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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의 길 1 -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만들자
공동체는 오늘날 사회가 궁구하는 화두 중 하나이다. 곳곳에서 공동체들이 생겨나지만, 또한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다. 결코 쉽지 않으나, 진정 살아있는 공동체 건설이 시급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함께 모였다고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중심을 향하여 다양성의 일치를 이뤘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서로 좋아한다고 공동체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방향과 중심이 같아야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수도원 역시 공동체이다.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학원’(RB 머리, 45)이고 수도승들은 모두 이 학원의 학인(學人)들이다. 모든 학인이 주님 한 분을 섬기기 때문에 공동체의 항구한 일치가 가능하다.
그렇기에 베네딕도 성인은 이렇게 가르친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RB 4,21)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안에서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RB 4,72)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RB 72,11) 내 삶은 물론 공동체의 중심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거나, 삶의 중심에 놓아서는 안 된다. 수도승들은 물론 많은 현대인들이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중심 없이, 생각없이, 영혼없이 자기를 잃고 살아가기에 문제이다. 작금昨今의 입시위주 학교 교육도 이런 ‘자기’ 없는 인간을 양산하는 추세다.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는다면 그 세상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수도승들에게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는 것은 영혼없이 살아가는 것과 같아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리스도는 수도승은 물론 수도공동체의 중심이자 영혼이다.
‘참 나’를 살기 위하여, 또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를 우선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면 저절로 섬기기 마련이다. 이런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 섬김이다. 수도승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며,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다. 믿는 이들은 모두 영적으로 주님의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우리를 섬기러 왔던 주님에 대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응답이다. 이를 깨달아야 기쁘게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우리의 유일한 참 스승은 그리스도 예수뿐이다.(마태 23,8)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3ㄴ-45) 평생 종과 섬김의 영성을 몸소 살았던 주님이었다. 하늘 높이 올라가야 만나는 지고한 주님이 아니라 땅 낮은 곳에 내려와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아야만 만날 수 있는 겸손한 주님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섬기면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학원공동체가 바로 수도공동체이다. 이를 두고 오늘날의 학교제도로 생각하기보다는 자발적 모임의 배움터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수도승들은 이 배움터에 평생 정주하면서 주님 섬기는 법을 공부해야 하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학인들일 수밖에 없다. 나이가 바로 학년이고 죽는 날이 바로 졸업이다. 수도승의 공부 목표는 단 하나,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이다. 하여 주님과 주님의 뜻을 잘 알아야 주님을 잘 섬길 수 있기에 주님을 알아가는 평생 공부는 필수이다.
주님을 섬긴다는 표현은 막연한 게 아니다. 진정 주님을 섬기는 삶은 수도승들의 모든 수행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이며 좋은 수도원은 주님을 섬기는 분위기가 가득한 학원공동체이다. 결국 침묵, 기도, 노동, 성독(聖讀), 절제 등 모든 수행은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한 방편들이다. 특히 사순절은 각자에게 적절한 섬김의 분량인 절제의 수행에 힘써야 할 때이다(RB 49.5).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수행은 매일 참여하는 공동기도 시간이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RB 43,3)는 말씀대로 수도승들에게 주님을 위한 섬김의 의무(RB 16,2)는 먼저 공동기도인 미사와 성무일도이다. 활동의 섬김에 분주했던 마르타(루카 10,41)보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함으로 주님을 잘 섬겼던 마리아(루카 10,39)처럼, 주님의 말씀을 새기는 공동기도가 참으로 중요하기에 규칙서의 많은 부분(RB 8-20장)도 공동기도에 할애되고 있다. 비록 여행 중 홀로 있게 되더라도 섬김의 분량인 기도에 소홀해선 안 된다(RB 50,4). 공동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소통은 물론 형제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져 공동체의 화해와 일치도 촉진된다. 특히 매일 거행하는 미사를 통해 형제들은 모두 정성껏 주님을 섬기며 주님 역시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섬긴다.
주님을 섬김은 형제들을 섬김으로 표현된다. “형제들은 서로 섬길 것이며(RB 35,1) 모든 것에 앞서 모든 것 위에 병든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RB 36,1). 참으로 그리스도께 하듯이 그들을 섬겨야 하며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맞아들여야 한다(RB 53,1).” 이처럼 수도승들은 서약한 거룩한 섬김 때문에 장상과 형제들은 물론 특히 병약한 형제들을 섬겨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학원인 수도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운 복음적 공동체인가! 그러나 세상에 이상적인 공동체는 없다. 수도공동체 역시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상적 섬김의 공동체를 향해 여정 중에 있는 수도공동체이다. 성 베네딕도는 그의 규칙서에서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학원공동체의 설립을 위해 평생 배워야 할 마음가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수도승들은 지극히 열렬한 사랑으로 이런 열정을 실천할 것이다. 즉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며,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고 하느님을 사랑하여 두려워할 것이며, 자기 아빠스를 진실하고 겸손한 애덕으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RB 72,3-12).”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수도원에서 평생 주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주님의 학인들로 살아가는 복된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다.
성 베네딕도의 길 2 - 하느님의 일(Opus Dei)
수도승의 하루일과는 성당에서 시작하여 성당에서,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찬미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난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 수도승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마친 수도승들은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라는 찬미가와 더불어 끝기도를 바친 후, 장상의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강복을 받고 잠자리에 든다. 전통적으로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라 하며, 수도승은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불리며, 수도승의 기도를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 일컫는다. 하느님은 수도승의 존재이유이자 수도승 삶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왜 기도하느냐 물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살기 위하여’ 기도한다고 대답한다. 이보다 간명하며 적확한 대답도 없을 것이다. 살기 위하여 기도하니 수도승의 기도는 간절하고 절실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을 찾는 열정과 사랑은 저절로 기도로 표현되기 마련이며, 기도를 통해 수도승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행복의 원천이며 수도승을 살게 하는 힘이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수도승은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이 인지한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잃어버릴 때, 영혼은 허무의 어둠 속에 무너져 내리고, 온갖 영육의 질병들이 뒤따라온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기도, 특별히 공동체가 마음 모아 바치는 공동기도는 참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장이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는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RB43,3)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사실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많은 부분(RB 8-20장)이 하느님의 일인 공동기도에 할애된다. 수도승들에게 공동 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는 하루의 질서를 잡아주고 공동체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일용할 양식이다. 때때로 “답답한 수도원에서 도대체 무슨 맛으로, 무슨 재미로, 무슨 기쁨으로 살아가느냐”는 신자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하느님 찬미하는 맛으로, 재미로,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아마 이보다 더 좋은 대답도 없을 것이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승들이기에 수도승들을 ‘찬미의 사람’이라 부른다.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기도인 하느님의 일은 수도승을 살게 하는 힘이다. 매일 하느님의 일이 거행되는 성당은 ‘하느님의 노래방(?)’이다. 노래방에서 세상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풀고 나서 개운하게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듯이, 수도승들은 하느님의 노래방인 성당에서 하느님 찬미의 기도를 노래로 바치며 영육의 긴장을 풀고 기쁘게 공동체 생활을 한다. 수도원이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라면, 공동기도는 그곳에 끊임없이 시원하고 맑은 물을 대주는 원천이다. 수도승들은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를 바치면서 세상을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한다. 더불어 하느님을 중심으로 수도공동체의 일치도 견고해지며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도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도원에서 ‘기도의 샘’이 마르고, ‘기도의 불’이 꺼지면 세상은 온통 말 그대로 황량하고 어두운 사막이 될 것이다.
수도승들의 공동기도는 찬미와 감사의 양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 올라간다. 하느님을 찬미하려 해도 끝이 없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려 해도 끝이 없다. 반대로 매사에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려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찬미와 감사의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다. 수도승들의 공동기도, 즉 성무일도는 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진정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자라면 누구나 필히 바쳐야 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다. 행복은 선택이다. 찬미와 감사를 선택하면 인생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바뀌어 행복이 찾아오지만, 불평불만을 선택하면 인생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뀌어 불행을 초래한다. 개인은 물론 공동체 삶에 있어서도 불평불만의 바이러스보다 더 해로운 것은 없으며, 성 베네딕도께서도 이 불평불만의 악덕을 가장 혐오했다. 수도생활을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알렐루야’와 ‘아멘’이다. ‘알렐루야’를 부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다가, 축복된 인생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아멘’으로 마감하는 삶,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는 삶이 수도승의 삶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와 성체성사는 바로 살아 계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관조(觀照)의 시간이다. 주님을 직접적으로 섬기는 시간이요 주님을 반가이 맞아들이는 시간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섬기러 오시는 주님과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지만 특히 하느님의 일에 참례할 때 수도승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사실을 믿는다.(RB 19,1-2 참조) 그렇기에 기도하는 수도승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지혜롭게 마음이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시편을 노래한다.(RB 19,3-7 참조) 성무일도는 매 시편마다 마음과 정성을 다담아 바침으로써,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관조하는 성독(聖讀, Lectio Divina)과 다름없는 수행이다. 유별난 신비체험보다는 이런 공동전례를 통한, 평범한 주님 체험이 훨씬 건전하고 안전하다.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 비약이나 도약도 없고 지름길이나 요령도 없다. 잘하든 못하든 끊임없이 깨어 기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뿐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끊임없는 기도이다. ‘삶 따로 기도 따로’가 아니라 기도가 삶이 되고, 삶이 바로 기도가 됨을 목표로 한다. 수도승들은 기도와 노동과 성독이 균형 잡힌 삶을 추구하지만, 이 셋은 별개의 수행이 아니라 긴밀한 보완관계 안에서 모두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지향하는 일종의 관조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성무일도와 성독, 노동 이 모든 것이 넓은 의미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늘 깨어 살기 위한 수행이다. 평생 매일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이렇게 공동기도, 성독과 노동에 충실할 때 수도승의 삶 자체가 전부 기도로 변한다.
며칠 전 밤에 내린 비로 아침 배 밭 사이 산책길의 분위기가 참 상쾌했다. 문득 ‘하느님께는 매일이 새 아침, 새 날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 하느님처럼 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적어보았다. “매일을, 새 아침, 새 날로 / 평생을 하루처럼, 새 사람으로 처음처럼, 살고 싶다. / 하느님처럼, 영원한 청춘을!” 끊임없이 공동체와 함께 바치는 하느님의 일인 찬미와 감사의 성무일도가 수도승들을 하느님처럼 매일을 새 아침, 새 날로, 평생을 하루처럼, 새 사람으로 처음처럼, 영원한 청춘을 살게 한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주님을 노래 하리이다. 이 목숨 있는 한 내 하느님 기리오리다.”(시편104,33)
성 베네딕도의 길 3 - 노동(Labor manuus)
‘일’에 대해 묵상하던 중 궁금한 것이 있어 아침 식탁에서 수도형제들에게 슬며시 물어보았다. “잠자는 것도, 노는 것도, 먹는 것도 일인가?” 형제들이 친절하게 이구동성으로 이런 대답을 주었다. “잠자는 일, 노는 일, 먹는 일 모두 일이다. 단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된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일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십시오(1코린 1,31).’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나!” 살아있음 자체가 일하고 있음을 뜻하며, ‘일하는 인간’, 이게 인간의 정의이다. 하느님처럼 스물 네 시간 일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직업에서 파생되는 노동만을 일로 여기며 살아간다. 일이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하여 땀을 흘리는 노고만이 아닐 터인데, 일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 볼 만하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일을 한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하고 끝기도를 바치는데, 무의식 속에서 거룩한 일(성무일도)이 계속된다. 새벽에 다시 의식으로 돌아와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로 자신을 깨우며 이 거룩한 일은 밤에서 낮으로 이어진다. 수도승들이 미사와 더불어 하루 일곱 차례에 걸쳐, 약 4시간 동안 하느님의 일인 공동 성무일도가 만만치 않아 우리들끼리 우스갯말로 ‘중(僧)노동’ 중 ‘중(重)노동’이라 부른다. 힘들기는 성독(聖讀, 렉시오 디비나) 역시 매한가지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에 이런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장로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다.’(RB 48,17-18) 만일 독서가 TV 보는 것처럼 쉽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장로들이 이렇게 수도승들을 살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 베네딕도는 이런 이들에게 적절한 일을 부여하여 놀지 못하도록 조치한다. “만일 누가 너무나 무관심하고 게을러서 공부나 독서를 하려고 하지 않거나 할 수 없거든, 그런 사람에게는 할 일을 맡겨 놀지 못하게 할 것이다.”(RB 48,23) 사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나 성독, 육체노동만 힘든게 아니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수도생활 자체 또한 힘든 일이다. 수도승들의 모든 수행은 결국 ‘수도승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 안에, 즉 ‘일’에 포함된다. 그러니 우리 수도승의 삶에 수행 아닌 것이, 일 아닌 것이 무엇이 있는가?
수도승들에겐 일이 있다면 ‘하느님을 찾는 일’,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 하나만이 있을 뿐이며 모든 일은 이 하나의 일을 지향하고 있다. 어느 수도승이 마더 데레사에게 ‘내가 세상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물었을 때 성녀의 핵심을 꿰뚫는 대답은 ‘참으로 좋은 수도승이 되십시오(Be a really good monk).’라는 말이었다. 사실 수도승은 무엇을 ‘하기 위해’, 또 어느 특정한 일에 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이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일정 기간에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일이기에 수도승들에겐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이 있을 리 없다. 어찌 수도승들뿐이겠는가. 참으로 믿는 모든 이들 역시 죽는 날이 정년퇴직일이요, 그 때까지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계속된다. 일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일을 한다. 일에는 귀천도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까지 목수 일을 하셨다. 일이 문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문제요, 사람이 우선이다. 만일 수도승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항구히 부지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그가 하는 일 모두는 기도가 되고 그 자신의 치유와 성화는 물론 그 모든 일도 성화될 것이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을 할 것이다.”(RB 48,1)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평생 부단한 수행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누구나 일정한 공간과 시간 안에 일정한 정력과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하고 싶다 하여 결코 무한정 일을 할 수는 없다. 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가 있다. 공동체의 일과표에 따라 공동체의 맥락 안에서 각자 부여된 일을 제자리에서 제 정신으로 집중하여 제대로 해야 시간과 정력의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다. 성무일도와 노동과 성독이라는 세 중요한 일은 공주(共住) 수도생활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다. 이 세 일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질서 잡힌 건강한 개인이요 공동체가 된다. 외적 질서에 상응하는 내적 질서요, 외적 안정에 상응하는 내적 안정이다. 욕심을 비우고 일과표에 따라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게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다.
그러나 수도승이 일선의 현장에서 물러났다 하여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지만 수도생활의 일에는 퇴직이나 은퇴가 있을 수 없다. 살아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돈이 되든 안 되든, 좌우간 무슨 일이든 부지런히 해야 한다. 믿는 이들 역시 이런 자세로 살아야 영육의 건강하고 품위 있는 노년을 맞이할 수 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게으름에 빠지면 썩는다. 게으름만큼 우리 몸과 마음을 쉽게 망가뜨리는 것도 없다. 청소를 하든, 쓰레기를 치우든, 설거지를 하든, 바느질을 하든, 그 무슨 일을 하든 부지런히 정성껏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면 된다. 설혹 몸이 불편하여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지 못하면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며 머물러 있는 자체도 일이다. 이런 이들은 산이나 나무처럼 존재 자체가 일이 된다. 소화 데레사의 시성 문제로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 교황 바오로 6세께서 주신 ‘성녀는 평범한 일상의 작은 일 하나하나에 큰 사랑을 담아 실행했으며 이게 시성의 이유다.’라는 요지의 통쾌한 답변이 생각난다. 제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충분하다. 누구나 똑같은 일이나 육체노동에 종사할 수는 없다. 공주 수도생활은 하나의 종합예술이며 사람에 따라 일의 분야도 다양하다.
우선적으로 고려할 사항은 그 수도승에 맞는 적재적소의 일자리요, 기술 좋고 능력 있는 자들은 그에 맞갖은 일을 하여 실제 공동체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 은인들의 도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수도승의 전통이나 양심상 용납하기 힘들다. 그러니 수도승들에게 적합한 일이 있다면, 수행을 방해하지 않고, 어느 정도 돈벌이가 되어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정도면 좋다. 그렇지만 수도승들의 일은 반드시 수도생활의 균형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수도승의 육체노동에 대하여 성 베네딕도는 이렇게 충고한다. “그러나 만일 지역의 필요성이나 가난함 때문에 직접 추수해야 할 경우에라도 불만스러워하지 말 것이니, 우리의 교부들과 사도들처럼 자신의 손으로 노동함으로써 생활할 때 비로소 참다운 수도승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심한 사람들 때문에 모든 일을 적절하게 행할 것이다.”(RB 48,7-9)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삶의 진리이다. 하느님의 일인 성무일도뿐 아니라 필히 육신의 생산적인 일도 해야 한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2테살 3,10)”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있고,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불교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 말씀도 있다. 그러니 수도승들은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각자의 수준에 맞게, 무리하는 일 없이 모든 일을 적절히 행해야 한다. 수도원 안에서 모든 일 역시 겸손의 수행으로서, 수도승들은 이 일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므로 수도원의 기술자들은 온갖 겸손을 다하여 그 기술을 사용할 것이며, 자기의 기술이 수도원에 어떤 공헌을 하는 줄로 알고 교만하거든 지체 없이 그 기술직을 중지시켜야 한다.(RB 57,2) 또한 수도원에서 생산된 물품의 가격을 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탐욕의 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다른 세속 사람들이 파는 것보다 언제나 싸게 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할 것이다.(RB 57,7-9참조) 수도승은 물론 믿는 이들의 모든 일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의 영광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가가 그 일의 잣대이다. 수도승이 평생 부지런히 겸손하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일에 항구할 때그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RB 57,9)
성 베네딕도의 길 4 - 환대(Hospitalitas)
환대란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 환대를 받은 기쁨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환대하면 ‘산처럼’이라는 자작 애송시가 생각난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
가슴을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같은 수도원 뒷산은 우리를 환대하시는 하느님을, 그리스도를 닮았다. 성경은 사람들을 환대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주님은 말씀처럼 가슴을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신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요 먹보요 술꾼(마태 11,19) 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참으로 별 볼일 없는 이들을 환대하셨고 스스럼없이 이들과 어울리셨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길손들을 반가이 맞아들여 하느님을 환대했고(창세18,1-15),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루카10,38-42), 그리고 자캐오는 주님을 환대했다(루카19,1-10).
환대의 관행은 그리스도교 수도승 생활에서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환대를 상징하는 ‘환대의 집’이며, 이 하느님의 집에 사는 수도승들 또한 하느님의 환대에 기대어 살다가 떠날 하느님의 손님들이다.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고 뒷문은 사막을 향해 열려 있다. 뒷문으로 열린 사막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앞문을 통해 찾아오는 세상 사람들을 기꺼이 맞아들인다. 하느님 체험이 바로 환대의 원천이다. 매일 수도원 성당에서 거행되는 성체성사와 공동 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은 수도승들을 환대하시고 수도승들은 하느님을 환대한다. 공동 전례기도를 통해 반갑게 주님을 환대한 수도승들은 손님도 그렇게 맞이할 것이다. 고독과 침묵의 사막과 같은 수도원에서 공동 전례기도를 통해 수도승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똑같이 세상 사람들을 통해 수도원을 찾아오신다.
수도승들은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 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B 53,1). 수도원의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야 하고 수도승들은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야 한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수도승은 온갖 사랑의 친절로서 맞이할 것이며(RB 53,3), 온갖 겸손을 드러낼 것이니(RB 53,6)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흠숭받으시고 영접받으시기 때문이다(RB 53,7). 그러나 수도승들은 아무나 손님을 반가이 맞아들일 수 없다. 환대의 공동체적 특성상, 장상이나 장상에게 명을 받은 사람만이 손님들을 접대할 것이며(RB 53,8), 명령받지 않은 사람은 손님들을 영접하거나 대화를 하지 말 것이니(RB 53,23), 공동체에 불필요한 혼란을 초래하지 않기 위함이다. 손님들의 방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형제가 맡아보게 하고, 하느님의 집은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지혜롭게 관리되도록 한다(RB 53,51-52). 과례(過禮)는 비례(非禮)가 되기 쉬우니 자기와 상관없는 손님들을 마주치거나 보게 되면 겸손하게 인사하고 손님과 더불어 이야기할 수 없음을 말하고 지나감이 좋다(RB 53,24). 수도승의 손님 접대는 분별과 지혜가 요구되는 섬세한 기술이다. 수도승들은 손님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듯이, 손님들은 수도승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다. 손님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수도승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만남이 환대 영성의 절정이다.
수도승들은 손님 환대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일 때 더욱 그러하다(R B 53,15). 손님으로 오는 수도승들을 맞아들이는 여러 예식들(RB 53,8-13) 이 오늘날에 와서는 시행되지는 않지만 환대의 영적 가치를 환기한다. 특히 손님을 영접하는 아빠스와 모든 형제들이 그들의 발을 씻어 준 후 함께 외우는 계응송이 환대 영성의 핵심을 밝혀 준다. “당신 성전 가운데에서 하느님이여, 우리는 당신 자비를 받았나이다”(RB 53,14). 손님들을 통해 주님을 환대할 때 수도승들 역시 자비하신 주님의 환대를 받는다. 규칙의 손님맞이 예식을 살펴보면 손님은 주인이 되고 주인인 수도승은 종이 되어 온갖 친절과 사랑과 겸손을 다해 손님을 섬긴다. 금식이 인간의 법이라면 환대는 하느님의 법이다. 깨뜨릴 수 없는 중대한 금식의 날이 아니면 장상은 손님 때문에 금식까지도 해제한다(RB 53,10). 이렇게 손님을 통해 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한다고 환대가 아니다. 손님을 기꺼이 맞아들이고 받아들여야 진정한 환대이다. 복음에서 주님을 맞이하는 마리아가 진정한 환대의 모범이다. 마르타는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어 정작 주님은 안중에도 없었지만(루카10,40), 마리아는 주님을 모시고 그분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진정으로 그분을 환대했다.(루카10,39)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다. 이들은 수도승들의 공동 전례기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을 환대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또 수도승들은 수도원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손님들 역시 수도승들 안에서 자기들을 환대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몇 달 전 문득 깨달은 바가 지금도 생생하다. 수도원 산책 중 주차장 주변에 이르러,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크고 둥근 해바라기 꽃들의 환한 얼굴을 보는 순간, 이것이 진정으로 환대하는 이의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그때 떠오른 시구로 글을 마친다.
“해를 향해, 해를 닮아, 해를 담아
크고 둥근 환한 얼굴
해바라기 꽃들
주변이 환하다
저절로 활짝 열리는 마음
환대는 해바라기 꽃처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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