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시인의 시집 『사과나무 독해법』
악력
권정희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
제9회 3·1절 만해백일장 대상(1988년)
광진문학상 시조 대상(2014년)
『시와소금』 신인상 당선(2015년)
시집 『별은 눈물로 뜬다』 (2016년)
천강문학상 시조 대상(2016년)
한국예총 광진지부 예술인상 수상(2019년)
시집 『배롱나무 편지』 (2022년)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2023년)
시조집 『사과나무 독해법』 (2025년)
asim3400@daum.net
시인의 말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그러나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몸을 떠난 수많은 질문들
겨우 말 하나를 바깥에 두고
눈 위에 언어의 함성으로 발자국을 찍는다
결코 슬픔이 아닌
2025년 1월
권정희
늙은 사과나무 독해법
아무도 읽지 않는
비탈길에 사과나무
침묵으로 들끓는 야윈 어깨 다독이며
온몸에 푸른 숨결을 후후 불어 넣는다
식어가는 봄 한때
홀로 건너는 저녁 무렵
꽃들의 안부를 묻는 바람에도 서글퍼져
눈물로 떠나는 봄을 세상에 배웅한다
산다는 건 어둠 속에 등불을 켜 드는 일
가슴에 들어앉은 슬픔의 뼈마디로
밤하늘 별의 눈물을 살에 새겨 보는 일
아직도 못다 쏟은 붉디붉은 문장들
공으로 이르는 길, 없어도 있는 길을
깊어진 눈빛만으로 훠이훠이 가고 있다
화성 용연에서
저 달을 잡고 싶어 바람을 따라왔다
서성이는 잠시 동안 움찔 귀를 세우는 건
반야의 문으로 나온 이무기의 호흡인가
연잎과 왕버들의 속삭임에 묻히고도
지금은 전설로 남은 웃는 얼굴이 슬픈 짐승
피안의 수레 굴리며 세월을 낚고 있나
어둠이 짙을수록 가슴이 떨리는 건
내 것이 아닐 것 같은 내일이 있어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이무기의 울음처럼
고요히 휘몰아치는 도톨한 감정들을
식은땀 흘려가며 끌어안고 여무는 밤
이무기 숨을 모아 쥔 여름도 깊어간다
타지마할
야무나 강가에서 타지마할을 보았다
아내를 잊지 못해 조성한 찬란한 묘
궁중에 떠 있는 듯한 신비감이 서려 있다
경배하듯 늘어선 사이프러스 앞에는
슬픔이 가만 멈춰 연못 속을 비추는지
우뚝 선 흰 울음 궁전 꿈을 꾸듯 환하다
사랑의 그 무게가 얼마나 깊었으면
긴 세월 이어 이어 그 마음이 빛이 날까
영롱한 별을 품은 듯 모두 숨을 멈춘다
노을이 낯선 나를 가로질러 가는데
정원의 텅 빈 고요가 자꾸 따라붙었다
이별은 기다림의 뼈 주술처럼 풍기며
*인도 아그라Agra의 남쪽, 야무나yamuna 강가에 자리 잡은 궁전 형식의 묘지.
아래층 여자
붉은 독이 가득한 한 여자가 있었다
통과할 수 없는 봄을 가슴으로 끌어와
수시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하였다
충혈된 눈빛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는
그 여자의 집에는 거센 바람뿐이었다
밤이면 잠들지 못해 독을 세워 울었다
절벽에서 내리는 폭포의 비명 같은
그녀의 울음들이 살아 숨 쉬는 밤
모두가 물에 잠긴 채 귀를 막고 울었다
미르*, 별을 빚다
임오년** 윤오월의 그대 숨결 보듬는다
뒤주 속 울음들이 긴 시간을 거슬러 와
총총히 잔별로 뜨는 고궁의 한여름 밤
망와에 걸린 달, 회화나무 노거수도
사도의 피륙 한 벌 가슴에 묻은 건지
제 속을 비우고 비워 활처럼 휘고 있다
흙바람에 길을 트는 사초 적신 돌층계에
겹겹이 배어 나는 그날의 그 울림을
누군가 밟고 오는지 목이 메어 돌아온다
빛 뿌리는 한마디 말 재가 되어 사라져도
떠나며 남긴 이름 뜨겁게 살아남아
날 선 칼 천강***에 세워 은빛 사리 빚는다
*미르: 용의 옛말.
** 윤오월: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해. 1762년을 말함.
*** 천강: 별자리 이름. 28수 가운데 혜성에 속함.
해 설
사계절을 관통한
바람의 울림으로 노래하다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
권정희 시인이 세 번째로 이 세상에 펴내게 된 시조집의 이름이 『사과나무 독해법』 이다. 이 시조집은 특이하게도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이 약력에서 밝히고 있듯,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은 서울인데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곳은 시인의 영혼이 부유하고 있는 경북 영양인 듯하다. 하늘 아래 펼쳐져 있는 전통적 서정의 배경이 되는 삼라만상의 모습을 이렇게 유심히 관찰하여 표현하다니, 감탄하면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2024년인 지금 우리나라는 기상이변이 와서 흔히 봄하고 가을은 너무 짧고 여름과 겨울은 너무 길다고 하지만 시인이 어렸을 때는 사계절이 뚜렷했을 것이다. 그 계절의 변화와 각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인은 낱낱이 살펴보고 그녀(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오는 상실감과 방황과 고뇌, 슬픔을 단시조와 연시조에 담아 노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조집 『사과나무 독해법』은 아주 드문 생태환경을 노래한 시조집이다. 또한 자연과 인간이 형상화되어 서정적 자아의 주관화된 내면과 공존하는 시조집이기도 하다.
해설 지면의 편의상 시 본문에서는 각 행이 연으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인용할 때는 몇 편 붙여서 쓰는 것을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소감의 글을 써볼까 한다. 제일 첫 번째 작품은 민들레의 발화를 다룬 것이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약속한 건 없지만
민들레 발목이 건너는 이 봄
숨소리 들리지 않게 다가서는 발자국들
-「발화發花」 전문
민들레는 봄이 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시인은 봄이 왔다는 것을 "민들레 발목이 건너는 이 봄"과 "숨소리 들리지 않게 다가서는 발자국들"로 얘기해주고 있다.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온 천지에 민들레가 피어 있어서 새삼 놀랐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있다. 민들레는 특히나 씨가 어디든 날아가 뿌리를 내리는 놀라운 생명력을 발산하는 봄의 전령이다.
추천사
한분순 (시인·한국시조시인협회 명예이사장)
이지적인 미학과 다정한 선문답의 입체 서정
오묘하게 획득된 예지와 감각 문체를 편직하여 권정희는 『사과나무 독해법』 으로 시조의 멋을 증강한다. 대자연 야생 활기와 연대기적인 철학을 현대인들 삶에 다정히 잇는 탄성 어법이다. 서정을 응축시키면서 안정과 비약을 넘나드는 섬밀한 서술의 텍스트성이 유려하다. 곁들인 것은 정형 미학을 탄력적으로 구현하는 남다른 형식 율감이다. 계절마다 깃든 신비와 감응하며 실존의 애틋함을 포옹함으로써 번뇌를 다스리는 우아한 결기가 있다. 풍경은 스스로 이미 위대한 문학이기에 그로부터 완벽 필력에 닿는다. 그 문장으로 밝은 별을 켜는 듯한 설법의 우주 속에서, 권정희는 연인이듯 또 구원처럼 기예롭게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