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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눅 15:1-7)
영국 런던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답니다. 그곳은 유명한 웨스터민스터사원입니다. 이곳은 고딕양식으로 지은 영국 성공회의 성당입니다. 그런데 이 사원을 방문하는 방문객들 입에서부터 오래된 한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방문객들이 이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들을 맞아준 한 안내자가 있었습니다. 이 안내자는 사원에 대한 역사적인 내력과 그리고 무덤에 묻혀있는 지나간 세기의 믿음의 영웅들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또 현재 그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끝나고 난 후 방문객들에게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지요. 이때 미국에서 이곳을 방문한 여신도가 안내자를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질문이 유명한 일화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이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대해 잘 설명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질문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최근에 이 교회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이 뜻밖의 질문에 대답이 준비되지 않았던 안내자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 일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이냐의 질문입니다. 찬란한 역사와 화려한 외형은 자랑하지만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인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십니까?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비유의 동기와 배경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시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저들을 환영하고 함께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와같은 행동에 대해 비난하고 책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나 죄인들을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천민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이란 율법을 최고의 법으로 알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세리와 죄인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일체의 만남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과 만나고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앞에서 "잃어버린 양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잃은 양인 세리와 죄인들을 무가치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을 잃은 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돌아옴이 하늘의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은혜받고, 교훈받기를 원합니다.
1.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나라는 원래 목축업이 성한 나라입니다. 목자는 양을 끌고 하루 종일 풀을 찾아다니며 양을 먹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 목자는 양떼를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그런 다음 우리 문 앞에다 막대기를 걸쳐놓고 한 마리씩 그 막대기 밑으로 통과하게 합니다. 모든 양들은 차례를 기다리다가 목자가 들어가라고 하면 한 마리씩 들어갑니다.
이때 목자는 막대기 밑으로 통과하는 양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풀은 잘 뜯어 먹었는지, 병이 나지는 않았는지 따위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또 그 수를 일일이 세면서 들여보내기 때문에 돌보던 양이 백 마리면 마지막에 백으로 셈이 끝나야 맞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목자는 우리 문을 잠그고 집으로 쉬러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일이 양의 수를 헤아려 가며 전부 우리로 들여보내고 나니 백 마리여야 할 양이 아흔아홉 마리 밖에 없는 게 아닙니까?
한 마리가 모자랍니다. 잘못 세었나 싶어 전부 끌어내서 다시 세어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마리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때부터 목자의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 양에게 있지 않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캄캄한 밤에 혼자 떨어져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벌벌 떨며 헤매고 있을 잃어버린 그 한 마리 양에게 온통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 양을 찾아야 합니다. 목자는 집에 돌아갈 생각도 잊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피곤하고 배고프다는 것도 잊은 채 막대기 하나만 들고 양을 찾아 길을 나섭니다. '오늘 우리가 어느 골짜기, 어느 언덕을 지났더라?'하고 기억을 더듬으면서 오던 길을 되짚어 잃은 양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을 때까지 밤새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닙니다. 양은 목자의 소리를 가장 잘 알아듣습니다. 행여 그 양이 어느 곳에 있든지 목자의 소리를 듣고 응답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백마리 가운데 한 마리이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마음은 그러지를 못합니다. 온통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 마음이 쏠려 있습니다. 단지 마음이 가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한 마리에 목숨을 겁니다. 우리의 눈과 가치관으로 보면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목자는 99마리를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이 목자의 사랑은 양 한 마리에 최고의 가치를 둔 사랑이고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잃어버렸던 나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이 땅에 찾아오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온다. 복음서에 보면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양을 찾으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이라는 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땅 사람들은 이방민족과 피가 섞인 혼혈족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경멸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땅에 가셨습니까? 그 땅에 살고 있는 미천한 여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조차 경멸하던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받던 죄 많은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비난을 무릅쓰고 그곳에 가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은 어느 날 여리고 땅을 지나가셨습니다. 주님이 그 곳에 가신 이유도 바로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의 대표자였던 세리장 삭게오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들과 한 통속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비난당하는 것 정도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당신의 목숨보다도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이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 부으십니다. 그 주님은 여러분을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젖먹이는 어미가 자식을 잊어버리는 일이 생길지는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시고 그 사랑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나는 과연 한 영혼을 마음을 다해 깊이 사랑하였습니까? 그 영혼 살리기 위해 나는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고 찾아 나섰습니까? 진정 사랑하신다면 이웃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추운겨울에 아파서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는 따뜻한 국 한 그릇이라도 대접해 보십시오.
위로가 필요한 자에겐 진심어린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힘들고 어려운 자들에겐 작지만 도움의 손길을 뻗치시기 바랍니다. 그런 작은 관심과 사랑이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고 결국 그 영혼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4절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목자가 찾고 있는 양 앞에는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 양은 그 양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반드시 그 양을 찾아야 합니다.
양을 찾아 헤매다가 목자는 들에서 비슷한 양을 만났다고 만족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가 찾고 있는 그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양은 다른 양으로 대치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의 양이라도 다른 양으로는 안됩니다. 목자에게는 지금 잃어버린 그 양 한 마리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자녀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래서 고아원에 가서 나이가 같은 아이 하나를 대신 데려와서 키운다고 마음에 위로가 되고 만족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내 아이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내 아이를 찾아야 비로소 먹을 수 있고 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부모입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전에는 낮에도 밤에도, 꿈속에서까지도, 그 자식의 환상이 부모의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래서 찾을 때까지 찾는 것입니다.
오래 전이지만 대구의 '개구리 소년들'이라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뒷산에 개구리 잡으러 갔다고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당시 대통령까지 나와서 담화문을 발표하고, "반드시 찾읍시다" 하며 부모들을 격려했습니다. 그 소년들 가운데서 김종석이라는 학생의 부모는 아들을 찾고자 남달리 몸부림치면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날마다 아들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를 들고 대구역에 나가 아들을 본 사람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아버지는 생업을 포기하고 1톤 짜리 트럭에 아들의 포스터를 붙이고 전국을 누비면서 수 년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홧김에 술을 마시고 자포자기하며 살다가 그만 간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들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기쁜 소식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그동안의 아픔과 슬픔과 눈물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것만큼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1년만에 실종된 곳에서 멀지 않은 맞은편 산에서 유골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게 찾았지만 보이지 않더니 결국은 유골로 발견되고 만 것입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영적으로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찾지 못하다가 마지막 영원한 불못에서 발견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 말씀을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곰곰이 묵상하면서 읽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개구리 소년들의 부모들과 비교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자신을 모르고 세상에서 제 맘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돌아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제 맘대로 방탕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한 체 자기 잘난 맛에 살면서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죽기까지 하시면 구원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누굽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남의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이 전도의 첫 출발입니다. 하나님이 애틋하게 사랑하는 영혼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사랑하는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앞에 데려가는 것이 마땅할진대 그것이 바로 전도의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을 온 천하와도 바꾸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마 16:26) 말씀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래서 찾을 때까지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사명입니다. 험준한 골짜기를 뒤지며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아 다닙니다. 계속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새벽에도 찾았을 것이요, 하루 이틀에 찾지 못하면 한 주간, 아니 할 달도 찾았을 것입니다. 아니 평생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전도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한 번 전도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양을 추적하여 마침내 찾았습니다. 목자의 집념이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념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3.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고 크게 기뻐하십니다.
(5,6절)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이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과 양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1) 찾아낸즉, "즐거워"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돌아왔을 때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하면서 기뻐했습니다(눅23:43).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목자가 찾은 양을 어깨에 멘 이유는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요 양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을 너무나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전설에는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온 일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양에 대한 애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의 양인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3)"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6).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더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성도 여러분, 잃은 양을 찾읍시다. 우리 집 안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우리 이웃에 잃은 양은 없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손을 통하여 찾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잃은 양들입니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지옥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가 없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면 천국의 큰 기쁨이 됩니다.
일본 동경에 19세된 소녀가 홀아버지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 처녀는 독실한 신자였는데 그 아버지는 강도질을 하는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처녀는 시간 있는 대로 아버지에게 전도하며 예수 믿으면 죄를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권면하나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후 수단으로 결심하고 유서를 써서 호주머니에 넣고 기다리다가 아버지가 칼을 가슴에 품고 나가는 것을 알고 뒤를 따라갔습니다.
시부야 공원으로 가서 숲 속에 숨은 것을 보고 변장하고 가방에 유서를 집어넣고 보자기를 쓰고 아버지가 숨어 있는 앞을 구두소리를 내면서 지나갔습니다. 숨어있던 강도는 그 여자를 찌르고 가방을 낚아채 가지고 도망쳤습니다. 집에 와서 가방을 뒤져보니 딸의 유서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불효한 딸의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오늘 밤 아버지가 죽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으로 모시는 길은 이길 밖에 없는 줄 알고 남의 자식을 죽이면 그 부모의 가슴 아픈 것을 얼마나 고통인가를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지요. 나는 지금 죽어도 천당에 갈 준비가 되어 있기에 최후로 이 길을 택하였오니 저를 자식으로 아시거든 불쌍하다 마시고 회개하시고 예수 믿으시고 천국에서 기쁜 낯으로 만납시다. 안녕히계세요”
이 유서를 읽은 아버지 강도는 입술을 깨물고 통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편지를 움켜쥐고 경찰서로 뛰어가 ‘그동안 강력 범죄를 한 자가 바로 나입니다’하고 딸의 사연과 같이 자수를 하게 되어 회개하고 무기징역을 받아서 20년간 복역하고 모범수로 나와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귀한 믿음의 딸의 모습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생명 걸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당신의 생명 걸고 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혼은 누구입니까?
미국 대통령을 지냈던 부시는 56세에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40세까지 탕자였다고 합니다. 20세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하여 극심한 알콜 중독자, 바람둥이에다 마약까지 복용했다고 합니다. 부시가 40세 되던 해, 친구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데 한 친구가 전도를 했습니다. 부시는 그 자리에서 교회에 한번 나가 보겠다고 술에 취해 약속했습니다.
부시는 그 약속대로 그 다음 주에 교회에 나갔는데, 그 후 술을 마시면 온몸이 마비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부시는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떻게 술을 끊게 되었느냐고 기자들이 묻자 부시는 “내가 끊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마시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끊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 힘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부시는 교회에 나와 새사람이 되었고, 탕자에서 대통령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할 때 이러한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읍시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우리 주변을 돌아보시고 내게 붙혀준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십시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 종말을 맞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사명,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내가 진짜로 사랑하는 내 가족들, 내 이웃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서 생명을 구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