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9-15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께서 벧엘에 다시 나타나셔서 새 계시를 주신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9절은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입니다.
1) 모세는 드보라의 죽음에 관해서 몇마디 소개 한 뒤에 두 번째 이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돌아온 뒤 이 두 번째 이상에 의해서 작은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메소보다미아로 향하던 도중에 하나님께서는 전 여행을 통해서 어느 곳에서든지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제 다시 그곳으로 송환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야곱이 보다 빛나는 모습으로 기억할 만한 말씀을 받았던 곳이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다시 오게된 것은 자기 믿음에 새로운 확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복이란 바로 그분께서 친히 하신 약속을 의미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서로 복을 갈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완전한 행복에 있어서 유일한 시여자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때 야곱이 들었던 것은 전부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약속이 그에게 반복되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포로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신앙생활에 있어서 힘을 얻은 자로서 보다 큰 용기로 남은 인생 행로를 끝마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2) 한번 더 강조하여 말씀드리면 이 구절 말씀은 윗 부분(6-8)과 잘 통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그 일행이 이제는 하나님의 인도로 벧엘까지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10-12)가 다시 한번 있을 만합니다. 벧엘로 말하자면 일찍이 야곱이 망명하던 도중에 하나님을 만났던 유명한 곳입니다(28:10-22). 이제 그가 서원 했던 대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만큼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 그대로가 실현되어 가는 과정으로 있습니다.
2. 본문 10절은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입니다.
우리는 앞서 이 이름들의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구명(舊名)은 폐지되지 않지만 나중에 붙여진 다른 이름이 우선시 되며 더 존귀합니다. 그는 태 중에서 자기 형과 격렬하게 싸웠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야곱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하나님과 겨루어 승리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그가 이긴 것은 자기 힘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용기와 힘과 무기를 차용해서 그것으로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이런 명예를 부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두 개의 이름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과 비교할 때 야곱은 미천하고 고상하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너는 야곱이라고 불리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별명도 추가되리라’ 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구명은 탁월함이 덜하기 때문에 두 번째 이름에게 자리를 양보한다는 말입니다. 어거스틴이 제시하는 견해는 견실하다기보다 우선 그럴 듯합니다.
그는 그의 현재 생에 대해서는 야곱이라고 불리웠고 미래의 생에 대해서는 이스라엘로 불리웠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성자에게는 이중명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극히 월등하였다는 것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마무리짓습니다. 우리는 여러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때때로 이 두 가지 이름을 결합시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별칭이 사도들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별칭은 천상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주의 영광을 위하시는 목적으로 우리 본명 앞뒤로 “성도” 라는 별칭과 교회 앞에 내세워진 직분명으로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등으로 불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부가적으로 주신 은혜와 은사로 되어진 것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은혜의 혜택의 표시입니다.
3. 본문 11-12절은
“⑪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⑫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입니다.
1) 본문 11절 초두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도 다른 곳에서처럼 자기 능력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야곱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더 확실히 의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야곱으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 국민으로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으로 배가시키겠다고 하십니다. ‘국민’ 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께서는 야곱의 자손이 명실공히 큰 단일 민족을 형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수효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신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이란 말은 결과적으로 타당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것이 은혜의 입양에 의해 아브라함의 족속으로 편입된 여러 국민을 가리킨다고 하기를 원한다면 이 표현 양식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혈통에 의한 자손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복이라기보다 저주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그 안전을 단결과 일치에 의존하는 터에 그토록 많은 국민으로 나뉜다는 것은 저주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 말씀가운데 두 견해를 포함시키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여호수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 지파로 나뉘었습니다. 이때는 마치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은 국민으로 불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민족 자체는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 민족은 많은 국민의 회중으로 불리웁니다.
지파 간 구별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통일성이 엄연히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어 자체를 이방인에게까지 연장시켜 해석하는 것은 적당합니다. 열방은 세계 도처에 이산되어 있었지만 신앙 결속으로 하나의 회중으로 모이기 때문입니다. 열방은 육신을 따라서는 야곱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새로운 탄생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출생의 씨앗인 구원의 언약은 야곱에게서 유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로 세웠노라’는 선언을 따라 모든 신자는 야곱의 자손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합니다.
2) 본문 11절 끝에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과 그 자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국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는 굳게 서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은 합법적 왕국에서 타락한 나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실로 우리는 악한 근원에서 생긴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수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순전한 복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다윗에게 속한 자들, 곧 참된 계승자들에 대한 말로 이해합니다.
3) 본문 12절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자기 조부 아브라함과 자기 아비 이삭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그 땅 주인으로 책봉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상속권을 따라 그 땅 영유권을 야곱의 후손에게만 양도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에서를 거룩한 가족으로부터 명백히 제외시키시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3절은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입니다.
1) 하나님께서 올라가셨다고 되어진 사실은 그분의 강림에 대해 유추되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충만하시기에 우리에게 자기 임재의 표시를 보이실 때마다 자기 자리를 바꾸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왜소성(矮小性)에 비추어서 그들에게 적응시키기 위해서 채택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을 때 또는 이상이 끝났을 때 그분께서는 야곱을 떠나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심으로써 자기 말씀에 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자기 은혜를 증거 하실 때에는 우리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천적(天的) 영광 사이에 그 거리는 아주 멉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기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승천으로 우리 믿음을 그리로 이끌어 올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 그분께서는 성령의 권능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2) 이렇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내용은 큰 위로요 격려입니다(10-13).
(1) “야곱”의 이름이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입니다(10절).
“이스라엘”이란 이름에 대하여는 32:24-3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그에게 새 이름이 덧붙여진 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전승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곧 그의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것입니다(11절). 또 그 자손이 필경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12절) 입니다. 이것은 물론 육적 이스라엘이 큰 나라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그리스로 말미암아 무수한 신자들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또한 그들이 세상에 살지만 천국의 후사가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의 기업을 누리게 되는 사실을 예언하는 내용입니다(롬4:13-17, 23-25).
5. 본문 14-15절은
“⑭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 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⑮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입니다.
1) 야곱이 두 번째 이상을 기념하여 다시 기념비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그 전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지지합니다. 마치 그곳이 하나님의 옛 전이어서 야곱이 그 안에서 전제물을 부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야곱은 거주를 위해 그리로 오라고 명령받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오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곳을 새로 보고 이전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새로이 하며 그것을 한층 더 완전히 확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조상들이 제단을 쌓고 거기서 오래 머물려고 했다는 기사를 다른 데서도 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이유는 서로 달랐습니다. 야곱은 전에 벧엘에서 엄숙한 서약을 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귀향하게 될것을 조건으로 한 서약이었습니다. 그는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감사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 힘을 얻어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2) 그러니까 14-15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야곱이 “돌기둥”위에 “전제물을 부”은 것은 그 돌기둥을 위한 제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야곱을 서물 숭배자로 간주하는 오착 입니다. 야곱은 하나님만 공경하는 성도요, 지도자였습니다. 우리 본문에서도 그가 하나님을 공경한 사실을 문맥적으로 명시합니다. 이 제사 행위는 그와 함께 한 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와 헌신하는 표상이었습니다. 28:20-23절을 참조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