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랑 가슴으로』(작사 이성만 작곡 이범희)는 1981년
「하춘화」(1955년생)가 발표한 곡입니다.
「하춘화」는 전남 영암 출신으로 1962년 7세 나이로 데뷔하고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 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1971년 발표한 "물새 한 마리"가
히트하면서 음반이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싱어 송 라이터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 곡으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 가수상을 수상합니다.
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 가수로 성장했지요
「하춘화」 는 너무 못 생겼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소외 받고 있던
당시 무명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을 보더니 자신의 공연에
"이 사람이 아니면 내 공연의 사회자를 시킬 수가 없다. 꼭 '이주일'
이어야만 한다" 라고 말하며 '이주일'을 자신과 같이 일하게 했지요.
그 뒤 1977년 전북 익산시에서 공연을 하는 도중, 이리역 열차
대규모 폭발 사고로 인해 극장이 무너져 내려 「하춘화」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이 때 '이주일'이 「하춘화」를 구출하여
병원까지 업고 뛰어가서 무사할 수 있었지요.
오히려 「하춘화」 를 구한 '이주일' 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전치 4개월의
중상(重傷)을 입었습니다.
폭발 사고 당시 「하춘화」 를 구했던 '이주일' 은 오히려 무명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거둬들여 고정적으로 일하게 해줬다면서 살아 생전
「하춘화」 를 마음 속 깊이 존경했다고 하지요.
「하춘화」 역시 '이주일' 을 평생 생명의 은인(恩人)으로 여겼으며
2002년 '이주일' 이 사망했을 때도 당연히 빈소를 찾았습니다.
이 때의 충격 탓인지 「하춘화」 는 그로부터 2년 후인 1979년에 돌연
경남 대학교에 입학한 뒤 학업 및 결혼 준비를 이유로 은퇴를 선언
했었습니다. 그러나 1981년에 다시 가수로 복귀해서 『우리 사랑 가슴
으로』,"연인의 부르스" 등의 노래를 히트시켰으며, 1983년에는 자신이
아끼는 무대 의상 150벌을 후배 가수들에게 나눠줬지요...
1985년에는 남북 예술인 교환 공연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최고의
가수들을 상대방에게 파견하여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이 때 「하춘화」 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 자격으로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공연을
했습니다
「하춘화」 는 1989년에는 "날 버린 남자"가 국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하고, 1991년에 총 공연 횟수 8,000회를
기록하여 개인 공연으로 기네스북에 등록되었지요.
이후 「하춘화」 는 2002년에 댄스 리듬의 트로트 "연하의 남자"를 부르
면서 자신만의 춤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박사 학위를 취득
하면서 학업을 위해 잠시 은퇴하기도 했으나 2007년에 다시 복귀하여
"나이야 가라" 등의 신곡을 꾸준히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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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랑 가슴으로 불태웠던
그 언덕 길 찾아왔지만
이제는 재가 되어 강 바람에
흩어지고 말았네
한 번 떠나면 잡으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희미해지는 애달픈 추억이지만
깊은 강물은 어둠 속을 거슬러 올라
그 아름답던 추억을 다시 또 생각나게 해
자꾸만 자꾸만 날 울리며
달도 가고 해도 가고
행복했던 그 시절도 사라져가고
이제는 옛 추억의 그림자만 남아있네
외로이 한 번 떠나면 잡으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희미해지는 애달픈 추억이지만
깊은 강물은 어둠 속을 거슬러 올라
그 아름답던 추억을 다시 또 생각나게 해
자꾸만 자꾸만 날 울리며