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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성경본문 : 잠언 3: 34
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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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발 목사
몇 일 전에 서점에 갔다가 책을 보는데 사마천이라는 사람이 지은 [사기]라는 책을 누가 번역해 놓은 것을 봤습니다. 사마천은 기원전 90년 정도 때의 중국 사람인데 이 사기라는 책은 사마천이 지은 아주 훌륭한 역사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본 그 책은 사기를 다 번역한 것은 아니고 사기 중에서 몇 부분만 발췌해서 번역해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서의 제목을 뭐라고 붙였는가 하면 [자신을 낮춰 천하를 얻는다] 그렇게 붙였습니다. 그러니 힘을 자랑하고 휘두르기만 하는 사람이 천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되고 천하를 얻으려는 사람일수록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 하는 것이 사마천이 주는 교훈이자 또 역사가 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라는 겁니다.
지금 중국의 국가 주석으로 있는 사람은 후진따오라는 사람입니다.
이 호금도(후진따오)는 오래 전부터 장쩌민(강택민)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국가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이 된 사람 중에서 실제로 주석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 제거가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유일하게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그대로 주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후진따오를 더 높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유일하게 살아남아서 주석이 될 수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말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은 장쩌민 주석이 있는 자리에서 회의를 하거나 보고를 할 때가 있으면 의자에 앉을 때 절반만 걸터앉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의자 절반 때문에 주석이 되었다 그럽니다.
물론 그것이 국가 주석이 된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낮춰 천하를 얻은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세상에서 인간관계를 맺어 나갈 때에도 겸손이라는 이 자세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도 겸손이 필요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는 겸손한 자세가 더욱 더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잠언 3:34을 보면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 앞에서나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것인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엎드리는 것이 겸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숙여지지 않으면 그것은 겸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힘이 있는 사람 앞에서 힘없는 사람이 때로는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겸손은 아닙니다.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숙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겸손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서부터 하나님 앞에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 그런 진정한 겸손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겸손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능력자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 되시는 분이심을 알알갈 때 우리가 그 앞에서 스스로 숙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서부터 숙이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겸손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자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 된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정말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또 하나님 앞에서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겸손의 자세를 가졌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사람과 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자신을 가진 사람들. 그 마음의 자세를 가리켜서 신학적으로 '휘브리스'라는 말을 씁니다. 고만함, 고고함.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쪽같이 산 것 같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던 당시에 이스라엘에는 여러 부류의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이나 그런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 역시 바로 이런 '휘브리스' 고만함, 고고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바로 그런 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있는 구약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율법을 읽고 그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 율법을 지킥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했습니다. 하루 세 번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절기도 지키고 심지어는 자기가 얼마나 말씀을 잘 지키는가를 과시하기 위해서 율법을 쓴 종이를 몸에 두르고 다니거나 작은 상자를 만들어서 거기에 말씀을 넣고 그것을 이마에 달고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점점 생각하기를 우리는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 우리는 잘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완벽하다.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가차없이 처벌을 하고 그런 사람들과는 함께 어울리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이런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봉변을 당합니다. 왜요? 자기들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3:27을 보니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
석회를 칠해 두어서 밖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희게 보이지만 그 속은 시체가 썩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더럽습니까?
바리새인, 서기관들, 스스로 거룩하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와 같다는 겁니다.
사람이 좀 도덕적으로 살면 얼마나 도덕적으로 살겠습니까?
물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할 때는 누가 좀 낮다, 못하다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행위를 따라 상을 줄 수도 있고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그래서 세상에서 그것 때문에 칭찬을 듣고 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그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모자라는 존재라는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셨습니다.
한 사람도 죄 범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EX) 구약성경을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욥이라는 사람은 당대에 거부라고 했습니다. 어마 어마한 부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았는지 날 마다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욥을 당대에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어느날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전재산을 잃어버리고 아들들을 다 잃어 버렸습니다. 자기 몸은 부스럼이 나서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내되는 사람은 욥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왜 자기처럼 의로운 사람이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이 욥에게 하나님의 그 능력과 영광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자 이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무능한 존재인가를 깨닫고는 그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 42장5절과 6절을 보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더 분명히 알고 또 하나님을 알고 나니 회개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살고, 그래서 상을 받는 그것보다는 비록 다른 사람들 보다 이제껏 좀 못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 은혜 주시는 겁니다.
욥도 하나님을 알고 또 자기 자신을 알고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갚절의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구속이 있다.
두 번째로 인간이 무능하고 죄인이라서 아무리 율법을 잘지켜도 하나님 마음에 들 수 없고 구원을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구속이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속량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어떤 사람이 노예 상태에 있을 때 그 사람을 위하여 노예의 값을 지불하고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속량, 구속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우리를 풀어주셨다.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말미암아 댓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 댓가는 그저 몇 년 정도 감옥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 지옥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런 죄 값을 안 치르도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대체 어떤 값을 치르셨길래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가?
오늘 본문 25절을 보니까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화목제물.
우리가 이 화목제물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 화목 제물은 구약시대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종류 중 한 가지가 화목제였습니다. 이 화목제는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앞에 제물을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하셔서 백성들과 다시 화목한 관계가 되기를 희망하는 그런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화목제 제사를 드리면서 늘 짐승을 잡아 피를 속죄소위에 뿌렸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짐승만 잡아 가지고 제사지냈으니 됐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서 백성들은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와서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어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이 짐승을 대신 죽입니다. 우리는 죄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하면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은 정말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는 진정한 제물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하는 자의 믿음과 중심을 보시고 잠시 진노를 거두시고 그 사람을 받아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일시적입니다.
한 번 죄를 지으면 한 번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
다음에 죄를 또 지으면 또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
영원히 제사를 지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제물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짐승 한 마리로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나서신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자신은 아무 죄도 없으시지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죽어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의 제물이 되신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렇게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시니까 이 제물이 부족하다고 말 하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그 제물되신 예수님을 인하여 구속을 받고 속량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겁니다.
EX) 찬송가 202장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 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보혈의 능력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피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인가? 그런 신비주의적인 뜻이 아니다. 이 말은 주님이 우리 위해 제물이 되셨는데 그 제물은 완전하여 우리를 구원할 충분한 제물이 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합니다.
자기가 착한 일을 해야지 천국 가는 것이지 어떻게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자기가 율법을 지켜야지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교만, 휘브리스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이 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무능한 사람들입니다.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 죄를 자복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음으로 자녀가 된 분들이 있습니까?
27절을 보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유일한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믿음으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는 분들은 늘 주님의 사랑으로 나같은 죄인도 구원을 얻었다고 주님을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무능한 자인가를 고백할 수 있고 그래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분명한 믿음 가지시고 이미 믿음 가진 분들은 그런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 앞에서 늘 겸손히 여러분의 사정을 아뢰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응답을 체험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