려면 인의와 예악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유교적 예악(禮樂)을 정식 채택 했으며, 한문제(漢文帝) 때는 “진(秦)나라는 힘과 형벌로 위협하는 정치를 해서 일시적으로 천하를 굴복시켰으나 원한과 반발이 일어나 오래 보존하지 못했다며, 우리 한나라는 예의와 도덕에 따라 백성을 어루만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유가적 이상을 주장하는 사상이 중심에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동자서원 표지>
BC 141년에 즉위한 한무제(漢武帝)는 유학을 공부한 중신들을 가까이하였으며, 이때 동중서가 나타난다. 그는 3년 동안 장막에 들어앉아 공부에 몰두하느라 가사는 팽개치듯 했고, 행동 하나하나를 예법에 맞게 하여,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았으며 여러 제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제자 중에 선배가 후배를 가르치도록 하여 신입생은 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스승의 얼굴을 한 번 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동자서원>
<공부에 몰두하는 동중서>
동중서는 한경제(漢景帝) 때 박사의 직위를 받아 관직에 들어가지만, 뒤를 이은 한무제 때 정치의 올바른 지침에 대해 널리 대책을 써 올린 “천인삼책(天人三策)”이 채택되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한무제가 유교를 본격적으로 장려하여 오경박사를 두고 명당과 태학을 설립하는 등 유교 국교화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무제에게 '천인삼책'을 올리는 장면>
그러다가 동중서는 한무제에게 불경죄를 저질러 사형을 선고를 받았으나, 얼마 후 사면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 그 뒤로는 집에 들어앉아 죽기까지 학문과 교육에만 열중하였다. 사마천은 그의 라이벌이었던 공손홍(公孫弘)에 대해서는 따로 열전을 마련하여 그의 정치적 비중을 인정했다. 그러나 동중서의 기사를 마무리하며 “한나라가 일어나 다섯 임금을 거치는 동안 [춘추]에 능통한 사람은 오직 동중서 뿐이었다.”라고 하여, 학문에 있어서는 동중서가 공손홍보다 뛰어났음을 밝혔다.
<동자기념관>
동중서가 후대에 영향을 미친 것 은 이른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다. 이는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이 마치 거울에 비친 듯한 상관관계가 수립된다는 설이다. 동중서는 음양가의 이론을 유교에 채용하여 세상 만물은 모두 음양오행의 규칙에 따른다고 보았다. 목금화수토(木金火水土)의 오행은 동·서·남·북·중앙의 오방(五方), 청·백·적·흑·황의 오색(五色) 등 물리뿐 아니라 인·의·예·지·신의 오덕(五德) 등 사회적 질서도 규율한다.
<인(仁)>
원래 춘추시대의 유가(儒家)는 자연이나 초자연의 문제를 거의 논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만을 다루었고, 음양가(陰陽家)는 사회적 문제보다 자연의 물리에 집중했는데 동중서는 이 두 관점을 하나로 합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런 결합은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여겨지는 결론에도 이르러 천인감응설이 언제나 철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의(義)>
그러나 그 원칙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전해졌고, 유교적 정치사상에도 반영되었다. 조선시대의 왕들이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과인이 정치를 잘못해서 우주의 질서가 어긋났기 때문”이라며 반성하는 뜻에서 반찬을 줄이고 음악을 듣지 않았던 것도 이 천인감응설에 근거한 관행이었다고 한다.
<예(禮)>
이처럼 동중서의 사상은 수직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정당화했으며, 비과학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자연과 사회를 혼동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다. 정치는 지배계급이 사치와 방종에 빠지지 않고, 도덕의 원칙과 대의명분에 맞는 정치를 하도록 하였다. 천인감응론은 자연과 사회는 잘 조화가 이루어진 세계여서 과도한 토목공사를 벌여 산과 강의 모습을 바꾸거나 특정 계층에 부를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
<지(智)>
결과적으로 그것은 일종의 인도주의와도 연결되었다. 옛날에는 사형을 가을에 집행했다는데, 계절 중에 금(金)에 해당하는 가을에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생명이 스러지게 해야 오행의 조화를 깨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뭄이나 홍수가 있으면 가벼운 범죄자들을 사면하고 심리 과정에서 억울함이 없도록 조심했는데,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의 울분이 음기가 되어 양기를 침범함으로써 천재지변이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신(信)>
동중서가 기초를 잡은 옛 동양의 사상체계에 비해, 오늘날의 우리는 훨씬 복잡하고 더 현실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보다 합리적인 사회질서 속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까? 지구의 양극지방에서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빙하가 녹아내리는 상황에서 모든 생태계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사상체계가 더 이롭고 해로울 것인가?
<동중서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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