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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아멘
우리는 전례 예식 안에서 혹은 기도할 때 ‘아멘’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아멘’을 단순히 하나의 소원을 드러내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합니다.’라는 정도로 이해하지만, ‘아멘’이라는 말은 ‘확실하다’, ‘견고하다’, ‘든든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אמן(아만)에서 파생된 부사입니다. 곧, 단순한 희망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니라 ‘확실히’, ‘참으로’, ‘그렇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방금 말한 것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선언이며(신명 27,15-26; 느헤 5,13 참조), 또한 기도에 자기자신을 일치시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멘’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가운데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우리가 청하는 바가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에 찬 응답이며 믿음의 표현입니다.(토빗 8,8; 유딧 15,10 참조)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찬송하며 믿음의 응답을 드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아멘.”
[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인의 마음(새 회칙 <Dilexit nos>를 중심으로)
최근 자신의 ‘마음’(heart)을 돌보는 현대인들이 많아졌습니다. 명상이나 ‘마음 챙김’(Mindfulness) 훈련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취하거나, ‘자기연민’(Self-compassion) 연습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지요. 남에게 보이는 물질적 성과나 외적인 성공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회가 일상 속 개인의 내면이나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요? 어느덧 현대인들에게 ‘마음’은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2024년 10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반포하신 예수님의 마음과 새로운 문명 건설에 관한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에서도 마음이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교황님은 마음이 우리의 진짜 의도이며, 우리가 정말로 생각하고 믿고 바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마음은 한 개인을 드러내는 본연의 모습이자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세상은 그 마음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지요.
사실 그동안 신학이나 다른 학문에서 ‘마음’은 중요한 주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마음’을 명확한 학문적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성이나 자유와 같은 개념에 비해 폄하되어 온 것이 사실이지요. 그러나 현대에 이르는 동안 인류는 이성과 자유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참혹한 병폐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성이나 자유는 조작되기도 하고, 반인륜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이처럼 황폐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의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통해 우리 내면에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를 당신 마음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8-29)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비천한 인간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도 형제자매 중 가장 작은 이에게 다가서도록 인도하십니다. 여러분도 혹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애쓰고 있나요? 그리고 그 치유의 과정에서 매번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나요? 자신이 내면의 타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치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치유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샤를 드 푸코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마음이 내 안에 살 수 있도록, 그분께서 나자렛에서 사셨던 것처럼 그분의 마음이 내 안에서 살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1코린 2,16) 때문에 그 사랑은 확장되어 세상으로 번져나갈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판공성사가 무엇인가요?
지난 3월 5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된 사순 시기 잘 보내고 계신가요? 매년 봄에 맞이하는 사순 시기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시기’(로마 13,12 참조)이며, ‘악마에 대항하여 악령과 싸워야 하는 기간’(에페 6,11-17; 1베드 5,8 참조)이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때를 ‘우리가 악마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주님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회개와 보속의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는 내적인 준비를 위해 판공성사를 봅니다. 사실 ‘판공성사’는 한국 천주교회의 특수 용어로 1년에 두 번, 대림 시기와 사순 시기에 보는 고해성사를 가리킵니다.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에는 매년 적어도 한 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라고 교회법 제989조는 말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1년에 두 번 춘추(春秋)로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관례였고 이를 ‘판공’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판공성사’는 별도의 성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화해하는 ‘고해성사’입니다.
“죄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고,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의 단절이며 동시에 교회와 이루는 친교에도 해를 끼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느님의 용서를 가져다주고 교회와 화해를 이루게 하며, 고해성사는 이를 전례적으로 표현하고 실현”(《가톨릭교회 교리서》 1440항)합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는 사제가 베푸는 성사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성사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즉, 고해성사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길입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대림 시기때 판공성사를 보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두 모여서 한꺼번에 참회 예절로 판공성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죽을 위험과 같이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한, 먼저 개별적 고백 없이 한꺼번에 여러 참회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죄가 베풀어질 수 없습니다.(《교회법》 제961조) 또한 대림 시기 때 판공성사를 보았더라도 삶을 잘 성찰해 보면, 우리를 영적으로 허약하게 만들어서 영적 건강에 해를 입히는 죄에서 벗어나 내적 치유가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사표가 나와서 의무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과 의미를 알고 기꺼이 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정성된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 절대로 귀찮아하시거나 지치지 않으십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것은 하느님께 심판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보듬어 주시는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에 여러분들 모두 용기를 내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17) ‘주님’ 칭호
바오로 사도, 이방인들에게 예수를 ‘주님’이라 선포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신앙 공동체의 주류로 자리하면서 교회 역시 상당한 변화를 겪습니다. 교회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기 전까지 율법 중심의 유다교 영역에서 주로 활동했다면 이때부터 헬레니즘 영역 안으로 발을 담그기 시작합니다.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 곧 “예수께서 메시아이시다”라고 직설적으로 고백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지 일일이 그리고 올바르게 설명해야 했습니다.
당시 헬레니즘 지역에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칭호는 그리 종교적인 용어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지역 운동선수, 특히 레슬링 선수만 해도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할 때마다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는 헬레니즘 지역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 대신에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선포합니다.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세주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죠.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대한 신학적 숙고가 시작됩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많은 칭호가 나옵니다. 먼저 예수님의 지상 활동과 관련된 칭호로는 ‘예언자’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대사제’ 등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미래 활동과 관련해서는 ‘메시아’ ‘그리스도’ ‘사람의 아들’과 같은 칭호가 사용됐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현재 업적과 관련해서는 ‘주님’ ‘구원자’라는 칭호가, 예수님의 선재(先在)를 설명할 땐 ‘로고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었습니다.
그 밖에 ‘다윗의 자손’ ‘예언자’라는 칭호도 사용됐습니다. 이번 호에는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가장 즐겨 사용했던 ‘주님’(Κυριοs, 퀴리오스)이라는 칭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주님’ 칭호를 184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가장 아름다운 찬가를 묵상해 봅시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5-11)
이 그리스도 찬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은 ‘그리스도’와 가장 밀접한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라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에 따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 이름을 입에 담지 않고 히브리말로 ‘아도나이’, 곧 ‘주님’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창조주이신 거룩한 아버지 하느님만을 지칭하던 ‘주님’이라는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께도 똑같이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칭호이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거나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455)
그리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다고 가르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와 관련해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라며 교회의 신앙이 성령의 작용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처럼 ‘주님’이라는 칭호는 헬라어를 말하는 디아스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지중해 동부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돼 전 교회로 확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영성생활에서 ‘주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칭호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라고 말한 한 나병 환자의 간구처럼 주님께 청하는 간절한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실현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간직하는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그리스도교 기도의 특징은 ‘주님’이라는 칭호에 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말로 기도에 초대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는 말로 기도를 끝맺으며, 신뢰와 희망에 넘쳐 ‘마란 아타!’(주님께서 오신다) 또는 ‘마라나 타!’(저희의 주님, 오십시오)를 외친다.(1코린 16,22)”(「가톨릭교회 교리서」 451)
역설적이게도 초대 교회는 ‘주님’ 칭호 때문에 로마 황제로부터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당시 로마 황제들 특히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주님이며 신’(domonus et deus)이라 칭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카이사르 외에 또 다른 임금이자 주님으로 예수를 선포하였다며 박해를 한 것이죠. 바오로 사도 역시 똑같은 이유로 테살로니카에서 곤욕을 치릅니다.(사도 17,5-7)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1) 특별히 기도하는 성월 ①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여섯 성월
가톨릭교회는 연중 어느 달을 특별히 선정해 그리스도인들이 뜻을 모아 기도와 선행에 정진하게 해 신심과 덕을 쌓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달을 ‘성월(聖月)’이라 합니다. 이때 교우들은 특별한 은혜와 전구를 청해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여섯 번에 걸쳐 성월을 지냅니다. 성월에 담긴 의미를 알아봅시다.
성 요셉 성월(3월)
성 요셉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자기 임무에 충실했으며, 크나큰 겸손과 신뢰를 지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또 성모 마리아께서 평생 동정을 지킬 수 있게 보호자이자 예수님 양부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성 요셉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사업을 이루실 수 있도록 가장 가까이에서 협력하신 분입니다.
1870년 비오 9세 교황은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언했고,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5월 1일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선포했습니다. 1889년 레오 13세 교황은 요셉을 성가정의 모범으로 선포하시고 성모 마리아 다음 위치에 올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3월을 성 요셉 성월로 정해 겸손과 하느님의 종이며 정결한 남편이고, 성실한 아버지이신 성 요셉을 특별히 공경합니다.
성모 성월(5월)
‘은총을 가득 받은’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동의함으로써(루카 1,38) 당신 아드님과 함께 구원 신비에 참여하고자 당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승천 후에도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주고 계십니다. 또 성모님은 천사와 성인들보다 더 많은 은총을 받으셨고, 우리의 특별한 사랑과 기도를 받으며 교회 모범이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년 5월을 마리아께 대한 신심을 쌓고 공경을 드리는 성모 성월로 지냅니다.
예수 성심 성월(6월)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므로 성체조배와 묵상으로 예수 성심을 공경해야 합니다. 예수 성심 공경은 교회 공식 인정을 받기 전부터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왔습니다. 1765년 클레멘스 13세 교황은 폴란드 주교들의 추천에 힘입어 예수 성심 전례를 제한적으로 허용했으며, 1856년 비오 9세 교황은 전 세계, 보편 교회로 예수 성심 공경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674년 기도에 몰두하던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1647~1690) 성녀에게 나타나셔서 예수 성심을 약속하셨습니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의 지위에 요긴한 은총을 준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의 가정에 평화를 준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의 모든 근심, 걱정 중에 위로를 준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이 살아 있을 때와 특별히 죽을 때 그들의 의탁이 될 것이다.
- 내 성심을 공경하는 자들이 경영하는 모든 사업에 풍성히 강복할 것이다.
- 죄인들은 내 성심에서 무한한 인자의 샘과 바다를 얻을 것이다.
- 냉담한 자는 열심해질 것이다.
- 열심한 자는 빨리 큰 완덕에 나아갈 것이다.
- 내 성심 상본을 모시고 공경하는 집안에 강복할 것이다.
- 사제들에게 극히 완고한 마음이라도 감화시키는 은혜를 줄 것이다.
- 내 성심 공경을 전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내 마음에 새겨 없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 누구든지 9개월 계속해 첫 금요일에 영성체하는 사람에게는 마지막 통회의 은혜를 주어 은총 지위에서 죽게 할 것이다.
[생활교리] ‘십자가 죽음’에 관한 몇 가지 물음
첫째,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가? 우선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 일이 일어난 요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주요 사안, 곧 율법, 성전, 그리고 유일신 사상 등과 관련되어 논쟁과 마찰을 빚었다. 그 내용을 보자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금지된 병의 치유 활동을 함으로써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거나(마르 3,1-6), 또 성전에 관한 기존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벗어나고 위배되는 말씀과 행위로 백성을 오도한다는 것이었다(요한 2,13-22).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죄의 용서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위로 여겨졌기에(마르 2,7), 종교지도자들은 그분을 하느님 모독자로 고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예수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단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과 책략에 따른 잘못과 이를 묵인하고 방관한 사람들에게만 물을 수 없다. 왜냐면 성경의 증언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1코린 15,3) 돌아가셨다면,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 수난의 장본인”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죄의 용서를 통한 구원의 행위라고 한다면, 그 죽음의 책임 대상은 ‘과거’의 성경 인물들을 넘어 ‘현재’ “계속해서 죄에 다시 떨어지는 사람들”(『가톨릭 교회 교리서』 598)이며, 그들이 바로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탈출 34,6)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원하셨는가? 당시 십자가형은 손과 발에 못 박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 이전에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태형(笞刑)이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끊임없는 조롱과 조소 속에 마지막 시신마저 새들의 먹이로 넘겨주어야 하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죽음이었다. 더군다나 이 참혹한 십자가 죽음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사도 2,23)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과연 예수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뜻은 무엇인가? 단연코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희생과 봉헌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원이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원하는 이는 없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요한 3,16) 당신 아들의 십자가 죽음마저도 기꺼이 감당하시는 분이시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그저 수동적으로 겪으셨는가?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답을 하신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시자”(『미사통상문』 제2양식) “가장 자유롭게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09).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곧 예수님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에 온전히 ‘순명’하시기를 원하셨고, 무엇보다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시기 위해 온갖 모함과 배척 그리고 배반 속에서도 당신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 죽음에 내어 맡기셨다. 결국,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사랑의 끝장판’으로서, “이제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죽음”(성 데레사)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