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랑하는 여인이 술주정뱅이가 되어 오줌을 싸니 그를 사랑한 드라마 감독이 묵묵히 수건으로 닦아주는 이야기, 부인과 사별 후 좋아하는 여인이 생겼는데 하반신이 마비되어 오줌을 처리할 수 없게 되자 기저를 갈아주고, 온 몸이 마비되어 대소변을 못 가리는 남자의 대소변을 처리해주는 여인의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자기 부모의 대소변 받아내기도 힘든 일인데... 남의 얘기가 아니죠. 우리도 부부 둘 중 하나가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도 아무 말 없이 대소변을 처리해 줄 수 있는 남편과 아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줌’
나는 요즈음 매일 변기를 닦고 있다. 손으로 변기의 안팎을 세심하게 닦는 일을 일과 중의 하나로 삼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 가는 나의 버릇이다. 오늘은 오줌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어제 저녁 넷플릭스에서 보던 드라마의 마지막 회에 나오는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술에 취한 여성이 몽롱한 상태로 앉아있는 소파의 끝자락에서 오줌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의 아랫도리가 흥건히 젖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줌을 싸고 있는 것이다.
그 아래 바닥에 앉아있던 장년의 남자가 그걸 보고 수건을 가져다 말없이 닦고 있다. 취한 여자는 잘나가던 미녀 탈랜트였는데 알콜릭이었다. 인기가 떠난 공허를 술로 메꾸어 온 것 같다. 남자는 그녀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사랑해 온 방송국의 드라마 감독이었다.
인기가 한창이고 신데렐라 대접을 받을 때 꽃 같은 그녀는 여러 나비를 받아들이면서 즐겼다. 남자는 그걸 알면서도 우직하게 속에서 사랑의 불을 끄지 않았다. 남자가 묵묵히 바닥에 흘린 오줌을 닦는 순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내면에 짙은 감동의 파도가 일어나는 것 같아 보였다.
상대방이 흘린 오줌을 닦아준다는 건 진득한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또 다른 한 장면이 슬라이드 같이 나타난다.
부인과 사별을 하고 오랫동안 혼자 살던 노인이 비슷한 또래의 여자 친구가 생겼다. 함께 밥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마음이 통했다. 노인은 친구가 된 여성에게 나머지 세월을 함께 지내자고 제의해 힘들게 허락을 받아냈다.
노인은 새로운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아들과 며느리에게 새 어머니로 모셔달라고 선언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혼자 있던 여자 노인이 갑자기 하반신에 마비가 오면서 방바닥에 엎드린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줌이 새어 나왔다.
깔끔한 성격이지만 그 여자 노인은 방바닥에 고인 자신의 오줌을 치울 수 없었다. 남자 노인이 밖에 나갔다 들어와 문을 열고 그런 상황을 봤다. 여자 노인은 당황과 절망 속에서 자기 아들에게 도로 데려다 달라고 울부짖는다.
남자 노인은 괜찮다고 다독이며 방바닥에 고인 오줌을 닦아내고 여자 노인을 목욕탕으로 데려가 몸을 닦아준다. 그리고 오줌이 묻은 옷을 깨끗이 빨아 줄에 너는 모습이었다. 남자 노인의 진정으로 걱정하는 표정과 오줌을 닦는 모습에서 인간의 향기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본 또 다른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변호사로 사건을 처리하면서 실제로 한 뮤지션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그룹사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맡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기타를 치는 손끝이 면도칼에 벤 듯 아려왔다.
생손을 앓는 것으로 생각하고 약국에서 연고를 사서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손가락부터 점차 팔목까지 피부가 면도칼로 저미는 것 같은 고통이 올라왔다. 큰 병원으로 갔다. 말초신경부터 온몸의 신경이 마비되어 가는 희귀병이라는 진단이 내렸다.
발끝부터 점점 마비가 되어 올라오고 있었다. 병원에서 그는 혼자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내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얘기하던 중 이런 말을 했던 게 아직도 기억의 갈피 속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내가 사랑하던 여인이 있어요. ‘사랑과 야망’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한 여성 탈랜트였어요. 아주 예쁘죠. 그 여자가 내 입원실을 찾아왔어요. 나는 가라고 했어요. 저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었으니까요. 그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내 오줌을 받아내고 대야에 물을 받아다가 내 하체를 닦아주더라구요. 난 그냥 눈물이 흘렀어요.”
오줌과 똥을 치워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깊은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병원 침대 위에 누운 채 움직이지 못할 때였다. 나는 아버지의 오줌과 똥을 딱 한 번 받아냈다. 내가 아기 시절 아버지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식의 똥오줌을 치웠을 것이다.
단 한번인데도 나는 싫었다. 부모에 대한 효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똥오줌을 치울 수 있느냐 였다. 나는 나쁜 아들이었다. 아내가 아플 때 나는 즐겁게 똥오줌을 받아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게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나는 요즈음 열심히 변기를 닦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