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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엄마 생일을 맞아 내의를 선물하려고 속옷매장을 찾았습니다. 점원 아가씨가 소년에게 필요한 옷 치수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잘 모르겠다”며 답했습니다. 점원 아가씨는 하나라도 팔아야겠다는 생각에 재차 물어봅니다. “그러면 엄마의 키가 크시니, 작으시니? 뚱뚱하신 편이니 날씬하신 편이니”등등 물었습니다. 소년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 엄마는 완벽해요. 우리 엄마는 굉장한 미인이거든요.” 완벽하다는 말에 점원 아가씨는 엄마가 대단히 관리를 잘하는 중년 부인인 것으로 생각해서 가장 날씬한 치수의 내의를 예쁘게 포장해서 소년에게 주자 소년은 계산하고 물건을 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소년이 다시 매장을 찾아 내의를 바꿔 갔습니다. 그 소년이 바꿔 가져간 내의는 판매용 내의 중 가장 큰 치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보이지 않는 다른 눈들을 각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년이 보는 엄마와 사람들이 보는 엄마는 분명 달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불신자들이 보는 세상은 분명 다릅니다. 저와 여러분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우리의 삶의 방식, 삶의 목적과 세상의 생활방식, 생활의 목적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눈과 우리가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가치관과 세상이 보여주는 삶의 가치관은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지내실 때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역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역의 모습이 성도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하고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역의 형태를 분석하고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정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역만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교회로 바로 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회 사역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교육과 양육을 뜻합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여기에서 “모든 도시와 마을”로 번역된 헬라어 τὰς πόλεις πάσας καὶ τὰς κώμας(타스 폴레이스 파사스 카이 타스 코마스)라는 말은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온 갈릴리’라고 표현된 지역을 다르게 표현한 말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께서는 잠시 이방인 지역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거의 갈릴리 지역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온 갈릴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ὅλῃ τῇ Γαλιλαίᾳ(홀레 테 갈릴라이아)를 마태복음 9장 35절에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하였으며 그 곳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수시로 방문하며 공생애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지상에 오셔서 예수님께서 3년간 행하셨던 공생애 사역에서 중점 사역은 3가지로 구분되는데 바로 오늘 본문처럼 가르치는 사역, 복음전파사역,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의 3대 사역이라고 칭합니다. 그 중 지금 살펴볼 예수님의 첫 번째 중점사역 바로 가르치는 사역, 즉 교육사역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여러 회당에 다니면서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이 회당은 원래 포로기 때부터 유래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원래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드렸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성전까지 갈 수 없는 형편에 그 곳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모여 회당을 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회당에서 모였던 그들을 전통을 따라 유다지역 곳곳에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이 회당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이뤄졌습니다. ‘회당’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συναγωγή(쉬나고게)는 유대 공동체의 모임 장소 또는 집회나 회중 자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모임은 주로 마을에 있는 회당에서 열렸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생활법률에 따르면 열 가정이 모여 사는 곳에는 꼭 회당이 있어 회당에서 모여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을 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회당마다 회당장이 그 회당을 책임지고 운영하면서 성경낭독이나 성경해설등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정하고 그 사람들에게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가르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께서 방문하신 이 곳 저 곳에서 회당장의 허락을 얻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게 되신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고향마을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4절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마태복음 4장, 9장, 12장, 13장 등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도 기록되어 있고 회당뿐 아니라 길거리나 어느 집에 유숙하러 들어갔을 때에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기까지 우리가 겪어내는 모든 삶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쓴 상처과 아픈 관계 등 인생의 채찍과 사람이라는 막대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 아집과 교만을 인생에서 깨닫고 그로 인한 우리 죄악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사역을 우리는 흔히 이 시대 교회사역을 따지면 ‘설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가르치는 사역중 가장 대표적인 가르침 사역이 설교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요즘 이 시대 교회에서는 각종 성경공부와 학습문답, 세례문답을 통해서도 가르치는 사역을 합니다. 제자훈련, 사역자훈련, 전도훈련등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연령대별 주일학교, 성경학교 등등으로 가르치는 사역이 있습니다. 교회는 아직 진리를 모르고 신앙적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야 하고 이제 막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도 꾸준히 성장하고 양육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6절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해야 할 분명한 사역모습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을 본받아 이 땅의 교회가 해야 할 사역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며 교회가 해야 할 본질적인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회 사역 둘째는 전도사역입니다. 복음 전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역모습 두 번째는 여러 도시와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시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며 하나님 나라 임재를 전파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천국백성이 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전파사역 이전에 예수님의 그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천국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를 통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절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죄를 가진 인간이 죄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주셨고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값을 대신 갚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께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을 때 우리가 그 분이 우리 구원자이심을 깨닫고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는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10장 9,10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바로 영혼구원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영혼을 이끌어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악에서 허덕이며 죽음과 멸망의 굴레 빠진 영혼을 구속하시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우리가 교회를 통해 할 일, 우리가 교회가 되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복음전파의 사역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교회 사역 마지막 셋째는 치유 사역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섬김과 봉사사역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한 회복사역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공생애 시절에 수 많은 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중요한 사역 가운데 하나는 치유하는 사역이었습니다. 우리가 몇 주간 살펴본 마태복음 8장과 9장에서는 총 열 건의 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로마군대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기도 하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어쫓기도 하셨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며 바로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가게 하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셨고 12년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눈 먼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시력을 주셨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을 보며 깜짝 놀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비방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왜곡하며 호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 분의 본체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이 땅에서 행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죽음을 뛰어넘어 살리시는 역사, 아픔을 뛰어넘어 고치시는 역사, 모든 질병을 통치하시며 질병을 고치시는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 성도가, 우리 교회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치유하는 사역을 하겠냐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 시대에 이런 사역이 지금도 가능하다고 말하며 성령운동속에 신유사역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신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신유사역에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신유사역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역, 예수님의 치유를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임하는 신유의 능력자가 나타나 그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면 병든 자를 그 능력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명백한 이단입니다. 성경에 있는 열 두 사도와 같이 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도 나타나 사도의 역할을 이 시대에도 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은 예수님과 사도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추가적으로 말씀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말하고 말씀을 추가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건 분명 성경에서 거짓 선지자, 미혹된 사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할 내용들입니다.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치유사건은 메시야의 임재를 보여주는 사건이고 예수님의 치유사건은 근본적 죄의 해결을 위해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사건을 교회에 적용해 본다면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그들의 질병에 대해 안타까움을 함께 하며 같이 기도하며 봉사하는 것이 교회 사역이라고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 36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9장 36절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오늘 본문에서 “불쌍히 여기다”라고 번역된 원 헬라어는 σπλαγχνίζομαι(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동사입니다. 뜻은 ‘동정하다, 자비를 베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항상 하나님께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 혹은 예수님께서 힘든 상황에 놓인 백성들을 보며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을 표현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의 주어로 쓰인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을 묵상하며 한 절 한 절 살펴보고 있는데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참 신기하며 놀라운 말씀 연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표현하며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지상 3대 사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작년 10월 1일 주일에 마태복음 4장 23절의 말씀을 강해할 때도 이렇게 정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태복음 5장부터 오늘 본문 9장까지를 자세히 보시면 마태복음 5장과 6장은 가르치시는 사역, 7장에서는 천국복음 전파사역, 8장과 9장은 고치시는 사역을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부분 마태복음 9장 35절에 와서 첫 시작인 마태복음 4장 23절과 거의 똑같은 구절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역을 하신 이유를 마태복음 9장 36절에 덧붙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을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본문에서 무리를 “목자 없는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인도자를 잃어버릴 때 갈 길을 헤메는 양들과 같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양들은 인도해주는 목자 혹은 목자견이 없으면 길도 못 찾는 존재입니다. 길을 못 찾아 헤메이다가 맹수의 먹이가 되어 죽어버리는 것이 양입니다. 바로 이런 양이 이 땅의 인간들입니다. 인생들은 근본적으로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방황하며 살아갑니다. 이곳저곳 어디가 올바른 길인지 몰라 헤매어 돌다가 결국 영혼이 죽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상 삶에 대해 마태복음 9장 36절에서 ‘고생하며 기진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적 상태, 영적 상태는 ‘고생하며 기진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ἐσκυλμένοι καὶ ἐρριμμένοι(에스퀼메노이 카이 에르림메노이)이라는 문구에서 ‘σκύλλω’(스퀼로)는 ‘괴롭게 하다, 고통을 주다, 갈기갈기 썰다’ 등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압제하다, 낙담시키다’라는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진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ῥίπτω(흐립토)는 ‘던지다, 내던지다, 팽개치다, 떨쳐버리다’라는 뜻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수동태 형태로 쓰여져 있고 의미를 따져보면 ‘바닥에 버려지다, 무력하게 주저앉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의욕이 사라져 절망에 빠진 상태입니다. 완전히 녹다운된 상태의 인간, 즉 목자를 잃은 양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런 인간의 회복을 위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 보좌에서 영광가운데 그냥 계셔도 되시는 분이시지만 인간의 죄악, 인간의 방황, 인간의 무능을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인간의 고생, 인간의 기진맥진이 안타까우셔서 인생의 의미회복, 인생의 행복 회복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고생과 기진함은 예수로 말미암아 치유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인간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 우리와 같은 고단함과 허기짐과 피로를 친히 경험하셨고 우리보다 더 한 하나님 진노의 잔을 다 마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정말 치유를 갈망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 땅에서 치유 받아야 할 영혼에 대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치유받을 영혼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들을 고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면 그 치유받을 영혼이 고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영혼이 예수님을 만나 회복되도록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정말 치유와 회복을 위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은 ‘목자 없는 양’처럼 이 세상을 방황하며 삶의 기력을 잃고 허무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혼들이 삶의 목적을 회복하고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죽어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가르침, 복음전파, 질병치유는 모두 이런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정리하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함께 할 일꾼을 부르시는 것으로 말씀을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제자들이 동참하도록 독려하시며 일꾼의 필요함을 역설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 37,38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 “추수하는 일꾼”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대체로 “추수”라고 표현된 헬라어 θερισμός(쎄리스모스)는 심판과 종말을 의미하며 마지막 때를 강조하는 단어로 쓰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전체 의미를 생각해 볼 때 심판보다는 회복의 의미가 더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추수는 심판이 아닌 선교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마음보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만인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가운데 구원받을 영혼이 있기를 원하시지만 인간의 완악함이 선택적 구원을 만들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 수 없는 구원받은 영혼과 구원받지 않은 영혼을 대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복음전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9장에서 추수할 일꾼을 요청해야 하는 이유가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의 추수 전까지 천국이 가까이 왔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3대 사역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이 땅의 교회, 예수님의 백성된 이 땅의 성도들도 이 3대 사역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사역에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의 사역을 이 땅에서 이뤄나가는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